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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하늘 아래 가득한 낭만 헝가리 부다페스트

 

체코 프라하역에서 야간열차를 탔다. 부다페스트까지 약 9시간이 걸린다. 6명이 함께 타는 비좁은 쿠셋(침대칸) 꼭대기 칸에서 선잠을 잤던 것 같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가끔 잠에서 깼고, 지금쯤 국경을 넘어가고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가끔 차창을 스쳐 가는 가로등 불빛에 눈이 부시기도 했다.


부다페스트역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8시였다.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역사 밖으로 나오니 이방인을 제일 먼저 반기는 건 역시나 잿빛의 하늘이었다. ‘동유럽표 가을 하늘’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의 우중충한 하늘. 어디에선가 잔뜩 몰려온 두터운 먹구름이 부다페스트 시내를 뒤덮고 있었다. 


무거운 트렁크를 끌며 반질거리는 돌바닥 길을 가는 동안 귓전에는 내내 ‘글루미 선데이’의 아련한 선율이 맴돌았다. 헝가리 하면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음악. 1935년 헝가리의 무명 작곡가 레조 세레스는 연인인 헬렌에게 실연당한 아픔을 담아 ‘글루미 선데이’라는 곡을 썼다. 그런 사연이 있어서일까? 음반이 출시된 지 8주 만에 헝가리에서만 187명의 자살자가 나오고 전 세계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이 노래를 들으며 목숨을 끊었다. 레조 세레스 역시 자기 노래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다는 죄책감에 자살했다고 한다. 


롤프 슈벨 감독은 이 믿기지 않는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 <글루미 선데이>를 만들었다. 영화는 자보와 일로나 그리고 안드라스라는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만들어 내는 특별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다. 미로처럼 좁은 골목을 걸어가는 동안,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던 일로나의 모습과 그녀를 바라보던 안드라스의 강렬한 눈빛 그리고 영화 내내 흐르던 치명적인 피아노 멜로디가 머릿속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당신을 잃겠느니 당신의 반쪽이라도 갖겠소’라던 자보의 안개 같은 목소리도 골목 저편 어디선가 들리는 듯했다. 어쨌든 야간열차는 8시간의 어둠 속을 느리게 달려서는 몽환처럼 어슴푸레한 부다페스트의 풍광 속으로 여행자를 내려놓은 것이다.

 

부다와 페스트, 서로 다른 풍경
호텔에 부랴부랴 짐을 맡기고 처음 찾은 곳은 ‘세체니 다리’다. ‘글루미 선데이’의 배경이 됐던 곳이기도 하다. 밤에 불을 밝히는 전구가 멀리서 보면 사슬처럼 보인다고 해서 세체니(사슬)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다뉴브강을 연결하는 8개의 다리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세체니 다리 양 끝에는 커다란 사자상이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사자는 혀를 갖고 있지 않다. 별명이 ‘혀 없는 사자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조각가가 깜박 잊고 혀를 만들지 않았다’, ‘더 이상 싸우지 말라는 의미로 일부러 안 만들었다’ 등 의견이 분분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혀가 없으니 울지 못한다. 그래서 헝가리 사람들은 ‘가능성 없는 일’을 이야기할 때 종종 ‘사자가 울면’이란 문구를 인용한다고 한다.  


부다페스트는 원래 하나의 도시가 아니었다. 다뉴브(도나우)강을 사이에 두고 각각 발전하던 부다와 페스트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도시다. 인구는 약 2백만 명으로 중·동부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다. 부다는 귀족과 부호의 영역, 페스트는 상인의 활동무대였다. 고대 로마의 군사기지로 개발되기 시작해 1361년 헝가리의 수도가 됐다. 13세기 이후 헝가리 왕들이 거주했던 왕궁을 비롯해 역사적 유물과 건축물들이 산재해 있다.

 

페스트가 도시로 형성된 것 역시 13세기 무렵, 상업과 예술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두 도시는 16~17세기엔 터키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 지배하에 있었으나 1872년 합병하여 하나의 도시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주변 작은 도시들까지 합쳐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이 때문인지 부다 지역과 페스트 지역은 각기 서로 다른 매력을 드러낸다. 왕이 살았던 부다 지역은 어딘가 중후한 분위기를 풍긴다. 왕궁과 성당 등 역사적 건축물이 즐비한 것도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했으리라. 부다 지역에 가장 큰 볼거리는 야트막한 부다 언덕에 다 모여 있는데, 부다성과 마챠시 사원, 어부의 성채 등은 반드시 찾아야 할 곳이다. 


부다성은 13세기에 지어졌다. 전성기 시절, 빈과 함께 합스부르크 제국의 공동 수도였던 부다페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만신창이가 된다. 전후 50년 동안 지속된 공산주의 통치 역시 건물 대부분을 파괴해 버린다. 현재의 부다성 안에 있는 부다 왕궁은 네오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된 것을 복구한 것이다. 고풍스럽고 우아하던 실내장식이 현대식으로 다 바뀌었다고 한다. 성은 역사박물관과 국립박물관·국립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다.


 

왕궁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88m 높이의 첨탑이 있는 거대한 마차시 사원과 만난다. 1200년대 중반에 건축된 이 사원은 헝가리의 역사에 따라 한때는 교회로, 또 한때는 이슬람 사원으로 이용되기도 한 특별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네오 고딕양식으로 지어져 있으며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외관이 돋보인다.

 

기하학적 무늬의 타일로 장식된 본당 지붕도 시선을 끈다. 이곳은 마차시 왕을 비롯해 역대 국왕의 결혼식과 대관식 장소로 이용되던 곳. 온통 황금으로 장식된 주 제단이나 대관식에 사용된 베일과 성물 등 전시물이 상당히 화려하다. 터키에 점령당했을 때는 이슬람 사원으로도 쓰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뾰족한 지붕을 가진 흰색 건물들이 회랑을 이루며 길게 늘어선 어부의 성채 또한 볼 만하다. 100여 년 전 건축된 네오 로마네스크식 건물인데, 다뉴브강 연안에 있는 요새 중에서는 가장 오래됐다고 한다. 과거 어부들이 이곳에서 파수를 맡아 적들을 방어했다고 해서 어부의 성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적용된 반원형 아치와 고깔 모양의 탑들이 동양적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이곳에서는 강 건너편의 페스트 지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데, 세체니교의 끝자락에 위치한 아담 클락 광장에서 케이블카를 이용해 언덕 위로 쉽게 오를 수 있다. 


부다 언덕에서 봤을 때, 페스트 쪽 강변에 성처럼 솟아있는 건물이 부다페스트가 자랑하는 국회의사당이다. 건국 1천 년을 기념해 1904년에 완성한 것으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입법 건물 중 하나다. 그 위엄과 화려함을 지키기 위해 십수 년째 보수공사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건물 일부만 사용하고 있으며 개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제한적이어서 가이드 투어를 신청해야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영웅광장에 서면 36m의 중앙탑 위에 세워진 헝가리의 수호천사 가브리엘과 헝가리 독립을 위해 싸운 근대지도자와 왕들의 동상이 위엄 있게 여행자를 기다린다. 헝가리 건국 1천 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곳으로 헝가리 역사를 빛낸 영웅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았다. 중앙기둥의 대좌에는 9세기경 헝가리에 온 마자르족 수장들의 동상이 서 있다. 다른 유럽 국가와는 다르게 의상과 무기가 독특하다. 


 

부다 지역에 비해 페스트 지역은 젊음과 활기로 넘친다. 특히 다뉴브강변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한 바치거리는 보행자 전용 거리로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부다페스트의 명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곳이다. 수많은 상점과 사무실·은행·레스토랑 등이 몰려 있어 페스트 지구 내에서도 가장 화려한 분위기를 자랑한다. 노천카페·레스토랑·기념품샵과 고급 호텔 등이 이어진다. 


키라리거리 역시 페스트 지역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다. 지하철 데악광장역(Deak Ferenc Ter)에서 내리면 된다. 현지인들이 즐겨 가는 동네로 세련된 멋으로 가득하다. 작은 골목에는 멋진 펍과 가게들이 들어서 있는데, 상당히 오래된 빈티지 제품을 취급하는 가게도 많다.  


바치거리 끝에 중앙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1897년 개장했다. 헝가리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으로 과일을 비롯한 농업국가 헝가리를 대표하는 신선한 농수산물과 다양한 상품을 구입할 수 있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와 다이애나 왕비가 다녀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1층에는 갖가지 채소·과일·치즈 등을 파는 식료품 가게가 자리하고, 2층엔 요기할 수 있는 작은 식당이 줄지어 있다. 민예품과 골동품을 파는 상점들이 몰려 있어 예전 공산권 시대의 유품 등 간단한 액세서리나 선물용품 등을 사기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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