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화구성법을 연재하면서 처음 소개했던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첩첩산중의 깊은 산과 잡초가 무성한 밭, 돌덩이에 가로막힌 길, 강물에 떠내려오는 사람 등이 현재 이 아이가 얼마나 무기력한 상태에 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왜 이런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그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 바로 ‘집·나무·사람’ 그림이다. 나무는 무의식적인 나 자신을, 사람은 의식적인 나를, 집은 나를 둘러싼 환경(가족·타인·세상)과의 소통방식(대인관계)을 상징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심리상태, 즉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떤 삶을 살았고, 타인(세상)과 어떻게 소통하고 있으며, 그 결과 현재 어떤 심리상태에 놓여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번 호에서는 풍경화구성법의 구성요소이자 그림검사의 기본인 HTP 검사1 요소인 ‘집·나무·사람’을 살펴본다. 더불어 사례분석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방법도 소개한다. 상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아니라, 현재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과 어떻게 소통하면서 미래를 바꿔나갈지에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각각의 구성요소가 주는 의미
● 집
집은 ‘쉼’을 제공해주는 곳, ‘안전’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풍경화구성법에서 집은 다섯 번째로 그려지기 때문에 공간에 여유가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마을의 중심부, 혹은 밭 옆쪽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가정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은 산꼭대기에 아주 작게 집을 그러거나(<그림 4>), 종이 귀퉁이에 집의 일부만 보이게 그린다(<그림 6>). 가족구성원 역시 ‘자기 혼자’ 사는 경우가 많고, ‘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할 때도 있다. 집과 관련된 다음의 질문들은 아이들이 가족을 포함한 타인과의 대인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는지 탐색하는 데 도움이 된다.
- 이 집은 누가 살고 있니?
- (혼자 사는 집이라고 한다면) 언제부터 혼자 살았니? 혼자라서 외롭지는 않니?
- 이 집은 10년 후쯤 어떻게 변해있을까?
● 나무
나무는 기본적인 자아상,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가능성·적응성을 어떻게 보는지를 반영한다. 자신이 어떤 마음 상태에 있는지 무의식적으로 드러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나무의 소원을 꼭 질문하는 것이 좋다. 특히 나뭇가지는 양분을 흡수하여 나무를 성장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나뭇가지가 생략되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나무에 대한 다음의 질문은 학생이 현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자존감 등)를 알아보는데 도움이 된다.
- 이 나무의 종류는 뭐니?
- 이 나무 주변에는 무엇이 있니?
- 나무에게 소원이 있다면 무엇일까?
● 사람
사람 그림은 ‘집’이나 ‘나무’보다 더 직접적으로 자기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자신의 상태를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왜곡시켜서 표현하기도 하고, 이상적인 자아를 나타내기도 한다. 또한 중요한 타인 혹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2. 풍경화구성법에서는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그네를 타거나, 나무에 기대어 있거나, 누워있는 그림을 그린다면 현재 정신적·육체적으로 지쳐있는 상태일 수 있다. 사람에 대한 다음의 질문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보는데 도움이 된다.
- 이 사람은 누구니? 무엇을 하고 있니?
- 이 사람은 언제 여기로 왔니? 여기가 마음에 드니? 어떤 점이 가장 마음에 드니?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없니?
- 이 사람은 산 정상에 올라가 본 적이 있니? 동물과는 친하니?
사례로 살펴보기
● 문이 없는 집
일반적으로 집은 <그림 2>처럼 그려진다. 출입문이 있고, 창문과 굴뚝이 있는 정형화된 집(신기하게도 아파트·빌라에 사는 아이들도 이렇게 그린다)이다.
문은 세상과 만나는 통로이다. 자기 스스로 나갈 수도, 타인이 들어올 수도 있다. 창문 역시 자신이 바깥을 내다볼 수도, 타인이 안을 들여 볼 수 있다. 그래서 문·창문은 타인(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능력(대인관계)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을 나타낸다.
간혹 문고리가 없는 문을 그리는 경우도 있다. 자신은 나갈 수 있지만, 타인은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 즉 타인과 친해지고 싶지만 또 막상 만나면 불편해하는 양가감정이 있을 수 있으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인관계를 맺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런 학생과 상담을 할 때는 너무 친밀하게 다가가거나, 꼬치꼬치 캐묻듯이 정보를 수집하려고 하면 거부감을 나타낼 수도 있다. 반대로 손잡이 외에 초인종·우편함 등 장식물이 달려있다면, 타인과의 관계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그림 3>처럼 문을 그리지 않았다면 타인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두렵고, 다양한 시각·평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어려워할 수 있으며, 사회적인 관계가 위축되어 혼자 고립되어 있을 수 있다. 그림을 작게 그렸다고 문을 생략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아이들은 <그림 4>처럼 아주 작게 집을 그리더라도 문·창문, 심지어 문고리까지 그린다. 따라서 집의 크기와 상관없이 문·창문이 없는 그림은 꼭 상담을 진행해봐야 한다.
게다가 <그림 3>의 집은 가시 많은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어 나갈 수가 없다. 가끔 나무를 자르러 온 사람이 꺼내줘야 외출이 가능하다. 나무의 소원은 나무를 자르러 오는 사람이 가위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가지 잘리는 것이 싫지만, 너무 큰 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서워서 말을 할 수가 없단다. 밭에는 딱 3개의 새싹이 있는데, 햇빛이 없어 모두 죽어있고(밑으로 꺾여 있다), 세상으로 통하는 길은 스트레스로 탈모가 온 사자가 막고 있다. 얼마나 자존감이 낮고, 불안도와 의존도가 높으며, 문제해결능력이 미흡한지 알 수 있다.
이 그림에서 희망요소는 종이 왼쪽 상단에 작게 그려진 ‘이 세상을 열 수 있는 열쇠’를 들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사람에게 빨리 와서 도와달라고 전달할 방법이 없다. 사자와 나무 자르러 온 사람이 너무 무섭기 때문이다. 정서행동특성검사에서 관심군이었던 이 학생은 상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되어 병원으로 연계했고, 현재 입원 치료중이다.
● 작은 집과 큰 나무
<그림 4>에서 집은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다. 반면 나무는 다른 구성요소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크다. 꽃을 든 사람은 강아지와 함께 다리를 건너고 있고, 넓은 도로 위에는 BMW 자동차가 서있다.
나무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큰 도로에서 사고가 많이 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나무의 소원이 안쓰럽다. 강바람이 너무 춥고, 사람들이 자신에게 소원을 비는 것이 부담스럽고 힘들단다. 그냥 할머니네 집으로 가서 자신을 키우느라 고생하는 불쌍한 할머니·할아버지만 지켜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바람을 타고 길 끝에서 굴러들어온 돌 때문에 옮겨가는 것도 힘들어 졌다며, 자기도 돌처럼 걸리적거리는 존재라고 낙심했다. 꽃을 든 아이는 어디 가는 중이냐고 묻자, “사실 이 아이는 마포대교에 죽으려고 왔는데, 그냥 마음을 고쳐먹고 꽃만 던지고 집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꽃을 던지는 이유는 자기를 낳아 준 엄마에 대한 고마움이라고 했다.
<그림 4>에서 희망요소는 무엇일까? ‘나무’와 ‘자동차’이다. 외부환경으로 비록 현재의 자아상(사람 그림)이 나약해 보이지만 원래 이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자아상(나무 그림)은 튼튼하고 이타적이다. 게다가 그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넓은 길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동차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포부와 의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 아이는 “이 길은 이 세상 모든 곳을 연결해주는 길이다. 끝없이 직진을 할 수 있지만, 어디론가 가고 싶다면 우회전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우회전을 하면 집이 나온다.
● 메마른 나무
<그림 5>의 나무는 한눈에 보기에도 메말라 보인다. 나무는 나뭇잎이 다 떨어진 채 거의 죽어가고 있다. 나무의 소원은 ‘살고 싶은 것’이지만, 날씨는 춥고, 햇빛은 거의 들어오지 않아 살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결국 죽을 것 같다고 했다.
집은 산 위쪽에 있어서 오고가는 것이 힘들지만, 산 아래에 있으면 바닷바람이 거세고, 물이 자주 넘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고 했다. 사람은 중학교 때의 자신이다. 강아지와 둘이서 이 마을에 오게 되었는데, 강아지는 바다에 빠질까봐 무서워서 집에 두고 혼자만 바다에 왔다. 가족은 어디서 사는지 잘 모른다고 했다.
돌이 너무 강조되어 있어서(색칠하는 시간 내내 돌멩이만 색칠했다) 돌의 역할을 물었더니, 방파제란다. 바람이 많이 불고, 물이 거세서 쌓아두었다. 하지만 방파제가 낮아서 물은 자주 넘친다고 했다. 방파제를 좀 더 높게 쌓지 그러냐는 질문에 싫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모른다고 답했다. 길 끝은 바다와 이어진다.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방법을 묻자, 보트가 있으면 갈 수 있지만, 보트를 사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재밌을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아이의 가정은 재혼가정이었다. 최근 다시 이혼했고 아버지는 해외로, 어머니는 부산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아이는 올해 처음 만난 친할머니와 살고 있다. 애정에 대한 갈망이 있지만, 상처받기 싫어서 마음에도 없는 온갖 싫은 소리로 거리를 둔다.
이 그림에서 희망요소는 그려지지 않은 보트와 방파제이다. <그림 6>처럼 보트가 그려져 있고, 필요하면 보트를 타고 밖으로 나가면 좋으련만, 이 아이는 아직까지 보트를 살 생각이 없다. 물이 자주 넘치더라도 방파제를 높게 쌓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여전히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가 드러난다. 상처받을까봐 두렵지만, 단절하고 싶지 않은 간절한 소망. 실제로 이 아이는 상담을 시작한 지 1년째, 매번 약속시간 한번 어기지 않고 찾아오지만, 아직도 자신의 감정을 살피는 것에 두려움이 있고, 거부하고 있는 중이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 두 개의 마을
언뜻 보기에 평화로워 보이는 <그림 7>의 특징은 강을 사이에 두고 집·나무·사람이 각각 등장하는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학생은 심각한 등교거부 학생이었다(어김없이 토끼가 등장한다). 1학년·2학년 때 결석일수가 매년 60일이 넘었고, 자퇴하겠다는 녀석을 겨우겨우 3학년까지 끌고 왔다. 그림 속에서 꽃을 달고 밭일을 하는 사람이 학생이다. 최근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농사를 짓고 싶다는 의욕이 생겨서 씨앗을 뿌렸다.
강 건너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원래 이곳에 살던 사람이다. 농사를 짓지도 않으면서 돈 많다고 뽐내고 싶고, 괜히 꽃을 단 아이와 친해지고 싶어서 트랙터를 구입한 후, 꽃을 단 아이에게만 빌려준다. 자신은 빌려달라는 말도 안했는데 온갖 참견과 잔소리를 하면서 빌려준단다. 그래도 편하니까 사용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할머니·엄마와 함께 사는 이 학생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함께 밥 먹는 것이다. 밥을 먹을 때마다 심한 잔소리가 오고 갔다. 특히 할머니는 “제 애비 닮아서 엄마를 괴롭힌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엄마와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엄마 피곤하게 뭔 쓸데없이 이야기를 길게 하느냐”며 불을 꺼버렸다. 할머니는 엄마만 챙겼고, 엄마는 그 안에서 편안해할 뿐 아이를 챙기지 않았다. 그런 엄마에게 아이는 서운함을 넘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 그림의 희망요소는 트랙터이다. 엄마에 대한 양가감정이 트랙터로 그려졌다. 상담과정에서 아이의 감정을 공감한 후, 자기 딸이 고생하는 것이 속상한 할머니의 입장과 자기 엄마와 딸 사이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엄마의 입장을 설명했다. 물론 그 행동방식이 미성숙했음도 설명했다. 나는 상담과정에서 이 아이가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쌤, 적어도 저는 이런 미성숙한 행동으로 타인을 괴롭히지 않겠네요. 그것이 엄마와 할머니가 제가 주신 교훈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