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여름보다 뜨겁게 느껴졌던 2023년의 8월은 수백억 원이 투입된 <밀수>(감독 류승완), <더 문>(감독 김용화), <비공식작전>(감독 김성훈), <콘크리트 유토피아>(감독 엄태화) 등 BIG 4 영화들이 책임졌다. 이제 선선한 가을을 감동으로 여는 영화들이 관객을 기다린다.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땄던 손기정 옹의 이야기가 영화 <보스톤 1947>(감독 강제규)으로 탄생했다. 세계 3대 콩쿠르에 나선 결선 진출자들의 뜨거운 경쟁을 다룬 <뮤직 샤펠>(감독 도미니크 데루데르)부터 감성 가득한 프렌치 시네마 <어느 멋진 아침>(감독 미아 한센-러브), 광활한 알프스의 대자연에서 피어난 두 소년의 우정을 다룬 <여덟 개의 산>(감독 펠릭스 반 그뢰닝엔, 샤를로트 반더미르히)까지. 폭염 이후 선선해지는 가을의 정취 속 관객의 마음을 감동으로 수놓을 영화 네 편을 소개한다.
다시 심장이 뛴다! 스크린에 피어오르는 그날의 감동
한국인에게 가장 슬펐던 올림픽은 언제였을까?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한국인 최초로 마라톤 우승이라는 놀라운 쾌거를 이뤘지만,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일본인 국적으로 출전해야 했던 고 손기정 선수는, 우승의 기쁨보다 태극기를 달고 출전하지 못한 슬픔을 금메달리스트에게만 주는 올리브나무로 가슴에 박힌 일장기를 가렸다.
비극의 영웅 손기정 선수에 대한 영화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저 놀랍다. 하지만 <태극기 휘날리며>(2004)로 천만 감독에 등극한 강제규 감독은 손기정 선수 이후에도 명맥을 이어간 한국 마라톤 역사를 스크린으로 그려냈다. 영화 <1947 보스톤>은 광복 이후 다시 뛰고 싶은 국가대표 마라토너들이 첫 국제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염원과 레이스를 담은 이야기.
<1947 보스톤>의 배경이 되는 보스톤 마라톤 대회는 1897년 처음 열린 이후 매년 4월 셋째 주 월요일에 개최되는 세계 최고의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대회이다. 영화 <1947 보스톤>에서는 광복 이후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딛고 이 대회에 대한민국 최초로 참가한 선수들의 여정과 일화가 펼쳐진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 선수와 동메달리스트 남승용 선수가 마라톤 지도자로 분해 후배 서윤복 선수를 1947년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출전시키는 이야기가 주 내용. 지난여름을 뜨겁게 달군 BIG 4 중 하나인 <비공식작전>의 하정우가 고 손기정 선수 역으로 분했고, 이제는 가수 본업보다 연기자가 더 어울리는 배우 임시완이 보스톤 마라톤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는 서윤복 선수 역을 맡아 해방 이후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의미 있는 아니 놀라운 성과를 이뤄내는 내용을 감동적으로 담았다.
여기에 지난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연출 유인식, ENA)에서 천재적인 두뇌와 자폐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변호사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박은빈 배우가 특별출연으로 극의 완성도를 높인다. 후반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중인 영화 <1947 보스톤>은 올해 추석 개봉 예정이다.
콩쿠르 결선 진출자 12명의 숨 막히는 경쟁과 가슴 벅찬 전율
<뮤직 샤펠>(감독 도미니크 데루데르)는 지난달 제19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작으로 국내 관객들에게 첫선을 보이며 눈길을 사로잡았다. <뮤직 샤펠>은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로 불리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특별한 경선 방식을 소재로 한 클래식 심리 스릴러다.
치열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결선 진출자는 총 12명. 결선 진출자로 선정된 12명의 연주자는 일주일간 ‘뮤직 샤펠’이라 불리는 외딴 성에 격리된 채 주최 측이 지정한 곡과 자신이 선택한 곡만을 연습하는 것이 특이한 룰이다. 방문·전화·편지 등 외부인과의 접촉은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TV·라디오·컴퓨터·스마트폰의 사용도 당연히 금지. 이들은 일주일 동안 세상과 완벽히 단절된 상태에 놓인다. 그러니까 ‘뮤직 샤펠’에서는 연주자 자신과 음악만이 존재한다. 다른 점은 자신과 같은 수준의, 아니면 더 나은 수준의 천재적 재능을 가진 세계 각국의 경쟁자 11명이 함께 있다는 것뿐.
어릴 때부터 피아노 영재로 불렸던 제니퍼(타커 니콜라이) 역시 12명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이 폐쇄적인 공간과 경쟁 상황에 갇힌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던 연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예전의 트라우마까지 되살아나게 할 만큼 커다란 압박과 불안으로 다가온다. 전 세계 예비 음악인이 선망하는 꿈의 공간이자, 냉혹한 경쟁의 장을 배경으로 한 <뮤직 샤펠>은 예술가의 고뇌, 음악에 대한 열정, 최고를 향한 갈망이 휘몰아치는 서스펜스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여기에 하나 더. <뮤직 샤펠>은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작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완성도 높은 피아노 연주 장면으로 음악적 충족감을 가득 채워준다. 귀에 익은 여러 클래식 명곡 중에도 제니퍼가 선택한 결선 자유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웅장한 선율은 그야말로 영화의 백미.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 펼쳐지는 결선 무대 장면은 보는 이에게 가슴 벅찬 전율과 황홀경을 선사한다. 제니퍼 역으로 한국 관객과 처음 만나는 배우 타커 니콜라이는 실제 피아니스트를 방불케 하는 리얼한 퍼포먼스를 펼치며, 무아(無我)의 세계에 빠져드는 듯한 뛰어난 표현력과 날카로운 내면 연기로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올해 첫 감성 프렌치 시네마
가을 감성을 자극하는 2023년 첫 프렌치 시네마는 바로 <어느 멋진 아침>(감독 미아 한센-러브)이다. 제7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선보였고, 최우수유럽영화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끝없이 이어지는 삶에 관한 진지한 질문을 주인공들의 무겁지 않은 일상으로 드러낸다.
산드라(레아 세이두)는 5년 전 남편을 잃고, 홀로 여덟 살 딸 린(카밀 르방 마르탱)을 키우는 싱글맘이자 직장인이다. 혼자 일하며 육아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그녀는 퇴행성 인지장애를 앓는 아버지(파스칼 그레고리)마저 돌봐야 한다. 일·육아·간병이라는 쳇바퀴 일상을 보내던 산드라에게 어느 날 문득 사랑이 찾아온다. 죽은 남편의 오랜 친구였던 클레망(멜빌 푸포)이 마음속으로 들어온 것.
이쯤 되면 불운으로 가득했던 주인공이 새로운 사랑으로 행복해진다는 뻔한 스토리를 예상할 법도 하지만, 프랑스 영화에서 그런 할리우드 스타일의 스토리텔링을 기대해서는 안 될 이야기다. 클레망은 유부남이다. 산드라와의 만남을 즐기면서도 혹시나 부인에게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캐릭터.
게다가 부친의 병세는 점점 심각해지고, 산드라의 벌이로는 좋은 요양원은 엄두도 못 내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겹친다. 일과 가족, 사랑 사이에서 삶은 계속되고 때로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한다. 하지만 아침은 여느 때와 같이 찬란하게 찾아온다. 그것이 감독이 말하는 <어느 멋진 아침>이 아닐까.
이 영화는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담겨 있어 관객에게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봉쇄되었을 때, 10여 년 벤슨증후군을 앓던 감독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한창 <어느 멋진 아침> 시나리오를 쓰던 그는, 더 이상 부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긴박감을 느꼈고, 글을 쓰는 것이 그의 존재에 대한 흔적을 남기는 일이라 여겼다. 이는 극중 산드라의 대사 “아버지의 몸뚱이는 요양원에 있지만, 영혼은 그의 서재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책을 보는 것이 더욱 아버지를 만나는 일인 것 같다”라는 대사로 표현되었다.
미아 한센-러브 감독은 <어느 멋진 아침>으로 가족, 특히 부모에 대한 두 편의 영화를 완성했다. 전작 <다가오는 것들>(2016)에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했다면, 이번 <어느 멋진 아침>에서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영화 모두가 가족과 관련되어 있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산드라 역을 맡은 명실상부한 현재 프랑스 최고의 여배우 레아 세이두의 새로운 얼굴과 연기 변신을 확인할 수 있다. 9월 6일 개봉.
알프스 대자연, 가장 높은 곳에서 피어난 두 소년의 우정!
<여덟 개의 산>(감독 펠릭스 반 그뢰닝엔, 샤를로트 반더미르히)은 프랑스 3대 문학상인 ‘메디치상’ 수상에 빛나는 이탈리아 작가 파올로 코녜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탈리아 알프스 ‘아오소타’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두 친구 ‘피에트로’와 ‘브루노’의 눈부신 우정과 재회를 담은 드라마이다. 연출·각본·연기의 뛰어난 3박자에 힘입어 <여덟 개의 산>은 제75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도시 아이 피에트로는 여름을 맞이해 알프스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산에 남은 유일한 아이 브루노를 만난다. 초록빛이 우거진 풀밭과 눈부신 호수 등 알프스 곳곳의 자연을 함께 누비는 그들의 모습은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우정 그대로를 보여준다. 피에트로의 아버지 ‘지오바니’와 함께 설산을 등반하는 어린 피에트로와 브루노의 모습은 황홀한 대자연의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 이후 둘은 헤어진다.
어른이 되어 알프스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과 새로운 주변인들의 등장은 그들의 상황이 어린 시절과 같지 않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다시 만난 두 친구 뒤로 펼쳐진 광활한 산과 푸른 하늘의 모습은 그들이 어쩌다 산 위에 집을 짓게 되었는지, 또 ‘내가 뿌리내릴 곳은 우정이었다’라는 대사에서 소년에서 청년이 되기까지 산 위에서 단 하나의 우정을 나눈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산들의 풍광 속에서 가슴 먹먹하게 다가온다.
<마틴 에덴>으로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루카 마리넬리, <내 피부 위로>로 제75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파시네티상 최고 연기상을 수상한 알렉산드로 보르기 등 세계 영화제가 사랑한 연기파 배우들이 두 친구를 맡아 감동을 선사한다.
여기에 스웨덴의 실력파 싱어송라이터 다니엘 노르그렌이 음악으로 참여해 자칫 영상미로 그칠 뻔했던 영화에 노스탤지어가 가득한 사운드를 입혔다. 실제 산속의 집과 스튜디오를 오가며 음악활동을 하는 다니엘의 음악에 대해 감독은 “순수하고 마음을 울린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