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巧詐不如拙誠(교사불여졸성)”이란 말이 있다. “교묘한 사람의 허위는 졸렬한 사람의 진실보다 못하다”는 뜻이다. 巧詐(교사)란 교묘한 속임수란 뜻이다. 교묘한 수단 방법으로 남을 속이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거짓을 말한다. 온갖 교묘한 재주로 남을 속이는 것을 말한다. 拙誠(졸성)은 반대의 뜻이다. 졸렬한 진실이란 뜻이다. 보잘 것 없는 정성을 말한다. 속임수나 거짓이 없는 참된 것을 말한다. 비록 어설퍼 보이지만 참된 마음을 말한다. 진실한 말과 행동을 하는 이를 말한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巧詐(교사)가 판을 치는 것 같다. 巧詐(교사)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겉으로 드러내는 것 하고 내면적인 것이 다르면 안 되는데. 안과 겉이 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오래가지 못한다. 속임수나 거짓은 언젠가는 드러나고 만다. 이럴 때 당하는 수모는 엄청날 수밖에 없다. 낭패를 당하고 만다. 학생들에게 巧詐(교사)를 가르치면 안 된다. 巧詐(교사)를 단호히 물리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묘한 속임수로 일시적으로 얻는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차라리 拙誠(졸성)이 낫다. 졸렬해 보이지만 진실이 훨씬 낫다. 진실이 오래간다.
84년 어느 출판사의 한문교과서에 보면 松都三絶(송도삼절)이란 고사가 나온다. 송도는 지금의 개성을 말하고 삼절은 세 가지의 기이한 것으로 ‘세 가지에 뛰어남’이란 뜻이다. 내용을 보면 황진이가 서화담에게 말하기를 “송도삼절은 박연폭포와 선생 및 저입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선생은 서화담 즉 서경덕을 말한다. 저는 황진이이다. 서화담은 조선조 중종 때의 유학자이고 개성 화담에 살았으므로 제자들이 화담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8세 때 대학(大學)을 읽고 크게 깨친 바 있어 진사시험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버리고 평생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전념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요즘 울산교육이 강조하는 학력과 인성을 모두 갖춘 분이시다. 대학자이셨고 뛰어난 실력을 갖춘 선비이셨다. 그뿐 아니라 그의 인격이 너무 고매하였고 덕망이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금까지 따뜻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환한 달처럼 흠모하며 사모하는 분이시다. 서화담은 황진이 때문에 유명한 분이라 할 수 있다. 황진이는 알다시피 절세의 미인 아닌가? 거기에다 뛰어난 재능과 발란한 개성을 자랑한 분이다. 주로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올해도 작년에 이어 울산강북교육의 역점은 무엇보다 학력향상과 인성교육이다. 학력향상도 중요하지만 인성교육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사람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다. 본받을 점이 있고 본받아서는 안 될 점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서 배울 점이 꼭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착한 사람과 악한사람이 다 나의 스승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착한 사람에게서 착한 점을 찾아 자기도 착한 일을 하도록 하고 악한 사람에게서 악한 점을 찾아 자기도 악한 점을 고쳐나가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명심보감 정기편에 이런 말이 있다. “見人之善而尋其之善(견인지선이심기지선)하고 見人之惡而尋其之惡(견인지악이심기지악)이니 如此(여차)면 方是有益(방시유익)이니라.”라는 말이다. 이 말은 뜻은 “남의 선함을 보면 나의 선함을 찾아보고, 남의 잘못을 보면 나의 잘못을 찾아볼(尋) 것이니 이렇게 해야만 바야흐로(方)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남의 선함을 보면서 자신의 선함을 찾아보게 하는 것은 인성교육 중의 좋은 한 방법이라 하겠다. 학교에서 친구들의 착한 점을 보면 그 학생을 칭찬하면서 나도 또한 다른 착한 점
명심보감의 정기편에 “凡戱(범희)는 無益(무익)이요 惟勤(유근)이 有功(유공)이니라.”라는 말이 나온다. “무릇 유희(遊戱)는 무익하고 오직 근면만이 공이 있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戱(희)는 무슨 뜻일까? 유희, 즉 놀이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戱(희)는 단순히 놀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놀이를 의미한다면 놀이 자체가 모두 무익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놀이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 삶의 활력소가 된다. 삶의 비타민이 된다. 삶의 도움이 되고 삶의 보탬이 된다. 유희라고 해서 모두가 보탬이 되지 않고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의 戱(희)는 그냥 기분 전환을 위한 놀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노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게으름을 말하는 것이다. 한문의 문장 구성은 대구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위의 문장도 대구로 되어 있다. 凡戱(범희)는 惟勤(유근)과 대구로 되어 있다. 無益(무익)은 有功(유공)과 대구가 된다. 凡과 惟는 부사의 역할을 한다. 무릇, 오직의 뜻이다. 그리고 戱(희)는 勤(근)과의 반대의 의미이다. 無益(무익)이 有功(유공)과 반대의 뜻으로 미루어
어제 저녁 워낭소리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오랜만에 영화를 보았다. 평소에 영화를 잘 보지 않는데 오랜만에 보니 볼 만하였다. 농촌을 배경으로 하였고 늙으신 두 어르신과 소에 관한 영화였다. 농촌 출신으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감동있게 잘 보았다.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새벽까지 그 여파가 밀려왔다. 워낭소리의 영화가 주는 교훈을 할아버지에게 초점을 맞춰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교직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배워야 할 점이 많았다. 그 중 세 가지만 말해 보고자 한다. 첫째, 할아버지의 환경을 탓하지 않는 모습이 돋보였다. 80세가 되면 모든 일을 그만 두고 편히 쉴 연세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평생 하시던 농사일을 그만 두지 않으셨다. 연세가 많을 뿐만 아니라 한 쪽 다리를 못쓰는 형편에 있었다. 농사짓는 농부가 가져야 조건 중의 하나가 건강 아닌가? 건강하지 못하면 어떻게 힘들고 고된 농사를 지을 수 있나? 일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닌데도 농부의 일을 그만 두지 않으시고 잘 극복하신 것이다. 또 발톱이 하나 빠진 상태였고 두통으로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끝까지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이 정도의 형편이라면
신학기 들어 첫 출근길이다. 마음이 설렌다. 어디 새로 발령을 받은 것도 아닌데도 그렇다. 우리 과에 한 장학사님께서 새로 오시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아주 잘 생겼다. 텔런트 같았다. 사람도 좋고 일도 잘 하신다고 하셨다. 기대가 된다. 아침에는 봄비가 온다. 보슬비다. 비는 자주 내려야겠다는 생각이다. 비가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물이 없으면 모든 생물이 죽을 수밖에 없다. 더 많은 비가 왔으면 한다. 길가에 서 있는 태극기가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게 보기가 좋다. 나라를 지킨 넋의 숨결이 느껴진다. 애국의 물결이 아름답게 흔들리고 있다. 비행기가 사뿐히 내려앉는다. 또 비행기가 내려앉는다. 참 좋은 아침이다. 많은 선생님들께서 자리를 옮겨 근무를 하게 되는데 마음이 추울 것 같다. 몸도 춥고 마음도 춥겠다. 바람도 아직 훈훈한 바람은 아니다. 이럴 때 기존의 선생님들께서 훈훈한 바람 역할을 했으면 한다. 사소한 것까지 관심을 가져주고 친절을 베풀어주면 새로 오시는 선생님의 기억 속에는 오래 감사가 간직될 것 같다. 오늘 아침에는 갑자기 선생님들의 자세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다. 신학년도 1학기가 시작되는 날인데 선생님들의 자세가 참 중요할 것 같다. 어떤
명심보감에 이런 말이 나온다. “子雖賢(자수현)이나 不敎(불교)면 不明(불명)이니라” 자식이 비록(雖) 어지나 가르치지 않으면 밝게 되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비록 자식이 어질다고 해도 배우지 않으면 밝게 되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배움에 강조를 두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자식의 성품이 착하고 마음이 너그럽고 착하며 슬기롭고 덕행이 높다고 해도 자랑할 것이 못 된다. 배움이 없으면 밝게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식이 아무리 성품이 착하고 마음이 너그럽고 성격이 온화하다고 해도 배움이 없으면 모자랄 수밖에 없다. 不明(불명)에서 明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나? 우선 잘 알아서 막힘이 없음의 뜻을 지니고 있다. 배워야 잘 알게 되고 무엇이든 막힘이 없게 되어 시원스럽게 된다. 배워서 지식에 능한 자는 막힘이 있을 수 없다. 요즘 대학시험이나 각종 시험에서 심층면접을 강화하는 것도 明의 정도를 알아보기 위함이라 하겠다. 얼마만큼 전문지식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 전문지식에 대한 막힘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라 하겠다. 아무리 어질고 착하고 마음씨 곱고 넓은 마음을 지녔다 해도 배움이 없으면 不明(불명)하게 되니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배움에 임해야 하는
퇴계 이황 선생님에게서 배울 점이 참 많다. 퇴계 선생님은 깨끗한 청백리로서 공직자로서의 모범을 보였으며 학문하는 태도의 모범을 보이고 바람직한 선비상을 확립하였으며 제자를 사랑하는 올바른 스승상을 정립하신 교육자이시며 2,000편이 넘는 많은 시를 남긴 문학자이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신 생활의 모범인이시다. 퇴계 선생님은 학교를 세우고 선비를 기르는 것은 그 뜻이 대단히 높은 것이라고 하셨다. 학교를 세우고 훌륭한 인재를 기르는 것이 높고 깊은 뜻으로 알고 학교교육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셨다. 퇴계 선생님께서는 선생님과 학생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하셨다. 선생님과 학생이 가져야 할 자세해 대해 말씀을 하신 것이 있다. “師生之間(사생지간)엔 尤當以禮義(우당이예의)로 爲先(위선)”하라고 하셨다. 스승과 제자의 사이엔 더욱(尤) 마땅히(當) 예의로써 우선(先)을 삼아라고 하셨다. 선생님과 학생과의 관계에서 제일 우선시 한 것이 예의(禮義)였다. 예의가 없고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관계가 깨어지면 가르침이 될 수가 없고 배움이 될 수가 없다. 배우는 학생이 가르치는 선생님에 대한 예의가
요즘 정말 살기가 힘들다. 경제가 어렵다 보니 어려운 것이 피부로 느끼게 된다. 기름값이 내려지는 듯하더니 또 올라간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기름값을 아끼려고 애를 쓴다. 생활이 불편하지만 아끼려고 최선을 다한다. 이럴 때 검소한 생활이 필수가 아닌가 싶다. 검소한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절제하고 절약하는 것이 필요하다. 화려한 사치생활은 금물이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우리 모두가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소한 생활이 우선이다. 함부로 낭비해서는 안 된다. 전기도 아껴야 한다. 물도 아껴야 한다. 종이도 아껴야 한다. 기름도 아껴야 한다. 돈도 아껴야 한다. 사치하지 말고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 꼭 필요한 데만 써야 한다. 불필요한 곳에 쓰지 말아야 한다. 절약하는 습관이 필요다. 가치 있는 곳에만 써야 한다. 자신을 절제해야 한다. 자신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술로 자신을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 시간으로 자신을 혹사해서도 안 된다. “尙儉者(상검자) 開福之源(개복지원)”이라 하지 않았는가? 검소함을 숭상하는 것은 복의 근원이라고 한 말을 예사로이 들어서는 안 된다. 경제가 어려울 때 검소한 생활을 해야지 나는 넉넉하다고
공자께서 배우는 학생들이 부모에게 무례하게 행하고 웃어른에게 공손하지 않으며 말에 대한 조심성도 없고 믿음도 없고 거짓에 난발함과 남에 대한 무관심과 무배려, 무사랑함과 친구와의 사귐이 도가 넘어 이를 염려하고 안타까워 한 나머지 배우는 이에게 배우기 전에 무너진 것에 대한 회복을 부르짖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한탄하고 있음에 공감하면서 역시 배우는 이가 회복되어야 할 것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언급을 한 것이다. 공자께서 親仁(친인)하라고 하셨다. 어진 이를 가까이 하라고 하셨는데 그의 제자인 자하는 어진 이를 가까이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말씀하였다. 좀 더 세밀하게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자하가 말하였다.: 어진 이를 좋아하기를 여인을 좋아하듯 하라고 하였다. “賢賢 易色(현현 역색)”하라고 하셨다. 어진이를 좋아하되 여자를 좋아하듯 하라는 뜻이다. 賢賢(현현)은 술목구조로 앞의 賢(현)은 서술어이고 뒤의 賢(현)은 목적어이다. 뒤의 현은 ‘어진 이’를 말하고 앞의 현은 ‘좋아하다’의 뜻이다. 그리고 易色(역색)도 같은 구조로 앞의 易(역)은 ‘기뻐하다’의 뜻이고 뒤의 色(색)은 ‘예쁜 여자’를 뜻한다. 자하는 어진 이를
학력과 인성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학력이 중요할까? 인성이 중요할까? 학력만 향상되면 좋은 사람일까? 인성만 좋으면 훌륭한 사람일까? 어디에 비중을 두어야 할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공자께서 학이편에서 제시해 줌을 보게 된다. 공자께서는 학력과 인성 둘 다 중요함을 말씀해 주고 있다. 인성만 중요하니 인성에만 치중하라고 하지 않고 학력만 중요하니 학력에만 치중하라고 하지 않는다. 학력과 인성이 함께 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성을 말할 때는 학력도 함께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공자께서 하신 말씀을 두고 오해할 수도 있다. “弟子入卽孝(제자입즉효)하고 出卽弟(출즉제)하며 謹而信(근이신)하며 汎愛衆(범애중)하고 而親仁(이친인)하여 行有餘力(행유여력)이어든 卽以學文(즉이학문)이니라”라는 말이 학력보다 인성을 더 중요시한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인성과 학문이 다 중요하되 인성을 강조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인성을 너무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인성이 학력 못지않게 중요한데도 인성을 무시하고 있으니 학문하기에 앞서 인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 학문하기 위해서는 인성의 과정을 다 거치라는 뜻이 아닌 것이다. 그런 과정을 다 거친
공자께서 논어 학이편에서 호학(好學)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는 어떤 자일까? 공자께서 하신 말씀을 살펴보면 호학(好學)하는 자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는 한 마디로 말한다면 군자(君子)이다. 군자가 바로 배우는 자의 모범이다. 표본이이라 할 수 있다. 군자는 인성면에서도 탁월할 뿐 아니라 학력면에서도 탁월한 자이다. 지도자급이다. 본보이기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학식과 교양을 두루 갖춘 인물이다. 우리는 학생들을 이런 인물이 되도록 교육을 시키고 있다. “子曰 君子食無求飽(군자식무구포)며 居無求安(거무구안)하며 敏於事而愼於言(민어사이신어언)이고 就有道而正焉(취유도이정언)이면 可謂好學也已(가위호학야이)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로서 배불리 먹기를 구하지 않고, 편히 살기를 구하지 않으며, 할 일을 미루지 않으면서 말은 신중하고, 도를 좇아서 바르게 한다면,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이 말씀 속에 배우는 자가 취해야 할 자세를 살펴볼 수 있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는 먼저 食無求飽(식무구포)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먹음에 배부르기(飽)를
옛날에도 심성이 바르지 못하거나 행실이 나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의 언행을 보아하니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르치는 자의 입장에 있었던 분들은 심성이 바르지 못하거나 행실이 나쁜 사람들을 마음 거슬리지 않게 우회적으로 알아듣도록 하였다. 비유를 통해 가르치기도 하였다. 올빼미와 비둘기의 이야기이다. 올빼미(梟효)는 심성이 나쁜 사람을 비유하고 비둘기(鳩구)는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을 비유한다. “올빼미가 비둘기를 만나니 비둘기가 말하기를 그대는 어디로 가려 하오? 올빼미가 말하기를 나는 동쪽으로 이사가려 하오. 비둘기가 말하기를 무슨 까닭이오? 올빼미가 말하기를 고을 사람들이 모두 나의 울음소리를 싫어함이라. 이런 까다락으로 동쪽으로 이사가는 것이오” 올빼미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지 못했다. 미움을 당했다. 자기를 싫어하는 것을 알았다. 자기가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했다. 자기의 행실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자신의 행동이 엉망인 것을 알지 못했다. 자신의 심성이 나빠 마을 사람들이 자기를 멀리하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오히려 자기 편에서 큰 소리를 쳤다. 마을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지도자에게 찾아가서 “아장동사(我
성호 국가정보원장은 2009년 새해의 화두로 ‘중석몰촉(中石沒鏃)’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 말은 ‘돌에 맞아(中) 화살(鏃)이 꽂히다(沒)’는 뜻으로, 정신을 집중하여 전력을 다하면 어떤 일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사기(史記)》의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에 나오는 말이며, 이광(李廣)이 쏜 화살에 대한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이광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궁술과 기마술에 남다른 재주가 있는 맹장이었다. 체격도 크지만 팔은 키에 비해 원숭이처럼 길었다. 무인답지 않게 그는 과묵하였고, 눌변이었다. 청렴하여 전공을 세워 포상으로 받은 것을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으며, 식사도 부하들과 똑같이 하여 부하들의 신망과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하루는 이광이 명산(冥山)으로 사냥하러 갔다가 풀숲 속에 호랑이가 자고 있는 것을 보고 급히 화살을 쏘아 맞혔는데 호랑이는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가까이 가 보니 그가 맞힌 것은 화살이 깊이 박혀 있는 호랑이처럼 생긴 돌이었다. 다시 화살을 쏘았으나 이번에는 화살이 퉁겨져 나왔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은 것이었다. 중석몰촉은 무슨 일이든지 쏜 화살이 돌에 박힐 정도로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여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여 농사는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根本)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농사짓는 것을 천하의 가장 큰 근본으로 여겨 왔다. 그리하여 농사를 아주 중요시하였고 관심을 많이 가졌고 농사에 관한 여러 가지 책을 간행해 왔다. 여러 책 중 하나인 농가집성(農家集成)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농사를 함에 힘을 쓰고(務用力) 부지런히 일을 빨리하는 자는 얻는 바(소득)이 많다”라고 하였다. 농사와 가장 밀접한 것이 學 즉 배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우는 학생은 농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여기서 배우는 자에게 주는 교훈은 몇 가지 있다. 하나는 務用力(무용력)이다. 농사를 지을 때에 힘써 일하라고 하였다.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힘써 공부해야 한다. 힘써 배워야 한다. 務用力(무용력)을 분석해보면 ‘힘을 쓰다’의 중복임을 알 수 있다. 중복을 해서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務(무)가 ‘힘쓸 무’ 아닌가? 또 用力(용력)도 힘을 쓰다는 뜻이다. 그러니 힘을 쓰고 또 힘을 써라는 말이다. 농사를 지을 때와 같이 배움에 있어서도 힘을 쓰고 또 힘을 써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소출이 있다. 얻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