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荀子)의 권학문도 눈여겨 볼 만하다. 순자는 “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군자박학이일삼성호기)하면 則知明而行無過矣(즉지명이행무과의)라고 하셨다. 군자가 널리 배워서 자신을 헤아리고 살펴보면 지혜가 밝아져 행동에 과실이 없게 된다는 뜻이다. 역시 순자도 학문과 인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널리 배우라고 하고 있다.(博學) 널리 배우고 하루에 세 번(日參) 반성(省)을 하라고 하고 있다. 하루에 세 번 자기 자신에 대해(乎己) 반성하면(則) 지혜가 밝아지고(知明) 행동에 허물이 없게 된다(行無過)고 하셨다. 널리 배우면 지혜가 밝아지고 하루에 세 번씩 반성하면 행동에 허물이 없어진다고 하시면서 배움에 임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이다. 곧은 나무도 먹줄을 받아 그것을 구부려서 바퀴로 만들면 구부러진 형태가 컴퍼스로 그린 듯 둥글게 된다고 하셨다. 비록 땡볕에 말리더라도 다시 펴지지 않는 까닭은 그것을 단단히 구부려 놓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나무도 먹줄을 받아 구부리면 원하는 형태로 바뀌듯이 사람도 배움을 입게 되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순자는 나무는 먹줄을 받으면 곧게 되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듯이 사람도 널리 배우고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이신 이이(李珥)선생님께서 42세 때에 지으신 격몽요결(擊蒙要訣) 서론의 첫머리에 이런 말이 나온다. “人生斯世(인생사세) 非學問(비학문)이면 無以爲人(무이위인)이라”는 말이다. 이 말의 뜻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학문을 하지 않으면 사람될 바가 없다”는 말이다. 즉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가르침을 받지 않고 배우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가 사람이 아니고 배워야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배우지 않으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배우지 않고서 어찌 바른 사람이 될 수 있겠나? 배워야만이 사람이 될 수가 있다고 이이선생님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배움을 거부하는 이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다. 배움은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학문이 아주 특별한 것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학문이 별거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학문은 별난 물건도 아니고 기인한 것도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일에 따라 가각 당연한 것을 얻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새해 신정도 지났고 설날도 지났다. 이제 2009년의 새해가 분명하게 시작되었다. 아무도 부인 못한다. 새해가 되면 모두가 새로운 각오를 한다. 새로운 다짐을 한다. 새로운 자세를 가진다. 무엇보다 새해에 ‘日新又日新(일신우일신)’을 다짐한다. 날마다 새롭게 되기를 다짐한다. ‘日新又日新(일신우일신)’은 중국 은나라 탕왕의 반명(세숫대야)에 기록된 말로 ‘日新 日日新 又日新-일신 일일신 우일신)’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합쳐 ‘日新又日新(일신우일신)’의 성어로 사용되고 있다. 보통 ‘日新 日日新 又日新-일신 일일신 우일신)’은 날로 새로워지려거든 하루하루를 새롭게 하고 또 매일매일을 새롭게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날마다 새롭고 매일매일(나날이) 새롭고 또 날로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세 한자가 나온다. 日과 新과 又다. 핵심어는 新이다. 日은 때를 말하는 것이고 又(우)는 반복을 의미한다. ‘日新 日日新 又日新-일신 일일신 우일신)’은 결국 日新(일신)을 세 번 반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날마다 새롭게 하라는 것을 세 번이나 강조한 것이다. 무엇이든 강조할 때 세 번을 하지 않는가? 만세도 삼창을 하듯이 말이다. 이 말은 새롭게 하되 매일 새롭게
사서삼경의 하나인 중용에서도 배움에 대해서 잘 말씀해 주고 있다. 배우지 않으면 몰라도 배울 바에야 확실하게 배우라고 한다. 배운다면 알 때까지 배우라고 한다. 익숙해질 때까지 배우라고 한다. “有弗學(유불학)이언정 學之(학지)인댄 弗能弗措也(불능불조야)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弗(불)은 不과 같은 뜻이다. 有弗學(유불학)은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이란 뜻이다. 다른 말로 ‘배우지 않으면 몰라도’라고 풀이할 수 있다. 배울 바에는(學之) 엉성하게 배워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확실하게 알 때까지 배우라는 말씀이다. 중용의 이 글 앞부분에서는 널리 배우라고 하셨고 이제는 널리 배우되 확실하게 배우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예사로이 들어서는 안 된다. 배우다가 힘이 들면 그만 두고 배우다가 이해가 잘 안 되면 그만 두고 배우다가 장애물이 생기면 그만 둔다. 하지만 중용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弗能弗措也(불능불조야)라고 하셨다. 弗能(불능)은 ‘익숙해지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으면, 할 수 없으면’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 배우기 시작했으면 익숙해 질 때까지, 이해될 때까지 할 수 있을 때까지 배우라고 하고 있다. ‘남들은 한번 들으면 이해
논어 옹야편(雍也篇)에 공자와 그의 제자인 염구(冉求)의 대화 내용이 나온다. 그 대화 내용을 보면 염구의 학문하는 자세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고 공자의 말씀에서 학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잘 가르쳐 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冉求曰(염구왈) 非不說子之道(비불열자지도)언마는 力不足也(역부족야)로소이다.”라고 하였다. 29세 아래의 제자인 염구가 스승인 공자에게 한 말이다. 스승의 가르침이 기쁘다고 하였다. 이중 부정(非不說)의 표현을 쓴 것으로 보면 강한 긍정을 나타내기에 배움에 기쁨을 만끽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선생님의 가르침이 좋고 배움이 기쁘다고 할 정도면 학문은 거의 이룬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할까? 스승인 공자께서는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면 不亦說乎(불역열호)아”라고 하지 않았는가? 배우고 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하셨다. 스승이 배움에 대한 기쁨을 가졌으니 그 제자도 스승과 같이 배움에 대한 기쁨을 가졌으니 얼마나 보기가 좋은가? 10대 청소년들이 염구의 배움에 대한 기쁨을 누렸으면 한다. 배우는 것도 재미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배우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고 배우는 것에서 행복을
“君子務本(군자무본)”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군자는 근본(本)에 힘쓴다는 뜻이다. 이 말은 공자의 제자인 유자가 말한 것인데 논어의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말이다. 근본에 힘쓴다는 말은 근본을 소중히 여긴다는 말이다. 군자는 기본을 지키려 노력한다. 군자는 기본을 닦는데 노력한다. 군자는 기본에 충실하려 애쓴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군자는 어떤 사람인가? 학식(學識)과 덕행(德行)이 높은 사람이다. 알찬 실력과 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이다. 높은 학문과 고귀한 인격체를 가진 사람이다. 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건강하고 건전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모범적인 지도자급 사람이다. 혼탁한 세상을 바로 세워가는 사람이다. 질서를 바로 세워가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사람다운 사람이 군자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군자란 바른 인성과 알찬 실력을 갖춘 인재라 할 수 있다. 논어 학이편에서 유자의 말을 유심히 살펴보면 군자가 위인(爲人)을 가르키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군자가 즉 사람다운 사람을 말한다. 제대로 된 사람을 한 마디로 군자라 말하고 있다. 군자의 책무가 무엇일까? 즉 사람됨(爲人)의 기본은 무엇일까? 그것을 유
어떤 이는 ‘篤信好學(독신호학)’을 가훈으로 삼기도 하고 서예가들은 篤信好學(독신호학)을 즐겨 쓴다. 이 말은 논어(論語) 태백편(泰伯篇)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께서 篤信好學(독신호학)하라고 하셨다. 독실하게 믿고 학문을 좋아하라고 하셨다. 篤信과 好學을 둘 다 술목구조로 보아 “믿음을 독실하게 하고 학문을 좋아한다”로 해석을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篤信을 수식구로 보아 篤信이 好를 수식하는 것으로 보면 이렇게 해석이 가능하다. ‘돈독한 믿음으로 배우기를 좋아하다’라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렇게 볼 때 굳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라는 뜻이 된다. 굳은 신념으로 학문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확고한 자신감으로 배우기를 좋아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배우기를 좋아하고 책읽기를 좋아하되 돈독한 믿음을 갖고 임해라는 것이다. 배우기를 하면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하게 되고 배우기를 하면 나아가야 할 길과 나아가지 말아야 할 길을 분별하게 되며 배우기를 하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게 되며 배우기를 하면 가정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고 배우기를 하면 목숨을 걸어야 할 때와 목숨을 걸어서는 안
논어(論語) 위정편 (爲政篇)에 보면 “學而不思則罔(학이불사즉망)하고 思而不學則殆(사이불학즉태)니라” 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의 뜻은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무망(誣罔)하게 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국 최초의 학자이며 교육자이기도 한 공자께서 하신 이 말씀 속에 핵심 되는 두 한자(漢字)가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學’과 ‘思’다. ‘배우기’와 ‘생각하기’다. 배우기와 생각하기의 연관성에 대한 말씀이다. 배우기와 생각하기는 따로 놀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배우기와 생각하기가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말해 준다. 배우기와 생각하기의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다. 배우기만 해도 안 되고 생각만 해도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배우기에 치우쳐도 안 되고 생각하기에 치우쳐도 안 됨을 일깨워준다. 생각 없이 배움도 안 된다. 생각 없이 배우기만 하면 어떻게 되나? 망(罔)하게 된다고 하셨다. 罔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나? 罔은 우선 ‘그물’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고기가 그물에 걸리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고 새가 그물에 걸리면 더 이상 날아갈 수 없듯이 배우기만 하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진전
세월이 나를 기다려 주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때는 시간을 꼭 붙들어놓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지만 시간은 너무나 매정하다. 뒤로 돌아보지도 않는다. 대꾸도 하지 않는다. 자기대로 간다. 꾸준하게 간다. 일정하게 지나간다. 아무리 손짓해도 돌아보지 않는다. 젊으면 젊을수록 시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남는 것이 시간이라고 자랑한다. 오늘 지나가면 내일이 있다고 한다. 자고 나면 있는 게 시간이라고 한다. 시간을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간의 귀함을 느끼지 못한다. 시간이 좀 빨리 지나갔으면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시간을 붙들고 싶은 심정이다. 시간의 귀함을 느낀다. 금보다 귀한 시간이라고 하면서 힘차게 붙들어보지만 힘이 버거워 포기하고 만다. ‘내가 이렇게 늙었나, 내 머리가 왜 이리 희어졌나? 내가 왜 이리 힘이 없어졌나? 내가 왜 의욕이 사라졌나 ’하면서 한탄만 한다. 특히 배움에 시간을 투자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더욱 시간의 지나갔음을 아쉬워한다. 젊었을 때의 시간을 잘 사용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다시 젊음이 주어진다면 시간을 쪼개가면서 열심히 공부해보겠다고 한다. 다시 젊음으로 돌아간다면 주어진 시간을 늘여가면서 면학(勉學)에 힘써보겠
명심보감 훈자편에 “지락(至樂)은 막여독서(莫如讀書)요 지요(至要)는 막여교자(莫如敎子)니라.”라는 말이 나온다. “지극한 즐거움은 책을 읽는 것과 같은 것이 없고, 지극히 중요한 것은 자녀를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것이 없느니라.”는 뜻이다. 한문에서 莫如(막여)는 최상급의 비교 의미를 나타낸다. 莫如讀書는 ‘독서만 같은 것이 없다’로 독서가 최고란 뜻이고 莫如敎子는 ‘자식을 가르치는 것이 최고다’라는 뜻이다. 독서가 최고이고 자식을 가르치는 것이 최고이다. 자식 입장에서 보면 책을 읽는 것이 최고이고 부모 입장에서 보면 자식을 가르치는 것이 최고이다. 자식이 책을 읽고, 글을 배우는 것이 최고요, 최상이요, 최선이라는 뜻이 된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자식의 책 읽는 소리가 나면 그게 가장 큰 즐거움이 되고 자식이 글을 배우는 것을 보는 것이 가장 긴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스스로 책을 읽음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찾아야 하고 스스로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너의 지락(至樂)이 무엇인고?” 하고 물으면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은 오락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고, 어떤 이는 나의
사서삼경의 하나인 중용(中庸)에도 배움에 대한 말씀이 있다. “박학지(博學之·널리 배우고)하며, 심문지(審問之·자세히 묻고)하며, 신사지(愼思之·깊이 생각하고)하며, 명변지(明辨之·독행지(篤行之·돈독히 행하느니라)”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 속에는 학문하는 단계가 나와 있고 학문하는 방법이 나와 있음을 보게 된다. 학문하는 단계는 다섯 가지이다. 첫째가 學(학)이고, 둘째가 問(문)이며 셋째가 思(사)이고 넷째가 辨(변)이고 다섯째가 行(행)이다. 즉 학문하는 단계는 ‘배우기-묻기-생각하기-분별하기-실천하기’의 단계이다. 배우는 자는 언제나 이 다섯 가지의 과정을 거치면서 배우도록 하고 있다. 먼저 배우고, 배우면서 모르는 것 나오면 묻고, 배우고 터득한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배우면서 옳은지 그른지 판단해 보고, 배운 것을 행동으로 옮겨보는 것의 과정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이 과정을 잘 거치고 있다면 배움이 제대로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이 문장 속에는 어떻게 배울 것인가에 대한 방법이 잘 나와 있다. 배우되 ‘널리’ 배우라고 하셨다. 博學之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학생시절 배울 때는 스스로 배움에 한계를 두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두루 많이 배워야
명심보감 훈자편에 “賓客不來(빈객불래)면 門戶俗(문호속)하고 時書無敎(시서무교)면 子孫愚(자손우)니라”라는 말이 나온다. “손님이 오지 않으면 가문(門戶)이 속되고 시서를 가르치지 않으면 자손이 어리석게 된다”는 뜻이다. 위의 문장을 유심히 살펴보면 여기에 나오는 전자와 후자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자와 후자는 대구로 되어 있고 호응이 될 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서로 연관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앞의 “賓客不來(빈객불래)면 門戶俗(문호속)하라”는 뒷문장 “時書無敎(시서무교)면 子孫愚(자손우)니라”라는 문장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손님은 어떤 손님을 말할까? 그냥 지나가는 손님을 말할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손님을 그런 손님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손님은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 집안에 학문을 가르칠 만한 스승이 있기에 그 스승에게 한 수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분을 가르키는 것이다. 고귀한 집안에 찾아드는 손님은 할 일이 없어 수다나 떨기 위해 오는 손님이 아니다. 남의 험담이나 하고 시간이나 보내기 위해 오는 손님이 아니다. 없어서 구걸하기 위해 손을 벌
논어 태백편(泰伯篇)에서 공자께서 "興於詩(흥어시)하며, 立於禮(입어례)하며, 成於樂(성어락)이니라" 라고 하셨다. “시에서 興하며, 예에서 立하며, 악에서 成하느니라”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 시에서 흥이 생기고 예에서 일어나고 악에서는 이룬다" 하셨다. 한문교재연구회에서 발간(1980)한 한문∏에 보면 興於詩 (흥어시)를 풀이하면서 ‘詩는 사람의 흥기시킨다는 의미이고, 詩는 시경을 가리킨다’라고 되어 있다. 詩를 단순히 시경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다. 詩는 詩, 시경뿐만 아니라 모든 서적을 통틀어 하는 것으로 공자의 사상을 유심히 살펴보면 여기서의 詩는 ‘학문’, ‘배움’, ‘가르침’, ‘교육’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시에서 흥하다는 말은 학문에서 흥이 생긴다는 뜻이 된다. 배움에서 흥이 돋는다는 뜻이다. 교육을 받음으로 흥미를 가지게 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배움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배워서 때때로 익히는 것이 즐겁고 기쁘다고 하셨다. 책을 읽는 것에서 흥을 찾은 것이다. 글을 배움에서 기쁨을 얻은 것이다. 교육을 받음으로 신바람이 난 것이다. 이렇게 배우고 익힘으로 기쁨을 얻고 흥이 돋게 되며 나아가 立於禮(입어례
논어(論語) 안연편에 “君子(군자)는 以文會友(이문회우)하고 以友輔仁(이우보인)이니라”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공자의 뛰어난 제자인 증자(曾子)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 말은 “군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라는 뜻이다. 이 문장을 유심히 살펴보면 한편의 시와 같다. 서로 대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점층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以文의 대구가 以友이고 會友(회우)의 대구가 輔仁(보인)이다. 이 문장 전체의 핵심은 文이고 이 글 전체를 이끌어가는 핵심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文은 무슨 뜻일까? 우선 단순하게 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 즉 배움을 말한다. ‘학문으로써 벗을 모은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하면 글을 배움으로 인해서 친구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학생들과의 만남이 以文會友(이문회우)라고 할 수 있다. 학생들과 학교에서, 교실에서 만나 무엇을 하나 글을 배운다. 글을 배움으로 친구를 얻게 되니 이 또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이 귀한 줄 모르다가 뿔뿔이 헤어지게 되면 글로써 얻은 친구들이 생각난다. 죽을 때까지 찾는 것이 글로써 만난 친구이다. 어려울수록 더욱 찾게 되는 것
집이 좀 넉넉하다고 해서 공부할 때 공부하지 않고 시간을 허비하는 학생들에게 경고하는 말씀이 있다.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문공(朱文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家若富 不可恃富而怠學(가약부 불가시부이태학)-집이 넉넉하더라도 넉넉함을 믿고서 배움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주문공(朱文公)께서는 가난한 자에게는 폐학(廢學)을 하지 말라고 하셨고 부유한 자에게는 태학(怠學)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학문을 그치는 것도 문제지만 학문을 게을리 하는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학문을 그치는 것이나 학문을 게을리 하는 것이나 둘 다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름을 빛낼 수 없다. 입신출세를 할 수가 없다. 현달(顯達)할 수가 없다. 성공을 할 수가 없다. 군자가 될 수가 없다. 학자가 될 수가 없다. 전문가가 될 수가 없다. 학문을 그치거나 게을리 하고서야 어찌 보배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나? 자신에게 보배가 될 수가 없고 가정의 보배도 될 수도 없고 세상에 기여할 보배가 될 수가 없다. 폐학(廢學)하는 이는 그래도 변명이라도 할 수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공부할 수 없다고, 형편이 어려워서 배우기를 그만 둔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태학(怠學)은 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