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에 “無友不如己者 (무우불여기자)”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 때문에 공자에 대한 오해가 많다. 지금까지 학자들이 어떻게 해석했을까? 無를 금지로 해석하여 ‘자기와 같지 못한 이를 벗하지 말라(無)’로 하면서 공자의 가르침을 왜곡하였음을 보게 된다. 정말로 공자께서 자기만 못한 이를 벗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그건 아니다. 그것은 해석의 잘못에서 온 것이라 본다. 여기서 無가 금지의 뜻이 아니라 無뒤에 오는 문장 전체를 부정하는 내용이라 볼 수 있다. 즉 友=不如己者(자기와 같지 않은 자, 곧 자기보다 못한 벗)에 대한 전체부정이 無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해석이 가능하다. ‘자기보다 못한 벗이 없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자기와 못한 벗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자신의 허물이 보이면 고치기를 꺼리지(憚改) 말라고 하신 것이다. 나 주위의 친구를 보라. 어디 자기보다 못한 자가 있더냐? 없다. 반드시 친구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친구를 보면 자신의 허물이 생각나고 친구를 보면 자신의 잘못이 깨달아지고 친구를 보면 자신의 과오가 생각나니 친구를 보면서 허물이나 잘못이나 과오가 드러나면 지체 말고 고쳐나가라고 하는 것이다. 친구가 바로 나에게 의사가 되는 셈이다.
형편이 어려워 공부하기가 힘든 학생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말이 있다. 주문공(朱文公)이 “가약빈(家若貧)이라도 불가인빈이폐학(不可因貧而廢學)이라 - 집이 만약(若) 가난하더라도 가난으로 인하여 배움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폐학(廢學) 즉 배움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격려하고 있다. 한문(漢文)에서 불가(不可)는 ‘할 수 없다’ 즉 ‘can not'의 뜻이 있다. 위의 문장을 ‘아무리 집이 가난하더라도 가난이 배움을 그치게 할 수 없다’로 해석할 수 있다. 가난이 무엇이기에 배움을 그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가난이 배움을 막아서는 안 된다. 가난이 책 읽기를 금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메시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조금이라도 마음 아파하지 말고 낙심해서는 안 된다. 머뭇거리거나 뒤로 물러서서도 안 된다.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당당하게 생각하면서 배움에 더욱 힘을 가해야 한다. 지금까지 동서고금을 통해 가난을 구차하게 생각하지 않고 가난을 슬기롭게 잘 극복함으로 배움에 임한 두 사람이 있지 않은가? 진나라의 ‘차윤’과 ‘손강’이라는 분이다. 이 두 분의 공통점이 바로 가난 속에서 살아 왔다.
논어의 학이편에 보면 증자(曾子)가 날마다 세 가지에 대해 자기 자신을 반성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매일 자신을 반성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반성이 있어야 자신의 현 위치를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반성이 없이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증자(曾子)가 무엇을 반성하였을까? 자신의 학문에 대한 세 가지 반성이었다. 하나가 “爲人謀而不忠乎아-위인모이불충호)이다.” 즉 사람(남)을 위하여 꾀함에 충실하지 못했는가?라는 반성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人은 남을 말하는데 배움을 받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증자는 가르치는 선생님의 입장에 있는데 배우는 제자들을 위해서 꾀함(謀)에 충실했는가?라는 뜻이다. 謀(모)의 뜻을 한자사전에서 찾아보면 謀는 꾀하다고 하기보다 ‘묻고, 살피고, 의논하고, 상의하고, 모이고, 접촉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배우는 자에게 묻고, 살피고, 의논하고, 상의하고, 모이고 함께 접촉하고 하는 교수-학습의 활동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忠은 충성하다의 뜻도 있지만 ‘정성스럽다’의 뜻이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의 반성은 ‘배우는 자를 위하여 가르침에 정성스럽게 하였는가? 하지 않았
공자께서는 배움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강조했다. 배우는 것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배움 그 자체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논어의 학이편에서 가장 첫머리에 내세운 것이 바로 배움(學)이다. 배움보다 앞세울 것이 없다. 배움보다 더 중요시할 것도 없다. 배움 자체가 삶이고 배움 자체가 삶에 행복을 준다. 살아서 배움을 제대로 못하면 죽어서도 배움을 내세운다. 배우지 못해 한이 진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學生’이라는 표현을 써서 배움을 계속하기를 바란다. 그만큼 배움은 중요하다. 배움 그 자체가 행복을 가져다 준다. 기쁨을 가져다 준다.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고 하셨다. 학문을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하셨다. 반문법은 언제나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냥 기쁘다고 하지 않고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물으셨다. 동의를 구하셨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다 그러하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 배움은 계속 되어야 한다. 방학이라고 해서 배움이 멈춰서는 안 된다. 배움은 중도에 그만 두어서는 안 된다. 배움을 하면서 그 속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 배운 것
장자(莊子)는 우리들에게 왜 배워야 하는지, 배우면 무슨 유익이 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장자(莊子)가 말한 “人之不學 如登天而無術(인지불학 여등천이무술-사람이(之) 배우지 않는 것은 하늘에 오르고자 하나(而) 방법(術)이 없는 것과 같다(如))”에서 왜 배워야 하는지 알 수가 있다. 왜 배워야 할까? 우선 장자(莊子)는 우선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고 했다. 배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배우지 않으면 능력이 없어 무능해진다고 하였다. 하고 싶어도 무능해서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능력이 없이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세상 아닌가? 그래서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서 배워야 하고,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서 배워야 하며,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배워야 하고 원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배워야 하는 것이다. 장자(莊子)는 배우지 않으면 하늘에 오르고 싶어도 오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해 안타까워 할 뿐이라고 했다. 배우지 않으면 능력을 갖출 수 없고, 재주를 가질 수도 없으며, 기술을 익히지 못하고, 원리를 터득하지 못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이 된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니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은 어머니이면 누구나 다 ‘맹모단기(孟母斷機)’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요즘 어머니들 중에는 맹모(孟母)를 닮으려고 애를 많이 쓴다. 맹자(孟子)의 어머니가 있었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맹자(孟子)가 탄생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록 맹자의 어머니처럼 위대한 어머니가 아니지만 맹자(孟子)와 같은 이름 있는 선비, 유명한 인물, 세계적인 인물을 만들 수 없을까? 맹자(孟子)가 특히 재능이 탁월했기 때문에 대학자, 대교수가 되었단 말인가? 이 물음에 스스로 답을 해 본다. 보통의 어머니도 맹자와 같은 유명한 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고 특히 재능이 탁월하지 못해도 대학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맹모단기(孟母斷機)’는 보통 어머니들을 주눅이 들게 만들고 평범한 자녀들에게 기죽이는 말이 아니다. ‘맹모단기(孟母斷機)’는 열녀전(列女傳)에 나오는 말인데 ‘맹모단기(孟母斷機)’의 내용이 담긴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평범한 보통의 어머니도 뛰어난 인물을 만들어 낼 수 있고, 평범한 보통의 자녀들도 탁월한 인물이 될 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맹모단기(孟母斷機)’의 내용을 읽어보면 우선 맹자도 학교 다닐 때 특별히 뛰어난 사람이아니라는 것
명심보감의 ‘권학(勸學)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學如不及 猶恐失之 (학여불급 유공실지)”라는 말이다. 이 말은 공자께서 하신 말씀인데 ”배움은 따라가지 못할 듯이 하고 오히려 때를 잃을까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짧은 문장에는 의미심장한 깊은 뜻이 담겨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 문장의 앞부분에는 학문하는 자세, 즉 배우는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뒷부분은 학문의 때와 복습과 반복학습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고 있다. ‘學如不及 (학여불급)’이란 ‘학문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如)’는 뜻인데 이 구절 속에는 배울 때 겸손의 자세를 가져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조금 아는 것 가지고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교만에 넘치는 말이다. ‘學如不及 (학여불급)’자세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아는 자는 있을 수 없다. 공자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배움이란 언제나 아직 미치지 못한 것 같은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늘 쫓아가는 심정으로 배우라는 것이다. 공부하는 이가 늘 자신의 부족함을 안타까워하면서 정진하도록 한 말이 ‘學如不及 (학여불급)’이다. 배우는 학생이 아는 체, 똑똑한 체하면 학
논어 자장(子張)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博學而篤志하고 切問而近思면 仁在其中矣(박학이독지,절문이근사,인재기중의-널리 배워서 뜻을 돈돈하게 하고, 절실하게 물으며 가까운 것부터 생각해서 미루어 가면 인이 그 가운데에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자하(子夏)가 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 속에는 학문의 단계가 잘 나와 있고 학문할 때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가르치고 있다. 학문의 단계는 4단계임을 알 수 있다. ‘배움의 단계-뜻을 세우는 단계-물음의 단계-생각의 단계’로 나와 있다. 해석에 따라, 보는 관점에 따라 단계가 다를 수도 있다. 뜻을 세우는 단계가 먼저요, 그 다음이 배움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단계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이(而)’의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而)’ 순접을 나타내는 접속사인데 ‘그리고’로 해석할 것이냐? 아니면 “그리고 난 후”로 해석할 것이냐에 따라 단계가 바뀌어질 수 있다. 배움이 먼저든, 뜻을 세우는 것이 먼저든 간에 그것을 내세우고자 것은 아니다. 자하(子夏)가 우선 학문을 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나 하면 첫째가 배워야 하고(學), 둘째가 뜻(志)
아직도 자녀가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학교를 탓하고 선생님을 탓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분들은 자식을 가르치는 것은 아버지의 책임이라는 사마온공(司馬溫公)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은 “養子不敎(양자불교)는 父之過(부지과)”라고 하였다. 아들을 기르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허물(過)이라고 하였다. 아들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고 아버지의 책임이다. 그런데도 무턱대고 책임을 학교에 돌린다. 선생님에게 돌린다. 자식이 학문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우선 아버지의 가르침이 없음에 있음을 알고 자식 가르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공부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어야 하고, 공부를 권하기도 해야 하며 자녀의 일거수일투족 세밀한 관찰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전적으로 학교에 모든 책임을 맡기는 것은 기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선생님의 책임이 분명히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선생님의 열정이 식지 않았는지?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쳤는지? 내가 전공하는 과목에 대한 연구가 끊임이 없었는지? 학생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엄하게 잘 가르쳤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사마온공은 “가
우리들은 자식을 키우면서 어디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에 대한 갈등을 일으킬 때가 많다. 돈을 모아야 하나? 교육을 시켜야 하나? 돈도 모으고 교육도 시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이겠지만 우리의 형편은 그렇지 못하다. 대개 교육을 시키고도 황금을 모을 만큼 넉넉하지가 않다. 그러면 돈과 교육과의 갈등에서 어디에 비중을 둘 것인가? 어디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이럴 때 명심보감의 훈자편에 나오는 말씀에서 힌트를 얻어 보면 좋은 것 같다. 명심보감의 훈자편에 “黃金滿영(황금만영)이 不如敎子一經(불여교자일경)이요. 賜子千金(사자천금)이 不如敎子一藝(불여교자일예)니라.”라는 말이 나온다. “상자(바구니)에 황금을 채워두는 것이 자식에게 경서 하나를 가르치는 것만 못하고, 자식에게 천금을 주는 것이 그에게 한 가지 재주를 가르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가르치는(敎) 것이 황금(黃金)보다 더 나음을 말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추구해 왔던 것이 황금(黃金)이다. 하지만 황금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고 좋은 것이 있으니 그게 敎이다. 가르치는 것이다. 가르침이 없으면 황금을 지킬 수가 없다. 가르침이 없으면 아무리
명심보감 훈자편에 “憐兒(연아)엔 多與棒(다여봉)이요, 憎兒(증아)엔 多與食(다여식)이니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여쁜 아이에게는 매를 많이 때리고, 미운 아이에게는 밥을 많이 준다는 뜻이다. 어여쁜 아이는 사랑하는 아이로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를 사랑하거든 매를 들어서 교육하고 아이를 미워하거든 밥을 많이 주라고 하였다. 밥뿐만 아니라 떡, 아니 먹을 것, 맛 있는 것 많이 주라고 하면서 예부터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잘못 행동하면 매를 든다. 여기의 봉(棒)은 매 또는 가벼운 회초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몽둥이이다. 잘못된 길로 걸어가는 자녀에게 몽둥이와 같은 무거운 회초리로 교육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가정에서 자녀들이 잘못할 때 매를 드는 경우가 그리 흔하지 않다. 매보다는 오히려 욕을 더 많이 사용한다. 자녀를 바로 세워보고자 하는 도구가 회초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가지고 있는 가벼운 입을 사용한다. 그러니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들지 못하게 하니 어떻게 하나? 가지고 있는 입을 가볍게 사용하여 교육을 하게 되니 교육이 제대로 되겠나? 열 번, 백 번 말을 해도 귀밖에 듣는다. 효과가 없다. 그러니 선생님들의 말은 더욱 거칠어진다. 험
“男子失敎(남자실교)면 長必頑愚(장필완우)”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명심보감 훈자편(訓子篇) 첫머리에 나온다. 아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자라서 반드시 난폭하고 어리석게 된다는 말이다. 남자(男子)는 남자, 여자의 남자일수도 있다. 하지만 훈자편에 나오는 말로 자식을 훈계하는 말씀이니 남자(男子)는 남자 아이 또는 아들이라고 하면 무방할 것 같다. 여기서 실교(失敎)에 대해 유심히 살펴보면 여러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먼저 실교(失敎)는 가르치지 않다는 뜻이 있다. 부모가 아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난하게 되고 어리석게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 부모가 자식을 가르쳐야 함을 말해 준다. 즉 부모님의 인성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준다. 자식이 가정에서 배우지 않으면 행동이 거칠게 된다. 행동이 난폭하게 된다. 또 어리석게 되고 둔하게 된다. 부모가 실망할 정도로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아무리 바빠도 자녀들에 대한 인성교육은 철저히 시켜야 함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배우지 않으면 난폭하게 되고 어리석게 된다는 말은 무턱대고 한 말이 아니다. 강태공은 알다시피 선군(先君)인 태왕이 오랫동안 바라고 바라던 어진 인물이 아닌가? 인품이 잘 갖
명심보감의 훈자편(訓子篇)에 “人皆愛珠玉(인개애주옥)이나 我愛子孫賢(아애자손현)이니라.”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은 누구나 다(皆) 주옥을 사랑하지만 나는 자손의 어진 것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주옥(珠王)은 보배롭고 값이 있고 가치가 있고 귀한 것이라 누구나 좋아한다. 하지만 주옥(珠王)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고 한 선각자(先覺者)가 있다. 그분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사람이 무엇보다 귀하다고 하였고 사람이 무엇보다 보배롭고 사람이 무엇보다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사람은 사람이로되 어떤 사람이냐 하면 어진 사람이다. 마음이 너그럽고 착하고 슬기롭고 덕행이 높은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이 너그러운 것이 돈보다 귀하고 사람이 착한 것이 부보다 귀하며 사람이 지혜로운 것이 주옥보다 귀한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다 주옥을 사랑하지만 자기는 자손의 어진 것을 사랑한다고 하였다. 어찌보면 약간 별난 것 같이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분의 생각은 정말 깊이가 있고 높이가 있는 것 같다. 주옥의 원천이 현(賢)에 있음을 알았다. 사람의 겸손한 것이 부(富) 위에 있음을 알았다. 돈 있고 교만한 것보다 돈이 모자라도 덕이 있는 것이 나음을 알았다. 마음이
순자(荀子)의 ‘권학편(勸學篇)’에 “學不可以已(학불가이이)-학문이란 중지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학문이란 중도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不可以(불가이)는 ‘할 수 없는 것이다’의 뜻보다 더 강한 뜻이 담겨져 있다. 不可以(불가이)는 영어로 must not 즉 ‘해서는 안 된다’의 뜻으로 다가온다. 학문을 중도에 그만두는 것을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학문을 중도에 그만두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기에 아주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학문을 그쳐서는 안 된다고 그만두어서는(已) 안 된다고,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왜 그렇게 권학편 서두에서 그렇게 강하게 강조하고 있을까? 무엇보다 학문이 너무나 깊고 높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높은 산에 올라보지 않고야 어찌 산이 높을 줄 알겠으며 깊은 계곡을 굽어보지 못하면 땅이 두꺼운 줄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높은 산에 올라가려면 중도에 그만둘 수가 있는가? 높은 산에 올라가야 산이 높음을 맛볼 수 있는데 중도에 포기하면 산이 높음을 알 수가 없고 깊은 계곡에 가보아야 땅의 두꺼움을 맛볼 수 있는데 중도에 그만두면 어찌 땅의 두꺼움을 알 수 있
시간의 귀중성을 깨달은 사람 중의 한 분이 중의 주희다. 주희는 누구보다 시간이 귀한 줄 알고 시간을 쪼개가며 책을 읽었다. 매일 같이 배우고 또 배웠다. 아무리 배워도 끝이 없는 게 학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자꾸만 흘러가고 나이는 자꾸만 들어가니 자신의 한계를 느낀다. 그런데 주위의 사람들은 보니 너무나 안타까웠다. 자기는 배우는 일에 시간이 모자라 일촌광음(一寸光陰)도 가볍게 여기지 않았는데 주위의 사람들은 시간을 너무나 낭비한다. 자꾸만 변명만 늘어놓는다. 오늘 배우지 못하면 내일 배우지, 내일 배우지 못하면 모레 배우지 하면서 배우려고 하지 않다. 한 해를 허송세월 보내고서는 올해 못 배운 것 내년에 배우지 하면서 글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오늘 배우지 않으면서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고, 올해 배우지 않으면서 내년이 있다고 말라고 하셨다. 특히 젊은이들은 시간이 안 가서 탈이다. 시간의 귀함을 모른다. 시간이 남아돈다. 시간을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주자는 10대 젊은이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이 시간의 귀중함을 모르는 이에게 시간의 귀함을 깨우쳐 주며, 시간이 남아도는 이에게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