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터링(Lettering)은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서로의 사정이나 뜻을 전하는 ‘편지쓰기’를 말한다. 이른바 아날로그 시대에는 전통적으로 가족이나 친지 간에 애틋한 사연이나 소식을 전하면서 ‘서간문(書簡文)’이라는 고유의 문형(文型)을 만들기도 했던 것이 통신의 발달과 더불어 전자시대로 접어들면서는 형식이나 방법도 크게 변했다. 이번 호에서 소개하려는 레터링의 의미는 좀 다르다. 여기서 의미하는 레터링은 특정한 상대에게 소식이나 사연(事緣)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 속에 내재(內在)하고 있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토로(吐露)하는 활동이다. 여기에서는 필체나 글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논리구조까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으며 절대로 평가하지 않는다. 수업에서의 Lettering 초기에는 이 방법을 국어 학습에서만 활용했다. 소설문을 가지고 수업을 할 때 학습자들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을 자유롭게 선택해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도록 했다. 이를테면 ‘심청전’에서 등장하는 인물이면 심학규, 심청, 뺑덕어멈 곽 씨 부인, 뱃사람, 동네 사람, 봉은사 시주승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자신이 관심이 있는 인물에게 편지글을 쓰는 것이다. 대상은 사람뿐 아니라 등장하
교직의 정점에서 교단에서 교장이라는 자리를 ‘꽃’에 비유한다. 교직에서는 거기가 정점이요, 최고의 자리라는 뜻이다. 교사에서부터 주임교사를 거쳐 교감에서 교장의 자리로 가는 과정에서 일구월심(日久月深) 얼마나 많이 노심초사했으며 얼마나 많이 땀을 흘렸던고, 얼마나 많이 학수고대(鶴首苦待) 했던고. 교장으로 가기까지는 수없이 험한 준령을 넘고 모진 세월을 거쳐 거기에 이르는 곳이다. 기다려서 맞이한 것이 아니라 온갖 힘을 기울여서 쟁취한 곳이다. 그 시절, 평교사는 그렇지 않다 치더라도 주임교사(부장교사)부터는 교장과의 관계가 좋아야만 한다. 절대로 교장과 맞서지 말아야 했다. 어떻게 하든 근무평가를 잘 받는 것이 선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구를 잘하고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일보다 오히려 그것이 먼저 해결돼야 했다. 나도 주임교사가 되면서 남달리 학교에 일찍 출근해 교장의 눈도장을 찍어야 했고 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일들을 솔선하게 되었다. 학교 길의 휴지를 줍거나 빗자루를 들고 운동장을 쓰는 일에도 매진했다. 누군가 그랬다. 교사시절에는 잘 보이지 않던 휴지가 주임(부장)이 되면 더 잘 보이고 교감, 교장이 되면 휴지뿐 아니라 학교 구석구석에 있는
미꾸라지와 메기 이야기 학교 경영에서 연구학교 운영은 매우 흥미 있는 과업의 하나였다. 거의 정형화(定形化)화되어 있는 학교 경영의 일상적인 틀로부터 변화를 가져오게 될 뿐만 아니라 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관련 문헌이나 선행 연구를 탐색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새로운 학설을 접하게 됨으로써 교사나 교장 모두가 지적인 성장을 도모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연구결과의 성공 여부를 불문하고 부가 점수까지 받게 되니까 도랑 치고 가재 잡고, 꿩 먹고 알 먹는 격이 된다. 그런데 요즘엔 한 번 연구학교를 운영하고자 해도 50% 이상의 교사가 동의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하니까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 된다. 만사를 편하고 쉽게 가자고 한다면 학교 여건상 꼭 필요한 경우에도 연구 활동을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몇몇 교사들은 아직도 좌정관천(坐井觀天)의 늪에서 안일무사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씁쓸하다. 이와 같은 세태를 빗대어 만든 이야기 중에 ‘미꾸라지와 메기’가 있다. 메기가 없는 논의 미꾸라지는 피둥피둥 살만 쪄서 매일 잠만 자는데 메기와 함께 사는 미꾸라지는 몸체도 날씬하고 행동이 민첩해 재빠르게 움직인다고 한다. 천적(天敵)이 없는 생
일반 회사에서는 생경(生硬)한 학교 풍속도 영원한 손님 집단 45만 교육자 중에서 나를 포함해 교장, 교감, 교사, 행정실장 등 모든 학교 관계자들의 상당수가 몸담고 있는 직장을 진정한 ‘자기 학교’로 여기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잠시 와서 머물다가 가는 곳일 뿐이다. 길면 4년, 1년이 지나면 3년 남았다 여기고 3년이 되면 마음조차 이미 떠나버린다. 손님으로 왔으니까 아이들과의 만남도 고작 1년 동거(同居)일 뿐 교실도 앉은 자리도 1년용으로 치부하게 마련이다,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내 것이 아니니까 소중할 리 없다. 곳곳에 정 • 부 책임자의 이름은 써 붙였지만 소유권을 가진 건 하나도 없다. 굳이 주객(主客)을 따진다면 6년을 공부하게 되는 학생들이 주인이고, 교사는 손님이 아닐까 싶다. 소년시절의 꿈과 추억이 어린 배움의 요람이라 해 저들은 모교(母校)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은 학교 수도꼭지에서 줄줄 물이 흘러내려도 그것을 잠그는 사람이 없고 벌건 대낮에도 불이 켜져 있는 화장실의 스위치에 손 한 번 대는 사람도 없으며 운동장에 휴지가 떨어져 있어도 스스로 줍는 어린이를 찾아보기가 어렵다면 학교야말로 주인이 없는
스승과 선생 교단에서 평생을 살아온 내가 종종 ‘스승’과 ‘선생’ 문제로 고민해본 적이 있다. 국어사전(새 국어사전, 교학사)에서 ‘스승’은 자기를 가르쳐 이끌어 주는 사람’이라 정의하고 있다. 선생, 사군(師君), 함장(函丈), 영어로 master를 첨부해 놓았고 ‘선생’은 ① 스승. teacher, ② 학예에 능한 사람, ③ 교원에 대한 일컬음. sir, ④ 나이나 학식이 맞서거나 그 이상인 사람에 대한 일컬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선생과 스승은 동의어인가 하면서도 석연치 않았다. ‘선생’은 일찍이 저명한 정치가나 사회 인사의 호칭으로 써왔고 최근에는 원로 연예인들에게도 자주 쓰인다. 그렇다면 나도 선생이었으니까 김구 선생이나 김대중 선생의 반열에 서게 된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런 등식은 너무 어색했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비약이 되어 묘한 이질감과 자괴감마저 들었다. 재직시절, 주변의 동료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선생이면 어떻고 스승이면 어떠냐며 하찮은 일에 신경을 쓴다면서 부질없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언제나 두 단어의 뉘앙스가 다른 것을 느끼며 ‘스승’과 ‘선생’을 동의(同意)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기독교 문화권과는 달리 불교 문화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