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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해본 것만 남는다는 생각으로! 중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중학교 1학년과 2학년 수업을 위주로 하였고, 3학년 수업을 할 경험은 많지 않았다. 올해 3학년 수업을 하면서 각 성취기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수업을 구상해야 할까에 대해 고민하였다. 각종 교과서를 살펴보니, 거의 모든 교과서에 ‘삼각비’ 단원에서 건물 높이를 측정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선생님이라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활동을 해보는 데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계획한 대로 수업이 진행될까 하는 부분부터 나도 경험해 보지 않은 수업내용이기에 준비해야 할 부분도 많았다. 이러한 과정들을 생략하고 교과서대로만 진행을 한다면 몸은 편할 수 있지만, 학생들에게 ‘삼각비’ 단원에서 배움이 일어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이 수업을 계획하였다. ‘삼각비’ 단원의 수업 흐름 ‘삼각비’ 단원은 고등학교 때 배우는 ‘삼각함수’ 단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학생들이 깊이 있게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낯선 용어와 기호로 인해서 ‘삼각비’에 대한 진입장벽이 높다. ‘삼각비’의 유용성을 느낄 수 있도록, 첫 시간에는 중학교 2학년 때 학습한 닮음 개념을 활용해서 ‘각도기’와 ‘자’로 높이를 측정하는 활동을 하였다. 특수각에 대한 삼각비는 외우고 있어야 하므로 학생들이 모둠에서 돌아가면서 외울 수 있도록 연습하는 시간을 주고, 카드를 만들어서 학급의 모든 학생이 답할 수 있게 연습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전화번호가 나오게 문제를 만든 후, 친구들과 교환해서 정답을 맞히는 활동을 하면서, 문제를 만들어보는 경험을 할 수 있게 구성하였다. 생성형 AI와 함께 프로젝트 수업하기 수업을 준비하면서 이제는 자연스럽게 챗GPT와 대화를 나눈다. 보고서를 작성하면서도 고민되는 지점들은 생성형 AI와의 대화를 통해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수업을 사전에 많이 고민했지만, 수업을 진행하다보니 조금씩 수정해야 할 부분들이 생겼다. 생각과 다르게 흘러간 부분들이 있었기에, 나의 시행착오가 이 수업을 준비하는 다른 선생님들께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솔직하게 기록해 보고자 한다. [PART VIEW] ● ‘교실 높이 측정 수업’에서의 시행착오 삼각비 수업은 1차시와 2차시로 나누어서 수업했다. 1차시는 교실의 높이 측정, 2차시는 체육관에 있는 여러 장소의 높이 측정이었다. 1차시 수업이 변해가는 과정을 먼저 소개한다. 첫 번째 반에서는 클리노미터(clinometer)를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하였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빨대·바늘·실·각도기를 미리 준비했지만, 만드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래서 이걸 만드는 것보다 활용하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거라는 판단으로 두 번째 반부터는 첫 번째 반에서 만든 클리노미터를 사용했다. 클리노미터를 활용하면서 알게 된 점은 ‘빨대 구멍이 커야 학생들이 보기 편하다’는 것과 ‘클리노미터 읽는 방법을 먼저 설명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만들어진 클리노미터 사용으로 시간이 단축되었고, 덕분에 측정하는 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측정하기 전에 ‘교실의 높이가 얼마인지’ 예측해 보게 했다. 키가 큰 친구들은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서 대략적인 높이를 예상했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서 움직이는 바람에 다소 소란스러워졌기에, 세 번째 반에서는 자리에 앉은 상태에서 교실의 높이가 얼마인지 예측하게 하였다. 그러자 학생들은 “선생님 키가 얼마예요?”라고 물으며, 나의 키를 통해서 교실 높이를 추측하려고 하였다. ‘기존에 알고 있는 것’을 통해 ‘모르는 것’을 예상해 보는 활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네 번째 반에서는 앞선 세 반에서 일어난 시행착오들을 수정하여 수업했다. 그래서 정돈된 모습이기는 하였지만, 수업 후에는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다. 교사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기에 학생들은 오히려 여러 가지 부분에 대해 서로 질문하면서 방법을 알아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교사가 최대한 많은 사고실험을 통해 수업을 구상하되, 학생들은 그 안에서 자유롭게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와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이 배움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다시 중학교 3학년 수업을 하게 된다면,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진행해야겠다는 성찰이 이루어졌다. ● ‘체육관에서의 건물 높이 측정’ 수업 2차시 수업도 소개해 본다. 처음에는 학교의 다양한 건물 높이를 측정하는 활동을 계획했다. 이 수업은 8월 말에 했는데, 폭염주의보가 계속 이어지던 때였다. 그럼에도 운동장을 돌면서 사진을 찍었지만, 수업하는 주에는 계속 비 예보가 이어져서 결국 운동장에서 사진 찍은 장소의 높이는 측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비가 와도 상관없는 ‘체육관’으로 옮겼다. 체육관에서 실제 높이를 측정하기 어려운 부분을 선택하여 학생들에게 측정해 보게 하였다. 학생들은 클리노미터의 원리를 바탕으로 ‘각도기 앱’과 ‘줄자’를 활용해 수치를 측정한 후, ‘삼각비’를 적용해 계산한 결과값이 실제 값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Smart Measure(스마트 메저) 앱을 활용하여 학생들이 실제로 측정하고 어느 정도의 오차가 생기는지 알아보고,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보고서 작성하기 활동 후에는 기록을 남기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활동은 단순히 활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활동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정리를 하면서 배움이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모둠별로 활동지를 작성한다. 이 수업은 전문적 학습공동체 선생님들과 사전 협의회를 거친 후에, 수업을 공개하고 이후에 사후 협의회를 가졌다. 사전 협의회를 하면서 비 예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체육관으로 장소를 옮길 수 있었고, 수업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수업을 나누는 것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한 번의 수업 나눔을 위해서 그 수업에 대해서 고민하고, 준비하고, 실제 수업을 한 후에 학생들의 반응을 통해서 교사는 조금씩 성장한다고 믿는다. 실패한 수업인지 성공한 수업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한 명의 교사가 했던 수업의 후기가 이 글을 읽는 다른 선생님께 영감을 주어 수업에 대한 에너지를 줄 수 있기를 바란다.
한때 많은 학생의 꿈이 연예인이나 유튜버였다면, 이제는 ‘건물주’나 ‘돈 많은 백수’라고 당당히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꿈이 없어요’라며 무기력함을 고백하는 학생들을 더 자주 마주하곤 한다. 다양한 삶의 모델을 보여주고, 학생 스스로 꿈꿀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교사의 책임이자 학교도서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특정 분야나 학과를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긍정적인 사고와 성취동기, 회복탄력성 같은 내면의 역량을 다지는 것이 진로 탐색의 본질임을 새삼 실감한다. 독서는 학습의 기초체력을 기르는 도구이자 그 자체로 완성도 높은 진로교육활동이다. 이러한 교육적 가치에 깊이 공감한 진로진학교사와 협력하여,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도서관 활용수업을 계획하게 되었다. 책 속에서 꿈을 발견하고 자신의 꿈에 날개를 달아 옹골지게 자기 빛깔로 비상하는 학생들을 만난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수업 소개 2022 개정 교육과정 진로와 직업 영역은 ‘진로와 나의 이해’, ‘직업세계와 진로탐색’, ‘진로설계와 실천’의 총 3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진로와 나의 이해’ 영역은 관심 분야 직업인의 삶의 모습과 진로 경로에서 드러나는 진로 특성에 비추어 학생의 흥미·적성·가치관 등의 진로 특성에 대한 심도 있고 통합적인 이해가 수행될 수 있어야 한다. 이 영역의 핵심 아이디어는 성공한 직업인의 진로 특성, 자신의 진로 특성에 대한 통합적 이해와 계발, 진로에 대한 유연하고 긍정적인 마음가짐 등이 중요하다. 또한 관심 분야 직업인의 삶에서 나타나는 진로 특성을 탐구하고 자신의 진로 특성과 연결하여 종합적인 이해가 이루어지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교과내용의 전반이 도서관의 풍부한 자료와 결합했을 때 교육적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또한 지필평가의 부담에서 벗어나 다양한 교수·학습방법을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으며, 모든 단원이 도서관 자료를 폭넓게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PART VIEW] 수업 과정 및 내용 본 수업은 총 10차시로 설계되었으나, 학교나 학급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첫 단계는 ‘자기이해’에서 시작된다. 올바른 자아인식과 강점 파악을 통해 진로의 기틀을 마련한 뒤, 자신의 꿈과 부합하는 도서를 선정하여 정독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어 신문기사나 인터뷰 등 다양한 자료탐색으로 직업세계를 깊이 있게 이해한다. 캔바(Canva)·미리캔버스·파워포인트(PPT) 등 다양한 디지털 도구를 활용하여 자신만의 진로 프레젠테이션을 제작하며, 이때 학생들의 수준 차이를 고려하여 표준화된 템플릿을 제공하여 학습을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단순한 정보 습득을 넘어, 독서를 매개로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설계하는 자기주도적 진로설계 역량을 기르게 된다. 제작된 프레젠테이션을 바탕으로 ‘책을 통한 내 꿈 발표회’ 시간을 가졌다. 단순한 내용 전달을 넘어 자신이 선택한 책과 진로를 소개하며 친구들 앞에서 마치 자신의 비전을 선포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발표 후에는 성찰일지를 작성하여 자신의 발표 내용과 준비 과정을 되돌아보는 자기평가를 실시했다. 이와 동시에 친구들의 발표를 경청하며 배울 점과 응원의 메시지를 나누는 동료평가도 병행했다. 동료평가는 점수를 부여하는 방식이 아니라 친구들의 꿈을 지지하고 강점을 찾아주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중심으로 진행하여 서로의 성장을 독려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수업 후기 10차시의 수업을 마친 후 학생들의 피드백 속에서 발견한 핵심 단어는 ‘성취감’이었다. 이는 교사의 일방적인 지식 전달에서 벗어나, 학생 스스로 선택한 텍스트에 몰입하며 자신의 삶을 디자인하는 주도적 과정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디지털 툴을 활용한 시각화 작업은 학습 몰입도를 높이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으며, 대다수의 학생으로부터 ‘막연했던 진로계획이 구체화되었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처음에는 단순히 ‘꿈이 뭐냐’는 질문이 제일 어렵고 싫었는데, 도서관에서 저와 비슷한 고민을 담은 책을 읽으며 마음이 편해졌어요. 제가 뭘 잘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건 이번 수업이 처음인 것 같아요. 단순히 직업을 정하는 게 아니라 저 자신을 공부하는 시간이라 정말 유익했어요.” (A 학생) “도서관 활용수업이라고 해서 지루할 줄 알았는데, 제가 관심 있는 분야의 기사나 인터뷰를 직접 찾아보니까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캔바로 발표 자료를 만들면서 제 꿈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서 뿌듯했어요.” (B 학생) “발표 준비가 막막했는데 선생님이 주신 템플릿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끝낼 수 있었어요. 제가 조사한 직업인에 대해 친구들에게 멋지게 소개하고 나니 정말 그 직업에 한 발짝 다가간 기분이에요.” (C 학생) 아이들의 미래를 깨우는 다양한 시도들 ● 사람책 공감토크 진로와 직업 교과를 통해 다각적인 시도를 이어오고 있으며, 그중 수년간 지속해 온 대표적인 활동은 ‘사람책 공감토크’이다. 이는 사람이 한 권의 책이 되어 자신의 삶과 지혜를 공유하는 도서관 융합형 진로교육 모델로, 학생들이 현장의 생생한 경험을 직접 대출(경험)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람책의 삶을 통해 학생들은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나갈 기회가 되었다. ● 필사를 통한 나만의 독서다이어리 만들기 ‘필사를 통한 나만의 독서다이어리 만들기’ 활동도 학생들이 진로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설정하고 자신을 성찰할 수 있도록 돕는 활동이다. 필사는 집중력을 높이고 심리적 안정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특히 ‘공부의 힘’과 관련한 내용을 필사함으로써 진로목표를 내면화하고 실천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된다. 활동을 마친 결과물은 교과세특 및 창의적체험활동 자율활동에 연계하여 기재해 줌으로써 학생들이 자기주도적으로 탐구 역량을 증명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생활기록부 기재 예시 이토록 공부가 재미있어지는 순간(박성혁)을 읽고 마음에 드는 문장의 필사를 통해 공부의 참 의미가 성공이 아닌 성장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공부에 대한 동기가 부여됨. 그동안 자신의 학습방법에 대해 반성하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학습계획을 세움. 필사를 통해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었으며 자기주도적으로 독서하는 습관을 기르고 독서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비로소 배우는 즐거움을 깨닫고 실천함. 독서는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학생들의 전인적 성장을 돕는 중요한 활동이다. 진로와 직업 교과와 연계한 수업 및 활동들이 학생들에게 독서의 가치를 일깨우고, 독서를 통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좋은 책을 읽고 토론하는 학교문화를 조성하여 학생들이 비판적 사고와 문제해결력을 갖춘 균형 잡힌 인격체로 성장해 나가길 소망한다.
시(詩)의 언어 최근 최민자의 수필집 사이에 대하여를 읽다가 ‘모래 울음’이라는 글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결이 하도 고와 시처럼 줄을 바꾸어 보았다. 모여 앉아 있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말을 섞지도 얼싸안지도 않고 돌아앉아 버석거려본 것들은 안다. 부딪쳐봤자 상처나 주고받을 뿐이라는 것을. 정 붙이면 안 된다고 다시 또 나뉘고 헤어져야 한다고 가슴팍 쪼개가며 배워버린 이별. …(중략)… 모래가 운다. 채송화 한 송이 피워 올리지 못하는 저 쓸쓸한 불임(不姙)의 이름으로 싸륵, 싸륵 버석거리며 운다. 스웨덴 한림원은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한강 작가를 선정하며, 그녀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poetic prose)”을 써왔다고 평했다. 한강은 1993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서울의 겨울’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소설가이기 이전에 시인으로 등단했던 이력을 바탕으로 고도의 상징과 운율이 느껴지는 문장을 구사했다. 최민자의 수필 또한 상당 부분이 시어로 가득 차 있다. 노벨상 수상자 한강의 소설이 ‘시적’이라면 최민자의 수필은 ‘시 그 자체’이다. 우리말은 어휘와 표현 방법 자체가 비유·상징·함축·서정적 묘사로 이뤄진 시어(詩語)적 특성이 강한 언어인 것 같다. 시의 DNA를 품은 언어와 국가 우리는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는 나라이고, 대형 서점에는 시집 코너가 눈에 띄게 자리 잡고 있다. 작고한 개그맨 전유성 씨가 우리 대학 초청 강연에서 자신은 시를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며 예비 교사들에게 늘 시를 읽으라고 강력하게 추천했던 기억이 새롭다. 시는 단지 문학의 한 장르가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창의성의 뿌리이다. 시가 삶 속에 녹아 있는 나라로는 러시아·이란·칠레·아이슬란드를 들 수 있다. 러시아인들에게 시는 ‘영혼의 양식’이다. 푸시킨·레르몬토프·아흐마토바 등 국민 시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여 동네 작은 서점조차 시집 코너를 정성스럽게 꾸민다. 올랜도 파이지스(Figes, 2002)는 나타샤 댄스: 러시아 문화사에서 러시아인들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시를 암송하며 정신적 위안을 얻는 문화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척박한 역사와 추운 겨울을 공유하는 우리에게도 시는 시대를 견디게 하는 힘이었다. 이란은 ‘시가 공기처럼 존재하는 나라’이다. 페르시아 시는 이란인의 일상 언어와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Schimmel, 1992). 많은 가정이 하페즈(Hafez)나 루미(Rumi)의 시집을 경전처럼 비치하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명절에 시집을 펼쳐 점을 치는 ‘팔-에 하페즈’ 문화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상징적이다(UNESCO, 2023). 칠레는 ‘시인의 나라(País de poetas)’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베르나르도 수베르카소(Bernardo Subercaseaux)의 칠레 사상과 문화의 역사(2003)는 칠레의 국가 정체성이 어떻게 시와 문학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파블로 네루다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라는 두 명의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을 배출했다. 산티아고의 서점들은 이들의 시집을 포함한 커다란 시 코너를 가지고 있다. 인구 대비 출판율이 세계 최고 수준인 아이슬란드는 자신들을 ‘시인과 독자의 나라’로 정의하고 있다(Guðjónsson, 2022). 겨울철 시집을 선물하는 ‘욜라보카플로드(Jolabokaflod)’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BBC, 2013). 2011년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Reykjavik)는 비영어권 국가 최초로 유네스코 문학 창의 도시로 지정되었다. 선정 사유 중 하나로 풍부한 시적 전통과 높은 창작 활동이 언급되었다. 기술의 시대, ‘시성비’와 시의 새로운 가능성 위에서 인용한 문헌 기록들과 달리 어쩌면 그 나라에서조차 인터넷과 AI 영향으로 시를 쓰고 읽는 사람이 크게 줄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 선조들은 모이면 시를 읊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마다 시화전이 유행이었고, 시집을 선물로 주고받았다. 1990년대에도 회식 자리에서 노래 대신 시를 읊는 친구들이 있었다. 이제 시낭송회는 드문 풍경이 되었고, 서정적 가곡과 함께 시도 우리 곁에서 멀어지고 있다. 시를 쓰고 읽는 추동력은 역설적이게도 ‘혹독한 겨울’ 같은 힘든 물리적 환경과 절대 고독이나 사회적 모순에 대한 분노와 같은 고통스러운 심리적 환경인 것 같다. 외적 자극을 무한대로 제공하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깊은 영혼의 세계를 돌아볼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겨울철 실내복보다 시를 찾는 마음, 시가 주는 치유력과 감동이 더 먼저 얇아지고 있는 것 같다. 우려와 달리 비유·상징·함축이 특징인 시적 표현은 디지털 네이티브인 Z세대에게 오히려 가장 매력적인 소통법이 될 수 있다. Z세대는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를 극도로 중시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연구(김인애, 2024)에 따르면, 이들은 1.5배속 시청을 기본값으로 여기며 지루한 부분을 참지 못한다. 정보 과잉 시대에 필요한 핵심만을 빠르게 골라내려는 이들의 생존 전략은 본질적으로 ‘함축’과 ‘상징’을 지향한다. 그들의 요구에 가장 부합하는 표현 방식이 한자성어와 시어(詩語)가 아닐까 싶다. 기성세대에게는 낯선 신조어의 범람 역시 최소한의 음절에 최대한의 감정을 담으려는 ‘시성비’적 발로다. K-컬처 열풍의 배경에도 직설을 넘어 시적으로 승화된 감각적인 언어와 영상미가 깔려 있다. 시는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짧고 강렬한 자극을 원하는 이 시대에 가장 최적화된 고밀도의 콘텐츠인 것이다. 기성세대가 Z세대의 감각에 들어맞는 새로운 시적 표현을 개발하고 널리 사용한다면 세대 간의 벽이 낮아질 것이다. 사용하는 어휘는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시적 표현이 우리 일상을 채운다면 우리의 삶도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우리 언어의 품격도 더 높아질 것이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개발한 창의적인 시적 어휘로 소통할 때, 한류는 일시적인 태풍이 아니라 상처받은 세상을 어루만지는 따스한 훈풍이 될 것이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싸륵싸륵 우는 모래알 같은 아이들의 마음속에, 시라는 ‘채송화 한 송이를 피워 올리는’ 일, 그것이 오늘날 어른들이 걸어가야 할 ‘시적인 길’이 아닐까 싶다.
초광역 행정통합과 교육자치의 새로운 국면 현재 대한민국은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이라는 국가적 위기 앞에 서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5극 3특’ 초광역 메가시티 전략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국가 균형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핵심적인 행정 개편이다. 이 거대한 통합의 흐름 속에서 초·중등교육은 단순한 일반행정의 부수적 대상이 아니라, 지역 내에서 교육-고용-정주로 이어지는 ‘지역 완결형 발전 모델’을 완성하는 가장 강력한 핵심 동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극 3특’과 관련한 특별법안 논의에서 교육이 소외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본고에서는 일부 특별법안을 토대로 초광역 행정통합이 초·중등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교육과정·교원인사·교육행정 체제를 중심으로 조망하고, 성공적인 안착을 위한 입법 방향을 제언하고자 한다. 교육과정의 변화와 쟁점 _ 국가 수준을 넘어 ‘지역화’로 행정통합 이후 교육 현장에서 체감할 가장 큰 변화는 교육과정의 자율권 확대다. 이는 학생의 선택권을 보장하고 지역의 특색을 교육에 녹여내는 ‘교육과정의 지역화’를 의미한다. ● 변화의 핵심 특정 교과의 비중을 유연하게 조정하거나 지역 산업 및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새로운 과목을 개설할 수 있는 교육과정 자율권이 확대된다. 특례법안에서는 자율학교·영재학교·특수목적고등학교 등 다양한 형태의 학교 설립 및 운영권 특례가 확대되어 교육생태계의 다양화가 가속화될 전망이다. 또한 교육특구 및 통합학교 등 정부 정책과 맞물려 지자체와 지역 이해당사자가 참여하는 커뮤니티 형태의 학교 거버넌스 변화가 예상된다. ● 주요 쟁점 교육과정 자율성 확대는 필연적으로 ‘국가교육과정’과의 조화 문제를 야기한다. 학교 여건과 지역 특성에 맞는 인재 양성을 위해 어느 범위까지 자율권을 부여할 것인가에 대한 적정성 확보가 시급하다. 그리고 특정 학교에만 특례를 집중하기보다 대다수 일반 학교에 적용 가능한 보편적 특례를 검토하여 통합의 실질적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또한 학교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있어 단위학교의 자치와 지자체·교육청의 책임을 명확히 분리하는 법적 근거 마련이 필수적이다. 교원인사 정책의 혁신 _ 불안을 확신으로 바꾸는 ‘신뢰 기반’ 인사 초광역 통합 시 교원들이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근무지 변경에 따른 생활권 변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강제 전보’ 방식에서 탈피한 혁신적인 인사 모델이 필요하다. ● 선택적 순환근무제의 명문화 광역 단위의 강제 전보를 금지하고, 본인의 동의를 필수로 하는 ‘선택적 순환근무제’와 ‘권역별 근무지 고정제’를 입법화하여 현장의 불안감을 해소해야 한다. ● 기피 지역으로의 전환(4대 핀셋 지원) 도서·벽지 등 기피 지역을 ‘기획지역’으로 재정의하고, 최신식 관사 제공(Housing), 조례 기반 통합특별수당 신설(Allowance), 자녀의 고교 진학 우선권 부여(Education), 희망 근무지 우선 배정권(Career) 등 파격적인 인센티브 패키지를 제공해야 한다. ● 지역 교육전문가 육성 신규 임용 인원의 10% 범위 내에서 지역 대학 졸업자 등을 선발하는 특별전형은 공정한 절차를 거쳐 준비해야 하며, 의무기간을 근무하게 함으로써 지역 밀착형 교육전문가를 육성해야 한다. ● 신규교사를 위한 새로운 인사 기준 마련 통합교육청이 출범한 이후 신규 채용되는 교사들을 위한 합리적인 인사 기준(전보·전직·승진 등)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이는 오랜 난제로 여겨졌던 승진 문제를 혁신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지방교육행정 체제의 개편 _ 슬림한 본청, 강력한 교육지원청 통합특별시의 출범은 교육행정 조직의 근본적인 재설계를 요구한다. 핵심 방향은 ‘이원화 책임제’의 도입이다. ● 현장 중심의 분권 통합특별시의 본청은 정책기획과 일반행정 총괄 업무로 기능을 슬림화해야 한다. 대신 교육지원청을 독립적인 지역 교육 집행 거점으로 삼아 인사와 예산에 관한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고, 교육장의 임기 보장 및 공모제를 통해 자율성을 강화해야 한다. ● 민주적 견제와 협력 이른바 ‘제왕적 교육감’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시민참여형 숙의기구를 설치하고, 주요 결정에 대한 재의요청권을 부여해야 한다. 동시에 교육청과 특별시청 간의 칸막이를 제거하기 위해 ‘공동협력국’을 설치하고, 형식적인 협의회를 의결기구로 격상시키는 실질적 융합이 필수적이다. 교육재정의 확충 _ 안정적 성장을 위한 기반 마련 모든 정책의 실행력은 예산에서 나온다. 초광역 행정통합이 교육의 하향 평준화가 아닌 상향 평준화로 이어지려면 별도의 재정 특례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 통합특별교육교부금의 설치 내국세의 일정 비율을 법정화한 ‘통합특별교육교부금’의 적정 비율을 결정하고, 교육 계정을 신설함으로써 특별시 교육의 안정적 운영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 ● 규제 철폐와 인센티브 통합 관련 인프라 사업에 대해 10년간 투자 심사 및 타당성 조사를 면제하고, 지방채 발행 시 이자 비용을 국가가 부담하는 등 과감한 재정적 레버리지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성공적인 정착을 위한 핵심 전략 초광역 행정통합은 단순히 행정구역을 합치는 과정이 아니다. 이는 우리 아이들이 태어난 곳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 지역사회의 인재로 성장하여 정착할 수 있는 ‘지역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다. 통합이 교원들에게 불이익이 아닌 새로운 성장의 기회가 됨을 제도로 증명해야 한다. 또한 권한을 학교와 현장에 대폭 이양하는 ‘분권’과 지자체-교육청 간의 실질적인 ‘융합’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미래 교육의 해답을 지역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입학은 곧 개인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인생 변수’가 되곤 했다. 고도 경제성장기에 대학 졸업자들은 큰 어려움 없이 직장을 잡았다. 그런 과정에서 교육이 한국 경제성장을 이끌었다는 ‘한국판 드라마’의 신화가 세계적으로 회자되었다. 한국 교육이 한 편의 ‘드라마’로 표현될 정도로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학교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경제 현장에서 효율적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한국 경제가 성장하지 못했다면, 교육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학교 문을 나선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아우성쳤다면,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말도, 대한민국에 대한 교육 찬사도 없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교육에 대한 칭송은 이제 드라마 전원일기 같은 추억일 뿐이다. 경제가 침체하고 사회적으로 일자리가 줄어들지만, 학교교육은 별반 바뀌지 않고 고학력자들이 끊임없이 양산된다. 전체 고졸자의 70~80%가 대학에 진학해 미래의 부푼 꿈을 설계하지만, 대학 문을 나서는 순간 냉혹한 현실을 마주한다. 4년제 대졸자가 좋은 직장은커녕 전문대 졸업자의 일자리를 빼앗고, 심지어 고졸자의 일자리마저 위협한다. 교육의 배신이자 교육의 실패다. 찬란한 교육 신화, 부모주의와 출세론 지금 대한민국은 ‘교육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우리 사회의 뜨거운 교육열은 교육을 통한 희망사다리 오르기로 상징되는 ‘교육 출세론’과 ‘부모주의(parentocracy)’가 결합한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학교에서는 칠판 하나만 놓고 가르쳐도 학생들이 넘쳐났고, 졸업장을 받은 청년들은 쉽게 취업하는 황금기가 있었다. 지금은 환경이 확 바뀌었다. 대졸자의 30~40%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그냥 쉬는 30대가 30만 9,000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국가데이터처, 12월 보도자료). 게다가 9급 공무원 시험에 외국 대학 유학파까지 응시하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교육의 실패이자 딜레마다.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 고등교육은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대학의 입학자원이 급감하고, 4차 산업혁명 등 국내외 환경 변화로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 특히 2021년 이후 대학 입학정원이 입학 가능 학생 수보다 커지는 역전 현상이 본격화하는 격변기임에도 현장의 발걸음은 더디다. “격변기에 가장 나쁜 일은 과거 방식을 갖고 대응하는 것(피터 드러커)”이라는 말처럼 우리 교육이 딱 그런 격이다. 왜 그럴까?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스무 번 가까이 칭송한 한국 교육의 우수성은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한국 교육은 우리가 못 살고 학교교육 환경이 엉망이었을 때는 ‘인기 드라마’를 방영했다. 반면 외국 대학도 부러워할 정도의 쾌적한 시설을 갖춘 대학이 많아진 현재는 ‘실패의 드라마’를 억지로 내보내고 있다. 초·중·고 교육은 대학 진학을 위한 관문이 된 지 오래다. 객관식 위주의 시험은 여전히 교실을 지배하고 커리큘럼 변화도 능동성이 떨어진다.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분들에게는 야박한 평가라서 송구하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교육은 여전히 딜레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학령인구가 줄어들어 대학 문턱이 낮아진다고 해도 상위권 대학에 대한 수요는 여전하다. 대학 수십 개가 문을 닫아도 소위 ‘SKY 대학’ 입시 경쟁률은 별로 완화될 것 같지 않다. 자녀를 한 명도 채 두지 않은 젊은 부모들은 자녀 교육비 지출을 줄이지 않을 것이고, 교육 출세론에 대한 ‘희망 고문’은 더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나쁜 일은 과거 방식으로 교육하는 것 그러면 한국의 고등교육은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고등교육이 변화하지 않으면 고3 담임은 계속 상위권 대학에 몇 명 진학시켰는지에 대한 평가 압박에 시달릴 것이다. 유능한 교사와 무능한 교사의 평가 잣대가 SKY 대학에 몇 명 진학시켰는지가 되는 한 우리 교육의 미래는 없다. ‘업적주의(meritocracy)’의 악령이다. 교육부가 대학 구조조정을 한답시고 정원 조정 개입→자율→방관→개입을 되풀이하는 사이 대학은 자강(自强) 능력을 잃고 ‘눈치 대학’으로 변질됐다. 대학구조개혁의 기본은 교육시장 원리에 따른 수요 공급과 수요자의 선택권 보장이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대학의 질(교육·연구·사회 기여도)이 좋아지는 데 전체 대학을 대상으로 한 획일적 평가나 나눠주기 지원은 바람직하지 않다. 고등교육기관 수를 장기적으로 최소 100개 이상 줄여 양적 팽창을 질적 팽창으로, 추격형 교육을 선도형 교육으로 바꾸는 파괴적 개혁이 절실하다. 그러나 지역 이기주의에 편승한 정치권의 입김에 대학구조개혁은 답보 상태다. 정치인들은 개별 대학의 지역사회 기여도와 경제적 비중에 대한 실증적인 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대학이 문 닫으면 지역 경제가 초토화한다”라는 말만 반복한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교육 수요자의 선택권과 대학의 성적표인 ‘교육 수요자 원칙’을 냉정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 신호탄을 국민이 세금을 대주는 국립대가 쏴야 한다. 고등교육 재편은 중등교육 변화의 상수 고등교육 재편은 곧 중·고교의 커리큘럼 변화와 교수법 변화와 맞물린다. 그런 만큼 신중해야 하고 수술 칼날은 예리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립대와 국·공립대 개혁을 ‘투 트랙’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국립대는 단계적으로 줄여 지역별로 통합해 광역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궁극적으론 ‘1도 1국립대’ 개편이 필요하다. 교육부가 대학을 인위적으로 손본다면, 국민 세금을 대주는 국립대를 우선 대상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서울대 10개 만들기’와 글로컬 사업 등으로 거점 국립대만 잔칫집이다. 선후가 틀렸다. 국립대 개혁의 필요성은 전공만 봐도 알 수 있다. 국립대는 살아남기 위해 전문대 전공까지 카피했다. 몇 년 전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에 의뢰해 근거 자료를 찾아본 결과 당혹스러웠다. 국·공립과 사립을 포함한 전국의 대학 중 114개 대학(원) 520개 학과(학부 307, 대학원 213)에서 전문대가 운영하는 학과를 중복 개설하고 있었다. 전문대가 처음 개설한 전공을 일반대학(대학원)이 카피한 경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안경광학·치위생·치기공·철도·물리치료·작업치료·방사선·뷰티·미용·응급구조·외식·조리·카지노·소믈리에·바리스타·반려동물·제과제빵 전공을 들 수 있다. 거점 국립대가 전문대 전공, 정책의 패러독스 2026년 현재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글로컬대학에 선정된 거점 국립대도 이 모양이다. 정책의 ‘빅 패러독스(Big Paradox)’다. 물론 국립대가 전문대와 통합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전공을 더 심화해 학문적으로 발전시키려는 계획도 있을 수 있다. 백번 양보해도 그건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문재인 정부의 유은혜 교육부 장관은 이런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는 20대 국회의원 시절 정책자료집(‘전문대학 10년의 변화와 박근혜 정부 전문대학 정책 진단’)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현행 법·제도 안에서는 4년제 대학의 전문대학 관련 학과 신설을 막기 어렵고, 오히려 확대되기 쉽다. 정부는 산업계에 대기업의 진출로 인해 중소기업 경영 악화 등을 막으려는 조치로 ‘중소기업 적합 업종제도’가 있듯이, 대학 교육에서도 전문대학만이 유지할 수 있는 학과를 법·제도적으로 보장해 전문대학이 ‘직업교육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은혜 전 장관은 물론 박순애 전 장관도, 이주호 전 장관도 고등교육 체질 개선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대한민국 교육의 실패이자, 교육부의 실패이고, 고등교육의 실패다. 대학을 나왔다고 사회가 양팔을 벌리고 환영하는 시대는 지났다. 전공과 기업 수요의 미스매치(mismatch)는 고사하고 절대적인 일자리 수가 부족해서다. 한국 교육이 쌓아온 찬란한 신화는 앞으론 향수가 될지도 모른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걸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가르치고 싶은 것만 가르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교육의 딜레마는 계속된다. 이제 딜레마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부도, 사회도, 기업도, 공무원도, 학교도, 학부모도 모두 생각을 바꿔야 한다. 디지털 전환(DX, Digital Transformation) 시대를 넘어 AI 중심의 인공지능 전환(AX, AI Transformation) 시대다.
학령인구 급감과 지역 소멸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전문대학이 새로운 생존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서울 중구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에서 만난 김영도 회장(동의과학대 총장)은 인터뷰 내내 ‘슈퍼 테크니션(고숙련 기술인)’과 ‘직업교육은 복지’라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그는 최근 미국 애리조나주립대(ASU)를 방문해 대학이 산업 인력을 책임지며 지역 혁신을 이끄는 모델을 직접 확인하고 돌아왔다. 4년제 대학보다 9% 이상 높은 취업률을 기록하며 실용 교육의 저력을 증명하고 있는 전문대학. 이제는 단순한 학위 기관을 넘어 인공지능(AI)시대를 선도하고 지방을 살리는 ‘평생 직업교육 플랫폼’으로의 대전환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 1월 애리조나주립대(ASU)를 방문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미국은 우주 산업 등 첨단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동시에 제조 현장의 숙련 기술 인력이 부족해 산업 생태계가 붕괴되는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업입니다. 설계 능력은 뛰어나지만 실제 배를 만들 인력이 없어 산업 경쟁력이 무너졌습니다. 반면 애리조나주는 사막이라는 불모지임에도 TSMC(220조 원 투자), LG에너지솔루션(4조 5천 억 원 투자) 등 거대 투자를 유치하며 지역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습니다. 이 기업들이 애리조나를 선택한 핵심 조건은 ‘안정적인 인력 공급’이었고, 그 역할을 ASU가 자임했습니다. 대학이 기업 유치 단계부터 ‘우리가 인력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하며 산업을 견인하는 구조를 만든 것입니다. 한국 전문대학도 지역 혁신의 중심에서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확신을 얻고자 현장을 찾았습니다.” ASU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ASU 측은 솔직했습니다. ‘우리는 연구 인력인 엔지니어는 양성하지만, 공정을 실제 운영할 테크니션과 오퍼레이터는 충분히 길러내지 못한다’라며 한국 전문대학의 현장 교육 역량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귀국하자마자 국내 전문대 12개교를 포함해 총 14개 대학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했습니다. ASU 총장과 제가 단체 대화방에서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협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선 테크놀로지 엔지니어링과 헬스케어 두 분야에서 교육콘텐츠를 공동 개발하고 공유할 계획입니다. 단순한 학생들 연수 수준을 넘어 공동 커리큘럼 설계와 인증 체계 구축을 통해 한국 직업교육 모델의 글로벌 확장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벌써 임기 1년 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성과를 꼽는다면. “규제 혁파를 통해 전문대의 지평을 넓힌 점을 꼽고 싶습니다. 임기 동안 성인 학습자 입학 정원 제한을 완화해 현장 인력이 언제든 학교로 돌아올 길을 열었고, 전문기술 석사 과정에 간호 분야를 포함시켜 고숙련 기술교육의 전 트랙을 완성했습니다. 이는 학문 중심의 석사 과정과는 다른 실증기술 연구·개발 및 사업화(R BD) 중심 과정입니다. 최근 영진전문대 전문기술 석사 졸업생이 창원폴리텍대 교수로 임용된 사례는 숙련 기술이 ‘설명 가능한 기술’로 정리돼 교육 현장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례입니다. 남은 임기에는 학사 학위 전공심화과정의 정원 제한(현행 20%)을 확대해 성인 학습자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직업교육의 법적 토대가 될 「직업교육법」 제정을 반드시 마무리하겠습니다.” 취임 초부터 「직업교육법」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데 이유가 궁금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직업교육은 특성화고(중등), 전문대(고등), 평생교육(고용부)으로 완전히 분절돼 있습니다. 특성화고 학생이 전문대에 진학해 숙련도를 높이려 해도 교육청의 ‘고졸 취업률’ 지표에 묶여 제도적 모순이 발생합니다. 「직업교육법」은 이 흐름을 하나의 연속된 트랙으로 묶고 국가의 책무를 명시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단년도 사업 중심이 아닌 지속 가능한 재정 지원 체계가 마련됩니다. 직업교육은 국가 산업 생태계를 지탱하는 핵심 인프라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식 도제교육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프랑스는 2018년 ‘직업 선택의 자유를 위한 법’을 통해 교육 바우처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국민 개개인에게 연간 500유로(약 75만 원) 상당의 계좌를 지급해 원하는 시기에 대학이나 도제학교(CFA)에서 기술을 배우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교육기관은 정부 공모가 아니라 학습자의 선택으로 평가받습니다. 우리도 공모 사업 위주 지원에서 벗어나 학습자 중심의 바우처 체계로 전환해 자율성과 책임성을 동시에 높여야 합니다.” “평생교육이 복지”라는 말씀도 그런 맥락인가요. “그렇습니다. 복지를 현금 지원으로만 생각하는데, 그것은 일시적 방편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복지는 개인이 다시 배워 스스로 자립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퍼주기식 복지가 아니라 교육을 통해 경제활동 기간을 늘리는 것이 ‘교육 복지’의 핵심입니다. 전문대는 이미 지역 주민 재도약을 위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습니다. 복지 예산의 일부를 평생 직업교육과 연계하고 전문대를 전 연령층이 드나드는 ‘커뮤니티 칼리지’로 공식화해야 합니다. 이것이 재정 부담을 줄이면서 개인의 존엄을 지키는 선진적 복지 모델입니다.” 경기 불황 속에서도 전문대 인기는 높습니다. 비결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최근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급여 격차가 줄거나 역전되는 사례가 늘면서 사회적 인식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블루칼라는 단순 노동자가 아니라 스마트 팩토리에서 로봇과 협업하며 공정을 관리하는 고난도 기술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알려지면서 전문대는 71%에 달하는 높은 취업률과 높은 입시 경쟁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 취업률은 4년제 대학보다 9% 이상 높고, 정시모집 지원율은 16대 1에 육박합니다.” 그러고 보니 전문대에서도 AI 활용 교육이 활발합니다. “전문대는 AI 알고리즘 자체를 연구하기보다는 AI를 실무에 접목해 생산성을 높이는 ‘활용 전문가’ 양성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종종 ‘서울대생을 이기는 셈법’을 이야기합니다. 학업성취능력이 7인 학생이 AI 활용 능력 10을 갖추면 7×10=70의 성과를 냅니다. 반면 학업성취능력이 10이라도 AI 활용 능력이 1이면 성과는 10에 그칩니다. 이제는 학벌이 아니라 AI 활용 역량이 성과를 좌우하는 시대입니다. 다만 AI 결과를 무조건 수용해서는 안 됩니다.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교육을 병행해 AI의 답을 검증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앞으로 대학 간 경계를 허물고 AI 실무 능력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인증제와 경진대회도 추진할 계획입니다.” 저출산과 지역 소멸 위기 속 생존 전략은 무엇입니까. “인구절벽은 위기이지만, 전문대에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자체와 지역 산업체가 인력난에 직면하면서 지역 밀착형 전문대의 가치가 높아졌습니다. 전문대는 4년제 대학보다 지역 정주 비율이 10%가량 높습니다. 지역에서 배워 지역 기업에 취업하는 ‘밀착형 인재’를 키우기 때문입니다. 라이즈(RISE) 체계 안에서 지자체가 정주 인프라를 만들고 대학이 교육을 공급하는 구조를 통해 지역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엔진이 될 것입니다.” 유학생 정책도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유학생 30만 시대지만 이제는 ‘왔다가는 유학’이 아니라 ‘정주하는 유학’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지역 중소기업과 산업현장에 활력을 불어넣을 정주형 인재가 필요합니다. 법무부와 협의해 ‘외국인 요양보호사 양성’ 제도를 공식화했고, 올해 3월부터 전국 24개 대학에서 첫 입학생을 받습니다. 전문대 유학생의 약 70%가 한국 정착을 희망하는 만큼, 교육부터 취업·비자 전환까지 책임지는 ‘정주 유학의 전초기지’가 되겠습니다.” 전문대에 대한 재정 지원은 충분하다고 보십니까. “초·중등 예산은 70조 원 규모지만, 고등교육은 15조 원 수준입니다. 전문대 예산은 9천억 원으로 1조 원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초·중등 예산은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에 따라 늘어나지만, 전문대는 16년간 등록금 동결로 재정난을 겪었습니다. OECD 국가와 비교하면 50%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고등직업교육 재정을 OECD 평균 수준으로 현실화하고 안정적인 재정 트랙을 마련해야 합니다.” 향후 10년, 전문대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전문대는 2~3년 학위기관이라는 인식부터 깨뜨리겠습니다. 청년부터 은퇴자까지 언제든 찾아와 마이크로 디그리나 자격과정을 이수하는 ‘지역의 평생 직업교육 플랫폼’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10년 뒤 전문대는 산업 경쟁력을 지탱하고 지역 정주를 이끌며 복지 기능까지 수행하는 국가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남은 임기 동안 그 제도적 기반을 닦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1913년 작품 색채 연구: 동심원이 있는 사각형(Color Study, Squares with Concentric Circles)은 각기 다른 색과 형태가 모여 이루는 조화를 담은 작품이다. 칸마다 담긴 원이 리듬처럼 어우러지며, 우리에게 편안한 울림을 전한다. 3월은 늘 ‘열림’의 설렘과 ‘낯섦’의 긴장을 동시에 준다. ‘추상미술의 아버지’ 바실리 칸딘스키가 1913년 캔버스 위에 수놓은 12개의 동심원은, 저마다 다른 빛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자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생명의 리듬이다. 칸딘스키에게 색채는 단순히 사물의 겉모습을 묘사하는 도구가 아니다. 그는 색을 ‘영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힘’이라 믿었다. 그에게 예술가란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가락이며, 색채는 그 피아노의 건반과 같다. 열두 칸의 사각형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듯한 동심원들은 관람객 마음의 건반을 두드리는 듯하다. 어떤 칸은 잔잔한 쉼표처럼, 어떤 칸은 강렬한 스타카토처럼 연주되면서 내면의 공명을 끌어낸다. 안락한 삶을 덮고 미지의 선율 속으로 칸딘스키의 인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시작’에 관한 서사이다.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서른 살의 나이에 교수직 제안까지 받았던 엘리트 학자였던 그는, 두 가지 운명적인 경험을 한다. 그리고 보장된 미래를 뒤로하고 독일 뮌헨행 기차에 몸을 싣고 떠난다. 첫 번째는 클로드 모네의 건초더미 연작을 마주한 일이었다. 우리가 알던 형태가 해체되고 오직 빛과 색채만이 남은 인상주의 작품을 보며, 그는 대상의 재현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인간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음을 느꼈다. 두 번째는 볼쇼이 극장에서 관람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이었다. 선율이 눈앞에서 색채와 선으로 흩어지는 공감각적(Synesthesia) 환영을 경험한 그는 음악에서 미술을 경험하며, 예술의 세계로 접어든다.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표현하는 공감각은 작품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3월의 문턱에서 칸딘스키와의 만남은 행운과 같다. 익숙한 세계를 떠나 새로운 삶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모두에게 꼭 필요한 용기를 주며 토닥토닥 지지해 주는 듯하다. 12개의 칸, 경계를 허물며 번져가는 생의 유동성 1913년에 제작된 색채 연구: 동심원이 있는 사각형은 사실 칸딘스키가 대중에게 보이기 위한 완성작이 아니라, 자신의 창작 과정을 조율하기 위해 작가들이 연구하고, 공부하는 일종의 습작이라 할 수 있다. 가로 31cm 남짓의 작은 종이 위에 수채·과슈·크레용이 뒤섞여 만들어낸 화면은 어지러운 듯하면서도 묘한 질서를 품고 있다. 작가는 12개의 사각형 그리드를 만들고 그 안에 동심원을 그려 넣었다. 하지만 이 선들은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매끄럽거나 계획적이지 않다. 붓질은 자유롭고, 때로는 다양한 호흡으로 작업한 듯, 작가의 감성이 남아 있다. 물감은 종이의 결을 따라 이웃한 칸의 경계를 침범하기도 한다. 작품 속의 원(Circle)들은 결코 정형화된 기하학적 형태가 아니다. 어떤 원은 옆으로 찌그러져 있고, 어떤 원은 배경색에 동화되어 형태의 경계가 모호하다. 빨간색은 노란색 옆에서 더 생동감 있고, 파란색은 보라색에 둘러싸여 깊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다. 이는 사물을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재현’의 의무로부터 예술을 해방시키려는 칸딘스키의 의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명이 가진 본질적인 ‘유동성’을 증명하는 행위다. 색채들은 서로 부딪히며 시각적 진동을 만들어내고, 그 진동은 마치 12개의 악기가 제각기 다른 선율을 연주하면서도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을 완성해 가는 과정과 유사하다. 여기서 원은 완결된 결과물이 아니라, 중심이면서 기초인 점에서 시작해 확장해 가는 듯하다. 점·선·면·형·색…. 언어에도 단어가 있어서 문장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듯, 시각 예술에서 이러한 조형의 요소는 소통의 기본 단위가 된다. 이를 유심히 관찰하고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사유하고, 나의 경험과 지식을 연결 짓는 것이 미술 감상의 방법이 된다. 이처럼 이 작품을 꼼꼼히 보면, 기본 요소가 다른 존재와 함께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하여 성장의 흔적 같기도 하다. 고정된 틀(Grid)은 존재하지만, 그 안을 채우는 생명력은 멈추지 않은 채, 화면 밖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듯하다. 불완전한 원들이 함께 그리는 우리 삶의 화음 이 작품은 오늘날 그의 어떤 대작보다도 현대인의 사랑을 받는 아이콘이 되었다. 미술사적으로 이 작품은 사물을 똑같이 그리는 것을 중시한 미적 가치인 ‘재현’의 의무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칸딘스키는 ‘모든 것은 하나의 점(dot)에서 시작된다’라고 설명하며, 점이 확장된 형태인 ‘원’을 우주의 신비와 끝없는 생명력을 담은 가장 완벽하고 평온한 형상으로 여겼다. 12개의 사각형 그리드(Grid) 역시 엄격한 틀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사각형을 담고, 작업을 할 때, 기울임·각도·방향을 안내하는 가이드라인이 된다. 얼핏 보면 차가운 이성의 틀처럼 보이지만, 그 안의 원들은 자유롭게 배치되어 완벽하지 않기에 오히려 삶의 본질적인 ‘유동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칸딘스키는 이 작은 칸 안에서 색채의 ‘진동(vibration)’을 실험하며, 마치 12개의 악기가 연주하는 다채로운 교향곡처럼 우리의 시각을 자극하고 청각적인 에너지를 준다. 칸딘스키의 불완전한 동심원은 3월이라는 새로운 계절을 통과하는 우리에게 담담한 의미를 전한다. 첫째는 우리의 ‘고유한 개별성’에 대한 긍정이다. 12개의 동심원은 단 하나도 같은 색 조합이나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다. 어떤 것은 정열적인 빨강으로, 어떤 것은 명상적인 파랑으로 각자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회라는 거대한 그리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역시 이와 같다. 우리의 삶 또한 타인의 잣대에 맞춘 완벽한 원이 되려 애쓰기보다 각자가 지닌 내면의 색채로 고유함을 추구하면 어떨까. 둘째는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조화’의 가치다. 칸딘스키의 실험이 보여주듯, 색채는 홀로 존재할 때보다 이웃한 색과 만날 때 생동감을 얻는다. 3월,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서 낯선 이웃들을 마주한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충돌하고 섞이며 예상치 못한 삶의 빛깔을 만들어내듯, 우리의 삶 역시 각자의 사회적 동심원을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올봄, 우리의 일상에 칸딘스키의 동심원처럼 찬란하고 역동적인 진동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프롤로그 멕시코시티 여행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영화 코코(Coco)였다. 화려한 색감 속에서 ‘죽음’마저 삶의 일부로 품어 안는 멕시코의 ‘죽은 자의 날(Día de los Muertos)’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 영화는, 죽음을 슬픔이 아닌 기억과 축제로 이어가는 문화를 인상 깊게 보여준다. 이러한 문화를 지닌 멕시코는 과연 어떤 나라일지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또 다른 큰 이유는 한국에서도 이미 일상적인 음식이 된 타코였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타코의 맛이 과연 ‘본연의 맛’일까 하는 질문이 늘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멕시코시티의 길거리에서 ‘진짜 타코’의 맛을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여기에 개인적인 역사적 호기심도 더해졌다. 미국 뉴멕시코주에서 여러 차례 마주했던 과달루페 성모상은 늘 인상적인 존재였다. 스페인 식민지 확산과 함께 북미 대륙으로 전파된 이 성모상의 기원지이자 기적의 장소를 직접 마주하고 싶다는 바람이 여행 동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 여행을 하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는 세계사 서술 속에서 자주 ‘공백’처럼 다뤄지는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문명이었다. 멕시코시티 근교에 위치한 테오티우아칸은 우리가 잊고 지내온 그 공백의 크기가 얼마나 클지 짐작하게 만드는 장소였다. 멕시코 최고의 박물관, 국립 인류학 박물관 멕시코시티 여행에서 시간이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이 박물관만큼은 반드시 1순위로 방문해야 한다. 멕시코 국립 인류학 박물관은 단순한 대표 박물관이 아니라, 멕시코라는 국가의 역사와 정체성을 가장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다. 1965년에 개장한 이 박물관은 풍부한 컬렉션으로 이름이 높다. 멕시코의 건축가 페드로 라미레즈 바스케스(Pedro Ramírez Vázquez)가 설계한 이 건물은 멕시코시티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박물관 중앙에 위치한 ‘분수 기둥’에는 멕시코 문화의 다양성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전시실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멕시코의 고대 문명이 현대와 단절된 과거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축적되어 왔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올멕(Olmec)의 거석 두상에서 마야(Maya) - 사포텍(Zapotec) -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 - 멕시카 문명으로 이어지는 전시는 멕시코 문명이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해 왔음을 보여준다. 박물관의 동선 자체가 하나의 역사 서술처럼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가장 오래 머문 공간은 아즈텍 문명실이었다. 이곳에 전시된 거대한 원형 석판 ‘태양의 돌’은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유물이었다. 태양의 돌은 태양신을 섬긴 아즈텍인의 우주관을 세밀하게 표현한 달력으로, 농경과 의식의 시기를 결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들의 달력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제5태양시대’는 2012년 12월 23일에 끝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태양의 돌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신전에 있던 것을 파괴한 뒤 소칼로 광장이 자리한 땅속에 묻었고, 이후 1790년에 발굴되었다. 인류학 박물관에 전시된 인신공양과 관련된 유물들은 처음에는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인신공양은 단순한 학살이 아니라 고도로 의례화된 행위였으며, 아즈텍 문명뿐만 아니라 여러 문명권에서 신성하고 명예로운 행위로 간주되었다. 이는 단순한 도구적 희생이 아니라, 공동체가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우주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상징적 실천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박물관의 가장 큰 가치는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을 ‘정복 이전의 미개한 문화’로 다루지 않는 데 있다. 옥수수 재배 도구, 천문학적 사고, 정교한 석조 기술은 이들이 이미 고도의 과학적 지식과 체계적인 세계관을 갖추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박물관을 나서며, 멕시코를 이해하고 싶다면 이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소칼로 광장, 템플로 마요르, 메트로폴리탄 성당 멕시코시티의 심장부인 소칼로 광장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한 광장이다. 아즈텍인들이 해발 약 2,400m의 호수 위 섬에 테노치티틀란을 세웠을 때부터 이곳은 거대한 신전이 자리한 도시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신전을 파괴하고 호수를 매립한 뒤 그 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면서, 오늘날의 소칼로 광장은 서로 다른 시대가 한 공간에 겹쳐진 장소가 되었다. 광장 한쪽에는 아즈텍 제국의 중심 신전이었던 템플로 마요르의 유적이 남아 있고, 바로 옆에는 스페인 식민 지배의 상징인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이 웅장하게 서 있다. 템플로 마요르는 국립 궁전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한 블록만 이동하면 만날 수 있다. 14~15세기에 걸쳐 단계적으로 축조된 이 신전의 높이는 약 40m에 달했으며, 꼭대기에는 전쟁과 태양의 신, 그리고 비와 다산의 신을 모시는 두 개의 신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복자들은 신전을 해체한 돌로 자신의 건축물을 세웠고, 현재는 도시 지하에 묻혀 있던 신전의 하단부만이 발굴된 상태다. 광장 북쪽에 자리한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은 아즈텍의 태양신 신전을 허문 자리에 세워진 건축물이다. 1524년 공사를 시작해 완공까지 240여 년이 걸린 이 성당에는 고딕·바로크·르네상스·네오클래식 등 다양한 건축 양식이 중첩되어 있다. 성당 내부를 둘러보면, 스페인이 이 땅 위에 새롭게 구축한 권력과 신앙의 질서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한 광장 안에서 무너진 문명과 새로 세워진 문명이 나란히 공존하는 모습은 멕시코 역사가 단절이 아닌 중첩과 충돌의 역사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멕시코를 상징하는 두 여인의 공간, 과달루페 성당과 프리다 칼로의 집 멕시코시티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나라의 정신을 형성해 온 두 여인의 공간이 존재한다. 하나는 집단의 신앙과 기억을 품은 과달루페 성당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고통과 예술로 시대를 증언한 프리다 칼로의 집이다. 이 두 장소는 멕시코라는 나라가 어떻게 형성되고, 무엇을 지켜 왔는지를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해 준다. 과달루페 성당은 멕시코인의 신앙과 역사가 만나는 가장 상징적인 장소다. 1531년, 원주민 농민 후안 디에고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스페인 가톨릭이 토착 신앙과 결합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때 성모가 자신의 모습을 증명하기 위해 후안 디에고의 틸마(망토)에 남겼다고 전해지는 성화는 오늘날까지도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성물로 모셔져 있다. 이 그림 속 과달루페 성모는 백인 여성의 모습이 아니라 갈색 피부와 토착적 얼굴을 지닌 원주민의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문화 융합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는 과달루페 성모는 라틴아메리카와 과거 멕시코 영향권에 있었던 미국 일부 지역의 성당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한편 코요아칸에 위치한 프리다 칼로의 집은 멕시코 국보급 화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이다. 이 푸른 집은 프리다 칼로가 태어나고 살아가며 결국 생을 마감한 장소로, 그의 삶 자체가 전시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프리다는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았고, 10대 시절 교통사고로 평생 지워지지 않는 육체적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다. 수십 차례의 수술과 침대에 누운 채 보내야 했던 시간 속에서 그는 자신의 몸과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림을 그렸다. 멕시코의 또 다른 국보급 화가로 평가받는 남편 디에고 리베라와의 불화 또한 예술로 승화시켰다. 집 곳곳에 남아 있는 칼로의 삶의 흔적들은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삶과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해 주었다. 비밀스러운 공간, 테오티우아칸 멕시코시티에서 약 40km를 이동해 테오티우아칸에 도착하자, 도시의 소음은 사라지고 압도적인 공간감이 펼쳐졌다. ‘신들의 도시’라는 이름처럼 이곳은 인간이 만든 공간이면서도 인간을 압도하는 규모를 지니고 있다. ‘죽은 자의 길’을 따라 태양의 피라미드와 달의 피라미드, 거대한 제의 공간이 일직선으로 배치된 모습은 치밀한 도시 계획의 결과다. 테오티우아칸은 기원후 1~6세기경 번성한 대도시로, 당시 인구는 수십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거 구역과 종교 공간이 명확히 구분된 이 도시는 단순한 종교 중심지를 넘어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아직 이 도시를 건설한 주체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이 여전히 ‘미해결의 역사’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피라미드 위에 서서 내려다본 광활한 유적은 세계사에서 종종 잊혀 온 공백이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을 조용하지만 강하게 일깨워 주었다. 유적을 둘러본 뒤 방문한 동굴 식당에서의 식사는 여행의 또 다른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자연 그대로의 동굴 공간에서 맛본 전통 멕시코 음식은 이 땅의 지리와 역사, 그리고 식문화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실감하게 했다. 석회암 동굴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이어진 식사는 멕시코라는 공간이 과거와 현재, 자연과 인간의 삶을 어떻게 겹겹이 품고 있는지를 몸으로 느끼게 해 주는 경험이었다. 에필로그 여행을 돌아보니, 멕시코시티는 본문에 담은 장소들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도시였다. 오히려 글에 미처 담지 못한 장면들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영화 코코를 떠올리게 했던 중앙우체국(팔라시오 포스탈)은 행정 공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일상의 공간마저 예술로 완성하는 도시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겼다.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자 멕시코의 국민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 역시 이 도시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벽화는 미술관을 넘어 도시 곳곳에서 멕시코의 역사와 노동, 혁명을 기록하고 기억해 낸다. 소우마야 미술관의 컬렉션들도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여 예술의 도시 멕시코시티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 끼니 먹었던 타코의 맛은 멕시코의 생활과 역사를 맛보는 경험처럼 느껴졌다. 이전에 먹었던 타코는 타코가 아니었다는 결론과 함께 말이다. 여행은 어떤 기억보다 음식이 남기는 미각의 기억이 가장 오래 지속되는 것 같다. 음식이 곧 여행이고, 여행은 곧 음식임을 이번 여행에서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는 600여 명의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핵심 주인공을 꼽자면 당연히 서희와 길상이고 그중에서도 ‘원픽’을 하라면 서희일 수밖에 없다. 소설은 서희가 다섯 살인 1897년 한가위에서 시작해 1945년 쉰세 살에 해방 소식을 듣고 감격에 겨워 해당화 가지를 잡고 주저앉는 장면으로 끝나고 있다. 서희는 어려서 어머니 별당 아씨가 머슴 구천이와 야반도주하면서 외롭게 자라고, 아버지 최치수마저 재산을 노리는 김평산·귀녀 무리의 음모에 빠져 목 졸려 죽는다. 유일하게 남은 할머니 윤씨 부인도 1902년 호열자가 대유행할 때 세상을 뜬다. 최참판댁에 열 살짜리 여자애 하나만 남은 것이다. 그런 서희를 작가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미인으로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은 유명희, 유인실, 봉순이도 미인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서희 미모에 대한 묘사가 압도적으로 많고 아름답게 그리기도 했다. 그런 만큼 서희를 꽃에 비유하는 대목도 많다. 대략 추려도 개나리·연꽃·매화 등을 꼽을 수 있다. 서희의 꽃, 개나리·연꽃·매화 서희 미모는 어머니 별당 아씨를 닮았다. 서희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별당 작은 연못에 얼굴을 비추어본다. 이때 서희는 ‘한 송이 연꽃’ 같았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서희는 허리를 굽혀 연못가에 얼굴을 비춰본다. 옥같이 맑은 조그마한 얼굴이 물 위에 뜬다. 한 송이 연꽃같이 보인다. 그러나 서희는 어머니의 얼굴로 본다. 길상이는 최참판댁 머슴이지만 서희가 용정으로 피신하고 거기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다 서희의 마음까지 얻어 혼인하는 인물이다. 길상이가 열여섯 살 때, 그러면 서희는 아홉 살일 때 길상이는 김 훈장댁에서 막 피기 시작한 개나리를 한 아름 꺾어다 서희에게 준다. 이 대목을 처음 읽을 때 꺾은 개나리를 봉순이에게 주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서희한테 주었다. 주인과 머슴이라는 신분 차이가 엄연했으니 연정까지는 아니겠지만, 서희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싹트고 있었음을 작가가 암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토지를 다 읽고 보니 일종의 복선이었다. 대문을 나선 길상이는 곧장 돌아갈 판인데 문이 열려져 있는 사랑 마당 쪽으로 눈이 갔다. 햇볕 바른 곳이어서 그랬던지 별당 뜰의 개나리는 움이 트고 있을 뿐인데 그곳의 개나리는 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옳지. 저걸 꺾어서 애기씨한테 드려야지. 방에 두믄 곧 꽃이 필기다.” 길상은 서슴없이 들어가서 조심성 없게 꽃가지를 우직우직 꺾는다. …(중략)… “얻었나?” 노려보는 서희 눈초리에 길상이는 감히 제 마음대로 꺾어왔다는 말은 못 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어서 방에 꽂아라. 따신 방에 두믄 꽃이 필 기다.” 봉순이 꽃을 받아 안았다. 그러더니 꽃가지 속에서 필 듯 말 듯한 꽃 한 가지를 꺾은 봉순이는 서희 귀밑머리에 꽂아주면서 “애기씨 참 예쁘요”하고 웃었다. _ (3권) 마침 서희는 당시 아버지 최치수에 대한 상복을 막 벗은 때였다. 1부가 끝날 즈음, 그러니까 용정으로 떠나기 직전에는 서희를 꽃 중의 꽃인 매화에 비유한다. 머리를 엮어 내리는 하얗고 가는 손, 그것은 마물 같고 열 손가락에 오목오목하게 박힌 손톱은 이른 봄날에 날아내리는 매화꽃이파리 같았다. 거울을 보기 위해 검은 눈동자는 한켠으로 몰리었고 흰자위가 넓어진 얄팍한 눈매가 몹시 아름답다. 길게 찢어져서 확실한 골을 이룬 눈꼬리도 또렷한 윤곽과 더불어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_ (4권) 작가는 정말 공을 들여 서희의 아름다움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서희는 미모만 빼어난 것이 아니다. 제 나이를 넘어서는 명석함이 있었고, 아버지와 할머니 등의 죽음으로 조숙했으며, 한서 등 책을 읽어 총명함까지 갖춘 여인이다. 그런 서희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 때가 두어 번 있다. 그중 하나가 길상에게 청혼할 때다. 서희가 신분 차이를 넘어 길상이와 결혼을 생각했을 때 길상이는 피하려고 했다. 이런 길상이의 태도는 서희의 자존심을 짓밟는 것은 물론이다. 두 사람은 용정으로 돌아오는 마차가 계곡에서 뒤집히는 사고로 서희가 크게 다치는 것을 계기로 혼인에 이른다. 이처럼 작가는 서희에게 개나리·연꽃·매화 등 아름다운 꽃들을 차례로 선사하고 있다. 그중에서 개나리는 유년의 서희 꽃으로, 아직 어린 서희와 길상이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적격인 것 같다. 해당화도 서희의 꽃 중 하나다. 작가는 서희가 어릴 적 해당화 꽃잎을 갖고 노는 장면을 여러 번 그렸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도 서희가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에 겨워 해당화 가지를 잡고 주저앉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우리나라 특산이지만 자생지 못 찾아 개나리는 진달래와 함께 초봄 가장 먼저 피어 봄이 오는 것을 알리는 꽃이다. 3월이면 전국이 노란 물로 든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개나리꽃으로 뒤덮인다. 학명이 ‘Forsythia koreana’로, 학명에도 한국 특산이라는 점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그런데도 아직 국내에서 개나리 자생지를 찾지 못한 나무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밝혀낸 자생지는 모두 산개나리 자생지일 뿐 개나리 자생지는 한 군데도 없다. 산개나리는 개나리처럼 가지가 아래로 처지지 않고 잎 뒷면에 털이 있는 점이 다르다. 일년생 가지가 개나리는 녹색, 산개나리는 자주색을 띠는 것도 다르다. 이른 봄 개나리 비슷하게 노란 꽃이 피는 나무가 있는데 영춘화(迎春花)다. 이름 자체가 ‘봄을 맞이하는 꽃’이란 뜻이다. 자라는 모양이나 크기가 비슷해 멀리서 보면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개나리와 닮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춘화를 보고 흔히 개나리가 피었구나 생각하고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개나리보다 보름쯤 먼저 피고, 꽃잎이 대개 6개로 갈라지는 점이 다르다. 개나리는 4개로 갈라지는 꽃이다. 개나리는 우리 토종인 데 비해 영춘화는 중국 원산으로 관상용으로 들여와 심은 것이다. 하얀 꽃이 피는 개나리처럼 보이는 나무도 있다. 바로 미선나무다. 미선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1속 1종 희귀 식물이다. 미선나무는 열매의 모양이 부채를 닮았다고 부채 선(扇)자를 써 미선(尾扇)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희귀 식물이지만 요즘엔 증식을 통해 많이 퍼져서 수목원은 물론 고궁이나 공원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 한국 영화는 없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와 봉준호 감독의 미키17 모두 국제장편영화상 부문 후보에 지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9년,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두고 “국제적인 영화제가 아니라 로컬 시상식”이라고 ‘위트 있게’ 말하긴 했지만, 씨네필은 물론 전 세계 영화인이 가장 기다리는 시상식이기에 유독 아쉬운 2026년이다. 그래도 별들의 전쟁이 궁금한 마음은 그대로다. 3월 15일 ‘ABC TV’와 ‘Hulu(훌루)’를 통해 생중계되는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릴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시상식 전 주요 부문 후보자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최고의 영예, 작품상과 감독상 씨너스: 죄인들, 원 배틀 애프터 어너더, 햄넷 3파전 작품상 후보는 10편이다. 평단 반응과 해외 매체 보도를 종합하면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씨너스: 죄인들과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원 배틀 애프터 어너더의 치열한 맞대결로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먼저 씨너스: 죄인들은 1930년대, 시카고 갱단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쌍둥이 흑인 형제가 끝내주는 술집을 여는데, 처음 문을 여는 날 불청객, 무려 뱀파이어들이 찾아오며 하룻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아카데미 주요 부문인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남우조연상·여우주연상·각본상은 물론, 촬영·편집·미술·의상·분장·음향·시각효과·음악·주제가상과 올해 신설된 캐스팅상 후보까지 16개 부문에 이름을 올려, 기존 14개 부문에 후보를 올렸던 라라랜드(2016), 타이타닉(1997), 이브의 모든 것(1950)의 최다 후보 기록을 갈아치웠다. 블랙팬서 1·2편을 연출한 라이언 쿠글러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통상 공포영화 장르에 인색했던 아카데미가 끈적한 블루스 음악을 휘감은 뱀파이어 호러영화를 주요 부문에 올린 것 자체가 상당히 파격적으로 느껴진다. ‘아이맥스관 필람 영화’로 불리는 원 배틀 애프터 어너더 역시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면서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 영화는 혁명을 꿈꿨던 젊은 시절을 감춘 채 망가진 삶을 살던 아빠가 자신의 딸을 납치한 16년 전의 숙적 ‘록조’ 장군을 쫓는 추격 블록버스터다. 영화 후반부 물결처럼 굽이치는 구간에서 펼쳐지는 클라이맥스 카체이싱 장면은 스턴트·CG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롤러코스터에 앉은 듯한 영화적 쾌감을 선사한다. 딸을 찾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변태’ 숙적 역은 대체 불가 연기파 배우 숀 펜이 맡아 완벽한 연기 변신을 보여준다. 아직 국내 개봉 전인 클로이 자오 감독의 두 번째 영화 햄넷도 강력한 수상 후보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 작품상·여우주연상 수상을 포함해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67관왕이라는 기록을 세우고 있다. 영화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영국인의 사랑을 받는 불멸의 작가 셰익스피어의 숨겨진 이야기다.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온 ‘아녜스’는 마을에 새로 온 교사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이루지만, 갑자기 찾아온 비극으로 두 사람은 삶의 이유를 상실하는 고통에 몸부림친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를 극복하려 애쓰는데, 그 과정에서 세기의 비극 햄릿의 서사가 피어오르게 된다. 전작 노매드랜드로 제93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이후 연속 수상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 외에도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를 그리스 거장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리메이크한 부고니아, 믿고 보는 제작사 A24의 마티 수프림(감독 조쉬 사프디), 브라질 출신 거장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감독의 시크릿 에이전트, 현시대 청년들의 일상과 욕망을 초현실적으로 다루는 덴마크 출신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센티멘탈 밸류, 브래드 피트의 건재함을 알린 조셉 코신스키 감독의 F1: 더 무비도 작품상을 놓고 경쟁한다. 지난해 작품상 부문에 한 편도 올리지 못했던 넷플릭스는 기차의 꿈(감독 클린트 벤틀리)과 프랑켄슈타인(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두 편을 후보에 올렸다. 감독상에는 씨너스: 죄인들의 라이언 쿠글러, 햄넷의 클로이 자오, 마티 슈프림의 조쉬 사프디, 센티멘탈 밸류의 요아킴 트리에 감독이 이름을 올려 5파전이지만, 사실상 원 배틀 어너더로 트럼프 시대를 풍자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에 대한 호평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이다. 아직 아카데미 무관의 거장이라는 점도 그의 감독상 수상 예측에 힘을 싣는다. 가장 치열할 남우주연상은 5강전! 티모시 샬라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마이클 B. 조던, 에단 호크, 바그너 모라 올해 가장 치열한 경쟁을 벌일 남우주연상에서는 마티 슈프림에서 괴짜 사기꾼 탁구 선수로 완벽 변신한 티모시 샬라메의 수상이 유력해 보인다. 지난해 컴플리트 언노운에서 젊은 시절 밥 딜런의 모습을 완벽히 소화해 작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의 강력한 후보였지만, 이민 예술가의 고독과 광기를 표현한 브루탈리스트의 에이드리언 브로디에게 아쉽게 트로피를 넘겨줬다. 2018년 스물두 살 나이에 출연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필두로, 지난 8년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로만 3차례 노미네이트되는 기록을 세운 티모시 샬라메가 세 번의 도전 끝에 트로피를 거머쥘 수 있을지 이목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오스카 전초전으로 불리는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 영화 부문과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잇따라 수상하며 아카데미 수상에도 청신호가 켜졌다는 평이다. 통산 여섯 번째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2016년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첫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지 꼭 10년 만에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로 다시 후보에 올랐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전작 크리드 1·2편에서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마이클 B. 조던이 씨너스: 죄인들에서 쌍둥이 형제 ‘스택’과 ‘스모크’를 소름 끼치는 1인 2역 연기를 선보여 남우주연상 후보로 지명됐고, 비포 썬라이즈,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시리즈의 주인공 에단 호크가 블루 문으로 배우 커리어상 최초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티모시 샬라메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시크릿 에이전트로 인생 연기를 선보이며 지난해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바그너 모라라는 예측이다. 1970년대 후반 브라질 군사 독재 시절, 고향으로 돌아온 한 남자가 실종된 어머니의 기록을 더듬으며 아들과 재회하는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로, 바그너 모라는 브라질 남자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안타깝게도 마티 슈프림과 시크릿 에이전트는 국내 미개봉 상황이다. 둘 중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되는 영화는 극장가에서 ‘아카데미 특수’를 누릴 것으로 보인다. 레드카펫의 주인공 여우주연상 제시 버클리, 로즈 번, 레나테 레인스베, 엠마 스톤 여우주연상은 햄넷에서 셰익스피어의 아내 역할을 맡아 섬세한 연기를 보여준 제시 버클리의 수상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이미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유력 수상 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부고니아에서 피칠갑에 삭발 투혼까지 선보이며 외계인 역할을 소화해 낸 엠마 스톤이 이번에 수상할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오기 때문이다. 육아로 번아웃이 오면서 삶이 붕괴되는 엄마의 모습을 섬뜩하게 그려낸 다리가 있다면 너를 걷어찰 거야(감독 메리 브론스타인)에서 엄마 역을 맡은 로즈 번은 다크호스다. 베를린영화제는 “로즈 번이 인생에 남을 연기 퍼포먼스를 보였다”고 평하며 은곰상을 안겼기 때문이다. 재밌는 점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아카데미 시상식 사회를 맡는 코난 오브라이언이 주연급 상대 배우로 출연한다는 점이다. 영화감독 아버지와 두 딸이 영화 한 편을 계기로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과 서로를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센티멘탈 밸류에서 딸 역을 맡은 레나테 레인스베도 숨은 강자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전작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서 한 번 호흡을 맞췄는데, 두 번째 영화로 아카데미 시상식의 문을 두드렸다. 재밌는 점은 요아킴 트리에와 레나테 레인스베의 열혈 팬으로 알려진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를 통해 “2025년 최고의 영화를 딱 한 편 꼽으라면 센티멘탈 밸류일 것이다. 레나테는 영화를 위해 태어난 얼굴과 재능을 지닌 배우로, 누구든 숨이 멎을 만큼 압도한다. 나는 그가 화면 속에서 보여준 연기들 때문에 혈압이 치솟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그는 영화의 천국이 내려준 선물이다”라고 극찬했다는 점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장편애니메이션상 받을까? 아르코, 리틀 아멜리, 엘리오, 주토피아 2 장편애니메이션 분야에서 한국 관객의 최대 관심사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감독 메기 강)의 수상 여부다. 장편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는데, 골든글로브 어워즈에서 두 부문 모두 수상하며 2관왕에 올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수상 기대를 높인다. 하지만 경쟁작들이 만만치 않다. 먼저 제49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2관왕을 차지하며 평단의 극찬을 받은 아르코(감독 우고 비엔베누)의 수상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로부터 ‘2D 애니메이션의 한계를 부순다’라는 극찬을 받은 아르코는, 배우 나탈리 포트만이 제작과 목소리 연기에 참여해 화제가 됐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사이 누나의 무지개 망토를 훔쳐, 서기 2932년에서 2075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소년 아르코가 매일 태풍이 몰아치는 잿빛 지구에서 살고 있는 아이리스를 만나게 되고, 그런 아르코를 뒤쫓는 미스터리한 삼 형제와의 추격전이 주 스토리라인이다. 역시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고, 제28회 칸영화제 특별 상영 부문에 초청된 리틀 아멜리(감독 메일리스 발라데·리안 조 한)도 눈길을 끈다.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를 신이라고 믿은 엉뚱한 세 살 소녀 아멜리가 세상의 사계절을 마주하며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를 오색찬란하고 따뜻한 파스텔톤으로 그려냈다. 영상미와 완결성이 돋보이는 애니메이션들도 있지만, 국내 830만 관객을 동원한 주토피아 2와, 외톨이 소년과 외계생명체의 만남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담은 엘리오 역시 후보로 경합한다. 아직 못 본 영화 혹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극장을 찾아 아카데미 수상 결과를 예측하며 작품의 감동까지 미리 만끽할 수 있다. 롯데시네마에서는 3월 10일까지 ‘2026 아카데미 기획전’을 연다. 음향특화관인 ‘광음시네마’와 ‘광음LED’에서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시라트, 씨너스: 죄인들 등 10편을 상영해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하고 수상작 예측 이벤트도 진행한다. CGV도 ‘2026 아카데미 기획전’을 열어 13편의 주요 작품을 상영한다. 광화문에 위치한 국내 예술영화관 대표 주자 씨네큐브에서도 3월 24일까지 ‘씨네큐브 2026 아카데미 화제작 열전’을 개최한다.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도 13편을 상영하는 특별전을 연다. 사진 제공 ● 네이버 영화,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사진진, 유니버설 픽처스, 찬란, 판씨네마, A24, CJ ENM
국평의 세대교체, 34평보다 더 잘나가는 24평의 질주 국평은 ‘국민평형’의 줄임말로서, 가장 많은 사람이 선택해 온 대표적인 주거 면적을 말한다. 과거에는 전용 84㎡, 즉 34평이 4인 가구 주거의 표준이었기만, 최근 이 견고했던 공식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집값은 크게 상승했고, 주거환경과 삶의 방식도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넓은 집’이 곧 ‘좋은 집’이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으며, 이제 주거 선택의 기준은 면적이 아니라 입지와 땅의 가치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24평이 있다. 과거에는 34평으로 가기 전 거쳐 가는 평형, 혹은 불가피한 선택지로 인식되던 24평이 이제는 당당한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2021년 부동산 가격이 한차례 폭등한 이후 24평의 강세가 점차 뚜렷해졌으며, 주요 재건축 단지와 신축 분양 현장에서 24평의 청약 경쟁률이 34평을 상회하는 현상이 지속되면서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인구 구조 변화에 따른 라이프 스타일의 전환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24평 선호 현상을 1~2인 가구 급증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설명한다. 이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부족한 설명이다. 인구 구조 변화는 분명 24평 수요를 키운 배경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가구원 수의 감소만으로 특정 평형이 주류가 되지는 않는다. 같은 1~2인 가구라도 소득 수준, 직업 안정성, 주거 인식에 따라 더 넓은 공간에서 더 여유롭고 쾌적하게 생활하고자 하는 욕구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1~2인 가구의 증가는 24평이 시장에서 더 주목받도록 하는 방아쇠 역할을 했을 뿐, 24평을 대세로 만든 결정적 요인이라 보기는 어렵다. 24평이 대세가 된 진짜 이유를 살펴보자. ● 이유 ❶ _ 높아진 시세에 따른 매매가의 상향평준화 가장 큰 이유는 ‘가격’이다. 단순히 ‘조금 비싸졌다’는 수준이 아니라, 주택 가격 자체가 한 단계 위로 올라가며 절대적인 부담 구간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같은 입지 안에서 24평과 34평의 가격 차이가 ‘조금 더 보태면 갈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대출을 최대한 활용해도 34평은 접근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부동산 시장 내에서 구조적인 선택의 문제다. 여기에 대출 규제와 금리 부담이 더해졌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와 더불어 6.27 대책 및 10.15 대책의 영향으로 대출 한도가 묶이면서, 레버리지를 활용한 상급지 진입이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자산가치가 높은 ‘똘똘한 한 채’를 선호하는 트렌드와 맞물리며, 24평은 ‘무리를 해서라도 접근 가능한 마지막 평형’으로 인식되고 있다. ● 이유 ❷ _ 감가상각되는 면적의 가치, 희소성이 부각되는 입지의 가치 2006년에서 2007년 사이, 이른바 ‘버블세븐’ 시기에는 강남의 34평을 팔고 용인·파주·고양 등 외곽의 50~60평대 대형 아파트로 옮겨가기도 했다. ‘강남 30평대 살 돈이면 용인에서 대궐 같은 60평에 살면서 외제차 굴리면서 살 수 있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외곽의 대형 평형은 매수세가 끊겼고, 하락폭은 컸으며, 회복은 느렸다. 주거 쾌적성의 가치는 면적이 크게 좌우했지만, 자산 가치는 면적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교훈을 준 사례이다. 현재 부동산 시장 트렌드는 면적보다 입지를 우선한다. 출퇴근 시간, 생활 편의성, 자녀 교육환경, 여가 활용 등 삶의 질 전반을 고려할 때, 넓은 면적보다 상급 입지가 주는 효용이 더 크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강남구 ‘대치 2단지’ 21평과 용인시 ‘신봉LG자이 1차’ 50평의 가격 흐름은 부동산 시장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면적보다 입지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핵심지의 토지 가치는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상승하며, 아파트가 노후화되더라도 가격 하락으로 직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땅의 가치가 건물의 노후화를 상쇄하며 전체 가격을 끌어올리는 구조이다. 반면 외곽의 아파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건물의 노후화가 그대로 가격에 반영된다. 대형 평형이라는 면적의 프리미엄 또한 점차 희석된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을 지탱하는 힘은 ‘얼마나 넓은가’가 아니라 ‘어디에 있는가’로 이동하게 된다. ● 이유 ❸ _ 면적보다 입지 상향을 더 추구하는 최근의 경향 이제는 더 넓은 집을 위해 입지를 포기하던 과거와 달리, 평형을 줄이더라도 한 단계라도 더 나은 입지로 이동하려는 ‘평형 축소, 입지 상향’ 선택이 보편화되고 있다. 한 번에 상급지로 진입하려는 이유는 명확하다. 중·하급지는 상급지보다 조정기나 하락기에 먼저 수요가 이탈하며, 상승기에도 가격 상승이 더 뒤처지기 때문이다. 여러 번의 부동산 시장 사이클을 거치며 학습한 결과이다. 그래서 요즘엔 애매한 중간 정차지를 들르지 않고 한 번에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최상급 입지’로 들어가려고 한다. 강동구나 동작구의 30평대를 가려던 사람은 송파구의 20평대로, 용인이나 수원의 30평대로 가려던 사람은 영등포구나 서대문구의 20평대로 눈을 돌린다. 또한 중간 정차지에 머무르는 동안 발생하는 기회비용도 무시할 수 없다. 가격이 정체된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상급지는 이미 한 단계 위의 가격대로 이동해 버리는 경우가 잦다. 결국 다시 갈아타려 할 때는 더 큰 자금 부담을 감수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거래비용과 세금 부담까지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그래서 요즘의 전략은 ‘조금 넓게 살다가 옮기자’가 아니라, ‘지금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먼저 자리 잡자’이며, 이 전략의 현실적 평형이 바로 20평대, 그중에서도 24평인 것이다. ● 이유 ❹ _ 24평의 뛰어난 환금성과 수익률 24평은 실거주와 투자 수요가 동시에 겹치는 평형이다. 1인 가구, 신혼부부, 맞벌이 부부는 물론이고, 초등 자녀를 둔 소가구까지 폭넓게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월세 수요가 모두 안정적으로 형성되며, 공실 리스크가 낮고 회전율이 빠르다. 가격 변동 국면에서도 24평의 특성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락기에는 상대적으로 가격 조정 폭이 제한된다. 절대 가격이 낮고 수요층이 두터운 만큼, 매수 대기 수요가 빠르게 유입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락을 거친 이후에 34평 대비 24평이 먼저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상승기에는 가벼운 몸집 덕분에 가격이 민첩하게 반응하며 빠르게 치고 올라간다. 이른바 ‘하락기에는 강하고, 상승기에는 빠른’ 구조다. 성동구 행당동 ‘행당한진’ 사례만 봐도 25평의 상승률이 32평보다 16%나 더 높게 나타나는 등 소형 평형의 수익률 강세는 뚜렷하다. 이러한 흐름은 특정 단지에 국한된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다. 실제로 서울과 수도권의 다수 단지에서 20평대가 30평대보다 더 높은 상승률을 기록한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4평 시대의 생존전략 _ ‘어떤 24평’을 골라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시장 환경 속에서 어떤 24평을 선택해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모든 24평이 같은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평형’이 아니라 ‘조건’을 기준으로 선별해야 한다. 지금의 시장에서는 작은 차이가 자산의 격차로 확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 입지와 타협하지 말자 24평을 선택하는 이유는 입지 상향이다. 따라서 직주 접근성, 역세권, 학군, 생활 인프라 중 최소 두 가지 이상을 동시에 충족하는 위치여야 한다. 단순히 상급지의 변두리가 아니라, 동일한 생활권으로 인식되는 범위에 포함되어야 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교통 인프라를 통해 실질적으로 연결된 생활권이어야 한다. ● 핵심 수요층이 두터운지를 보자 24평의 핵심 수요층은 영유아를 둔 신혼부부 수요에서 나온다. 따라서 신혼부부가 ‘조금 무리해서라도 사고 싶어질 만한 입지인가’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사례가 바로 ‘용인 수지’다. 신분당선이라는 강력한 교통축을 갖추고 있고, 학군과 생활환경도 우수하기 때문에 초등 자녀를 둔 부모 입장에서는 괜찮은 선택지가 될 수밖에 없다. 특히 분당으로 바로 진입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수요가 대기 수요로 머물기 좋은 입지라는 점에서 24평 수요가 집중될 수밖에 없는 곳이다. ● 최상급지라면 10평대도 고려하라 자산가치에 더 무게를 둔다면 10평대도 고려해 볼만하다. 30평대에서 20평대로 줄이며 한 차례 입지 점프를 했다면, 20평대에서 10평대 후반으로 다시 줄이면서 한 번 더 입지를 끌어올릴 수 있다. 물론 10평대 평형에서는 주거 편의성이나 공간 활용 측면에서 감수해야 할 불편은 존재하지만, 그 대가로 최상급지 일부 지역에 접근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열린다. 대표적으로 강남·송파·분당의 10평대 아파트를 들 수 있다. 이들 지역의 소형 평형은 수요가 꾸준하고 희소성이 높아, 실제로는 웬만한 20평대보다 더 큰 폭의 가격 상승을 보여온 사례가 많다. 다만 10평대라는 협소주택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주택 대비 더 큰 자산가치 상승을 기대하려면, 소형이라는 한계를 상쇄할 수 있는 최상급지 내에서만 선별해야 한다. 앞으로의 시장, 여전히 강소주택이 대세가 될 것인가? 앞으로의 부동산 시장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크기’가 아니라 ‘가치’다. ‘어설픈 입지의 넓은 집’보다 ‘상급지의 알찬 소형 주택’을 선택하는 흐름은 이미 시장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단순한 선호 변화가 아니라, 여러 차례의 시장 조정을 거치며 검증된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라 볼 수 있다. 따라서 강소주택의 강세는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하나의 뉴노멀(New Normal)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다. 자산 방어력과 환금성, 그리고 수요의 지속성을 함께 고려하면 평형을 키우는 전략보다 입지를 끌어올리는 선택이 구조적으로 유리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미래의 부동산 승자는 ‘평수’라는 숫자에 매이지 않고, 소득 수준이 높은 수요층이 기꺼이 선택하는 ‘강한 입지’를 선점한 사람의 몫이 될 것이다. 이런 변화의 연장선에서 과거 30평대가 상징하던 ‘국민평형’의 기준 역시 재편되며, 앞으로는 24평이 새로운 국평으로 인식되는 시대가 도래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보인다.
교실에 바로 적용하는 수업의 기술 (김성효 지음, 빅피시 펴냄, 264쪽, 1만 7,800원) 29년 차 베테랑 교육자가 업무와 학생 지도에 지친 교사들을 위해 수업 기획부터 설계, 실제 진행, 평가에 이르는 4단계 가이드를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교과서 기반 수업 기술과 학습 부진 학생 지도법, 그리고 교사의 권위를 세우는 6가지 수업 장악 노하우 등 현장에서 즉시 적용 가능한 구체적 전략을 담았다. 저자는 교사가 주도권을 잡고 아이들과 소통해야 교실이 행복한 배움의 공간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화학 (김성수 지음, 지상의책 펴냄, 356쪽, 1만 9,800원) 우주와 생명, 문명의 역사를 100가지 화학 물질로 꿰어낸 교양서다. 다양한 물질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원자의 탄생부터 지구의 지질, 생명체의 진화, 그리고 현대 산업과 미래 기술로 이어지는 흐름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독자가 자연스럽게 큰 그림을 이해하도록 했다. 저자는 화학이야말로 모든 학문과 통하는 ‘중심 과학’이라고 강조한다. 생각의 시체를 묻으러 왔다 (김영민 지음, 사회평론 펴냄, 308쪽, 1만 7,000원) 서울대 김영민 교수가 펴낸 논어 연작 5부작의 첫 번째 책이자 초대장 격인 에세이다. 지난 2019년 출간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의 개정증보판으로, 저자 특유의 위트와 날카로운 통찰을 통해 논어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저자는 논어를 무조건적으로 숭배하거나 현대적으로 과잉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며, 텍스트가 놓인 역사적 맥락을 반영해 새롭게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반복의 쓸모 (억만장자 메신저 지음, 동양북스 펴냄, 296쪽, 1만 9,800원) 매일 수십 편의 글을 쓰고 공유하며 ‘성실한 반복’의 힘을 몸소 증명해 온 인플루언서가 불안과 방황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저자는 고독을 도피처가 아닌 재능이 피어나는 시간으로 재정의하고, 매일의 작은 노력이 어떻게 운으로 전환되는지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방황·고독·축적·의식·성숙이라는 5가지 키워드를 통해 운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의 태도를 강조한다. 우주 정복 만화, 지학툰 (콜프 지음, 사회평론 펴냄, 384쪽, 1만 9,800원) ‘지구과학 덕후’를 자처하는 현직 교사가 펴낸 유쾌한 과학 교양 만화다. 백두산 폭발, 쓰나미 생존법 같은 일상적 호기심부터 판 구조론, 우주 멸망 시나리오 등 거대한 과학적 주제까지 재치 있는 입담과 만화로 풀었다. 영화 속 과학적 오류를 짚어내는가 하면, 과학사의 뒷이야기와 윤리적 질문들을 던지며 단순 암기 과목으로 여겨지던 지구과학을 삶을 이해하는 인문학적 시선으로 확장한다. 100장의 이미지로 끝내는 통합사회 1·2 (전보애 등 지음, 푸른길 펴냄, 232쪽, 각 1만 8,000원) 2022 개정 교육과정 개발에 참여한 교수와 교사들이 고교학점제 세대를 위해 내놓은 통합사회 학습서. 2028학년도 수능 개편으로 중요성이 커진 통합사회를 이미지 중심으로 직관적으로 풀어냈다. 1·2권에 각 50장씩, 총 100장의 엄선된 이미지가 복잡한 사회 현상에 대한 입체적 이해를 돕는다. 단순 암기 대신 ‘이미지 보기-생각 넓히기-깊이 들여다보기’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학생들의 사고력을 확장하고 핵심 개념을 쉽게 이해하도록 이끈다. 너도 씨앗을 품게 될 거야 (박고은 지음, 목수책방 펴냄, 152쪽, 1만 8,000원) 숲의 회복을 연구하는 산림 생태계 연구자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저자가 펴낸 따뜻한 생태 에세이다. 작은 꽃마리부터 커다란 소나무까지 우리 곁의 다양한 생명들이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동화·시·칼럼에 담아 엮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자연 속 작은 존재들을 어른과 아이가 함께 살펴보고, 그 생명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야기 나눠보기를 권한다. 싱크 아웃사이드 더 박스 (김호정 지음, 윌마 펴냄, 136쪽, 1만 9,500원) 북미에서 화제가 된 ‘상상 놀이 수업’을 담은 창의력 워크북이다. SNS 누적 조회수 2억 뷰를 기록한 이 수업은 ‘반만 그려진 미완성 그림’을 아이들이 자유롭게 완성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엑스(X)가 피자가 되고, 부메랑이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정답의 틀을 깨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각을 발휘하게 된다. 아이들이 스마트폰 대신 연필을 잡고, 익숙한 것을 새롭게 연결하며 ‘생각의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다 보면 분명히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올 거야.” 우리는 이 말을 참 자주 듣고, 또 자주 건넨다.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으니 포기하지 말라는 응원과 위로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BTS가 노래하는 ‘피·땀·눈물’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면 세상은 결국 그에 걸맞은 보상을 줄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뿌린 대로 거두고, 내가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 것이 가장 ‘공정한 질서’라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죽을 만큼 애썼는데도 결과가 따라주지 않을 때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되는데 왜 나만 안 될까?”라는 질문 앞에서 ‘내가 최선을 다한 게 맞나?’, ‘어딘가 부족했나?’라며 자책하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정말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걸까? 세상은 과연 공정한 걸까? 세상은 공정해야 한다는 믿음 _ 공정 세계 신념 사필귀정·인과응보·권선징악·종과득과(種瓜得瓜)…. 우리는 어릴 때부터 지금 당장의 충동과 욕구를 억제하고 규칙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면, 훗날 반드시 보상받는다고 배워왔다.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 돌아가야 마음이 편해진다. 심리학자 멜빈 러너(Melvin Lerner)는 이러한 믿음을 ‘공정 세계 신념(Just World Belief)’이라고 불렀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공정하며, 사람은 각자 받을 만한 결과를 받는다는 믿음이다. 만약 아무 이유 없이 선한 사람이 고통받고, 악한 사람이 득세하는 공정하지 않은 세상이라면 우리는 안심하며 살아갈 수 없다. 나 역시 언제든 이유 없이 고통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러너가 이 믿음을 ‘근본적인 착각(Fundamental Delusion)’이라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틀린 믿음이라기보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붙들고 싶은 환상이라는 의미다. 규칙을 지키고 열심히 살면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얻기 위해 우리는 이 환상을 필사적으로 붙든다. 현실을 왜곡해서라도 말이다. 공정함을 지키기 위해 현실을 왜곡하는 순간 현실에서 우리는 종종 불공정한 상황에 분노하고 안타까워할 때가 있다. 성실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노력해도 가난이 대물림되며, 정의가 돈과 권력 앞에서 무력해지는 상황들 말이다. 러너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그 사람이 뭔가 잘못했을 것이라고 해석을 바꾸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한다. 러너의 유명한 실험인 전기 충격 실험은 이 심리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실험실에는 문제를 틀릴 때마다 전기 충격을 받는 한 여성이 있다. 관찰자들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 여성을 관찰한다. 러너는 A 집단에게는 “여성이 실험 후 보상을 받는다”라고, B 집단에게는 “아무 보상이 없다”라고 알려준다. 실험이 끝난 후, 두 집단의 평가는 매우 달랐다. A 집단은 여성을 ‘불쌍하지만 의미 있는 경험을 한’ 성실하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평가했지만, B 집단은 “문제를 틀렸으니 자업자득이다”라며 조심성 없고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러너는 고통의 대가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평가가 극명히 달라진 것은 무고한 피해자가 존재하는 세상을 인정하기보다 차라리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고 믿는 편이 심리적으로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교실에서 학업에 뒤처진 아이,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를 보며 우리가 “왜 더 노력하지 않았니?”, “더 집중했어야지”, “네가 좀 더 다가가려 애썼어야지”라고 말하는 것도 ‘개인의 노력’을 문제 삼아 세상의 공정함을 유지하려는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졌고, 결과는 너의 노력에 달렸다 공정 세계 신념이 사회적 시스템으로 확장되면 능력주의가 된다.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졌고, 결과는 각자의 노력과 능력에 달렸다는 믿음이다. 이 둘이 결합하면 사고는 단순해진다. 성공은 ‘노력의 보상’이 되고, 실패는 ‘노력 부족의 증거’가 된다.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이를 ‘능력주의적 오만’이라 꼬집었다. 성취 뒤에 숨은 출발선의 차이와 재능이라는 ‘운’을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 출발선을 결정짓는 가려진 ‘혜택’ 샌델은 설령 기회의 평등이 실현되어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시작한다고 해도 그 결과가 반드시 공정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학교현장만 보더라도 안정적인 가정환경에서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하는 아이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아르바이트하며 공부하는 아이, 다양한 교육적 혜택이 많은 지역에서 사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의 출발선 조건은 다르다. 하지만 그 차이를 지운 채 결과만 비교하게 되면,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책임이 돌아간다. “환경이 나빠도 성공할 사람은 한다”는 논리와 함께 말이다. ● 재능이라는 이름의 ‘행운’ 샌델은 우리가 ‘나의 능력’이라고 믿는 재능 역시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우연히 당첨된 ‘자연의 복권(Natural Lottery)’에 가깝다고 말한다. 내가 나의 재능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얻는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은 오류다. 내가 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난 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자연의 복권’에 당첨된 결과일 뿐이며, 내가 가진 재능을 높이 평가해 주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 또한 나의 공로가 아닌 행운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p.181~182 재능에는 두 가지 행운이 겹쳐 있다. 타고난 능력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높게 평가해 주는 시대에 태어난 것조차 행운이다. 당대에는 외면받았지만, 훗날 재평가된 예술가들의 사례는 능력의 가치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와 시대가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진도준이 서민영에게 던진 “넌 스스로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지? 천만에. 네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누리고 있는 건 전부 다 혜택이야”라는 대사처럼 우리가 누리는 성취는 사실 많은 혜택 위에서 이뤄진 것일지 모른다. 행운의 지분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한 진정한 ‘공정’ 노력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노력은 여전히 소중한 삶의 가치이다. 무언가를 위해 온 마음을 다해 몰입하는 경험은 성장의 밑거름이다. 다만 그 노력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배경에 얼마나 많은 행운과 사회적 인프라, 그리고 타인의 도움이 있었는지도 함께 가르쳐야 한다. 샌델은 ‘운’의 역할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적 책임감이 싹틀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이룬 모든 것은 오직 나의 것’이라는 오만에서 벗어나, ‘우연히 주어진 선물 위에 나의 노력이 더해졌다’라는 겸손함을 회복하는 것이 교육의 본질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교육현장의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학생맞춤통합지원·사회통합전형 등은 바로 이러한 출발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장치들이다. 중요한 것은 제도 자체가 아니라 인식의 전환이다. 이러한 지원을 ‘역차별’이 아닌, 개인이 선택할 수 없었던 출발선의 차이와 재능이라는 이름의 ‘운’을 사회가 함께 나누는 ‘상생’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만이 공정이라고 믿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진정한 공정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노력이 다시 위로가 되기 위한 실전 팁 “열심히 하다 보면 꼭 이루어질 거야”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다시 일어설 힘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나는 왜 안 되는 걸까?’라는 자책으로 돌아온다. 같은 말이 다르게 작동하는 이유는 개인의 성향 차이 때문이 아니다. 심리학은 그 원인을 노력 그 자체가 아니라, 노력이 작동하는 심리적 조건에서 찾는다.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통제감을 상실했을 때, 강한 무력감과 불안을 느낀다. 이때 “노력하면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는 상황을 다시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으로 되돌려 놓는다. 노력이 위로가 되는 지점이다. 노력은 결과를 보장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통제감을 회복시켜 주기 때문에 사람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문제는 노력으로 모든 결과를 설명할 때이다. 결과가 좋으면 ‘내가 노력했기 때문’이고, 결과가 나쁘면 ‘노력이 부족해서’라는 구조가 굳어지면, 노력은 위로가 아니라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채찍이 된다. 실패 원인을 언제나 개인의 태도와 의지로만 돌릴 때, 노력은 희망이 아닌 상처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아이들에게 ‘세상은 공정하다’, ‘노력하면 다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당장 희망을 주는 듯 보여도 위험하다. 그 믿음이 현실 앞에서 흔들리는 순간, 아이들은 자신을 탓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노력이 다시 위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말을 살펴보자. ● 성공했을 때 _ 오만이 아닌 겸손과 감사로 확장시키는 말 “거봐, 노력하니까 되잖아”라는 말 대신 “정말 애썼구나. 네 노력도 컸지만, 이번엔 주변 도움과 운도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라고 말해보자. 여기에 “특히 감사했던 사람, 절묘한 타이밍,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있을까”라고 덧붙인다면, 성취는 오만이 아니라 겸손한 감사로 확장될 수 있다. ● 실패했을 때 _ 원인을 자신에게만 찾지 않도록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말 “네가 더 열심히 했어야지. 최선을 다한 거 맞니?”라고 다그치는 대신 “정말 속상하겠구나. 네가 최선을 다한 걸 내가 알아. 그런데 세상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이 참 많아. 이번엔 여러 조건이 잘 맞지 않았을 뿐이지 네 잘못이 아니야”라며 “이번 과정에서 특히 아쉬웠던 점이나 네가 배운 건 무엇이니?”라고 말해 주자. 실패의 원인을 전부 자신에게서만 찾지 않도록 돕는 것, 그것이 아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심리적 지지이다. 노력이 ‘칼’이 아닌 ‘꽃’이 되는 사회를 꿈꾸며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력이 놓여야 할 자리를 다시 정의하는 일이다. 성공했을 그것이 온전히 나의 능력만은 아님을 인정하며 겸손을 배우고, 실패했을 때 그것이 오로지 나의 잘못만은 아님을 깨달으며 자기비하 없는 회복탄력성을 스스로에게 허락해야 한다. 노력은 각자가 놓인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과정의 언어여야 한다. 2026 동계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열여덟 살 유승은 선수의 수상 소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력의 결과’가 얼마나 많은 손길과 우연, 그리고 보이지 않는 지지 위에 놓여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1년간 큰 부상이 있어 많이 힘들었지만, 그 시간을 딛고 여기까지 온 저 자신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이 메달은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에요. 힘들 때마다 곁을 지켜준 가족, 수술해 주신 의사 선생님, 끝까지 믿어주신 코치님, 그리고 비인기 종목이라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응원해 주신 모든 분의 마음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노력이 가장 건강하게 작동하는 순간은, 그것이 개인을 평가하는 잣대가 아니라 관계를 드러내는 언어가 될 때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열심히 하면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단순한 공식이 아니다. 노력은 혼자서 완성되지 않으며, 실패는 곧 무능의 증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성취 앞에서는 박수를 보내되, 그 이면에 놓인 수많은 조력과 맥락을 함께 볼 수 있는 시선을 갖는 것이다. 그럴 때 노력은 더 이상 사람을 베는 칼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꽃이 된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속도와 자리에서 다시 도전할 용기를 배운다.
2026년 1월의 다보스는 유난히 춥다. 한때 세계화의 성전이라 불리던 이곳의 공기가 달라진 것은 스위스의 칼바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세계 오피니언 리더들이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낙관론을 펼치던 자리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거대한 태풍이 몰고 온 공포로 채워졌다. 강대국 지도자의 선택과 행보는 지구촌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학교 운명이 학교장의 인품과 역량에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상 학교장의 인품과 역량은 ‘말하기’로 드러나는데, 많은 학교장이 스스로 말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사들의 생각은 다르다. 말을 잘하냐 못하냐의 기준은 말하는 사람이 아닌 말을 듣는 사람에게 있으며, 화려한 언변이나 유창함이 아닌 말의 설득력 유무와 그 정도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품격은 링컨 대통령의 사례처럼 ‘존경’에서 나온다. 링컨은 ‘존경’을 자신의 최고 가치로 삼았다. 존경은 인격과 품위에서 나온다. 존경받는 사람은 품격이 있는 말과 온화한 말을 한다. 상대방의 독설을 정면으로 맞받아치지 않는다. 한번은 링컨의 정치적 라이벌인 스티븐 A. 더글러스가 링컨을 향해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링컨은 “나한테 얼굴이 하나 더 있다면 이 얼굴을 하고 다니겠느냐”라는 자학 유머로 응수했다.이처럼 품격 있는 말은 정치적 라이벌의 차가운 마음마저도 녹이는 힘이 있다. 학교 경영 환경과 학교장의 말 잘하기 우리나라는 최근 양극화와 비교문화, 물질만능주의 등으로 인해 ‘분노공화국’으로 변해 가고 있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학교에도 영향을 미쳐 갈등과 분노가 증폭되고 있다. 이를 잘 보여준 사건이 서이초 사태다. 이제 학교라는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은 동상이몽을 꿈꾼다. 학부모는 ‘내 새끼 지상주의자’로, 교사는 ‘월급만큼만 일하는 직업인’으로 인식된다. 이런 학교를 학생들은 점차 ‘잠자는 곳’으로 여긴다. 학교 상황이 이런데도 학교장은 최선을 다해 학생을 교육하겠다는 소명의식을 품고 부임한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장에게 정년까지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학교장은 소위 ‘3y’, 즉 성급함(hurry), 염려(worry), 그리고 성냄(angry)의 심리상태에 놓이게 된다. 성급함은 조바심을 키우고 화를 부른다. 한국 사람치고 빨리빨리가 몸에 배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혹자는 빨리빨리 문화 덕분에 우리 경제가 압축성장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하지만, 성급함은 긍정적 요소보다 부정적 요인으로 작동한다. 결과에 대한 조바심과 염려를 키우고 기대에 못 미치면 쉽게 화를 내거나 좌절한다. 따라서 품격 있는 학교장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심리적 동요를 다스리는 ‘인격 다듬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품격 있는 말하기의 전제 조건 _ 인격 다듬기 학교장은 다양한 방식으로 학교 공동체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친다. 학교장이 훌륭하면 교사들은 당연히 지지하고, 학교 조직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 학교장이 품격 있게 행동하고 말하면 학교 조직에 신뢰가 형성되고, 구성원들 사이에 사랑과 열정이 피어난다. 말은 누군가를 베는 칼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치유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학교장은 단순히 말을 잘하는 것을 넘어, ‘잘 말해야’ 한다. 학교장의 말은 그 영향력이 크기에 스스로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 소위 ‘말발’이라 불리는 ‘번지르르한’ 화려한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언어 감수성’이다. 이 감수성을 잃으면 리더의 말은 민폐를 넘어 갑질이 되거나 상대에게 수치심을 준다. 말은 인격과 인품의 수준을 드러낸다. 훌륭한 학교장이 되려면 먼저 인품을 가다듬어야 한다. 인품이 품격 있는 말하기와 잘 말하기의 근본 바탕이며, 모든 말은 사람의 마음과 인품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4 훌륭한 학교장이 되는 길과 품격 있게 말하는 길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된다. 건강한 자기 만들기와 자기 다듬기가 있어야 품격 있는 말하기도 가능해진다. 학교장의 잘 말하기 _ 설득하는 말하기 5계명 잘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과 배려하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같아야만 좋은 것은 아니다. 다름을 어떻게 조율하고 설득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다섯 가지 원칙을 제안한다. ● 첫째, 호감 가는 사람이 되어라 호감 가는 사람과는 말이 통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의 관심사를 화제로 삼기, 먼저 말을 꺼내기, 적절히 자기 이야기 오픈하기를 해야 한다. 또한 독선과 독점을 빼고, 인정과 긍정을 더 해야 한다. 밀당의 고수는 상대의 눈높이에서 관심 사항을 끌어낸다. 따뜻하고 친밀하게 다가가는 것은 주파수를 맞추는 것과 같다. 사람은 자신이 잘하는 것을 말할 때 몰입한다고 한다. 따라서 대화의 물꼬를 트되, 말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이 필요하다. 선입견 내려놓기, 우호적인 태도 등으로 상대방이 다가오게 하는 매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 둘째, 하고 싶은 말을 확실하게 전달하라 내 생각을 타인의 마음에 닿게 하는 설득은 매우 어렵다. 모호하게 한 말을 상대방이 알아듣기를 바라면 그것은 과욕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확실하게 정의하고 깔끔하게 압축해야 한다. 짧게 말하되 할 말은 다 했을 때, 오히려 말에 여운과 설득력이 생긴다. 좋은 말은 구조화, 쉬운 표현, 명확성을 갖춘다. 한 문장으로 의미를 명확하고 짧게 표현하는 것은 강조하거나 임팩트 있게 말하는 데 도움이 된다. ● 셋째, 공감과 경청은 잘 말하기의 핵심 자질이다 공감은 무조건 편들기가 아니라, 상대방의 감정·마음·의도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소통은 공감 없이 불가능하다. 보통 MZ세대는 업무 지시에 질문으로 응수하는 경향이 있다. 학교장은 이런 MZ세대들을 설득하여 업무수행을 이끌어야 한다. MZ세대와 라떼세대는 소통 방식이 다르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해야 할 일을 지시하는 방식보다 도움을 청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다. 그들이 ‘저 교장이라면 한 번 더 도와주고 싶다’고 느끼게 만드는 말하기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경청의 바탕 위에 공감과 관심을 표현해야 한다. ● 넷째, 언어의 영향력을 신중히 관리하라 학교장은 언어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학교장의 말은 생각보다 영향력이 강하다. 인격적으로 말하고, 감정을 나누는 학교장의 말은 조직 구성원의 기를 살려 준다. 반면 모욕이나 갑질은 상대방을 낮게 만든다. 언어 감수성의 기반에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있다. ● 다섯째, 좋은 말하기의 출발은 내 마음을 잘 돌보는 것이다 학교장은 자신의 마음을 잘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감정을 잘 돌봐야 좋은 학교장이 된다. 견디기 힘든 상황이라도 분노의 에너지를 잘 풀어내야 한다. 훌륭한 학교장은 품격 있는 말로 감정을 표현한다. 사실을 그대로 표현하고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정확하게 알려주되 원하는 것은 단호하면서도 정중하게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불만은 말하되 비난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적 긍정은 자기기만이며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학교 안팎 행사에서의 잘 말하기 실제 앞서 언급한 원칙들을 실제 행사(인사말·환영사·축사·격려사 등)에 적용할 때, 다음의 흐름을 참고하면 더욱 품격 있는 스피치가 가능할 것이다. ● 인사말·환영사·축사·격려사 등의 의미부터 확실하게 이해하기 인사말이란 주최자로서 참석자에게 반갑고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는 말이다. 그래서 반갑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포함해야 한다. 환영사는 행사 주최자로서 참석자에게 환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축사는 행사를 축하해 주기 위해 외부에서 참석한 사람 중 유명 인사가 덕담이나 좋은 말씀 한마디를 전하는 말이다. 격려사는 체육대회나 워크숍 등에서 참여자들에게 용기나 의욕을 북돋우는 말이다. 격려사에는 칭찬과 희망, 동기부여가 되는 말이 포함되면 좋다. ● 명료하게 자기 소개하기 사회자가 소개했더라도 다시 한번 자신의 소속과 직책, 이름을 천천히 또박또박 밝히는 것이 좀 더 겸손해 보인다. 문장에서 주어가 중요하듯이, 인사말에서도 현재 누가 이야기하는가가 중요하다. ● 진심이 담긴 감사 인사하기 “바쁘실 텐데도 불구하고 오늘 이렇게 많이 모여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와 같은 상투적 표현 대신 진짜 감사한 마음이 느껴지도록 말하는 것이 좋다. “화창한 날씨가 우리를 축복해 주는 것 같습니다”와 같이 날씨나 현장의 분위기를 넣어서 이야기하면 훨씬 더 인사말의 품위가 높아진다. ● 특별한 감사 인사하기 행사가 열리기까지 도움을 주신 분들이나 특별히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감사할 내용을 미리 기록해 두었다가, 세세한 에피소드까지 덧붙여 언급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유명 인사나 고위 공직자 등이 참석한 경우, 한 사람 한 사람 직책과 이름을 언급하며 참석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하면 더 좋다. ● 행사의 의미 말하기 참석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의미와 목적이라도 학교장의 시각으로 한 번 더 인식시켜 준다. 만약 졸업식이라면 “오늘의 졸업식은 오랜 시간 ○○학교 과정을 열심히 공부하고 마치는 것을 축하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동안 미래 사회에 필요한 핵심 역량 등이 많이 함양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면 좋다. ● 당부와 부탁 “이 ○○행사가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지지를 부탁드리겠습니다”라며 중요한 행사·모임 등이 더욱 활성화될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한다. 더불어 참석자 모두의 가정에 행복을 비는 덕담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마지막으로 열심히 준비한 행사에 끝까지 함께 해 주시고, 참석자 모두의 가정에 행복이 함께 하길 기원하면서 제 인사말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학교장 ○○○이었습니다.”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못 바꿉니다. 제 모교인 보인고를 학생들이 아침에 눈을 비비면 가장 먼저 달려오고 싶은 곳, 학부모가 내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고객 만족 1등 학교’로 만드는 것이 제 마지막 소명입니다.” 자율형 사립고의 성공 신화를 다시 쓰고 있는 서울 보인고 김석한 이사장의 말이다. 1908년 개교한 보인고의 변신은 2004년 김 이사장의 취임과 함께 시작됐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현실에 안주하면 미래가 없다’라는 판단 아래 2007년 상고에서 일반고로 전환한 데 이어 2011년 자사고 전환이라는 대담한 결단을 내렸다. 이후 사재 등을 털어 무려 320억 원을 학교 환경 개선에 쏟아부었다. 낡은 교실을 전면 개보수하고, 현대식 체육관을 신축했으며, 학생들을 위한 최첨단 학습시설을 갖췄다. 보인고가 20여 년 만에 명문 사학으로 자리 잡은 배경에는 ‘성적 이전에 사람을 본다’라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학교가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가치는 인성이다. 실제로 학교장 추천이나 각종 포상 과정에서도 성적보다 3년간의 학교생활 태도와 공동체 안에서의 품행을 우선 살핀다. 이 같은 원칙은 보인고 교훈인 ‘날로 새롭게, 바르게 살자, 베풀며 살자’에 그대로 담겨있다. 김석한 이사장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보다 제대로 된 인성을 갖춘 학생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근본”이라며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바르게 살 줄 모르면 학교의 이름으로 추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성을 중시한 교육은 학업 성과로 이어졌다. 대학 진학 실적은 가히 독보적이다. 2021학년도 9명이었던 서울대 합격자 수는 매년 급증해 2025학년도에는 38명을 배출했다. 이는 국내 유명 외고 등 쟁쟁한 특목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전국 TOP 5 안에 드는 수준이다. 연세대와 고려대 합격자는 92명, 의학계열 합격자는 무려 75명에 달한다. 학교 측이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진학률의 질’이다. 이 학교 김범두 교장은 “우리는 최상위권 엘리트만 뽑아 실적을 내는 학교가 아니다. 중상위권은 물론 하위권 학생들까지 성적을 끌어올려 서울 유명 대학에 보낸다”며 “재학생 기준 진학률은 서울 지역 자사고 중에서도 압도적 1위”라고 강조했다. ‘수능 판박이’ 훈련과 80%가 참여하는 ‘심야 공부방’ 여기에는 보인고의 ‘실전’ 위주 학습시스템이 원동력이 됐다. 매주 토요일마다 수능과 똑같은 문항 수와 시간 엄수는 물론 실제 수능 시험장 종소리까지 재현한 ‘자체 모의고사’를 실시한다. 양궁 국가대표팀이 올림픽을 앞두고 실제 대회장과 똑같은 환경에서 훈련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첫해 20명으로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현재 130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만큼 호응이 높다. 야간 자율학습의 경우 전교생의 80%가 밤 9시 30분, 길게는 11시까지 학교 공부방을 지킨다. 단순히 자습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내 최첨단 실험 기자재를 활용해 ‘용수철 탄성 계산’ 같은 주제로 개인 연구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것이 곧 학생부 종합전형의 강력한 재료가 된다. 또 보인고가 자체 개발한 ‘보인 AI 앱’은 학생의 모든 데이터를 누적 관리해 클릭 한 번으로 대치동 고액 컨설팅보다 정확한 리포트를 뽑아낸다. 입시의 모든 것이 정규 교육활동을 통해 해결되니 학부모들은 학원 셔틀을 할 필요도, 사교육비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게 학교 측의 설명이다. 축구 명가(名家)답게 보인고가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운동하는 학교’라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게 1년 내내 전교생이 참여하는 ‘반 대항 축구 리그전’이다. “우리 학교 축구 리그는 단순히 공을 차는 수준이 아닙니다. 잘하는 A팀과 조금 서툰 B팀으로 나눠 전교생이 한 명도 소외되지 않고 그라운드를 누빕니다.” 김 교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축구 리그는 전적으로 학생들이 운영한다. 학생 스스로 운영위원회와 홍보위원회를 조직하고 경기 심판까지 맡는다. 심지어 억울한 판정을 막기 위해 직접 VAR(비디오 판독) 영상을 돌리고, 경기 하이라이트를 유튜브에 중계할 정도로 짜임새 있다. 이뿐 아니다. 축구를 못 하는 학생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농구와 피구 리그를 별도로 운영해 모든 학생이 땀 흘리며 성취감을 느끼게 배려한다. 점심 식사 후 전교생이 20분간 낮잠을 자는 ‘오침 시간’을 운영하는 것도 보인고의 오랜 전통이다. “잠을 참아가며 멍한 머리로 앉아 있는 건 효율이 없습니다. 푹 자고 맑은 정신으로 강의를 들어야 총명해집니다.” 김 이사장의 이러한 결단은 보인고 교실에서 ‘잠자는 학생’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9단계 전형으로 뽑은 우수 교사진 … 교사를 위한 ‘캡슐 호텔’까지 교사들의 헌신적인 연구도 빼놓을 수 없다. 오양욱 교감은 인터뷰 도중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3학년 부장교사가 단톡방에 내년도 대입 입시 요강을 분석한 결과를 올려놓았다”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선생님들 스스로가 학생들을 위해 자료를 찾고 아이디어를 낸다”고 말했다. 교사들이 이처럼 남다른 데에는 이유가 있다. 보인고는 ‘교사가 곧 학교의 경쟁력’이라는 신념 아래 어느 학교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채용 과정을 거친다. 서류전형부터 시강(수업 시연), 면접까지 무려 9단계를 통과해야 교사가 된다. 김 이사장은 “한 번은 15명 선발에 1,250명이 지원했는데,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이력서를 검토했다”며 “내 아버지가 부탁해도 실력이 없으면 안 들어준다는 배수진을 쳤다”고 술회했다. 그는 “교사 선발에서도 실력은 기본 조건이고, 학생과 동료를 대하는 태도와 인성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고 덧붙였다. 어려운 관문을 뚫고 보인의 가족이 된 교사들에게는 전폭적인 지원이 뒤따른다. 학교는 교사들을 위해 AI 교육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AI 워크스페이스’를 구축 중이며, 학생 지도에 쌓인 피로를 풀 수 있는 ‘캡슐 호텔’ 식 휴식 공간도 마련할 계획이다. 이들 외에도 남들이 부러워할 수준의 지원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학교 측은 ‘영업 비밀’이라며 더 이상의 공개를 꺼렸다. 보인고에는 영업 비밀이 또 하나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교육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다. 보인고는 코로나 팬데믹 이전부터 AI 기반 학습관리와 실시간 쌍방향 원격수업 시스템 구축에 나섰다. 이 덕분에 2020년 코로나로 전면 등교가 중단됐을 당시에도 외부 플랫폼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시스템으로 전 과목 실시간 수업을 진행했다. 고화질 기자재와 대용량 전용망을 선제적으로 구축해 ‘온라인에서도 오프라인과 같은 수업’을 구현했고, 이 과정에서 축적된 노하우는 서울시교육청과 다른 학교 관계자들이 직접 찾아와 벤치마킹할 정도로 주목받았다. 실제 교육부나 교육청의 AI 시스템보다 월등하다는 평가다. 김 이사장은 인터뷰 끝 무렵 보인고를 영국의 이튼 스쿨처럼 세계적 명문으로 키우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그는 “학교 부지 1만 평을 지하화·지상화하여 상업시설 수익을 내고, 그 돈을 온전히 인재 양성에 쏟아부어 대한민국을 이끌 리더들을 키워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기업가로서의 도전 정신과 모교에 대한 애정 가득한 보인고가 ‘우일신(又日新)’의변화를 어디까지 이어갈지 주목된다.
「학생맞춤통합지원법」 시행 「학생맞춤통합지원법」은 기초학력 미달, 경제적·정서적 어려움, 학교폭력, 경계선 지능, 아동학대 등 다양한 문제를 겪는 학생들을 발굴하여 지원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제정되어 2026년 3월 1일부터 시행된다. 학교는 학생·보호자·교직원의 요청에 따라 지원대상학생을 선정하고, 교육장·교육감에게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 지원 방법은 교육비 등 교육복지, 상담 지원, 외부기관 연계 등이다. 기존에도 시도교육청이나 지방자치단체, 개별 학교 단위에서 진행되던 학생에 대한 다양한 지원 사업은 존재하였으므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를 전국적으로 통일성 있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재정비하고, 국가적 지원과 전문인력의 확보, 예산 책정에 대한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치료 등 지원이 필요한 학생임에도 보호자가 이를 거부하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법안의 마련 과정에서 논의된 것으로 보이나, ‘지원대상학생 및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라고 되어 다소 아쉬움이 있다(「학생맞춤통합지원법」 제11조 제3항). 현재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에 대한 실질적 해결책을 지원하여 현장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과 교육기관인 학교가 학생의 복지까지 담당해야 하는 부담이 생겼다는 평가가 함께 있다. 학생의 문제행동은 질병이나 가정환경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문제행동이 발현되는 장소는 학생이 하루의 대다수 시간을 보내는 학교다. 학교는 최대한의 교육적 노력을 다하지만, 학생이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 원인의 변화가 없으니 개선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문제행동에 대한 피해는 결국 다른 학생들이나 교사가 받게 되는 것이다. 「학생맞춤통합지원법」은 이러한 배경에서 그 어려움을 학교만이 아닌 교육청·국가·지방자치단체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해결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 따라서 결국 법의 궁극적인 취지는 학교교육의 정상화와 학교업무의 경감에 있다고 본다. 부디 이와 같은 취지에 맞는 운영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학생에 대한 물리적 제지, 교실 밖 분리 권한의 법률화 현행 「초·중등교육법」은 교원의 학생생활지도 권한을 법령과 학칙으로 정하도록 하였고, 시행령은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로 그 구체적인 내용을 위임하여 두었다.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는 학생에 대한 물리적 제지, 교실 밖으로의 분리 등을 규정하고 있지만, 이러한 유형력 행사와 학습권 제한에 대한 직접적인 법적 근거가 없다는 한계는 늘 지적되어 왔다. 이에 개정된 「초·중등교육법」은 교사의 물리적 제지가 가능하다는 점, 학생을 별도 공간으로 분리(개별학생교육지원)할 수 있다는 점 등을 2026년 3월 1일 시행될 법률을 통해 명확히 하였다. 현행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에서는 문제행동을 보이는 학생을 보호자에게 인계해 가정학습을 시킬 수 있다는 규정은 두고 있으나, 이를 보호자가 거부할 때의 대응 방법은 언급되지 않았었다. 이 때문에 부득이 학교는 문제행동이 심각한 학생을 학교에 둘 수밖에 없었고, 피해를 입는 학생과 교원들이 발생해 어려움을 겪는 학교가 많았다. 개정된 법에서는 이때 학교장이 교육감에 대해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초·중등교육법」 제20조의4 제5항).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법들이 마련될 것인지 주목할 만하다. 교내 스마트기기의 사용 제한 규정 신설 학교가 학생의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 소지 및 사용에 제한을 두는 것에 대하여 그간 많은 논의가 있었다. 일부 시도의 학생인권조례에서는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 소지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안 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도 했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학교의 학생들에 대한 휴대전화 수거나 사용 제한이 정당한지에 대한 여러 판단이 있기도 했다. 「초·중등교육법」은 3월 시행될 법에서 교내 스마트기기의 사용 제한에 관한 규정을 신설(「초·중등교육법」 제20조의5)하며 기존 논란을 어느 정도 종식했다. 이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수업 중에 휴대전화 등 스마트기기의 사용은 불가능하고, 교육목적 등의 특별한 경우만 예외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또한 수업 외의 경우에도 교내 스마트기기의 사용과 소지를 제한할 수 있게 하여 교칙에 따라 수거와 분리보관 등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특이(악성) 민원 대응 방안 개선 지난 1월 교육부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특이(악성) 민원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학교장이 민원인에 대해 ‘침해행위의 중지 및 경고’, ‘퇴거 요청’, ‘출입 제한’ 등의 조치를 할 수 있는 매뉴얼을 마련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다만 해당 조치들에 대한 구체적인 법적 근거에는 현재로서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다고 보인다. 그 외에도 교사 개인이 아닌 기관이 대응하는 시스템을 마련해민원접수 창구를 단일화하고, 특히 특이(악성) 민원을 상급기관인 관할 청으로 연계해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도 마련 중에 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민원접수 창구의 단일화나 학교 방문 사전예약제의 경우에는 이미 여러 시도가 있었으나, 현실에 적용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다만 상급기관이 직접적으로 민원을 담당하게 된다는 부분에는 새로운 점이 있고, 교육행정 전문기관인 관할 청의 처리가 절차나 공정성, 결과에 대한 시비에서 학교를 벗어나게 하는 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현행법은 학교에 대한 민원은 일반 공공기관과 동일하게 「민원처리에 관한 법률」을 적용하여 처리하도록 한다. 그런데 학교라는 기관의 특성상 학생을 위한 학부모상담과 민원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이러한 학교 민원의 특수성을 반영한 별개의 절차, 특이(악성) 민원을 처리하지 않을 수 있는 권한 등이 향후 개정법에 담기기를 희망한다.
법적 근거 : 「교육공무원법」 제44조(휴직) 및 제45조(휴직기간 등) 휴직기간의 연장 및 재휴직 • 일반적으로 질병휴직 시 그 기간은 요양에 실제로 필요한 기간으로 함. • 처음에 제출한 진단서나 신청한 휴직기간이 끝났더라도, 휴직자가 요양이 더 필요하다는 객관적 증빙서류를 제출하였을 경우 연장 가능함. • 휴직기간(2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휴직기간을 연장하거나, 복직하였다가 재휴직도 가능함. 다만 복직 시에는 휴직사유의 소멸 여부를 파악하여 방학기간에 복직하였다가 다시 휴직을 반복하는 사례를 방지하는 것이 필요함. 제출 서류 질병휴직위원회의 역할 • 공무상질병휴직 3년 초과 시, 2년 범위에서 연장에 대한 자문 • 특별장학 또는 감사 결과 등에 따른 질병휴직에 대한 자문 • 질병휴직기간이 끝난 교육공무원의 직권면직 대상 여부에 대한 자문 • 기타 질병휴직과 관련한 전문적인 판단에 대한 자문 질병휴직 QA Q. 질병휴직 후 복직은 어떻게 되나요? A. 휴직자가 휴직기간 중 그 사유가 소멸되거나, 더 이상의 휴직이 불필요한 경우 임용권자에게 이를 신고(복직원 제출)하여야 하며, 임용권자는 지체 없이 복직을 명해야 합니다. 질병휴직기간 중이라도 본인의 질병이 완쾌되었다는 증빙서류(진단서 등)와 함께 복직원을 제출하면 임용권자는 이를 근거로 정상적인 직무수행 가능 여부를 판단하여 복직 여부를 결정합니다. Q. 휴직기간(최대 2년)이 만료된 후에도 직무를 정상적으로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처리되나요? A. 「국가공무원법」 제70조 제1항 제4호의 규정에 의하여 직권면직 처분을 할 수 있으며, 본인의 원에 의하지 않은 휴직 또는 면직 처분을 할 경우에는 처분의 사유를 기재한 설명서를 교부하여야 합니다. 그 처분에 불복이 있는 교육공무원은 그 설명서를 받은 날부터 30일 이내에 교원소청심사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할 수 있으며, 이 경우 면직 처분에 대하여는 교원소청심사위원회의 최종 결정이 있을 때까지 후임자를 보충하지 못합니다. Q. 질병휴직 중 학위 취득 가능한가요? A. 질병휴직의 경우 휴직사유에 부합되지 않으므로, 연구실적과 호봉승급 경력 모두 인정할 수 없습니다. Q. 1년간 질병휴직 후 근무 중에 병원 진료(정기적인 검사 및 진료)를 위해 병가를 사용할 수 있나요? A. 휴직 조치 후의 복직은 질병·부상의 완쾌 등 휴직사유의 소멸 시 가능하므로 휴직기간 만료 시 동일한 질병을 이유로 연속하여 일반병가를 허가할 수 없습니다. 다만 휴직기간(1년)이 끝난 후 복직하여 정상 근무 중 동일질병 또는 부상이 재발한 때에는 복직 후의 근무가 정상적인 상태로 상당 기간 지속된 경우에만 일반병가를 허가할 수 있습니다.
1일 국회 본회의에서 광주전남특별시 설치를 위한 특별법이 통과된 가운데, 법 제정으로 인해 지역 교육에 미칠 영향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첫 지역 행정통합법의 입법이라는 점에서 대구·경북과 대전·충남 등 행정통합을 추진하는 다른 지역의 시금석이 될 수 있어 각별히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번에 통과된 법 조항은 424개로 이중 교육과 직접 관련된 조항은 22개로 분석되고 있다. 분량은 제한적이지만 통합 이후 교육행정 체계와 교원 인사, 학교 운영의 기본 구조를 규정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우선 법은 통합특별시에 ‘통합특별시교육청’을 두고 교육감은 주민 직선으로 선출하도록 명시했다. 행정통합 속에서도 교육자치의 기본 틀을 유지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다만 조직·정원·기구 설치를 통합 행정체계에 맞춰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통합교육청 출범 이후 본청 기능이 확대될지, 교육지원청 권한이 강화될지에 따라 현장 체감은 달라질 수 있다. 조직 통합 과정에서 정책 결정 단위가 광역화될 경우 일선 학교와의 거리감이 커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교원 인사 분야에서는 통합을 이유로 한 강제 전보를 금지하고, 일정 기간 승진후보자 명부를 구역별로 운영할 수 있도록 특례를 뒀다. 이는 통합 직후 인사 불안을 최소화하려는 안전장치로 해석된다. 특히 생활권이 다른 지역 간 강제 이동 가능성을 차단했다는 점에서 교직 사회의 우려를 일정 부분 완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해당 규정이 경과적 성격을 띠는 만큼 장기적으로는 인사 관리 단위가 통합 권역 중심으로 재편될 여지도 있다.또 교원 수급 조정이나 배치 전략이 광역 단위로 설계될 경우승진 경쟁 구도와 근무 경로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학교 운영과 관련해선 소규모 학교 공동 운영, 교원 교차 지도, 시설 공동 활용 등을 허용하는 근거가 담겼다. 학생 수 감소가 지속되는 지역에서 학교 간 협력 모델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한 셈이다. 이에 따라 농산어촌 지역에서는 공동 교육과정 운영이나 순회 수업 확대 사례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반면 일반 학교의 교육과정 편성권이나 예산 자율권을 직접 확대하는 조항은 포함되지 않았다. 통합교육청 권한은 넓어졌지만, 학교 단위 자율성 확대가 자동으로 보장되는 구조는 아니다. 향후 통합교육청이 권한을 내부로 분산하지 않을 경우 행정 단위만 커지고 학교의 실질적 선택권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재정 분야 역시 중요한 변수다. 법은 통합특별시 체제에 맞춘 재정 조정 특례를 규정해 교육재정이 통합 재정 구조 안에서 운용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이는 권역 간 재정 격차를 조정할 수 있는 장치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교육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반대로 통합 재정 운용 기준이 일괄적으로 설정될 경우, 기존 지역 특성에 맞춘 예산 운용은 제약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재정 배분 기준과 집행 권한의 배치 방식이 교육여건 개선 여부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김동석 한국교총 교권정책본부장은 “이번 특별법은 교육자치의 외형은 유지하면서도 행정 단위를 광역화하는 방향을 제도화해 교실 수업을 직접적으로 바꾸는 조항은 없지만 인사·조직·재정 구조의 재편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며 “통합교육청이 어떤 권한 구조를 설계하느냐에 따라 학교와 교원이 체감하는 변화의 폭은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이어 “많은 사항이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거나 시행령과 조례 등에 위임된 만큼 조직 개편 과정이 향후 교육 현장 변화의 실질적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경북 김천고와 EBS(사장 김유열)가 4일 김천고에서 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세계적 석학의 강연을 학교 교육 현장에 직접 접목한 새로운 수업 모델 개발에 나섰다. 양 기관은 EBS의 대표적 평생 교육 프로그램인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이하 위대한 수업)를 기반으로 한 ‘EBS-Grecture 활용 융합독서논술 수업 모델’을 공동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협약은 고품질 교육 콘텐츠를 공교육 현장으로 확대해 학생들의 융합적 사고력과 글로벌 시민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됐다. 이에 따라 김천고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위대한 수업’의 글로벌 플랫폼 서비스인 ‘Grecture’를 정식으로 이용하게 된다. 특히 2026학년도 1학년 학생들은 ‘송설 GRECTURE 프로젝트: 지식에서 사유로’라는 명칭의 논술 과목 연계 프로젝트에 전면 참여할 예정이다. 해당 프로젝트를 통해 학생들은 세계 지성들의 강연을 단순한 시청각 자료가 아닌 하나의 확장된 텍스트로 활용하게 된다. 강연 시청을 시작으로 관련 자료의 발췌 독서, 소그룹 토론, 질문 생성 활동, 그리고 최종적인 논증적 글쓰기까지 이어지는 체계적인 융합 교육 과정을 거치며 인문·사회·과학을 아우르는 사유의 폭을 넓힐 것으로 기대된다. 협약식에 참석한 EBS 김성동 부사장은 “‘위대한 수업’은 세계적 지성을 한국 교육 현장과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EBS만의 독보적인 글로벌 프로젝트”라며 “김천고 학생들이 단순 정보 습득을 넘어 학문 간 경계를 허무는 자기주도적 탐구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라고 강조했다. 박윤상 김천고 교장은 “EBS의 수준 높은 교육 콘텐츠와 글로벌 플랫폼이 우리 학생들에게 더 넓은 시야와 깊이 있는 논술 역량을 선사할 것”이라며 “기존 학문의 범위를 확장해 바른 인성과 창의성을 갖춘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는 데 큰 시너지를 낼 것으로 본다”라고 화답했다. EBS는 이번 사례를 바탕으로 향후 전국의 교육 기관과 협력을 지속해 창의적인 미래 교육 환경 조성에 앞장설 계획이다.
제16대 한국국공립유치원교원총연합회(국공유) 신영진(경기 별빛누리유치원 원감·사진) 회장이 1일부터 2년 임기를 시작했다. 신 회장은 최근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지난 12년간 교원단체의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며 깨달은 것은 ‘교육의 본질을 지키는 기준’의 중요성”이라며 “유보통합 체계 속에서 공립유치원의 공교육적 정체성과 교원 전문성을 분명히 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 실천 과제로는 ▲‘유아교육법’에 근거한 ‘유아학교’로의 명칭 변경과 학교 체제 확립 ▲국가가 양성·임용하는 교원 자격 체계 유지 ▲기관의 특성과 양성 과정의 차이를 충분히 고려한 단계적·체계적 정책 설계 ▲학급당 유아 수 감축과 안전한 교육환경 확보 등을 꼽았다. 그는 “정책은 행정 효율 중심이 아니라 교육의 질 중심으로 설계돼야 하며, 현장의 교육적 판단이 존중받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며 “현장 의견이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임기 동안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국공유 운영과 관련해서도 “우리 회의 역사적 책임을 다하며, 유아에게 가장 이로운 방향으로 정책과 현장을 연결하는 전문 단체로 자리매김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올해는 1976년 공립유치원이 태동한 이후 50년을 맞이하고, 또 국공유 출범 30주년이다. 그런 만큼 올해를 역사적 전환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신 회장의 판단이다. “갈등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해법을 설계하고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추진하는 리더가 되고자 합니다. 선배 교원들이 지켜 온 제도적 성과를 공고히 하면서 다음 세대 유아교육인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