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새 역사교과서 문제로 대륙이 움직이고 있다. 대부분의 방송이나 신문들이 이와 관련된 내용을 매일 중요한 뉴스로 보도하고 있으며, 한국 등 관련 국가들의 움직임도 발빠르게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언론의 움직임은 중국 언론매체의 대부분이 관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중국정부의 입장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한편 중국의 지도자들도 문제가 된 역사교과서가 검정에 통과되지 못하도록 은근히 압력을 가하고 있다. 외교부의 왕이(王穀) 부부장은 노모토(野本佳夫) 주중대리대사에게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회원들이 집필해 검정신청한 중학교 교과서를 합격시키지 말 것을 촉구하였고, 중국 외교부의 주방짜오(朱邦造) 대변인은 "일본은 즉각 침략 역사를 부인하거나 미화하는 교과서 출판을 저지해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적반하장격인 행태를 익히 알고있는 일반 중국인들은 일본의 역사왜곡과 전쟁에 대한 미화가 교과서라는 조그만 책자를 앞세운 새로운 형태의 침략행위라고 여기며 분개하고 있다. 현재 중국측이 역사왜곡으로 문제를 삼는 부분 중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남경대학살' 문제이다. 이 교과서에서는 "도쿄재판법정은 남경전투 시 중국 민중 20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자료에 근거해보면 남경인구는 20만이다. 이밖에도 이 사건의 의문점은 많다."고 기술하였다가, 수정지시를 받고 정정한 수정판본에서 "도쿄재판은 일중전쟁에서 남경을 점령했을 때 다수의 중국민중을 살해했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실제 자료상 많은 의문점이 있고, 각양각색의 견해가 있어서 지금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남경대학살피해자기념관의 쭈청산(朱成山) 관장은 도쿄법원의 판결문을 인용하여 그것은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판결문을 보면 일본군이 점령 후 최초 6주간 남경과 그 부근에서 20만 명 이상을 학살하였는데, 이 속에는 불타서 숨지거나, 장강(長江)에 버려진 사람들의 숫자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전범들의 자백을 보면 이외에도 15만 명 이상이 더 목숨을 잃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경대학살에 대한 새 역사교과서의 기술내용은 남경에서의 중국인 학살을 부인하는 것으로서 분명한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9·18만주사변' 문제이다. 이 교과서에는 "만주사변(즉, 9·18사변)과 일본정부의 방침은 무관"하다며, 그것은 "일본육군의 파견부대가 관동군을 일으켜 일어난 전쟁"이라고만 기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은 `침략 의도를 감추려는 행위'라고 비난하고 있다. 1931년 9월18일 일본의 관동군이 남만철도를 훼손하고, 다음날인 19일 심양을 점령하였으며, 이어서 요녕의 기타 지역과 길림, 흑룡강의 2개 성을 점령하는 한편, 1932년 2월에는 동북지방 전체가 함락하였는데, 이러한 대규모의 침략행위는 일본정부의 비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이 동북3성을 점령해서 건립한 `만주국' 문제이다. 이 교과서에는 "중국대륙에 하나의 법치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또 만주국의 건설로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지게 되었다."고 하고 있는데, 중국인들이 보기에 이것은 침략자의 논리라는 것이다. 주목할만한 것은 일본정부가 앞으로 역사교과서에 대해 정치적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중국인들은 "정치적으로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종의 정치적 태도라고 보고있다. 즉 일본정부가 실제로는 침략전쟁을 미화한 역사교과서 수정본을 지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럴 경우 중국정부로서는 지금까지 되풀이해온 논리에 의해 문제를 푸는데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교과서 문제는 일본이 국수주의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중 일간의 `영원한 숙제'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구자억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