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멈춰선 시계, 자그마한 강아지, 잎새를 떨구어 버린 겨울나무, 그리고 백합화 한 송이이다. 욕심을 더 부려 본다면 웃고 있는 아이들과 아끼는 시집이다. 나는 어른이면서도 다 자란 아이들(어른)에게는 관심조차 없다. 내가 어른이라는 사실도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 집에는 세 개의 시계가 제각각 이다. 안방에 걸린 시계는 뻐꾸기시계인데 1년 가까이 잠을 자고 있지만 아무도 깨울 생각이 없다. 쫓기듯 달리는 일상을 뒤로하고 퇴근 후에 그 시계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서 여간 좋은 게 아니다. 때로는 쉬고 있는 그 녀석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일어나 달리지 않아도 되는 그 ‘자유에의 몽상’을 그 녀석을 통해서 나마 대신 누리고 싶음이리라.
거실에 걸린 시계는 5분 정도 빨리 달리는 부지런한 녀석이다. 약속 시간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남편을 참 많이도 닮았다. 그러고 보니 거실의 째각이는 우리 집에서 가장 부지런하다. 소리도 요란하고 쉴 줄도 모르는 것이 영락 남편의 부지런한 성깔과 꼭 빼 닮았다. 눈뜨는 아침부터 잠드는 늦는 시각까지 회사 일이 인생의 전부인 냥, 기뻐하고 고뇌하며 촌음을 다투는 그의 성실함과 잘 어울리는 시계이다. 연애 시절, 5분 늦게 나갔다가 가 버린 남편을 몇 시간 동안 기다리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약이 오르지만 약속 시간에 정확한 그를 탓할 생각은 없다. 거실의 째깍이는 나를 서두르게 하는 기술을 간직하고 있다.
부엌에서 보는 시계는 영광에서 근무할 때 연공 상으로 받은 것인데 우리 집에서 가장 정확한 시계이다. 남편의 출근 시간, 딸아이의 등교시간에 맞추어 식사시간을 조절하는 데 이용되므로 가장 신뢰받는 시계인 셈이다. 거실의 시계를 보면서 한 발 앞서 가는 부지런함을 일깨우고, 부엌의 정확한 시계를 통해서는 신뢰받는 인간의 면모를 생각해 본다. 안식을 누리는 안방의 시계를 바라보며 물러섬의 아름다움과 재충전으로 날아오르는 꿈을 꾸어 보기도 한다.
우리 집엔 작년 여름부터 사다 기른 퍼그 한 마리가 어느 사이에 8kg이 넘었다. 3년 동안 길렀던 ‘토실이’를 잊기 위해 1년의 기다림 끝에 사들인 애완견이다. 대인 시장에 나갔다가 발견한 퍼그 삼형제를 보고 30분 동안 만지작거리다가 안고 온 개이다. 늘어진 얼굴에 납작한 코, 매끄럽고 부드러운 예쁜 털을 가진 이티! 생김새가 하도 귀엽고 우스꽝스러워서 영화 속의 이티를 닮아 붙여 준 이름이다.
어렸을 때부터 강아지를 업고 포대기를 두른 채 소꿉놀이를 할 만큼, 나는 개를 좋아했다. 이른 시각에 일어나 집안일에 바쁘지만 이티에게 공들이는 시간도 여간 만만한 게 아니다. 욕실에 들어가 대소변을 가릴 줄 앎으로 키우는데 큰 애로는 없지만 털갈이의 뒤치다꺼리를 해 주어야 하므로 청소를 자주 해야 한다. 하루 종일 혼자서 집을 보다가 돌아오는 가족들을 반기는 이티의 사랑스러움은 피곤함을 가시게 하고도 남으니 그 녀석에게 공들이는 시간은 당연한 게 아닐까?
어쩌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을 못 이루거나 글이 풀리지 않을 때에도 이티는 좋은 친구가 되어 준다. 모두 곤한 잠에 든 시각, 말 친구가 필요할 때 이티를 깨우면 까만 눈을 굴리며 빤히 쳐다보는 그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이다. 음식 까탈을 부리지 않고 뭐든지 잘 먹어서 소탈하여 예쁘고, 장난 끼도 많고 애교도 여간 아니어서 즐겁게 하니 개를 길러 보지 않았거나, 본시부터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일일 것이다.
이티의 매력은 또 있다. 예뻐한다고 해서 주인을 업신여기지 않으니 아랫사람이나, 자식들이 본받을 일이요, 주어진 먹이를 한 톨도 버림이 없으니 음식 귀한 줄을 모르고 낭비하여 버리는 사람들이 생각해 볼 바이다.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는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련만 감사함을 아는 소치이리라. 또한 아무데서나 뒷일을 보지 않으니 술 한 잔 걸치고 급한 김에 아무데서나 실례를 범하는 양반들은 그 깔끔함을 배울 일이다. 거짓을 모르니 더 더욱 사랑스럽고 말이 많지 않아도 뜻이 통하니 친구 중에 최상인 것이다. 개만도 못한 인간이 되지 않으려거든 개를 구박하지는 말일이다.
나는 잎새를 다 떨구어 버린 겨울나무를 무척 좋아한다. 이른 봄에 파릇한 새 눈을 틔워 올리는 작은 생명이 대견해 보이고, 초여름의 대지를 연초록 물감으로 붓질하는 푸르른 나무들의 싱그러움도 희망이 있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늦가을에 제 할 일을 다 했다며 붉어진 얼굴로 석양에 물들어 단풍든 가을 나무도 가슴을 적시게 하는 데는 그만이다. 하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데는 빈 가지로 서 있는 겨울나무가 단연 으뜸이다. 홀로 서서 빈 하늘이 부르는 노래를 감상하며 지나온 계절을 반추하듯, 자람을 멈춘 채 내면의 자기 모습에 취해 한층 깊어진 얼굴로 세상과 화해하는 그 편안함이 부러워서이다. 봄, 여름, 가을 내내 힘들게 일해 온 뿌리를 쉬게 하고 다 자라 더 이상 보듬을 필요가 없는 이파리를 훌훌 띄워 보낸 그 여유가 부러운 것이다. 겨울나무처럼 내게 걸쳐진 옷자락을 훌훌 다 벗어버리고 홀가분하게 서서 빈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을까? 그 언제쯤…….
지난 스승의 날에 받은 선물 중에 가장 설레게 했던 것은 백합꽃 몇 송이였다. 아이들에게 선물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전달이 덜 됐는지 백합꽃이 배달되어 온 것이다. 퇴근 시간 무렵인데다가 꽂을 데조차 마땅하지 않아 집으로 가져 왔는데, 그 향기가 어찌나 좋은지 꽃만 홀로 두고 잠자는 게 미안해서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꽃향기를 맡으며 쓴 시이다.
백합꽃을 보며
네가 내게 오기 위해 나도 너처럼 그렇게
보낸 시간들이 순결한 때가 있었을까?
여섯 장 꽃잎 속에 나도 너처럼 그렇게
알알이 맺혔으니 고결한 향을 내뿜을 날이
이 밤, 자정이 넘은 시각에 내 생에 남아 있을까?
너를 홀로
세워 두지 못함이란다. 단 하루만이라도
순결한 향기를 지닐 수 있다면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단 한번만이라도
기쁨임을 노래하는 너는 고결한 숨소리를 낼 수만 있다면
아무런 말이 없이도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에 감사할 일이다.
고결하고 아름다운 것을! 서 있음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으리라.
홀로 피어서도 어느 한 순간 나도 너처럼
외롭지 아니함을. 꽃일 수만 있다면.
(1998.5.15 01:50)
나는 웃고 있는 아이들의 미소를 좋아한다. 우리 반에는 해맑은 얼굴에 왜소한 몸집을 가진 남자아이가 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발달의 정도가 더디어서 공부하는 일에는 서투르지만, 마음씨가 곱고 맑아서 생수 같은 아이이다. 공부를 잘 하고 똑똑한 아이들의 꾀부림과 영특함 대신에 정직함, 순수함으로 따뜻한 웃음으로, 나를 위로해 주는 아이이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마음 상하게 하는 일은 할 줄 모르는, 백합 같은 아이라고나 할까? 인간은 본래 착하기보다는 악한 존재라는 성악설이 그 아이에게는 적용되지 않으니, 그런 아이와 날마다 만나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선생인지 모른다.
나는 칼릴 지브란의 시집을 무척 좋아한다. 스무 살 안팎에 읽었던 ‘부러진 날개’와 ‘예언자’를 만나면서부터이다. 빌려주었다가 잃어버리게 되면 가장 섭섭해지는 책이기도 하다. 그의 글 속에 들어가 앉으면 빈 하늘과 만날 수 있고 백합꽃의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도 있으며, 겨울나무처럼 홀가분해져서 수도승이 되는 것이다. 그가 속삭이는 고독함 속에는 해맑은 웃음이 햇살처럼 퍼지기도 하고 사물을 끝없이 사랑하는 고운 눈매를 지닌 동심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그가 부르는 노래 속에서 멈춰선 시계의 한가로움까지 보태어 시간 여행을 떠나 중세의 삼나무 숲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멀리 시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다시 어른이 되어 버린다. 내가 어른이라는 사실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 곁에는 어른들보다는 아이들이 더 많으니 내가 어려지는 데는 보탬이 되지 않을까?
아이들 속에서 그들처럼 살아 있음의 감동에 펄펄 뛰고 싶다. 겨울나무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멈춰 선 시계가 되는 날까지. 한 송이 백합꽃의 향기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이티처럼 까탈 부리지 않으며 살고 싶다. 그리하여 들여다보면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시집 속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울 수 있었으면 한다. (‘98. 전남문학 가을호 수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