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 소개하는 글은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는 글입니다.
중국 합비 일중의 왕문교(汪文嬌)란 학생이 작년에 우리 서령고를 방문하고 돌아간 뒤, 그 소감문을 합비시 신안(新安)신문에 기고하고 그 기념으로 우리에게 신문 한 부를 보내주었습니다. 읽어보니 의외로 내용이 아주 좋고 또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읽으면 유익한 내용도 있는 것 같아 중국어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로 번역을 해서 이곳에 싣습니다. 좀 길지만 아주 재미있으니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수도 서울의 높은 물가
우리가 서울에 갔을 때는 주말이었고, 거리에는 사람과 자동차가 매우 많았다. 한국의 일인당 평균 소득은 중국의 10배 정도이며, 이 때문에 물가 역시 상당히 높았다. 나는 한국 친구의 도움으로 CD 이외에, 조그마한 한국 전통 공예품도 구입하였다. 그런 후 지하철을 타고 롯데월드로 향했다. 지하철 요금은 1000원, 인민폐로 약 7.8위안이었다. 차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 한 노인이 큰 소리로 무언가를 낭송하고 있었다. 나의 짝꿍 태준이가 설명하길, 설교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고 하니 문화의 또 다른 측면이라고 생각되었다.
오후에는 롯데월드에서 시간을 보냈다. 점심 식사를 하는데,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모두 한국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남학생들은 우리를 데리고 가더니 롤러코스터를 타자고 하였다.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타며 즐거운 경험을 한 후, 태준이와 함께 민속박물관에 갔다. 그곳에는 한국의 원시사회를 비롯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문화를 축소된 모형들과 함께 소개하여 한국의 과거 문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국민의 모습
'애국'도 '외국상품'을 쓰는 것이다. 한국은 과거부터 애국심이 높기로 세계에서 유명한 나라다. 국가의 좋은 인상을 홍보할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인지 우리가 한국에 가서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이 현대 자동차 아산 공장이었다. 로봇이 조종하는 시설 안에서, 안내해 주시는 분이 아주 자랑스럽게 그곳의 시설을 중국어로 설명해 주셨다. 관람객은 자유롭게 사진을 찍기도 하였는데, 어셈블리 라인은 단지 우리만 견학이 허용되었다. 아마도 이런 조치는 선진 과학 기술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한 조치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현대자동차 공장에 이어서 우리가 방문한 곳은 한서대학교의 항공종합교육시설인 한 비행장이었다. 그 곳은 학생들이 비행기에 대해 배우는 곳으로, 우리가 직접 비행기에 탑승하여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또한 시범 비행을 보여주었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많은 한국인들이 외국상품을 배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러나 이번 한국방문을 통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의 모습과는 또 다른 면을 많이 보았다. 한국인도 외국상품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방문단의 학생은 모두 홈스테이를 하였는데, 내가 생활한 가정에도 AIWA 오디오가 있었고, 많은 학생들이 ADIDAS 옷을 입고 펩시콜라를 마시고 있었으며, 우리 방문단의 또 다른 여학생이 지내는 집에서도 PNTENE 샴푸를 쓰고 있다고 하였다.
오늘날 한국의 경제 문화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외국 상품도 많이 사용하는 등 단지 국산품만을 고집하는 민족의 모습이 아닌 것 같았다.
한국의 학생 생활
선생님이 학생을 체벌한다? 서령고등학교는 7월 19일에 방학해서 8월 23일에 개학한다고 하였다.
태준이네 집은 학교에서 5분도 걸리지 않는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태준이는 나를 데리고 학교에 갈 때마다 후문을 지나 잔디밭을 통해 건물로 들어가며 나에게 속삭였다. "평소에 만일 잔디를 심하게 밟을 경우 선생님은 체벌을 한다." 세상에나! 난 중국에서는 교사의 체벌금지가 법률로 정해져 있다고 알려 주었다. 비록 내가 한국 선생님의 체벌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이 역시 학생의 모범적 행동을 위한 엄격한 기준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두 가지 이상의 외국어를 학습한다.
서령고등학교는 서산시의 사립 남자고등학교이며, 현지에서는 지명도가 높다고 하였다. 학교의 뒤쪽은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자연환경도 매우 훌륭하였다. 학생은 교실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교실입구에는 사물함이 배치되어있었고, 35개의 책상, 왼쪽에는 에어컨, 교탁 옆에는 커다란 TV가 놓여 있었다. 교실바닥은 나무판자로 되어 있는데, 생활하기에 쾌적하게 보였다.
한국은 외국과의 합작을 통한 발전을 매우 중시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인지 서령고등학교는 2학년 때부터 제2외국어를 선택하여 2개 이상의 외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양교(兩校) 교류에 참여한 한국 학생들도 중학교 때 중국어를 배웠다고 한다. 서울에서 서산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우리 20명의 학생들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어떤 학생은 기억을 더듬어 중국어로 말을 하였다. 1년여 넘게 중국어를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해 냈지만, 간단한 단어들뿐이었다. 그래도 한 학생이 먼저 말을 하면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큰 소리로 그 말을 따라서 말하는 등 순식간에 왁자지껄 시끄러워졌다. 우리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나자 더욱 친해졌고, 태준이는 나를 '지에지에(누나)'라고 부르고, 나는 태준이를 '띠디(남동생)'라고 불렀다. 나는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점점 물들어갔고, 한편으로 타국에서 우리의 모국어를 열심히 배우는 모습을 보고 정말 놀랍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하였다. 이것은 우리 중국과 한국의 우정에 대한 한 증거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이성교제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
학생들 중에는 꼭 장난꾸러기가 있게 마련이다. 중국학생도 그런데, 한국학생도 마찬가지였다. 둘째 날 학교를 참관하고 있던 중 30분 정도 휴식시간이 있었다. 그 때 한국 학생은 나에게 남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물었다. 아! 알고 보니 - 이렇게 소소하고 유치할 정도로 우스운 질문을 하다니 - 어느 나라의 학생이나 마찬가지구나.
오후에는 바닷가로 향했다. 우리는 물싸움, 공놀이를 하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는데, 그 순간만큼은 국적과 민족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 채 다만 함께 소리치는데 중국어와 한국어 그리고 영어가 뒤죽박죽 뒤섞일 뿐이었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이것이 우리의 열정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활력이 솟아났다. 그것은 중국학생이나 한국학생이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생활관습
한국인들은 청결을 중시했다. 한국의 위생과 질서의식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내가 다녀온 충남 서산은 조그마한 도시인데, 매번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시내를 벗어나는데 불과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거리는 대부분 폭이 5-6m, 정도인 협소한 왕복 2차선이었고, 행인도 그리 많지 않았다. 자가용과 자전거가 주요 교통수단이었으며 거리의 양쪽에는 가게가 이어져 있었는데, 모두 말끔하고 안락하게 치장되어있었다.
한국인은 집에 들어갈 때 모두 신발을 벗는 습관이 있었는데, 집 학교 또는 식당을 막론하고 모두 마찬가지였다. 실내 바닥은 매우 깨끗하여 양말만 신고 다닐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한국의 여자들은 전업주부가 많았다. 태준이의 어머니도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풍성한 아침식사를 준비하셨는데, 집안 일은 모두 어머니 소관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출근하시고 저녁에 귀가하시는데, 한국의 남자들은 모두 책임감이 무겁고 집안을 지탱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있는 듯하였다. 중국인들은 보통 일본과 한국의 여자들은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생각하는데, 지난 며칠 간의 관찰을 통해 느낀 바는 모든 가정의 구성원이 각기 서로 다른 역할을 이행하는 것일 뿐, 지위가 낮아 보이지는 않았다.
한국인은 여행을 좋아한다.
매 주말이 되면 한국인은 자가용을 타고 여행을 즐긴다. 서산은 바다가 가까운 도시이며, 고속도로 주변에는 골프 연습장이 자주 눈에 띠었다. 이런 시설을 이용하여 등산이나 수영 또는 다양한 운동을 즐기는 듯 하였다.
한 가지 소개하고 싶은 장면은 숙박시설이다. 바다에서 100m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숙박시설이 많았는데, 내부의 한 칸은 화장실이며, 다른 한 칸은 8-9평 정도 되는 거실에 TV, 에어컨, 냉장고, 주방시설이 완비되어 있었고, 한켠에는 이불과 베개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창문 밖에는 만개한 각종 꽃들이 심어져 있었으며, 발코니에서는 넓은 바다를 한 눈에 바라볼 수도 있었다. 이렇게 간편하면서도 안락한 시설을 모든 국민이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부러웠다.
한국은 어른을 공경한다.
한국은 현대화된 나라이지만, 어른을 공경하는 모습은 시종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한국의 이런 문화는 오늘날처럼 문명화된 사회에서 나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태준이는 장난기가 심한 학생인데,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매우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다음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하고, 헤어질 때도 마찬가지로 예의를 지킨다. 학교의 교무실 입구에도 '孝'라는 큰 액자가 걸려 있어 주목을 끌었다. 오늘날 평등을 추구하는 현상 속에서도 한국은 아직까지 이러한 고상한 예절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 중국인들이 괄목하여 볼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한국인들은 건강을 중시한다.
우리를 위해 통역을 해 준 언니는 합비대학을 졸업하고, 서령고등학교에서 수업 실습을 하고 있었다. 그 분이 나에게 '한국인은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알려주었는데, 이 점은 나 역시 들은 바가 있었다. 내가 지냈던 가정의 단지 내에는 헬스클럽이 무료로 운영되고 있었다. 태준이의 아버지도 매일 새벽 4시에 이곳에서 운동을 하신다고 하였는데, 과연 저녁마다 각종 운동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을 보시면서 연습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높은 신뢰감
한국에서 특별한 신뢰감을 느꼈다. 내가 지낸 가정의 대문 자물쇠는 암호로 열고 닫는 것이었다. 매번 대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면 자동으로 열렸는데, 태준이의 가족은 내가 보는 앞에서도 비밀번호를 입력하였다. 내가 자물쇠를 보는지 다른 곳을 보는지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또 공항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 다 쓰지 못한 한국돈을 인민폐로 환전하려면 환율상의 손해가 발생함으로 우리는 면세점에서 쇼핑을 하였다. 한국의 전통적인 복주머니가 눈에 띄어 빨간색이 있는지 물었다. 종업원은 창고에 가서 살펴보겠다고 한 후 바로 자리를 뜨고 그 자리에는 나와 다른 학생만 남겨졌다. 상점 안에는 많은 손님들이 쇼핑 중이었고, 작은 진열품이 많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쉽게 물건을 가져 갈 수도 있었다. 만약 중국에서 이런 상황이 생긴다면, 종업원이 자리를 뜨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지키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돌아온 후 빨간색은 없고, '손님이 원하는 색깔이 없어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하였다. 마지막 떠나기 전에 작은 감동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의 음식문화
한국의 여성들은 요리를 잘 했다. 한국의 음식 맛은 중국과 흡사했다. 한국에 가기 전에 교장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한국에 가서 음식문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외국에 갈 생각을 하지 마세요." 지난 며칠 간 나는 전형적이고 특색 있는 한국음식을 맛보았다. 김치와 불고기의 맛이 비교적 맵다는 느낌 이외에 다른 음식은 담백하였다. 한국의 여성은 모두 요리를 잘한다. 태준이의 어머니도 매일 아침 국수와 밀전병, 볶음밥, 김밥 등과 같은 많은 음식을 만들어주셨는데, 밖에서 사먹는 것 보다 훨씬 맛있었다. 또한 식사 때마다 직접 만드신 식혜와 달콤한 차를 마련해 주셨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세탁기보다 조금 더 큰 냉장대가 있었는데, 그것은 태준이 어머니께서 김치를 담그실 때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국인들은 식사 후에는 꼭 껌을 씹었다.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에 거의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기만 했던 것 같다. 식사를 할 때는 각종 맛있는 음식이 나의 위를 채우고, 식사가 끝나면 탕이 나오고 탕을 먹고 나면 차를 마시고 그 다음에는 과일과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한국 음식은 대부분 마늘을 사용했으며, 식후에는 껌을 씹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았는데 식당 입구에는 껌이 비치되어 있었다. 쉬는 시간에도 한국 학생들은 친절하게 과자와 음료수 등을 사와서 우리와 함께 먹었다. 그 친구들의 따뜻한 정은 잊을 수 없다. 또한 한국의 거리에서도 피자헛 가게를 보았는데, 태준이의 아버지는 요즘 한국 젊은이들이 패스트푸드를 좋아한다고 알려 주셨다.
중국과 비슷한 한국 문화
많은 한국인들은 한자(漢字)를 알고 있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오래된 고건축물에 한자로 쓰여있는 현판을 자주 보았다. 과거부터 우리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가 밀접했던 까닭에 많은 한국인들은 한자를 읽고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많은 학생들이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 태준이의 아버지도 2년 전에 중국어를 배우셨다고 하시면서 나에게 책을 보여 주셨다. 그 책 안의 촘촘하게 적혀 있는 글씨를 통해 열심히 공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한국에 도착한 날 저녁 환영회식장에서는 서령고등학교의 역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분은 중국어를 모르셨지만 한자를 많이 알고 계셔서 우리는 종이에 한자를 써가면서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외국인도 중국의 역사를 많이 알고 있구나 하는 자부심이 생기기도 하였다.
중국어의 한자 발음이 한국어와 유사하다는 것도 발견했다. 예를 들어, han guo(한국), zhong guo(중국), baba(아빠), mama(엄마), chun juan(춘권), leng mian(냉면) 등 아주 비슷하여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신기함과 편리함을 느끼기도 하였다.
MADE IN CHINA
통역 선생님의 말씀이 우리가 서울에서 쇼핑을 할 때 그 상품이 어느 나라에서 만들어졌는지 먼저 확인하라고 주의를 주셨다. 태준이의 어머니는 나에게 무척 잘 대해 주셨는데, 더구나 나에게 옷을 다섯 벌이나 선물로 주셨다. 중국에 돌아와서 확인해 보니, 그 중 네 벌이 'MADE IN CHINA'였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한국의 상품에는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 많습니다." 이 점 역시 우리 양국의 경제가 날로 가까워지는 증거가 아닌가 생각한다.
HOST FAMILY
태준이는 아주 멋진 남학생인데, 매일 저녁마다 우리가 찍은 사진을 홈페이지에 올려 나에게 보여 주었다. 외출할 때도 나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해 주었는데, 이 모든 것들이 한국 신사의 책임 정신이 아닐런지!
태준이의 아버지는 영어도 잘 하시기 때문에, 저녁마다 대화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매우 친절하시고 세심하게 보살펴 주셔서 마치 내가 그분의 딸이 된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머무르는 며칠 동안 어머니의 따뜻함을 느꼈다. 태준이의 여동생은 중학생이었는데, 통통하고 단발머리 소녀였다. 영어는 아직 잘하지 못했지만, 나를 볼 때마다 환하게 웃곤 하는 명랑한 아이였다. 태준이네 가족은 나를 데리고 외출할 때마다 영어로 설명을 해주셔서 특별한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이처럼 나를 존중해 주신다는 느낌에 고마움과 편안함을 동시에 느낀 소중한 가족이었다.
후 기
4박5일간의 방문 일정은 너무 빨리 끝났고, 나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 HOST FAMILY를 나와 서산을 떠났고 한국과 이별했다. 그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집에 돌아와서 지난 며칠 간 찍은 사진과 태준이가 보낸 편지를 뒤적거렸다. 기쁘면서도 동시에 슬픔이 밀려왔다. 이번 한국 기행은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과 깊은 인상을 안겨 주었다. 이 모든 것들이 오래오래 되새기며 음미할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