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출근하기 전 아침 밥상 앞에 앉아서 그 이름만 떠올려도 밥맛이 사라지려 한다. 학교에서 걸핏하면 친구들에게 주먹을 날리고 며칠 정신 차렸나 싶으면 아무 연락도 없이 무단결석을 계속하고, 얼굴이 멍들고 부었다 싶으면 노동판을 전전하는 아버지가 전날 밤 술 드시고 돌아와 행패를 부리고 갔음을 알 수 있는 아이. 애비 구실 못하는 자식의 허물을 알기에 당신 혼자 몸도 간수하기 힘든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손자 녀석 하나 있는 것을 애지중지하면서 뒷바라지 해보지만, 제 부모 말도 듣는 척 마는 척 하는 아이가 할머니 말씀을 귀담아 듣기나 하겠는가. 그래, 무슨 사건을 저질러서 학부모 내교 통지서를 받는 순간이면 불쌍하신 ○○이 할머니께서는 전후 사정도 모른 채 가슴 먼저 철렁 내려앉고 말아, 비 오듯 쏟아지는 눈물 훔치면서 교무실에 오셔서는“ 아이고 선상님, 지 얼굴 봐서 우리 손지 한번만 더 봐 주씨요. 흐흐.”울먹이는 모습을 보인 것이 올해로 벌써 몇 번째인가.
김○○.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이 애 생각만 하면 벌떡 일어나서 식은땀을 닦고 싶다. 오늘 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야 할 텐데. 혹시 친구들과 밤늦도록 동네 아파트 주변을 배회하거나 pc 방을 전전하지나 않을까. 어른들이 없는 빈 집에서 못된 아이들과 엉뚱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먹고 사는 일이 너무 힘들어 심야 거리에 좌판을 차려 놓고 생계를 유지하는 ○○부모님. 부부 간에 장사를 마친 후 이것저것 정리하고 집에 돌아오면 다음 날 새벽 서너 시경. 날마다 피곤에 지쳐 아무 생각 없이 쓰러져 잠들기도 바쁜 부모님의 고단한 삶을 보고 자랐기에, 어린 동생들의 아침밥을 짓는 일과 책가방 챙겨서 학교 보내는 일은 ○○ 몫이 되었는데, 그 착한 아이에게 어느 날 찾아 든 친구들의 유혹. 부모님이 밤 깊은 시간까지 자리를 비운 집에서 아무런 통제도 없다는 안도감에 그만 욕망의 덫에 걸리고 말았던 아이.
박○○. 평소에 과묵하고 착실하던 아이인데, 학급의 몇 몇 부잡한 친구들 꼬임에 넘어가 교실 통로 바닥에 거울을 받쳐놓고 여선생님 치마 속을 들여다보는 사건에 연루되어‘학교 내 봉사활동’처벌을 받게 되었는데 다른 학생들이 지나가며 “야, 변태! 재미 좀 봤다며?” 하고 놀리자 이를 너무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 학교에 나오지 않고 피시방을 전전하더니 무단결석이 잦아진 아이. 부모는 부모대로 멀쩡했던 아들의 갑작스런 좌절과 방황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담임선생님이 수차례 집으로 찾아가 상담도 하고 격려도 해서 최근엔 다시 학교에 나오고는 있지만 얼굴이 예전처럼 밝지 않은 걸 보면 한번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나 보다.
최○○, 윤○○, 김○○…. 아, 문제성 있는 아이들을 일일이 다 헤아리기 조차 힘들다. 그 하나하나 얽힌 사연을 들먹일라치면 남의 집 자식들이지만 짠해서 가슴 아프고, 내 일처럼 답답해서 속이 터지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스스로 원해서 잘못된 인생, 비뚤어진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진 경제적 삶의 궁핍과 그로 인한 가정적 불행을 어찌한단 말인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한번 나쁜 아이로 취급받다 보니 계속해서 쏟아지는 주변의 따돌림과 무관심 등, 사회․환경적 요인 때문에 심성이 비뚤어지게 된 많은 학생들이 치유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방황과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고 슬프다.
“저 막되 먹은 놈들, 한데 모아서 대안학교를 만들면 어떨까요?”, “저 놈들 다루느라고 이제까지 애간장이 다 녹아버렸으니, 이젠 다른 학교로 전학 보내버립시다.” “저런 녀석들 데리고는 담임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내년에는 저를 담임에서 빼주십시오.”
선생님들 입에서 오죽하면 이런 불만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겠는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때로는 밤중까지 학생들과 상담하랴, 가정방문하랴, 그러는 가운데 가르쳐야 할 수업부담은 많고 보고 공문은 하루가 멀다않고 쏟아지는 판이니, 불평할 만하고 짜증도 나겠다.
하지만 어쩌랴. 집에서 부모가 내팽개친 저 아이들, 겉으로 드러난 행실만 보면 어디 가서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아이들, 저들의 마지막 삶의 둥지인 학교에서마저도 천덕꾸러기 취급하고 별종인간 대하듯 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해서 어려서부터 자존감에 상처를 받고 자라는 아이들이 심성이 비뚤어지고 반사회적 일탈을 거듭하다 보면 결국 어른이 되어서도 범죄의 수렁 속을 헤매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준다 했던가. “우리 ○○, 웃는 얼굴이 참 보기 좋구나.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었나보지?” “○○아, 오후 수업 끝나고 별일 없으면 선생님이랑 탁구 한 게임할까?” “ 우리 ○○, 계단 청소를 아주 잘했더구나. 매사를 그렇게 열심히 하면 돼.” “○○아, 아버님 건강은 많이 좋아지셨니? 병원에 왔다 갔다 하느라고 가족들이 고생이 많겠구나.” 등등 마음을 주는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면서 머리라도 쓰다듬어 준다면 얼마나 좋아할 것인가.
교육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어떤 사랑도 자기헌신의 수고로움이 없다면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지적 측면에서 공부를 잘 가르치는 것도 물론 우리 선생님들이 할 일이지만 그보다 몇 십 배 중요한 것이, 그들이 조화로운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을 함께 나누며 가슴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무한한 가능성을 눈여겨 보아주는 일일 것이다.
오늘날 일선 교육 현장에서 생활지도가 큰 위기에 봉착한 원인 중의 하나가 입시중심의 경쟁적 교육체제 하에서 지적능력의 신장 쪽으로만 교육력을 집중하다보니 학생들의 인격 내지는 인성교육이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점이고, 신자유주의체제 하에서 물신숭배와 이기주의의 만연으로 날로 세속화되어가는 교사들의 교직관 때문에 예전과 같은 희생과 봉사의 교사상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들께서 힘든 줄 잘 압니다. 하지만 우리마저 저들을 버리면 저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다른 곳으로 전학을 보낸다한들 사고치고 오는 녀석들을 어느 학교에서 환영하며 받아줄 것이며, 너도 나도 담임을 고사한다면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저도 곁에서 돕겠습니다. 일이 있을 때는 퇴근 시간 좀 늦추면 어떻습니까? 문제가 심각할 땐 밤잠 좀 설치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물건 팔아 이문 남기는 장사꾼이 아니라 애들 하나라도 사람 만들려고 가르치는 교육자이니까, 지금 이 힘겨움 쯤 당연한 수고로 여기고 힘을 냅시다.”
결국 기대할 것은 우리 선생님들의 헌신과 열정뿐이다. 물론 학교의 노력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 가정에서의 부모역할이고, 청소년이 바르게 자랄 수 있게끔 국가차원에서 제반 여건을 조성하는 일도 시급하지만 그것들이 일조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선생님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교육애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이는, 정보화 시대를 맞아 사회변화의 속도가 가파를수록 교사의 역할이 축소되고 결국에는 단순한 지식전달자로서의 기능 밖에 더 할 것이 없으리라는 부정적 전망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인간의 성장과 관련한 삶의 영역에서 교육의 가치야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없이 소중한 것이라면, 우리 모두가 그런 역할과 소명을 부여받은 사람으로서의 책무성과 자긍심을 높여 나갈 때 교육의 미래는 분명 밝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