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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천추의 恨을 가슴에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물살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서둘러 사립문을 닫네.

- 단종의 '어제시' 중에서 -

10월 25일 토요일 오후 세 시. 청령포모텔에 도착.

애마를 타고 서산에서 꼬박 네 시간 반을 달려 온 길이다. 어느 외국인의 산장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멋진 서양식 건물이 여정에 지친 나그네를 반갑게 맞는다. 인터넷을 통해 사전 예약을 해 논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렇지 않았다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를 찾느라 한참을 헤맬뻔 했으니 말이다.

깊은 계곡과 울창한 숲. 그리고 산과 강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영월! 영월은 역시 냄새부터가 다르다. 영월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등산, 행글라이더, 래프팅, 스킨스쿠버 등 다양한 레포츠 행사를 안내하는 현수막들이 늦가을바람에 나부끼며 곳곳에서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그 유혹들은 온몸의 감각을 동시에 일깨워 양수겸장을 치기 때문에 웬만한 목석이 아니라면 그 유혹에서 벗어나긴 힘들 것 같다. 더구나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던 일상에서 벗어나 카키색 자유를 찾아 떠난 사람들임에랴.







<‘청령포’의 전경. 단종이 1457년 6월부터 두 달 동안 유배생활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삼면은 깊은 강물로, 나머지 한 면은 험준한 66봉으로 둘러싸여 천연의 요새로 불린다. 주변의 나무들 또한 단종을 향해 허리를 굽혀 절하고 있어 숙연함을 준다.>




<청령포 여객선. 청령포를 오가며 관광객을 실어나른다.>




<천연기념물 제349호 관음송(觀音松)이다. 단종의 비참한 유배생활을 직접 보고 또한 그 통곡소리를 곁에서 들었다고 해서 볼 '관(觀)' 자, 소리 '음(音)' 자를 써서 '觀音松'이라 불린다. 높이 30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5미터이며 지상 1.2미터 높이에서 두 가지로 갈라졌고, 갈라진 두 가지의 밑둘레는 각각 3.3미터와 2.95미터이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이 나무의 갈라진 가지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유서 깊은 나무이다.>

아름다운 단풍마저 쓸쓸하게 느껴지는 가을, 원통하게 돌아가신 단종의 원혼이 느껴짐인가? 오늘따라 바람도 세차고 소란스럽게 들려오는 물소리에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진다. 마음껏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 왕좌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과의 평범한 일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단종의 꿈을 저 차가운 물 속에 매몰차게 던져버리고 말았으니 이 속인들의 죄를 어찌 다 씻을 것이냐. 상념에 잠겨 한참을 걷다보니 발길은 어느새 관음송 앞에 이르러 있었다.

단종이 이 나무에 걸터앉아 흘린 비탄과 피눈물을 고스란히 목격했을 충성스런 나무.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분다. 바람이 불자 관음송은 단종의 애절한 사연을 되새김질하듯 온 몸을 흔들어대며 운다.
소나무, 눈서리 이겨내고 비 오고 이슬 내린다 해도 웃음을 보이지 않으니 초목의 군자로다. 소나무에 달이 뜨면 너는 잎 사이로 달빛을 금모래처럼 체질하고 바람이 불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구나
- 사명대사의 ‘청송사’ 중에서 -

관음송 뒤쪽으로 나있는 한적한 오솔길을 따라 오르니 육봉산의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났다. 그 길 옆 초라한 숲 속에 단종이 유배지 주변의 막돌을 날라다 직접 쌓았다는 ‘망향탑’이 보인다. 탑을 구성하고 있는 돌덩어리 하나 하나에는 아직도 어린 단종의 슬픈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는 듯 슬픈 형상을 하고 있다.




<단종이 직접 막돌을 날라 쌓았다는 망향탑의 전경>




<탑 쌓기도 지치면 왕비 송씨가 있는 한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오래도록 시름에 잠겨 앉아 있었다는 노산대. 높이 80m의 절벽 위에 있다.>




<노산대에서 바라본 서강의 쓸쓸한 풍경>




<왕방연 시조비에서 바라본 청령포의 풍경. 여류(如流)처럼 달리는 구름들이 고요한 강물에 어리고 무심한 나룻배는 무슨 상념에 젖어있나. 우리야 어리석어 님의 뜻을 알 수 없네.>




<복원된 ‘단종어가’의 모습이다. 단종어가는 승정원일지의 기록에 따라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재현해냈다. 어가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가 있으며 밀납인형으로 유배 생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어가 담장 안에는 유지비각이 설치돼 있다.>




<단종의 어소를 찾아와 배알하고 있는 선비의 모습. 밀랍인형>




<단종의 음식을 수발하던 시녀의 모습>




<관풍헌에 선 필자. 관풍헌은 단종 임금께서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약을 받고 요절한 비운의 장소이다.>










<유배지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조 때 세워졌다는 ‘금표비’이다. 금표비에는 남북으로 삼백 구십 척, 동서로 백 십 척 밖으로 출입을 금한다는 글씨가 선명하게 씌어 있다.>






<영월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도토리묵>

망향탑에서부터 소요음영하며 한 발 한 발 천천히 나아가니 흐르는 듯, 멈추어 있는 듯 유장한 세월의 가락을 따라 흐르는 에메랄드 빛 서강과 조개껍질처럼 둥글게 다듬어 놓은 아름다운 전망대가 안전에 펼쳐진다.

한걸음에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조망해보니 서강의 시리도록 맑은 물과 시원스레 솟아있는 선돌, 만산홍엽의 단풍 짙은 가을경치가 절경이다. ‘아, 이곳이 바로 선경이로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토해진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나그네의 마음 속에서 600년 전 단종의 넋이 저 아래 서강에 번져 이토록 슬프도록 아름다운 풍경이 연출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숙연해졌다.

망향탑을 알현하고 전망대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다보니 노을은 시나브로 사라지고 서강이 검게 변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저녁이 된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모텔로 다시 돌아와 근처 식당을 찾아보았지만 초행길이라 도대체 어느 집의 음식이 맛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텔에서 편안히 주문을 해서 먹을걸’ 하는 후회를 하며 한참을 헤매다가 ‘맛집’이라고 붓글씨로 크게 써 붙인 식당이 있기에 들어갔더니 마침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근처에선 꽤나 유명한 식당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격이 되었다.

뚱뚱한 몸집에 스마일표 앞치마를 두른 마음씨 좋게 생긴 50대 초반의 아주머니가 손크게 차려준 된장찌개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영월에서 직접 농사지은 쌀과 양념으로 요리한 것이라고 했다. 특히 강원도산 도토리묵은 정말 맛이 좋았다. 내가 연신 맛있다고 감탄사를 연발하자 주인아주머니가 한 그릇을 더 가져다 주셨다. 마지막으로 식당에서 주는 달콤한 감주로 입가심을 하고 식당 문을 나서니 주변은 이미 짙은 어둠으로 덮여 있었고, 동강 래프팅을 안내하는 아크릴 간판만이 저물어 가는 가을과 함께 화려한 불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맛있는 저녁을 마치고 맥주 한 캔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니 하루의 피로가 밀물처럼 밀려와 몸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지만 이상하게 정신은 은화처럼 맑다.

낮에 동강휴게소에서 먹다 남긴 마른 오징어를 안주 삼아 자작을 한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침대에 누워 깊어 가는 청령포를 바라보며 캔을 기울인다. 하늘에는 성긴 별이, 서강에는 낯선 나룻배의 불빛이 개똥벌레의 불빛처럼 어른거린다. 잃어버린 추억에 취하고 가슴 시린 낭만에 취하고 시원한 맥주에 취하고 고민에 취하고 게다가 밖에는 영월의 포근한 인심까지….

열려진 창틈으론 동해의 시원한 가을바람이 스친다. 갑자기 아련한 그리움과 간지러운 행복감이 밀려온다. 아, 이 순간 나에게 있어 아름답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대오각성의 깨달음도 잠시, 노독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객수감에 취하고 역사의 아이러니에 취해 그만 나도 모르게 스르르 달콤한 잠에 빠져든다. 어두워 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 또한 잠시 일상의 힘든 업무를 잊고 구름이 되고, 파도가 되고, 물새가 되어 하늘을 난다. 청령포에서의 고독은 그렇게 서서히 침잠하며 묻혀가고 있었다.

다음날,
영월의 아침은 유난히도 일찍 찾아왔다. 청령포의 태양은 나보다 한발 먼저 달려온 듯 단종이 묻히신 장릉을 찬란하게 비추고 있다. 장릉은 단종이 유배되었던 청령포로부터 약 2km 남짓한 곳에 모셔져 있었다.

1457년 열일곱 살이라는 푸르디푸른 나이로 광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실 때 같은 또래의 사랑하는 왕비 송씨가 보고싶어 차마 눈을 감지 못하자, 출세에 눈이 먼 군졸 하나가 달려들어 뒤에서 단종의 목을 졸랐다고 한다. 그러자 갑자기 맑았던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일며 벼락이 떨어져 단종의 목을 조르던 그 군졸을 죽였다고 하니 아, 하늘도 무심치 않았던 모양이다.

무덤가 아침이슬에 젖은 서너 평의 조락한 잔디밭에는 푸른 이끼가 선명하고 낙엽이 핏빛처럼 붉은 만산엔 저승을 떠도는 단종의 원혼이 서려있는 듯 서글프다. 무심한 태양도 단종의 원혼을 위로하는 듯 한참동안이나 비문에 따사로운 햇살을 비춰준다.

겨우 70평생도 살기 어려운 찰나 같은 인생. 그 인생에서 옥신각신하며 싸우다 한 줌의 썩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일진대 어찌하여 사람들은 이 같은 잔인한 짓을 거리낌없이 저지르는가. 얼마나 더 호화롭고, 얼마나 더 영화롭게 살겠다는 것인지 나그네는 주체할 수 없는 울분에 한동안 무덤 곁을 서성였다.

단종의 원혼을 장릉에 남겨두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니 구름이 걷힌 동녘하늘엔 가을이 이미 저만치 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단종의 원혼이 어른거리다 사라진다. 님의 모습은 신기루처럼 멀고 님의 통곡소리는 들을 수 없는 거리에서 환청으로만 남을 뿐! 육륙봉 사이로 사라지는 한 줄기의 햇살을 바라보며 필자는 어린 임금의 억울함도 저 아름다운 아침햇살처럼 저항 없이 하늘 속으로 스며들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통곡! 단종의 넋이시여 부디 이승에서의 온갖 고통 적멸하시고 평안히 영면하소서.






비운의 임금 단종이 잠들어 있는 ‘장릉’의 모습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다. 1457년(세조3) 금성대군 유(瑜)가 중심이 된 단종 복위 계획이 탄로되어 영월에서 사사되자 영월호장 엄흥도가 몰래 매장했다. 1681년(숙종 7)에 대군으로 추봉했고, 1698년 추복하여 묘호를 단종이라 하여 종묘에 부묘하고 능을 장릉(莊陵)이라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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