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딸인 저도 잘 하겠지만, 아빠 많이 위로해 주셔요. 학교에서 교감선생님 노릇이 얼마나 힘드신지, 집에만 계시는 엄마는 잘 모를 거여요. 저는 날마다 우리 학교 교감선생님의 하루 일과를 지켜보며 마음 속으로 생각해요. 과연 우리 아빠의 간과 쓸개는 온전할지. 오랜 평교사 생활 끝에 승진하셨다고 온 가족이 좋아했지만, 그 기쁨도 잠시. 나이 들어 몸으로 뛰어야 하는 수업의 짐이야 덜었지만, 학교관리자가 되었으니 편할 것이라는 사회적 인식과는 정반대로 학교의 궂은 일은 다 도맡아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은 거의 받지 못하는 자리이다 보니 마음고생이 오죽하시겠어요? 그런 아빠 생각하면 하루에도 몇 번 씩 목이 메어오곤 해요. 학교에서 교감의 위치는, 위로는 학교장을 받들어 모셔야 하고 아래로는 수십 명의 교직원들, 그 생각 다르고 개성 각각인 사람들 불평 안 나오도록 다독이고 설득해서 교육활동이 잘 이뤄지도록 이끌어가야 해요. 그런데 요즘은 선생님들이 교장이나 교감 같은 상사의 지시에 고분고분 순응하기보다 자기 입맛에 안 맞으면 사사건건 이유를 들어 반발하고 교직단체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는 경우도 많다 보니 더 힘들 수밖에요.”
사범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운 좋게 곧바로 임용고시에 합격해 큰 기대를 안고 설레는 가슴으로 교단에 선 딸이, 한 집안의 기둥이신 자기 아버지가 교감의 직위를 가지고 학교라는 직장에서 겪어야 하는 마음고생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어느 날 엄마를 붙들고 쏟아내는 딱한 하소연을 전해 듣다 보면, 이 땅의 교감선생님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도 안타까워서 가슴이 저려온다.
필자의 경우 현재의 전문직으로 오기 전에 일선 학교의 교감역할을 4년 남짓 이미 수행한 바 있어, 그 힘든 처지에 대한 공감이 남다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는 것은 초·중·고를 막론하고 일선 학교의 교감들이 감수해야 하는 아픔이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의 장학력 내지는 교육력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교육혁신 차원에서 특단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하겠다.
초·중등교육법 20조에 보면, ‘교감은 교장을 보좌하여 교무를 관리하고 학생을 교육하며, 교장이 부득이한 사유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그 직무를 대행한다’고 그 임무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막중한 임무만 부여하면 그걸로 끝인가? 그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필수적인 최소한의 권한마저 갖지 못할 때, 아니 권한이 있다손 그것이 있으나 마나해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것이라면 어떻게 주어진 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는가.
교장과 선생님들 사이에서 싫다, 좋다, 아무 말도 않고(아니 못하고) 그냥 ‘허허’ 웃어야만 하기에 ‘물렁뼈’니 ‘샌드위치’라는 비아냥을 듣는가 하면, 무기력에 빠져있는 선생님들을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게 하여 위에서 밀어붙이는 각종 교육정책들을 현장에서 구현해야 하기에 ‘나팔수’라는 호칭까지 얻어야 하는 서글픈 교감. 하지만 정말로 분통터지고 억울한 것은, 그 위치적 애매성과 권한적 모호성 속에서도 자기역할을 다하느라 언제 한번 편하게 자리에 앉아 신문 한 장 들척여볼 여유조차 없건만 사람들은 교감을, 아무 할 일도 없는 ‘노는 사람’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감의 주 업무 중의 하나이고 주력을 쏟아야할 교내장학활동만 하더라도, 그것이 단위학교의 교육활동을 활성화하고 교사 개개인에게 효과적인 수업능력 향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장학활동과 관련한 고도의 전문성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또 틈나는 대로 책을 읽어야 하고 연수도 받아야 하지만 그럴 여유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오늘은 폭행, 내일은 금품갈취 식으로 별의별 학생 사고는 날마다 터지고, 학교가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한다 싶으면 학부모들은 곧바로 학교에 찾아와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얼토당토 않는 민원을 제기하는 상황에서 ‘형사반장’ ‘민원해결사’ 역할까지 수행해야만 하는 교감으로서 제대로 된 장학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와 역할을 다해내기 위해서는, 결국 개인적 삶과 인간적 자존심은 거의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도 좋은 소리 못 듣고 끊임없는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깊은 무력감에 젖어 살아야 하는 이 땅의 교감이라는 자리. 무슨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교감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국가나 사회가 최소한 그들에게 보람을 느끼며 일할 수 있는 여건은 만들어 주어야 한다. 교육혁신 백 번, 천 번 외치면 무엇하는가. 교육현장의 선두에서 힘차게 이끌어 가야하는 학교의 교감들이 물에 젖은 솜처럼 지쳐있는데.
책무가 가벼운 자리는 없겠지만 학교경영의 실무적 집행자인 교감은 어쩌면 교장보다 더 중요한 존재다. 그들의 사기가 높아지고 마음에 신바람이 부는 일이야말로 침체에 빠진 학교 현장을 살리는 첩경이다. 가능하다면 교장에 버금가는 처우개선도 도모하고 실질적인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관련 제도나 법령을 손보는 일이 뒤따르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