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이 각광받는 세상이다. 제주의 올레길이 우리나라 최고의 관광코스가 되었고, 전국의 지자체마다 옛길을 찾아내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앞만 바라보고 바쁘게 살았다. 머리 아픈 일도 많았다. 여유를 누리면서 스트레스를 풀자는데 마음이 모아졌다. 직원들끼리 오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계획했다. 어느 날 부턴가 그 목적지가 충북의 최고 오지마을이자 삼도(충북, 경북, 강원)의 접경마을인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로 결정되었다. 의풍리는 우리 학교 박성례 행정실장의 고향이자 유승봉 선생이 근무했던 곳이다. 빈말로 했던 얘기가 착착 진행될 만큼 끈끈한 인간관계도 여행을 떠나는데 한 몫했다.
청주를 떠나 신나게 달려온 차가 어느새 단양시내를 지나 고수대교를 건넌다. 고습재 아래로 펼쳐진 단양시내의 풍경이 멋지다. 30여 년 전 나는 이곳의 도전분교에서 2년간 근무했다. 강변의 도전리는 20여 호의 작은 마을이었고, 고수동굴이 있는 강 건너편으로는 관광버스들이 부지런히 오갔지만 다리가 없던 시절이라 그림의 떡이었다. 충주댐으로 구단양이 수몰되어 50여 분 걸어야 시내버스를 탈 수 있던 이곳에 신단양이 들어섰다.
단양을 지날 때마다 가난했지만 정이 넘쳤던 그 시절과 그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운동회 연습하는 분교의 작은 운동장으로 막걸리 주전자 들고 찾아오던 할아버지, 운동회 날 아침 일찍 운동장을 깨끗하게 쓸고 국밥까지 대접하던 학부모, 깨끗한 자연만큼이나 꾸밈이 없고 순박하던 아이들이 늘 내 마음속에 추억과 낭만으로 존재한다.
차가 군간나루의 식당 앞에 잠깐 멈췄다. 이 지역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역이라 유난히 전투가 많았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있지만 군간나루는 야전병원과 같이 부상병을 치료하고 간호했던 중요한 장소였다.
주민들이 강물에서 막 잡아온 다슬기를 크기별로 분리하고 있다. 1㎏에 만원씩 판매하는 다슬기를 보고 있노라니 더운 여름날이면 강가로 나가 아이들과 다슬기 잡던 시절이 떠올랐다. 군간교를 건넌 후 다시 강변도로를 달려 영춘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영춘향교의 오래된 역사에 비해 길거리 풍경에 활기가 없다.
산굽이를 돌던 차가 평지로 내려서더니 동대리를 지난다. 예전에 동대초등학교가 있던 곳이다. 다시 한참 고갯길을 올라 베틀재 정상에 도착했다. 삼풍정 정자에서 의풍방향으로 이어지는 베틀재의 굽이 길을 내려다봤다.
개통기념비를 읽어보니 '해발 651m의 베틀재는 삼도(충북, 경북, 강원)를 볼 수 있고,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로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각각 30리이며, 삼도의 문물이 오고간 역사 속의 대로'라고 써 있다. 박 실장은 버스비 500원을 군것질하고 2시부터 8시간을 걸어 밤 10시경에 도착해 집안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철부지 여중생 시절을 떠올리고, 유 선생은 도로를 포장하기 전에는 교육청에 다녀오던 학교 기사가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했을 만큼 험난한 고갯길이었다는 것을 얘기한다.
아! 그렇게 보고 싶던 의풍리가 바로 눈앞이다. 하지만 일정상 마을을 자세히 둘러보는 것은 하루 미루고 생가를 방문한다는 농담을 하며 고갯길 끝에 있는 박 실장의 고향집에 들렀다.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는 지금의 잣대로는 이곳에서 10남매가 자랐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비좁은 줄, 가난한 줄 몰랐어도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웠던 그 시절이 그립다.
산딸기로 배를 채울 만큼 집주변에 먹을거리가 지천이었다는데 앞마당의 나무가 주인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과일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빈집이지만 토방에 놓여있는 고무신, 식수로 사용했던 샘, 부엌 옆 작은 창문, 지붕사이로 보이는 큰 밤나무가 이 집안사람의 생활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박 실장은 지금은 풀 넝쿨이 문살을 타고 오르는 작은 창문에 애착이 많았다. 방에 누워있으면 그 창문으로 부엉이 울음소리와 달빛이 스며들었다며 감수성을 키워준 고향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토방에 놓여있는 고무신의 주인 때문에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집밖으로 나오니 계곡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운무가 의풍리의 풍경을 더 아름답게 한다.
935번 도로가 의풍리를 지나는데 영부로는 단양군 영춘면과 영주시 부석면을 이어주는 도로이다. 박 실장의 고향집이 있는 용담에서 200여m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쉼터가 조성되어있다. 이곳은 영월에 유배된 비운의 임금 단종과 순흥에 안치된 숙부 금성대군에 얽힌 유적이 있는 경북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수령 200년의 소나무와 300년의 음나무 보호수가 볼만하다. 남대리 방향으로 가면 우리나라 건축의 백미라는 부석사를 만날 수 있다.
의풍리는 삼도의 접경지역에 위치한다. 경북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와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가 이웃이다. 의풍리에 오면 가까운 거리에서 삼도 땅을 밟아볼 수 있다. 우리 일행도 남대리 쉼터와 와석리 김삿갓 유적지를 찾으며 3도 땅을 밟았다.
의풍리 앞 계곡의 맑은 물이 와석리의 김삿갓 계곡으로 흘러가고, 의풍분교장이 폐교되기 전에는 와석리 아이들이 의풍으로 학교를 다녀 의풍리와 와석리 사람들은 가깝게 지낸다. 의풍리의 다른 지명인 와곡리도 와석리를 닮았다. 와석리로 가 김삿갓 유적지를 둘러보고 김삿갓 묘 위쪽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2년 전 김삿갓 계곡 옆 식당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다 먹었던 음식보다 훨씬 맛있다. 이곳으로 오며 밭에서 옥수수와 담배를 많이 봤는데 식당 옆에 건조실이 있다. 불현듯 담뱃잎을 기다란 줄에 꼬여주고 용돈을 받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역사는 잘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하다. 유 선생과 의풍 사람인 최병철씨는 작고 볼품없던 김삿갓 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뒤늦게나마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유적지가 되었으니 다행이다.
書堂來早知(서당내조지)/ 房中皆尊物(방중개존물)/ 生徒諸未十(생도제미십)/ 先生來不謁(선생내불알)
저녁 먹고 의풍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유 선생이 김삿갓의 욕설 시로 유명한 욕설모서당(辱說某書堂)을 들려준다. 어느 추운 겨울날 김삿갓이 시골 서당에 찾아가 재워주기를 청하다 훈장에게 미친 개 취급당하며 쫓겨날 때 써 붙이고 나온 시다. 소리 나는 대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는 욕설모서당을 풀이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의풍리는 산촌생태마을로 거듭날 준비를 하며 폐교된 의풍분교장을 숙박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월중행사 등을 쓰던 칠판이 걸려있는 옛 교무실 자리에서 위원장, 이장, 최병철씨와 술잔을 기울였다. 박 실장의 고향 친구 병철씨가 이것저것 챙기며 우리를 뒷바라지 했다. 인천에 살다 귀향한 병철씨는 스쿠버, 암벽등반을 즐겨하는 마을의 보배였다.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고 있는 연인들과 대화도 나눴다. 동해시에서 왔다는 젊은이들은 캠핑하기에 너무 좋다고 즐거워했다. 계곡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인생살이를 즐기다 늦게야 잠에 들었다.
아침 일찍 학교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교문 옆 이순신 장군 동상, 화단의 독서하는 소녀상, 덩그러니 놓여있는 시소, 발판이 떨어져 나간 그네,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 등이 폐교임을 알려준다. 때로는 작고 적은 것이 더 소중하고 낡고 초라한 것에서 더 정을 느낄 때가 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은 의풍분교장의 모습이 그러하다.
남동쪽은 소백산이 가로막고, 다른 삼면은 남한강에 둘러싸여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육지 속의 섬'이었던 영춘면에서도 가장 오지마을이 의풍리이다. 오죽하면 30여 년 전 김종호 도지사가 의풍을 찾았을 때 500년 만에 도백이 다녀간다며 주민들이 환영하는 모습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었다.
의풍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물 좋고, 산 높고, 땅이 걸어 사람이 살기에 좋은 삼풍(三豊)으로 조선 중기 때부터 황해도나 평안도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피난처로 삼았다는 곳이다.
마을 입구의 의풍1리 자랑비에 '3도의 접경마을로 충청북도 최북단 동부에 위치하고, 고려 말부터 양백지간과 삼풍지간을 믿는 정감록파들이 산속에서 화전을 일궜으며,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의 분기점이라 옛부터 풍진이 많은 지역이었고, 동학혁명 때는 최시형 교주의 처가마을이었으며, 의병난리 때는 의병들의 은신과 훈련장이었다'고 써있다.
양지말교와 의풍1교, 펜션을 닮은 새집과 담벼락이 허물어진 헌집, 페인트칠이 벗겨진 의풍분교장과 새롭게 단장한 보건진료소 등 어쩌면 의풍리는 옛 것과 새로운 것이 자연스럽게 공존해서 더 아름답고 정이 가는 곳이다.
의풍분교장 옆으로 흐르는 물은 김삿갓 계곡을 거쳐 대야리 앞에서 동강과 서강의 물이 합쳐진 남한강 물줄기와 하나가 된다. 이 물이 영춘, 단양, 충주, 여주, 양평을 거쳐 서울로 흘러가 한강물이 된다.
의풍에서 나와 영춘을 거쳐 오사리 강가의 래프팅장으로 갔다. 이곳에서 상리의 느티마을 앞 북벽까지 래프팅을 즐길 수 있다. 래프팅은 기본이 안전이라 구명조끼를 입고, 헬멧을 써야 한다. 보트에 오른 우리 일행도 '하나 둘~ 셋 넷~, 영차~ 영차~'를 크게 외치며 패들을 힘차게 저었다. 안전한 곳에 이르면 동료를 물에 빠트리고 좋아하다 같이 물에 빠지기도 하고, 보트에서 내려 막걸리 한잔 마시는 시간도 주어진다.
북벽은 느티마을 앞 남한강가에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석벽으로 철쭉이 만발하는 봄철과 단풍이 물드는 가을철에 풍광이 아름다워 옛 시인과 묵객들이 풍류를 읊으며 남긴 암각들이 많다.
고구려의 영웅 온달의 충성심과 그의 아내 평강공주의 사랑을 테마로 조성한 온달관광지가 영춘면에 있다. 평강왕 때의 바보 온달과 울보 평강 공주의 이야기는 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현대의 어떤 로맨틱 소설보다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서 래프팅을 마치고 드라마세트장, 온달동굴, 온달산성이 있는 온달관광지로 향했다.
온달조형물과 향토음식점을 지나 관광지로 입장하면 연개소문, 태왕사신기, 바람의 나라, 천추태후 등을 촬영한 드라마세트장이 맞이한다. 세트장은 중국 당나라 궁궐, 고려 궁궐, 성곽, 저자거리, 옛 민가, 정원 등이 대규모로 재현되어 있다. 공원을 돌아보면 테마공원을 비롯해 온달미니산성, 윷판바위, 온달손가락 조형물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261호인 온달동굴은 총 길이가 800m인 석회암 동굴로 진입로가 수평을 이루고 지하수량이 풍부해 여름철에도 시원하다. 뚱뚱하거나 키가 큰 사람은 고생할 만큼 낮고 좁은 곳을 여러 번 통과하는 것도 재미다. 종유석과 석순 등이 잘 발달되어 내부 비경이 웅장하고 극락전, 연화, 만물상, 코끼리, 해탈문, 선녀와 나무꾼, 500나한상, 부부상 등 아기자기한 석순이 많다.
학회에서 나온 분이 석순에 있는 이끼를 핀셋으로 제거하는 모습을 봤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석회암동굴들이 몸살을 앓지 않으려면 관람객들이 유의사항을 잘 지켜야 한다. 온달장군이 신라군을 막기 위해 남한강을 굽어보는 요새에 쌓은 온달산성(사적 제264호)은 드라마세트장에서 900여m 거리의 산위에 있다.
이틀 동안 돌아본 의풍리와 남한강 주변, 온달관광지가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늘 앞장서 직원 분위기를 화목하게 만드는 교장 선생님 덕분에 즐거운 여행을 했다'는 말을 예서제서하며 청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