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좌 안동, 우 함양’으로 불리던 선비의 고장이 함양이다. 선비마을답게 함양군내에 정자와 누각 100여 채가 보존되고 있어 우리나라 정자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이 서상면과 서하면으로 흘러내려 남강으로 이어지는 물줄기 화림동계곡! 영남의 유생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덕유산의 육십령을 넘기 전 지나야 했던 길목이다. 이름 그대로 화사한 꽃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이곳의 기암괴석과 넓은 암반, 반석위로 흐르는 맑은 물과 아기자기한 정자, 냇가 주변의 멋진 소나무가 무릉도원을 만든다.
10월 3일, 팔담팔정(八潭八亭)으로 유명한 화림동계곡을 찾아 길을 떠났다. 통영대전고속도로 서상IC를 빠져나와 26번 국도를 타고 계곡의 멋진 자연풍경에 시선을 빼앗기다보면 봉정마을 앞에 거연정(경남유형문화재 제433호)이 있다. 거연정에서 농월정까지 물길을 따라가며 물가에 있는 정자를 살펴봤다.
한 폭의 그림처럼 멋진 자연경관 속에 정자가 들어있어 풍류를 만끽할 수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 건물로 1613년에 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숙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내부에 뒷벽을 판재로 구성한 방을 1칸 두고 있다.
거연정(居然亭)이라는 이름처럼 사람과 자연이 한 몸이 되는 곳으로 자연 속에서 살고 싶어 하던 옛 선비들의 마음이 나타나있다. 정자 아래편 화림교(구름다리)에서 바라보면 맑은 물이 흐르는 소와 기암괴석의 암반이 정자를 돋보이게 한다.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거연정에서 안의면 월림리 농월정 국민관광지까지 6.2㎞ 구간에 선비문화탐방로가 조성되어 있다. 선비문화탐방로는 선비들의 숨결이 묻어있는 숲과 계곡, 정자의 자태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다. 탐방로가 시작되는 화림교에서 30여m 아래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군자정과 영귀정이 마주하고 있다.
군자정은 일두 정여창을 기리기 위한 정자이다. 정여창은 처가가 서하면 봉전마을이어서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전해진다. 큰 바위 위에 자리 잡은 정자가 군자가 올라 쉬었던 곳이라는 이름처럼 작지만 당당하고 기품이 있다. 주춧돌이 없는 기둥들이 책상다리 자세로 정자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군자정 아래 계곡으로 내려서면 큰 바위들이 많은데 건너편의 반석에 영귀대라는 붉은 글씨가 써있고 뒤편으로 팔각정자가 보인다. 영귀정(詠歸亭)을 만나려면 다시 화림교를 건너 나무그늘이 시원한 데크길을 걸어야 한다. 노래하면서 돌아온다는 안빈낙도, 낙향하여 시를 짓고 읊는 곳이라 전국의 경치 좋은 곳에 영귀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많다. 이곳의 영귀정은 최근에 개축한 듯 고색의 흔적이 없고 새로 건축한 개인 소유의 정자가 물가에서 자연과의 조화를 깨며 주객을 바꿨다.
동호정(東湖亭)은 화림동계곡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정자로 동호 장만리를 추모하여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장만리는 조선의 성리학자로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등에 업고 의주에서 신의주까지 피란한 충신이다.
정자의 기둥은 아래편 바위의 모양새에 맞추느라 길이가 제각각이고 통나무는 선도 고르지 않다.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도 다듬지 않아 거칠고 투박하지만 오히려 자연스러움에서 멋을 찾으며 자연과 동화되고자 했던 선비들의 지혜가 느껴진다. 계단을 올라가면 마루 입구에 놓인 고무신 한 켤레가 세월의 흐름과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린다.
동호정이라는 이름이 동쪽에 있는 호수의 정자를 뜻하듯 정자에서 내려다보면 물길이 제법 넓은데 냇물의 가운데에 차일암의 넓은 암반이 바위섬처럼 펼쳐져있다. 차일암(遮日巖)은 해를 가릴 만큼 크고 수십 명이 편히 앉아 쉴 수 있을 만큼 평평한 너럭바위다. 곳곳에 새겨진 글자를 통해 요즘 더운 날 차일로 만든 그늘에서 휴식을 하듯 옛 사람들은 이곳에서 악기를 연주하고(금적암), 노래를 부르고(영가대), 술을 마시며(차일암) 풍류를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산책로 풍경
거연정에서 농월정까지의 선비문화탐방로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둘레길 못지않게 풍경이 수려하다. 또한 두 사람이 다정히 손잡고 걸을 수 있을 만큼 정비가 잘되어 걷기에도 편하다.
같은 길도 누구랑 걷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계곡의 물소리는 똑같은 소리를 오래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정겨운 시골동네를 만나고, 농가의 밭과 과수원을 지나고, 향기 좋은 예쁜 꽃을 안아주고, 가슴속 이야기를 도란도란 풀어놓는 재미가 쏠쏠하다.
호성마을에서 농월정 방향으로 선비문화탐방로를 따라가면 가까운 거리에 경모정이 있다. 경모정은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의 후손들이 1978년에 건립한 정자로 주변의 소와 넓은 암반이 어우러지며 오가는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주위의 풍경이 달 밝은 밤에 더 어울릴듯하다.
경모정에서 데크길을 따라 하류방향으로 가면 람천정이 있다. 냇가의 너럭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와 주위의 멋진 풍경이 어우러진다. 수량이 많은 여름철에 찾으면 더 좋을듯하다.
농월정 가기 전 도로변의 냇가에서 황암사를 만난다. 황암사는 정유재란시 황석산의 산성에서 왜군과 격전을 벌이다 장렬히 순직한 인근의 주민과 관군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사당이다.
조선 선조 때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지족당 박명부가 노닐던 곳에 후손들이 세운 농월정(弄月亭)! 한때 화림동계곡을 대표했던 정자로 ‘달을 희롱한다’는 정자의 이름처럼 옛날 선비들이 고요한 밤 냇물에 비친 달빛을 한 잔 술로 희롱하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2003년 방화로 소실되어 농월정국민관광지에 있는 식당의 안내판에서나 그 모습을 볼 수 있어 안타깝다.
정자는 사라졌지만 정자 터 앞 천여 평 되는 반석 달바위, 반석 사이를 쉴 새 없이 흐르는 맑은 물, 냇가 옆 소나무 숲이 선경을 만들었다. 바라만 봐도 가슴이 확 트이는 절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농월정교 위에서 바라본 아래편의 풍경도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