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고속도로 여주IC에서 1.3㎞ 거리의 능현리에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가 태어난 생가가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화려하지 않지만 3000여 평의 터에 명성황후 생가(경기도유형문화재 제46호), 기념관, 문예관, 감고당, 민속마을이 있어 여주 여행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다.
조선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이끈 철의 여인 명성황후!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로 엇갈린다. 민치록의 외동딸로 태어나 9살 때 부모를 여의고 조선 26대 임금 고종황제의 황후가 되어 개화기에 쇄국정책을 펼치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대립한다. 뛰어난 외교력으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다가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에 의해 시해당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명성황후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였고 친인척관계였던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적극적인 추천과 명성황후의 친정이 단출한 것이 마음에 들었던 흥선대원군에 의해 16세에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안동김씨의 외척 세도정치를 경계하던 흥선대원군이 가문은 빠지지 않으나 정치에 개입할 사람이 없다는 판단아래 명성황후를 왕비로 간택했지만 훗날 며느리에게 보기 좋게 당한다.
일본은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정치에 깊이 개입하였고,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동원하여 일본을 조선에서 축출하고자 했다. 일본은 자신들이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는데 명성황후가 걸림돌이라는 생각에 일명 ‘여우사냥’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은 1895년 음력 8월 20일 새벽에 일어났다. 명성황후는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의 옥호루에서 난입해 들어온 일본 낭인들의 손에 처참하게 시해당하고, 시신마저 향원정의 녹원에서 불살라지는 수모를 당했다. 죽고 2년 후인 1897년에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홍릉에 안장되었다. 요절한 두 아들 다음에 낳은 셋째 아들이 마지막 임금 순종황제이다.
생가 앞에 연못과 정자가 예쁜 정원, 문예관, 숭모비와 추모비, 규모가 크지 않은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기념관에 명성황후의 친필과 시해장면을 담은 영상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일본 구마모토현 전·현직 교사들이 올바른 역사교육으로 한·일 우호증진에 기여하고자 만들었다는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의 회원들이 매년 명성황후 생가와 기념관을 방문하여 영정에 절을 하고 참배한다.
명성황후 생가는 전형적인 조선후기 사대부 가옥구조로 고종황제의 비 명성황후 민씨가 태어나 8세까지 살던 집이다. 1687년 부원군 민유중의 묘막으로 건립되었는데 안채는 당시 건물이고 행랑과 사랑, 별당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넓은 바깥마당에서 솟을대문을 지나 ‘ㅡ자형’ 행랑채가 있고, 중문과 사랑이 붙은 ‘ㄱ자형’ 문간채와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ㅁ자형’을 이루며, 옆으로 독립된 ‘ㅡ자형’ 별당이 있다.
생가 옆에 명성황후탄강구리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 41호)와 민유중 신도비(향토유적 제5호)가 서있다. 탄강구리비는 명성황후가 태어난 옛 마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앞면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 뒷면에는 광무 팔년 갑진 오월 어느 날 엎드려 눈물을 삼키며 공경히 쓰다를 뜻하는 '광무팔년갑진오월일배수음체경서'가 새겨져 있다.
민유중 신도비는 조선 19대 임금 숙종의 비 인현왕후의 아버지로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 민유중의 업적을 소개하고 그를 찬양하는 글이 새겨져 있는 신도비로 기단석의 몸통은 거북이 형상이고 머리는 용의 모양인데 머리를 틀어 150m 지점에 있는 묘소를 바라보고 있다.
초가집 5동으로 조성한 민속마을(능골주막)은 사시사철 전통놀이와 문화체험마당을 즐길 수 있어 남녀노소 모두가 행복한 곳이다.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면 옛날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엿볼 수 있다. 감고당은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되기 전까지 살았던 집으로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다가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진 뒤 철거위기에 놓이자 2006년 명성황후 고향인 현재의 위치로 행랑채 2동을 원형 그대로 이전한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