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들어서며 말경에는 아내와 오붓하게 남쪽을 다녀오기로 했다. 여행을 앞두고 우연히 해양성기후라 궂은 날이 많은 대마도가 우기에 이틀간 맑다는 것을 알았다. 늘 그렇듯 여행은 날씨가 한몫한다. 그래서 날씨에 맞춰 25일은 대마도, 26일은 부산, 27일은 울산에서 숙박하는 3박 4일짜리 여행을 떠났다.
사방을 연결한 고속도로 덕분에 청주에서 부산이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다. 여행이 생활의 일부분이 되며 몸도 장거리 운전을 즐긴다. 교통량이 적은 평일이라 청주상주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대구부산고속도로를 3시간여 달리면 부산역과 가까운 부산국제여객선터미널에 도착한다.
여객터미널의 1층은 주차장, 2층은 입국장, 3층은 출국장이다. 3층에서 출국수속을 하고 부산항과 부산항대교가 만든 바다풍경을 감상한다. 12시 30분이 되자 일본인 승무원들이 맞이한 비틀호가 1시간 10분 거리에 있는 대마도의 히타카츠를 향해 출항한다.
부산항대교 밑을 통과하면 북동쪽의 신선대와 남서쪽의 국제크루즈터미널을 지난다. 3년 전, 부산 여행길에 너무나도 날씨가 맑아 혹시나 하고 신선대에 올랐었다. 그때 수평선 위로 기다랗게 모습을 드러냈던 대마도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날씨가 화창한 날 쾌속선 안에 갇혀 수평선만 바라보고 있으려니 크루즈에서 자유를 누리며 일본을 여행했던 기억도 새롭다.
대마도는 일본에서 부르는 쓰시마(つしま)보다 대마도라는 명칭이 더 익숙한 섬으로 부산까지 49.5km, 후쿠오카까지 142km 거리에 위치해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가 훨씬 가깝다. 또한 조선통신사들이 외교를 펼치며 오가던 징검다리로 일제강점기의 한과 조선 마지막 황녀의 흔적이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대마도는 히타카츠항이 위치한 북쪽의 상대마도와 이즈하라항이 위치한 남쪽의 하대마도로 나뉜다.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의 남쪽과 대마도의 북쪽이 가까워 부산항에서 히타카츠는 1시간 10분, 이즈하라는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대마도 안에서는 버스투어가 이뤄져 부산항에서 대마도에 입출항하는 방법이 다양하다. 히타카츠항·이즈하라항 중 한곳에서 입출항하거나 히타카츠항·이즈하라항 중 한곳으로 입항해 다른 곳으로 출항할 수 있다. 내가 이용한 발해투어의 비틀호는 첫날 히타카츠항으로 입항해 다음날 다시 히타카츠항에서 출항했다.
대마도(對馬島)는 나가사키현에 딸린 섬으로 전체가 쓰시마시에 속한다. 쓰시마시청은 면적이 작지만 본토와 가까운 하대마도의 이즈하라에 있다. 당연히 상대마도의 히타카츠는 이즈하라보다 작은 도시이다. 그래서 일본의 화려한 도시를 상상하고 여행 온 사람들은 히타카츠항이나 여객선터미널의 모습에 실망한다. 어쩌면 작은 터미널의 입국심사장에서 양쪽 검지 지문과 얼굴 사진을 찍으며 역시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것을 실감한다.
히타카츠에서 이즈하라까지는 관광버스로 2시간 거리다. 거제도보다 작은 섬이지만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협소한 길이 이어지고, 상대마도의 위쪽에서 하대마도의 아래쪽까지 83㎞ 거리에 터널이 65개나 있는데다 가끔 일방통행 도로를 만나 이동시간이 길다. 그래도 멋진 바다풍경과 밀림을 지나듯 좌우로 늘어선 편백나무들이 여행을 즐겁게 하고 자연을 최대한 보존하는 것도 배운다.
차창 밖으로 흑전복과 적전복을 비롯하여 김·톳·가리비 양식장, 벌통과 버섯, 다랭이 논밭, 꾸미지 않은 집들이 스쳐 지나간다. 대마도는 국립공원에 준하는 명승지인 국정공원지역으로 길가에 휴게소도 없다.
하대마도의 이즈하라에 대마도의 전체인구 32000여명의 반에 해당하는 15000여명이 거주한다. 시계탑이 보이는 쓰시마시청 주변이 이곳에서는 가장 화려하다는 번화가로 가장 큰 건물인 교류문화센터와 가장 높은 건물인 대마호텔(6층)이 이곳에 있다. 우리의 역사 유적들도 길 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만난다.
금석성은 도주 자리를 노린 친척이 대마호텔 부근의 도주관아에 불을 지른 대마도판 왕자의 난 때 불을 뚫고 도망친 장소에 3번째 성을 쌓은 관아로 소실되었다. 금석성의 대문격인 야쿠라몬(樓門)은 1990년 복원한 대마도에서 일본색이 가장 짙은 건축물이다.
1811년 제12회 조선통신사 366명은 에도까지 가지 못하고 대마도에서 국서를 전달했다. 이때 조선통신사의 국서를 접수하기 위해 일본 본토에서 대마도로 건너온 ‘통신사 접반사’가 13군데 임시거처를 마련했던 곳에 세운 비가 조선통신사막부접우노지로 금석성 안에 있다.
덕혜옹주결혼봉축비(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는 결혼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1912년 고종의 고명딸로 태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덕혜옹주가 1925년 일본으로 끌려가 대마도주의 입양아 후예인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할 수밖에 없던 우리의 아픈 근대사라 가슴이 쓰리다.
한말 비운의 역사 희생양인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는 결혼 후 조발성치매증 악화·이혼·딸의 자살 등 비극을 겪다 1962년 귀국해 낙선재에서 지내다 1989년 한과 애달픔이 많은 삶을 마감하였다. 십시일반으로 비를 세운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아랫단 위에 그 당시를 상징하듯 동전들이 놓여있다.
야쿠라몬 안쪽에 역관사와 상인들의 교역장소로서의 기능이 컸던 조선통신사의 영빈관이 지금의 체육관 자리에 있었다. 체육관을 건축할 때 땅에서 고려기와, 조선기와, 조선토기가 출토되었다.
쓰시마시청 옆 언덕 위에 고대부터 현대까지 대마도의 역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자료를 전시해 놓은 대마역사민속자료관이 있다. 조선통신사 행렬을 그린 두루마리 그림, 덕혜옹주 남편의 작품들을 볼 수 있는데 내부촬영은 할 수 없다. 자료관 앞마당에 조선국통신사지비, 주환조난자위령탑, 성신지교린 표석, 고려문이 있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하던 사절단으로 정사와 부사, 종사관 등 500여명의 대규모 인원이 한양에서 출발해 부산과 일본의 대마도, 시모노세키 등을 거쳐 에도까지 가는 데 반년 이상 걸렸다. 통신사행렬의 일본 첫 기착지였던 대마도의 이즈하라에 1992년 조선국통신사지비를 세웠다.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은 아메노모리 호슈의 외교 정신으로 조선통신사를 통해 조선과 일본이 교류하였듯이 '진정으로 믿음을 갖고 이웃끼리 교류한다'는 뜻이다. 1990년 당시의 노태우대통령이 일본 궁중만찬에서 이 말을 인용했다. 주환조난자위령탑은 2차 세계대전 때 조난된 사람들을 기리는 위령탑이고 고려문은 대마도 번주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다.
신사의 입구에는 커다란 문으로 글자 '天'을 닮은 도리이(鳥居)가 있다. 신도에서는 새를 사람의 뜻을 신에게 전달해 주는 신의 사신이라고 믿어 새가 쉬어 가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도리이(とりい)라고 부른다. 신사에서 만나는 도리이의 수나 재료가 다양하다.
이즈하라를 여행하며 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만난다. 시내의 하치만궁 신사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 사가들이 삼한을 정벌하였다는 신화속의 인물 신공황후를 모시는 신사다. 마리아 신사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고니시 마리아와 그녀의 아들이 모셔진 신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대마도주 소요시토시와 그의 부하였던 유키나가의 딸 마리아를 정략결혼 시킨 슬픈 이야기도 전해온다.
히치만궁신사에서 사무라이 거리로 가는 길에 종의지공지상을 만난다.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야욕이 발동한 임진왜란으로 단절되었다. 조선과의 교류는 대마도의 생사가 걸린 일이라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는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과의 교역을 재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성씨를 가지고, 칼을 2자루씩 차고 다니며, 칼로 사람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3대 특권을 주며 강한 것을 아름답다고 잘못 미화시킨 게 사무라이다. 막부시대의 사지키바라성 아랫마을 무가저택들이 있던 거리를 정비하여 사무라이 거리를 만들었다. 돌담이 아름다운 이곳의 나카라이 토슈이 기념관은 의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서 소년기를 보낸 토슈이의 생가다. 기념관은 자료전시와 지역주민 교류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토슈이는 한국을 존경하던 도쿄 아사히신문의 기자로 춘향전을 최초로 번역하여 일본에 소개한 문인이었다. 토슈이의 제자로 그를 연모했던 히구찌이치요는 일본의 유명한 시인이며 소설가로 5000엔 지폐에 등장하는 훌륭한 여성이다.
이즈하라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의 수선사는 골목으로 들어서야 만난다. 수선사는 656년 비구니 법명이 건립한 백제의 사찰로 단식 끝에 대마도에서 순국한 최익현선생의 시신이 이틀 동안 안치되었던 곳이다. 수선사에 들어가면 오른쪽 맨 앞에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가 서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병자수호조약을 반대하는 지부소(도끼를 가지고 상소를 올리며 답을 기다리는 것)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당할 만큼 강직한 분으로 1906년 의병을 일으켰으나 동포끼리 싸울 수 없다며 의병을 해산하고 일군에게 잡혀 대마도에 감금당했다. 대마도 경비대장이 내가 주는 음식을 먹고 내 말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자 노구에도 감옥에서 단식으로 버티다가 3개월 만에 돌아가신 애국지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