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는 조선통신사의 첫 도착지로 조선 세종 때의 이종무 장군까지 3차에 걸친 원정이 있었지만 흐지부지 일본 땅이 되었다. 그에 비해 '독도는 우리 땅, 대마도는 한국 땅'을 주장하는 대마도연구 문학박사 황백현 극일운동시민연합 이사장은 후쿠오카와 하카다를 거치느라 무려 21시간이나 배를 타며 어렵사리 대마도 여행길을 개척했다.
대마도라는 지명은 마한 즉 한반도를 바라본다거나 공중에서 보면 말 두 마리가 마주보는 형상이라서 생겼다고 한다. 대마도를 여행하다보면 ‘논밭이 적다, 산이 많다, 호수가 없다, 어업이 발달했다, 조림이 잘 되었다, 길이 좁다, 차가 작다, 신사가 많다, 집이 소박하다, 환경이 깨끗하다, 디젤차가 없다, 질서를 잘 지킨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대마도는 시골동네에 가깝다. 그래서 호텔방이 작거나 욕실이 없는 것도 대마도니까 그렇다고 편하게 생각해야 한다.
일본은 다른 나라의 종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만큼 신이 많은 나라다. 8만여 개의 신에 8만여 개에 달하는 신사가 있다. 물론 천황숭배와 군국주의를 고무시켜 이웃 나라들로부터 비난받고 있는 도쿄의 야스쿠니신사가 가장 규모가 크다.
일본의 주택문화는 목조건물의 다다미로 화재가 발생하면 이웃집으로 쉽게 옮겨 붙어 방화벽을 구축하여 화재를 예방하였는데 이 방화벽 돌담이 이즈하라의 골목길을 인상적으로 만들었다.
요즘 우리나라도 소형의 아파트를 선호한다. 크기나 멋보다 실리를 택한 주택에서 일본의 국민성을 엿볼 수 있다. 양철로 지은 집들을 구경하며 빨리 갈아치우기보다는 오래된 것에 대한 자부심으로 자원을 절약하는 것도 배운다.
일본은 일반적으로 집이 높고, 지붕의 경사가 급하고, 목조 주택이 많다. 일본의 처마는 밋밋한 직선인데 용마루 양쪽 끝에 불을 막는다는 의미로 물고기를 장식했다. 골목이 만나는 곳에 자판기가 놓여있고, 해양성기후라 날씨가 맑은 날은 건조대에 빨래가 걸려있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만관교(만제키바시)에 도착했다. 만관교는 대마도를 관통하는 아소만과 미우라만 사이의 만제키세토 운하에 놓여있는 다리이다. 만제키세토는 대마도를 상대마도와 하대마도로 나누는 경계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해군이 동지나해(대한해협)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굴착했다.
만관교를 북쪽으로 건너며 상대마도에 들어섰다. 360도 회전하며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에보시타케 전망대에 서면 대마도판 하롱베이로 불리는 서쪽의 아소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아쉽게도 우리가 머문 시간은 해가 지는 일몰 때가 아니었고 맑은 날씨였지만 해무가 조망을 가려 아쉬웠다. 한국 관광객들 때문에 주차장 옆에서 찹쌀로 만든 붕어빵과 커피를 판매하는 시골아줌마 수입이 짭짤하다.
‘신사’는 일본 고유의 토착 신앙과도 같은 신도의 신을 제사 지내는 곳으로 ‘신도’는 선조나 자연 등을 숭배하는데서 자연스럽게 출발했다. 아소만 입구에 위치한 와타즈미 신사는 바다의 신인 용왕의 딸 '토요타마히메노미코토'를 모신 해궁이다. 바다에서 신사의 본전까지 이어진 다섯 개의 도리이 중 바다위에 서있는 두 개의 도리이는 밀물 때 2m나 바닷물에 잠기며 잔잔한 아소만과 어우러진다.
일본 천황가의 전설이 시작된 이 신사는 바다를 통해 신이 들어온 것으로 묘사되고, 바다의 신인 용왕이 수중 도리이와 육지의 도리이를 통과하여 신전으로 들어 왔다는데서 시작되었다. 또한 도리이가 김해를 향해 세워져 과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코마이누는 신사 앞에서 악귀를 막는 수호자로 고려 개를 뜻한다. 삽살개를 닮은 두 문지기의 입모양이 다르다. 오른쪽 수놈이 입을 벌린 것은 사람이 태어나 말을 할 때, 왼쪽 암놈이 입을 다문 것은 죽어서 말을 못할 때를 상징한다. 또한 암수가 그것을 달고 있는 코마이누는 이곳뿐이란다.
일본은 한반도나 대륙으로부터 자의 또는 타의로 일본 열도에 와서 살게 된 도래인 문화다. 하늘의 형제 신들이 용왕의 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출산장면을 들여다봐 용궁으로 도망간 공주의 이모가 키운 아이가 훗날 이모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일본 초대의 신무천황이란다. 신전 옆 용 모양으로 길게 뻗은 소나무의 뿌리가 전설을 실감나게 한다. 일본 국가 기원의 발원지가 본토가 아닌 대마도라는 것이 흥미롭다.
고려 최초의 대장경으로 현종 때 판각한 초조대장경을 관리했다는 장송사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 1500여년의 백제 은행나무가 있다. 번개를 맞아 아랫부분은 비어있지만 웅장한 모습으로 경이로운 생명력을 자랑한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더 아름다운 가을철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관광버스가 좁은 고갯길을 힘들게 올라 쓰시마시 최북단에 자리한 한국전망대(韓國展望臺)에 도착한다. 한국전망대는 탑골공원 팔각정을 모델로 모든 자재를 한국에서 가져와 건축한 관광명소로 맑은 날 부산과 거제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대마도에 잡혀온 선조들이 명절 때가 되면 고향땅을 향해 설움을 달래던 고려산에 세운 전망대 안에 광안리 불꽃축제의 화려한 야경사진이 있다. 전망대 앞으로 보이는 섬이 해상자위대의 레이더기지다.
전망대 옆 조선역관사순난비는 1703년 풍랑으로 배가 뒤집혀 타국에서 숨진 108명 역관사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1991년에 세운 추모비다. 비석에는 10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함대를 격파한 도노자키와 일본 100선 해수욕장 중 하나인 미우다하마가 가까운 곳에 있다. 러일전쟁 때 러시아 군이 몰살당한 곳에 러시아군 위령비와 일본군의 전승기념비가 있다.
러일전쟁 때 격침된 군함에서 빠져나와 보트를 타고 상륙한 러시아 군인들을 현지인들이 잘 보살핀 역사의 현장에 은해의교(恩海義嶠), 생명의 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때 일본 제독 도고 헤이하찌로에게 전쟁에 이긴 소감을 묻자 “오늘의 승전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의 전술을 그대로 운용한 것 뿐이다”라고 했다던가.
미우다하마는 대마도에서 보기드믄 에메랄드빛 바다와 입자가 고운 천연모래 해변 때문에 다시 찾고 싶은 곳이다.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시설이 완비된 캠프장이 있고, 캠프장 입구에 나기사노유 온천이 있다.
외면할 수 없는 게 역사다. 또한 역사를 잘 품어야 미래가 있다. 매년 8월 대마도에서 조선통신사를 소재로 아리랑 축제를 열고, 해마다 한·일 학생들이 주변국에서 대마도 해안으로 떠밀려온 쓰레기를 함께 수거하며 우의를 다지는 것도 고무적인 일이다.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백문이불여일견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커피 한잔 하시고 가세요♬ 무료입니다.’ 출국하기 위해 다시 돌아온 히타카츠항 앞 ‘공중전화’라는 작은 선물가게에서 우리네 인정을 닮은 커피를 맛있게 마시고 흐뭇한 마음으로 대마도를 떠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