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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조롱의 기술

조롱은 관계 파탄을 전제로 하는 언어 행위다. 조롱이 습관화된 사회에서는 그 어떤 진지함이나 성실함도 하류 인생관으로 치부되기 쉽다. 조롱에도 품격이 있는 법이다. 이런 차이를 교육으로 배우게 해야 한다. 조롱과 풍자는 엄격히 구별된다는 점을 알게 해야 한다. 독서교육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독서교육을 통해 모두를 망가뜨리는 조롱 바이러스를 잠재워야 한다.

1. “조롱은 관계 파탄을 전제하는 행위”
누군가를 놀리고 조롱하는 자리다. A와 B는 회사에서 승진 라이벌이다. 오늘은 사석에서 A가 조롱하듯 B에 대해서 흉을 본다.

여러분 제 이야기 잘 들어보십시오.
한 남자가 파출소로 뛰어 들어오며 다급하게 말합니다. “제가 아내를 때렸습니다. 저를 유치장에 가둬주세요!” 당황한 경찰이 물었습니다. “아내가 죽었습니까?” 그 남자가 경찰에게 화를 버럭 내며 말합니다. “죽었으면 유치장에 가둬달라고 하겠습니까? 마누라가 쫓아오니까 그렇지요!”
웃기는 이야기지요? 아 글쎄, 이 남자가 바로 B라는 작자입니다. B의 집구석이 어떤 집구석인지 아시겠지요?

B의 부부싸움 해프닝을 두고 이를 조롱하는 쪽으로 A가 이야기를 살짝 과장 모드로 쏟아 놓는 장면이다. 위의 내용을 믿고 말고는 듣는 사람의 자유다. 부부싸움을 하면 늘 부인에게 몰리는 B의 평소 모습을 A가 조롱 모드의 이야기로 만들면서 이렇게 된 것이다.
조롱이란 것이 원래 그런 법이다. 사실(fact)을 기반으로 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미 사실에 상당한 감정의 무늬를 입혀서 마침내 사실을 떠나 버리는 것, 그것이 조롱이다. 이 자리에 B가 있다면 심한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B가 없더라도 A는 조롱 효과를 충분히 만끽했을 것이다. 자신의 질투 감정을 만족시키고 이 고약한 이야기가 널리 전파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롱이 개인적 이해 다툼과 상대를 할퀴는 데 사용되면, 이는 비루하고 비신사적이다. 중상, 모략, 음해, 질투 등의 감정과 같은 레벨에 조롱이 놓이는 것이다. 이런 조롱은 A와 B를 다 모르는 제삼자에게는 그저 웃기는 이야기로 끝나지만, 두 사람을 다 아는 지인들에게는 짜증나고 불유쾌한 기억으로 각인될 뿐이다.
늘 문제가 되고 있는 ‘왕따 현상’이야말로 어떻게 실현되는가. 집단 조롱의 형태로 일어나지 않는가. 선생을 조롱하는 아이들은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일찍이 아이들에게 조롱 자체를 가르치는 교육은 없었다. 교육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A가 B를 조롱하면서 B를 망가뜨리는 효과를 노렸다면 그것은 언젠가는 오히려 부메랑이 돼 A자신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란 비슷비슷한 결함과 모순을 누구나 지니고 있는 것이 그 이유다.
조롱이란 관계의 파탄을 전제로 하는 언어행위다. 교육은 관계의 생성과 관계의 회복을 배우게 하는 과정이다. 조롱하는 동안 조롱하는 사람의 내면이 겪어내야 하는 분노와 적개심 등 감정의 소모는 그 자체도 문제지만, 이것이 곧장 습관화 된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조롱하는 일을 밥 먹듯 장기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가 조롱에 능할지는 몰라도 올바른 전인(全人)에서는 아주 멀기 때문이다.
 
2. “조롱이 많아지는 사회는 심성이 황폐하다”
스마트폰의 진화로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의 파워가 놀랍다. 이들은 온라인상에서 불특정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서비스, 이른바 SNS(Social Network Service)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SNS를 통해서 현대인들은 기존의 인맥 관계를 강화시킨 새로운 인맥을 만들어 나간다. 그렇게 작동하는 인맥의 역동성은 기존 정치행태나 선거 모드를 바꿔 놓는다.
SNS가 일반화 되면서 개인적이면서도 감성이 도드라지는 메시지들이 무서운 소통의 힘을 보여 주고 있다. 정치·사회적 메시지들도 더 짧고 더 직설적이고 더 개인적인 기분을 담아서 소통된다. 여론의 흐름을 형성하고 장악하는 데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두터운 논리의 토대를 갖춘 엄숙한 정치 담론들은 대중사회에서는 밀려나는 느낌도 든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렇다. 사소하고도 짤막한 감성적 멘트에 수많은 대중들이 몰려다니며 지지와 비판을 쏟아 놓는다. 그리고 그 지지와 비판이 다시 각자의 SNS를 타고 사방의 인맥 속으로 번져나간다. 이런 흐름을 좇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논리도 논리지만, ‘지금 여기’ 나의 느낌과 기분을 더 잘 투사할 수 있는 메시지들에 몰려든다.
그런 기류 탓인지 풍자와 조롱의 메시지들이 많아졌다. 이는 물론 열린사회의 ‘언로 (言路)’들이 막히지 않고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방송과 통신이 결합된 막강한 SNS를 통해서,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조롱 모드의 메시지들이 소비 상품처럼 쏟아져 나온다. 솔직히 말해서 당사자가 아닌 제 삼자에게 조롱은 좋은 구경거리이다. 일종의 싸움 구경인데 말로 망신주기의 묘미가 그야말로 즐길 만하다.
조롱도 풍자의 일종이다. 풍자를 실현할 때, 상대를 비웃거나 얕보고 놀리는 조롱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자와 조롱이 같지는 않다. 때로는 풍자와 관계없이 순전히 상대를 욕보일 심산으로 조롱이 이뤄지기도 한다. 적대적 관계에서 하는 조롱일수록 풍자의 큰 뜻을 놓치고 오로지 망신주기에 매몰돼, 눈앞의 승리에 목을 맨다. 저질의 이전투구(泥田鬪狗)에서는 꼭 그렇다. 그러나 조롱의 대상이 권력일 때는 풍자의 범주에 든다. 그러니 힘 가진 자들은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잘 지켜서 경계해야 할 것이다.
조롱이 넘쳐나는 사회는 희망이 소실돼 가는 사회다. 믿음과 상생의 토대가 유실돼 가는 사회다. 조롱거리가 많다는 것은 그 사회의 올바른 권위와 신뢰가 사라져 가는 것을 뜻한다. 조롱이 압도하는 사회에서는 그 어떤 진지함이나 성실함도 하류의 인생관으로 치부되기 쉽다. 사회적 심리의 황폐함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조롱이 신랄해질수록 마치 조롱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변질되기 쉽다. 주의해야 할 대목이다. 조롱이 성공해 득의할수록 부담 또한 커진다. 내가 보낸 조롱이 어느 날 나를 향해 되돌아 올 수 있다. 나중에 알게 된다. 대중들은 시원하고 멋있다고 조롱에 환호하지만, 한결같지는 않다. 일종의 관음증처럼 조롱 구경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요컨대 내가 한 조롱이 사회적 정의 내지는 책무와 연관되는 것이라면 나야말로 항상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걸머지고 살아야 한다. 나의 조롱으로 내상을 입은 상대는 와신상담할 것이다. 몇 배의 조롱으로 갚아 주리라 다짐하지 않겠는가. 이래저래 조롱이 많아지는 사회는 개인도 사회도 그 심성이 황폐해지기 쉽다.

3. “조롱의 품격은 분노를 잘 다스리는 데 있다”
방랑 시인 김병연(일명 김삿갓)이 팔도 삼천리를 떠도는 중에 함경도 길주 명천 지역을 들렀다. 길주(吉州)와 명천(明川)은 서로 붙어 있는 지역이다. 그래서 부를 때도 그냥 함께 묶어서 ‘길주 명천’이라 말한다. 마치 경상북도의 청송과 영양이 서로 붙어 있어서, ‘청송 영양’ 이렇게 한 묶음으로 부르는 이치와 같다. ‘길주(吉州)’란 말 그대로 풀이하면 ‘길한 고을’이라는 뜻이다. ‘명천(明川)’이란 말 그대로 ‘맑은 고을’이라는 뜻이다.
길주에는 허(許)씨 성을 가진 허가(許哥)들이 많이 살았다. 그런데 길주는 나그네를 재워주지 않는 풍속이 있어, 허가가 많이 살지만 집에 들여 잠자도록 허가해 주지 않았다. 또 명천에는 어전리(漁佃里) 마을이 있었다. ‘어전(漁佃)’이란 물고기를 잡고 짐승을 사냥한다는 뜻이라고 하니, 아마도 물고기든 짐승 고기이든 흔하게 취할 수 있는 동네쯤으로 여겨진다. 김삿갓이 이 마을도 지나간 듯하다. 시인이 여기서 그리 후한 대접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김삿갓이 길주 명천에 머물고 떠나면서 이 고을을 조롱하는 시 하나를 남겼다. 제목 또한 ‘길주 명천’이다. 한자로 된 시를 읽는 묘미가 따로 있어서 원래의 시를 가져다 놓고, 이것을 다시 우리말로 옮겨서 소개한다.
吉州明川(길주명천)
吉州吉州不吉州(길주길주불길주) 許可許可不許可(허가허가불허가)
明川明川人不明(명천명천인불명) 漁佃漁佃食無漁(어전어전식무어)

길주(吉州), 길주(吉州)하지만 길(吉)하지 않은 고장.
허가(許可), 허가(許可)많지만 허가(許可)해 주지 아니하네.
명천(明川), 명천(明川)하지만 사람은 밝지(明) 못하고,
어전(漁佃), 어전(漁佃)하지만 밥상에는 고기 없네.
조롱에도 품격이 있다. 조롱의 품격은 분노를 잘 다스리는 데에 달려 있다. 김삿갓은 이미 그가 받은 박대의 분노로부터 차분하게 멀리 떠나 왔다. 그러기에 저처럼 에둘러서 살짝 드리울 듯 말 듯 조롱의 기운을 시구에 지펴 넣는다. 이 시로 길주 명천이 모욕감에 떨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차분히 스스로를 돌아볼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조롱하면 무안을 피할 수 없다. 사람이 아닌, ‘상황’을 상대로 해서 조롱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도 경지에 든 조롱의 기술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라는 말을 성실의 강요쯤으로 받아들이는 젊은이들이 ‘즐길 수 없으면 피하라’라는 말로 앞의 명제를 조롱한다. 군사정부 시절 주요 국가시설물에 명기한 ‘접근하면 발포한다’라는 위압적 경고에 ‘발포하면 접근한다’라는 말을 만들어 조롱했다. 이렇게 보면 조롱이란 일종의 저항적 상상력의 범주에 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롱하기를 부추기는 세태를 그냥 둘 수는 없다. 교육의 자리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독서교육이 그래서 다시 중요하다. 토론과 토의 그리고 회의와 대화를 더 의미 있게 가르쳐야 한다. 조롱은 이 모두를 망가뜨리는 바이러스다. 아니 이것들만이 조롱하기 바이러스를 제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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