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생존자, 유태계 이탈리아인 화학자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치 정권의 유대인 학살, 대규모 살인을 위한 가스실, 줄무늬 죄수복을 입은 유대인.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던 아우슈비츠는 사실이 아닌 개념이다. 저자가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아우슈비츠의 진실, 그리고 처참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저자는 말한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것은 질문일까 감탄사일까? 저자 프리모 레비는 유태계 이탈리아인으로 화학자이다. 그가 실제 화학공장의 관리자로 종사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웠다. 화학자이며, 문인이고,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유태계 이탈리아인 20명 중의 1인. 평균 생존기간이 3개월인 아우슈비츠에서 그는 11개월을 살아남았다. 저자의 프로필만으로도 호기심을 가질만하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짐승과 같은 생활을 버텼다면 인간과 세상을 증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의 존재를 담담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은 11개월의 아우슈비츠 생존 기록이다.
아비규환의 지옥, 그리고 인간 레비는 이탈리아에서 파시즘 저항운동을 하다가 포로로 잡힌다.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독일SS에 의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게 된다. 그는 한번 타면 결코 되돌아올 수 없다고 알려진 아우슈비츠행 수송열차에 탔다. 유대인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열차는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로 간다. 그리고 열차에는 ‘내’가 타고 있다. 이렇게 지옥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소문으로 아우슈비츠행 열차에 대해 들었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일이 되기 전에는 허상이다. 상상 속의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타고 있다. 기차에서 내리면 사람들은 가스실로 끌려가는 사람과 노동을 위해 노역장으로 끌려갈 사람으로 구분된다. 부부도 엄마와 아이도 의미가 없다. 오직 그들의 판단에 따라 그리고 기분에 따라 결정된다. 가스실로 가는 사람은 바로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앞에는 죽음과 같은 노동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넋이 나간 눈으로 입을 헤벌리고 두 팔을 힘없이 떨어뜨린 채, 고통이 중단된 것에 대한 일시적이고 허구적인 황홀감에 빠져 있다.” 혹한 속에 굶주린 몸으로 80kg의 침목을 옮기고 난 직후의 상태다. 육체적 한계상황까지의 노동을 한 후 저자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마치 심한 고문을 당한 후 묘사되는 환각 상황과 같다. 육체적 한계에 처한 인간에게 실존의 문제를 요구할 수 있을까? 수용소에서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다. 추위를 이겨내고, 굶주림을 벗어나야 한다. 저마다의 고통이고, 저마다의 죽음이다. “해 질 녘 작업 종료를 알리는 아이어아벤트(종업)의 사이렌이 울린다. 우리 모두 적어도 몇 시간은 배가 부를 것이므로 싸움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 기분이 좋다… 몇 시간 동안 우리는 자유로운 인간들 식으로 불행할 수 있다.” 동료 중 누군가가 민간인들의 죽을 훔쳐와 배불리 먹게 된 상황이다. 배가 부르다는 것만으로 모두가 행복해진다. 김훈의 소설에는 밥에 관한 내용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배고픔의 상황은 인간의 실존을 해체한다. 짐승과 같아지는 것이다. 배가 불러야만 인간의 방식으로 불행해질 수 있다. 배가 고프면 짐승이 되는 것이다. 육체를 가진 인간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참혹함 속에서의 인간다움 지옥과 같은 고통 속에서 레비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본인은 운이 좋았다고 짧게 말한다. 하지만 운과 함께 이런 삶의 자세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벽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과 정반대되는 측면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즉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인간의 존엄은 오히려 극한 상황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문명이 제거된 상황에서도 인간일 수 있을 때 아름다운 것이다. 레비는 40년 후 68세에 자살한다. 그는 왜 자살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