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성장이 어떠했는지를 돌아보려는 사람은, 지나간 시간을 향해 길을 떠난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성장시키고 변화시킨 사건’을 만나고 옛 은사를 발견한다. 따라서 옛 은사를 찾아뵙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은사의 구체적 은혜에 대한 제자의 구체적 감사행위이다. 그리고 옛 은사에 대한 감사는 어느 날 ‘그냥 문득’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장을 의미 있게 재발견하려는 심리적 노력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지난 봄 대학 신입생들을 위한 특강을 하였다. 세 가지를 당부하였다. 첫째는 너무 일찍 이성 친구를 사귀어서, 캠퍼스 안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애인 관계, 이른바 CC(Campus Couple)로 확정되는 것은 가급적 유보해라. 지불해야 할 기회비용이 너무 많다. 둘째, 전문가가 되려면 자기의 관심 주제를 정하여 지속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도록 블로그(Blog)를 운영하라. 너의 주제에 관심 갖는 사람들과 지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 셋째 학교에 다니는 동안이나 사회에 나가서나 은사로 모실만한 교수님과 생애를 두고 교유하여 친화될 수 있도록 하여라. 설령 네가 어떤 과오를 범하여 감옥에 가더라도 기꺼이 면회를 와 주실 수 있을 정도의 스승님이면 좋겠구나. 너의 일생을 복되고 덕스럽게 한다. 스승과 만나는 생애 내내 정신의 발달과 성숙을 거느릴 수 있을 것이다. 내 스스로 내 말을 내게 적용해 본다. 나는 첫째 항목은 잘 지켰다. 둘째 항목은 블로그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글을 쓰려는 의지는 제법 가졌던 셈이다. 세 번째 항목에 대해 생각해 보면, 나는 스승 복을 받은 사람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내 아버지께서 그 학교의 선생님이셨으니 아버지와는 생애를 두고 내 안에는 선생님과 아버지로 교차되며 친화의 관계를 가진 셈이다. 잘 몰랐었는데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 내가 아버지로 인해서 정신의 발달을 이루고, 내 생애가 복되고 덕스러움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3년간 담임을 맡아 가르침을 베풀어 주신 은사님 한 분이 계셔서, 구순이 넘은 지금까지도 찾아뵐 수 있는 복을 주신다. 선친과 죽마고우로 지내셨던 분이어서 내게는 아버지를 대하는 정서로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찾아뵙는 시간은 오로지 내가 감화되는 축복의 시간이다. 대학의 은사님께서도 고령이시지만 같은 서울 하늘 아래서 마음만 품으면 언제든지 뵈올 수 있는 복을 주신다. 이렇듯 늙은 제자를 아끼고 배려하시는 마음은 40년 전과 변하신 것이 없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것, 그것이 내 스스로에게 야속할 뿐이다. 이렇게 보면 은사들은 우리들 인생에서 늘 존경의 지평을 제공한다. 그 존경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어도 무방하다. 그저 나만의 존경이라도 나에게는 유효한 인생론의 의미를 은사들은 마련해 준다. H.아미엘은 말한다. “아무것도 존경하지 않는 인간은, 마치 절대 군주가 법률을 아무렇게나 대하듯이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의 위에 둔다.” 존경 대상이 없는 인간은 불행한 존재이다.
2. 은사를 찾아뵈어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는다는 것은 은사의 구체적인 은혜에 대한 제자의 구체적인 감사의 행위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보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인식이다. ‘은사 찾아뵙기’의 심층적 의미를 간과한 것이다. 자신의 성장에 대한, 특히 정신적 성장에 대하여 어떤 가치를 스스로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은사가 발견되지 않는 법이다. 자신의 성장이 어떠했는지를 돌아보려는 사람은, 지나간 시간을 향해 길을 떠난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 길에서 자신의 성장 과정을 응시하면서 ‘긍정과 감사의 철학’을 만난다. 그런 감사와 각성이 솟아나오는 어디쯤에서 비로소 옛 은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월을 거슬러 올라 옛 은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냥 문득’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장을 의미 있게 재발견하려는 심리적 노력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옛 은사를 다시 만나 뵘으로써 자신의 정신이 위로받는다. 설령 어려운 형편의 옛 은사를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 찾아뵙는 경우라 해도, 돌아오는 길에서 느끼는 정회는 무언지 내 마음이 위로받았다는 분위기에 젖게 된다. 은사 찾아뵙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내가 나를 의미 있게 사랑하고 있음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 사랑의 발견’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참으로 ‘괜찮은 자아(‘아! 나란 사람 제법 괜찮은 사람이야.’를 의식하는 나’)’를 발견하는 기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그의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에서 한 도시를 중심으로 주인공들의 시간과 행동과 심리와 기억들을 지루할 정도로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서술해 나간다. 거대한 사건과 명료한 현실에 파묻혀서 의식 위로 떠오르지도 못하고 지나가 버린 수많은 순간의 수많은 마음의 작용과 느낌과 의식들을 작가는 정밀하고 섬세하고 생생하고 집요하게 사로잡아 내기라도 하려는 듯, 그렇게 소설을 써 내려간다. 이렇게 해서 작가가 우리에게 환기시키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생에서 중요하고 위대한 것들이 대사건이나 큰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식 밑에서 놓쳐버린 극히 사소하고 섬세한 것들, 일상의 작은 부스러기와도 같은 마음 안의 감성적 사건들에서도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찾아 나서고 그것의 의미를 인생 전체의 의미 마당으로 끌어내어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그런 내밀한 감성의 상호작용들을 찾아가는 것을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명명한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동안 은사들과의 가졌던 상호작용과 교감들은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나 거창한 현실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하고 지나가 버린 수많은 순간의 수많은 마음의 작용과 사소한 느낌과 의식들로 구성된 것이었다. 그것들은 무심히 잊어버리기에 딱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은사 찾아뵙기’를 통하여 환기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영원히 ‘잃어버린 시간’에 속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선생님을 찾아뵙기로 마음을 먹는 제자의 마음 또한 이렇듯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데서 얻는 가치로 마음을 충전할 수 있다. 옛 은사를 찾아뵙기로 마음먹는 순간, 우리들은 느낄 수 있다. 그 옛날 선생님과 상호작용하던 그 사소하고 미세하고 부스러기 같은 경험들, 그때 선생님과 공유했던 시간과 공간에서 느꼈던 내밀한 감성들이 얼마나 새로운 의미와 가치들로 우리들 마음 안에서 일어서는지를 느낀다. 프루스트 식으로 말하면 이런 것들이야말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아주 내밀한 마음의 과정이라 할 것이다.
3. 사랑과 감사는 ‘은사 찾아뵙기’의 강력한 동인(動因)이다. 사랑과 감사는 인성 일반의 덕성과 가치를 담뿍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감사는 사회 일반의 소통을 아름답게 하는 데도 꼭 필요하다. 국가나 사회의 선진 지표로서 사랑과 감사가 그 사회의 언어문화, 기부문화, 복지문화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이를 입증한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