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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로제 시대’의 교육 : 그리운 사모아

<새교육>으로 본 교육사

‘노이로제’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1970년대 중반이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표현인 스트레스(stress)가 오래가면 나타날 수 있는 대표적 심리적 증상인 신경증(Neurosis)의 독일어 표현인 ‘노이로제(Neurose)’를 당시에 그렇게 많이 사용했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의 입에서 ‘노이로제’라는 말이고 쉽게 튀어나오던 시절이었다.

정치 분야에서 큼직큼직한 사건이 요즘만큼이나 자주 언론에 등장했던 것이 1970년대를 ‘노이로제 시대’로 만든 배경의 하나였던 것 같고, 죄 없고 뒷배경 없는 국민들의 ‘노이로제’가 모여서 충돌하고 폭발하는 장이 교육이었다.

정치적 불안의 시대

‘노이로제 시대’의 출발은 1972년 10월 유신의 선포였다. 1971년 8월, 분단 후 최초로 남과 북이 한 테이블에 마주 앉은 남북적십자 회담이 열렸고, 이듬해인 1972년 7월 4일에는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그러나 남과 북의 적대적 공생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1972년 8월 미군의 베트남 철수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감을 증식시켰고,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17일에 유신을 발표했다. 대통령 간선제와 중임제한 폐지를 골자로 하는 유신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에 이어 12월 27일에 박정희는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제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3년도 평화롭지는 않았다. 8월 8일에는 김대중이 납치됐다가 풀려나는 사건이 벌어졌고, 그해 12월에는 에너지 파동으로 TV 아침 방송이 일체 중단됐다. 1973년에는 소설가 펄 벅, 화가 피카소, 그리고 영화배우 이소룡 등 시대를 상징하던 문화 예술인들이 세상과 이별했다.

1974년의 시작을 알린 것은 긴급조치였다. 1월 8일에 발표된 긴급조치 1호는 헌법에 대한 반대, 부정, 비방을 일절 금지했다. 4월 3일에 공포된 4호는 학교 내외의 모든 집회, 시위, 농성 등을 금지하는 동시에 이를 위반한 경우 최고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미국에서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대통령이 탄핵을 당한 후 사임을 한 것이 이해 8월 9일이었으며, 바로 일주일 후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북한은 이해 9월 16일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했다(1994년 6월 탈퇴). 

광복 30주년이 되는 1975년도 암울했다. 4월 30일에 월맹군이 사이공을 함락시킴으로써 베트남 전쟁이 종결됐고, 대한민국이 제출한 UN 가입안은 8월 6일에 부결됐다. 이런 불안한 시대에 대처한다는 명분에 따라 학도호국단이 9월 2일에, 민방위대가 9월 22일에 창설돼 병영사회로 한발 한발 진입했다.

1976년은 희망과 불안이 교차한 해였다. IT 분야에서는 획기적인 해였다. 4월 1일에는 애플이 창립됐고, 우리나라 최초의 로봇 애니메이션 태권V가 개봉된 것도 이해 7월 24일이었다.

중국에서는 타이완의 지도자 장제스가 전년 4월에 사망한 데 이어 대륙의 지도자 마오쩌둥이 9월 9일에 사망했다. 8월 18일에 벌어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으로 남북, 북미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타임스나 뉴스위크 같은 외국 잡지는 검열을 통해 여러 페이지가 검은 매직으로 읽을 수 없게 덧칠해진 상태에서 배포됐으며 시내 곳곳에서는 경찰들이 시민들의 가방을 뒤지고 긴 머리와 짧은 치마를 단속했다. 

승공과 애국 교육 

<새교육>도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지 못했다. 10월 유신이 선포된 직후에 발간된 1973년 신년호에는 “10월 유신의 대과업이 전 국민의 가슴 속에 메아리치는 시기를 맞아 600만의 학생들을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할 줄 아는 한국인으로 키우는 보람을 영원히 간직하자”는 신년사가 실렸다. “우리의 주체성을 확립 강조하는 한국적 교육(박일경 명지대 헌법학 교수)”이 돼야 한다거나 “국가교육과정 개정의 기본 방향 또한 국민교육헌장의 이념 구현(정세문 음악교육자)”이어야 한다는 등의 애국적 주장도 지면 다수를 점령했다.

신년호의 특집은 1972년에 이어 또 ‘새마을 교육의 실적과 전망’이었고, ‘한국적 민주주의 우리 땅에 뿌리박자’와 같은 구호가 큰 글씨로 잡지의 이곳저곳에 마치 깃발처럼 나부꼈다. ‘새마을 교육 대상 입선작’이 실리고, 소개된 교육자료는 ‘10월 유신을 위한 사회과 교사용 지침’이었다. 편집자의 말대로 1972년을 ‘새마을의 해’라 불러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고, <새교육>은 제호일 뿐 내용은 <새마을교육>으로 변하고 있었다.

1973년은 ‘유신의 해’였다. 2월호의 권두언에서 김성식 충남도교육감은 ‘유신 정신 구현을 위한 학교교육의 혁신’ 방안을 제시했고, 김은우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는 교육자들에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살리는 결단을 요구했다. 그는 심지어 “정열적인 조국애와 민족애가 새로운 윤리의 척도”가 돼야 하고 교육내용과 제도도 이 기준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등교육과정 개정(2월 공포) 직후 간행된 3월호 특집 ‘새 교육과정에 따른 교육방향’에서는 심지어 산수과의 경우에도 ‘한국적 산수교육’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시됐다(이정실 서울시립농대 교수).

1974년 8월 15일에 있었던 대통령 저격미수(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으로 교육은 반공을 넘어 승공을 위한 수단이 되고 있었다. 1974년 10월호는 ‘승공교육의 강화’ 특집으로 꾸며졌다. 승공교육의 강화 구현 방안, 승공교육 자료 개발 계획 시안, 승공교육 학습지도안 등이 실렸다. 해외 교포에 의한 대통령 저격사건으로 인해 ‘교포교육 강화를 위한 교육자 앙케트’가 시행됐고, 김인회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는 “교육경쟁은 제3의 전쟁임을 명심”하고 교포교육을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초등학교 교사 정춘모는 “민족주체성 확립을 위한 미술교육”의 필요성을 외쳤다. 산수(수학)조차 한국적이어야 하고, 미술교육도 민족주체성을 지향해야 하는 슬픈 시대였다. 주체성을 강조한 나머지 한국적 물리학이나 한국적 과학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용기 있는 학자는 찾아보기 힘든 시대였다.

이런 어둡고 침울한 환경 속에서 청소년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할 수는 없었다. <새교육> 1975년 4월호에 인용된 한 보고서의 내용으로는 1970년대 중반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2/3가 ‘노이로제 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담자 차경수 교수는 원인을 부모가 주도하는 입시 경쟁이 청소년들의 심신을 괴롭혔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국가가 강요하는 애국 활동과 애국 교육도 청소년들에게 이중의 부담이 됐을 것이다.

1970년대 ‘노이로제 시대’의 교육을 상징하는 현상 중 하나는 재수생 문제, 특히 대입 재수생 문제였다. 재수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1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며 용기의 산물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 알려진 인물 중에도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 등의 과학자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문학가도 재수를 통해 자기의 꿈을 실현했으며, 이순신 또한 4수 끝에 무과에 합격했다.

문제는 재수생의 규모와 사회적 비용이었다. 4월호의 대담을 보면 1975학년도 대학 입시의 경우 입학 정원이 5만 7000명인데 재수생이 무려 16만 5000명에 달했다. 1975년 입시에서 예비고사에 응시한 학생이 22만 명이었고, 이 중 11만 명이 합격했다. 예비고사 합격자 중 5만 7000명만이 본고사에 합격했고, 나머지 5만 3000명은 불합격해 재수의 길을 가게 됐다. 예비고사 불합격자 11만 명 중 6만여 명이 재수를 선택했기 때문에 1975년 한 해에 재수생 11만 3000명 발생한 셈이었다. 

재수생 중 74%, 거의 4명 중 3명이 낙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대학을 비롯한 유명대학의 재수생 합격률이 입학생의 40% 전후를 차지한다는 것이 재수를 부추기는 배경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류대학이 문제였고, 재수생 프리미엄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런 사회적 환경과 교육적 여건 속에서 국가와 부모를 만족하게 해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노이로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인 시대였다. 당시 통계에 의하면 가계비의 50% 이상이 교육비로 지출되고 있었으니 이 또한 정상은 아니었으며, 재수생들에 의한 풍기문란도 항상 비판의 대상이었다.

대담자 이상갑 여의도고 교사의 표현대로 “비생산적인 교육, 비생산적인 지식은 오히려 무식보다 해롭다”는 격언이 실감 나는 시절이었다. 1970년대 중반의 ‘노이로제 시대’가 탄생시킨 ‘노이로제 교육’은 사회적 낭비이며 비극이었다. “사모아에는 학교는 없으나 훌륭한 교육은 있다”는 마거릿 미드의 표현이 그리운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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