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럽다’는 형용사이다. 느낌을 나타내는 말이다. 사물의 바닥이나 표면을 손으로 만졌을 때, 느껴지는 어떤 부드럽고 매끈한 질감을 나타내는 말이다. ‘미끄럽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거침없이 저절로 밀려 나갈 정도로 번드럽다’로 풀이되어 있다. ‘번드럽다’라는 말이 좀 낯설다. 그래서 이 말을 다시 사전에서 찾아본다. ‘껄껄하지 않고 윤기가 나도록 미끄럽다’라고 풀이되어 있다. ‘미끄럽다’와 ‘번드럽다’는 뜻이 비슷한 말이다.
‘번드럽다’에는 좀 다른 뜻도 있다. ‘사람됨이 어수룩한 맛이 없고 몹시 약삭빠르다’라는 뜻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말도 원래 ‘미끄럽다’가 사물의 질감을 나타낼 때 쓰였던 것을 사람의 성격이나 태도에 옮겨와서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끄러운 사람’이라고 직설법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미꾸라지 같은 녀석’이라든가 ‘기름 뱀장어 같은 사람’ 등으로 비유하여 쓰는 예는 많다. 이런 것을 보면, ‘미끄러움’이 그냥 촉감의 표현으로만 끝나지 않고,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을 표현하는 데로도 동원됨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원래는 자연과 사물의 상태를 설명하는 말로 형용사가 만들어졌어도, 그 말이 인간사회에서 쓰이는 동안에는 인간의 심리·성격·기질·태도 등을 설명하는 데로 그 쓰임이 확장된다.
‘미끄럽다’니 ‘곱다’니 하는 형용사들을 정면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또 그렇게 설명을 했다손 치더라도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미끄럽다’와 반대가 되는 느낌을 말해 주면 뜻풀이가 바로 다가온다. 그래서 ‘미끄럽다’는 ‘거칠다’, ‘삭막하다’, ‘꺼끌꺼끌하다’, ‘까칠하다’, ‘투박하다’ 등의 반대쪽에 있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미끄럽다’ 또는 ‘미끄러움’에 내재하는 의미가 반드시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어떤가. 사람들이 나를 두고 ‘미끄러움’의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나는 기분이 좋겠는가. “그 사람 말이야, 사람이 좀 미끄럽지”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평가되는 것을 사양하고 싶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사람됨이 어수룩한 맛이 없고 몹시 약삭빠르다’라는 뜻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미끄러움의 이미지’는 이 말 자체의 나쁨이라기보다는, 한국인이 ‘미끄러움’을 문화적으로 인지하려고 할 때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미끄럽다’와 관련하여 그런 인식 전통을 우리가 가져온 것이다.
통념에만 따라가지 말고 생각해 보자. 미끄러움에 내재하는 덕성(virtue)은 정말없단 말인가. 아니다. 기계나 공구가 뻑뻑하여 움직이지 않을 때, 윤활유를 친다. 윤활유의 속성은 미끄러움이다. 베어링이 마모되지 않고 잘 맞물려 돌아가려면 베어링과 베어링 사이를 잘 중재하는 미끄러움이 있어야 한다. 그걸 윤활유가 한다. ‘조직에서 윤활유와도 같은 사람’이라고 평가한다면 더없는 찬사이다. 사근사근하다, 붙임성 있는 사람이다, 친절하다 등등의 평가에는 사실 ‘미끄러움’의 자질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관계와 소통을 부드럽게 하는 미끄러움은 필요한 순기능이다. 미끄러움은 그 나름의 덕성을 지닌다. 그러니까 분명해진다. ‘미끄러움’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지나치게 미끄러운 것’에 문제가 있다.
SNS에 나도는 유머에 ‘간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이다. 풍자와 조롱이 얼마나 미끈하고 거침없고 번드러운지 쾌감을 느낀다. 차별과 억압을 이겨내는 데서 오는 기묘한 해방감도 맛보게 한다. 말에 미끄러움의 작용이 잘 녹아있다. 내용은 이러하다.
간디가 영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였다. 간디가 수강하는 과목을 가르치던 피터스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그는 식민지 출신의 인도 청년 간디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식민지 학생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간디가 대학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피터스 교수 옆으로 식판을 들고 다가가서 앉았다. 피터스 교수는 강한 차별 의식을 드러내며 간디에게 말했다. “이보게 간디 학생, 아직도 무언가를 잘 모르는 모양인데, 돼지와 새가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경우는 없어요.” 간디가 그 말을 바로 받아서 말했다. “아, 걱정 마세요. 교수님! 그럼 제가 어서 다른 곳으로 훨훨 날아갈게요. 하하하!”
간디에게 한 방 먹은 교수는 은근히 화가 났다. 간디에게 복수하려고 했다. 교수는 중간시험에서 문제를 어렵게 냈으나, 간디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교수는 분을 삭이며 간디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간디 학생이 길을 걷고 있는데 두 개의 자루를 발견했어요. 한 자루에는 돈이 가득 들어있고, 다른 자루에는 지혜가 가득 들어있어요. 둘 중 하나만 주울 수 있다면 간디 학생은 어떤 자루를 택하겠는가?” 간디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돈 자루이죠.” 교수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쯧쯧쯧. 저런 한심한 경우가 있나.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나는 지혜를 택하겠네.” 간디가 말했다. “뭐,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선택하는 것 아니겠어요. 하하하!”
너무도 약이 오른 교수는 간디의 시험지에 신경질적으로 ‘idiot(멍청이)’이라 적은 후 그에게 돌려주었다. 시험지를 받은 간디가 교수에게 다가가 말했다. “교수님, 제 시험지에 점수는 안 적혀 있고 교수님 서명만 있는데요. 하하하!”
간디의 언행에 ‘미끄러움’의 자질이 소복이 숨어 있다. 이 경우 ‘미끄러움’을 작고 아담한 어감으로 미화한 말로 ‘매끄러움’이란 말이 적절하다. ‘매끄럽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세 가지 뜻이 있다. 1) 거침없이 저절로 밀리어 나갈 정도로 반드럽다. 2) 글이나 말에 조리가 있고 거침이 없다. 3) 수더분하지 못하고 약삭빠른 면이 있다. 위의 이야기에서 간디가 발휘하는 매끄러움은 아마도 2)의 풀이와 깊은 연관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1)과 3)의 자질도 상당히 많이 발휘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간디는 영국인 교수의 편견에 매끄럽게 대처한다. 즉, 무례하게 덤비거나 거칠게 욕설하거나 거세게 싸우지 않고, 반드럽고 부드럽고 산뜻하게 제압한다. 얼마나 민첩하고 매끄러운지 교수는 번번이 간디 학생에게 당한다. 이런 풍자성이 강한 유머는 수사적(rhetorical)으로도 우수하다. 수사학적으로 뛰어난 표현을 구사한다는 것은 언어나 심리에서 ‘미끄러움(또는 매끄러움)의 효용’을 최대한 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디의 유머를 통째로 평가한다면 ‘아주 미끈하다’고 할 수 있겠다. ‘미끈하다’는 물론 ‘미끄럽다’에서 뻗어 나온 말이다. 말뜻을 확인해 보니, 세 가지 뜻이 있다. 1) 흠이나 거친 데가 없이 부드럽고 번드럽다. 2) 차림이나 꾸밈새가 훤하고 깨끗하다. 3) 생김새가 멀쑥하고 훤칠하다. 옹졸한 교수에게 응대하는 간디의 말솜씨나 마음자리가 1), 2), 3) 모두에 해당하는 것 같다. 부당한 것에 대한 풍자나 조롱은 ‘속 시원한 미끄러움’을 맛보게 한다. 언어나 심리에 미끄러움의 자질을 실어 낼 수 있으면, 그것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인지적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미끄러움은 기름의 본성이다. 적절한 미끄러움(매끄러움)은 삭막한 갈등을 피하게 한다. 그러나 미끄러움이든 매끄러움이든 그것의 과잉은 악덕이다. 그 과잉의 경지를 교언영색(巧言令色) 이라 했다. 미끄러움이 넘치는 사람을 일컬어 ‘뺀질이’라고 한다. 미꾸라지처럼 미끄럽게 빠져나가며 몸을 요리조리 빼면서 일을 열심히 하지 아니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뺀질이’이다. 거죽이 매우 매끄럽고 윤기가 흐른다는 뜻으로 쓰이는 ‘빤질거리다(반질거리다)’에서 온 말이 ‘뺀질이’이다. 내 안의 미끄러움을 과신하면 내가 사기꾼이 된다. 상대의 미끄러움을 주의하지 않으면 내가 사기를 당한다.
미끄러움에 대하여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그 미끄러움이 자연현상이든, 그 미끄러움이 인간 본성이든 경계해야 한다. 상대의 미끄러움에 휘말려 드는 것도 불행이지만, 나 자신의 미끄러움에 내 스스로 넘어지는 것도 딱하다. 일상에서 ‘미끄럽다’ 에 가장 널리 붙여 쓰는 말이 무엇이었던가. ‘미끄럽다’에 가장 자연스럽게 연결 짓는 말이 무엇이었던가. 바로 이 말이다. “조심해! 미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