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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교육 칼럼] 글쓰기에는 두 마음이 살고 있다

신문사에서 내 글을 싣겠다며, 원고 요청을 해 오면 누구든 진지해진다. 요청받은 주제에 따라서는 자못 비장해지기까지 한다. 개인의 허튼소리를 글로 써서 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방송에 나와서 어떤 문제에 대한 토론의 패널(panel)이 되어달라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무슨 글을 쓰든지 글에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나타내어야 한다. ‘나’가 없는 글이란 없다. ‘나’를 나타내는 데에 목적이 있는 글이 아니어도, 그런 글에도 어쩔 수 없이 ‘글 쓰는 나’가 나타난다. 그것은 어떤 글쓰기 천재도 피해 갈 도리가 없다. 개인의 자아가 배제되는 극단의 공적인 글에도, 이를테면 ‘기미독립선언문’ 같은 글에도, 그 글을 기초한 최남선이란 인물을 연결 지으며 우리는 그 글을 읽는다.


신문에 기고를 한다는 것은 내 글을 세상 만인이 다 주시한다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옴짝 없이 세상에 드러나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왕이면 ‘나’를 잘 나타내는 글이 되도록 애를 쓴다. 천 가지 만 가지 나의 모습 중에도 가장 그럴듯한 ‘나’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야말로 ‘근사(近似)한 나’를 담아내야 한다. ‘근사하다’는 단순히 멋있다는 뜻을 넘어선다. ‘근사하다’의 본 뜻은 ‘매우 이상적인 경지에 아주 가까이 닮아 있다’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런 ‘이상적인 자아’를 자기의 글에 담고 싶다. 만에 하나 ‘비겁한 나’가 드러나서도 안 되고, ‘부도덕한 나’를 보여서도 안 된다. ‘게으르고 이기적인 나’는 철저히 감추어야 한다. 무지해 보여서는 더욱 안 된다. 더더구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자아를 보여 줄 수는 없다. 그것에 더하여 문장을 아름답고 멋있게 쓰고 싶다. 요컨대 흠결 없는 ‘나’를 글에 담아내려고 노력한다. 또 가능하면 내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내 글이 폭넓은 설득력을 발현하기를 기대하며 글을 쓴다. 학창시절 교지나 학교 신문에 글을 싣게 되었을 때, 얼마나 나를 근사하게 알리고 싶어 했던가. 주장하는 글을 쓸 때는 ‘강력한 자아’를 드러내고 싶어 했고, 문학적인 글을 쓸 때는 ‘순정한 자아’를 표현하고 싶어 했지 않았던가. 나 또한 그러하다. 처음 교수가 되어서 처음으로 교수 회의에서 발언을 할 때도 얼마나 엄청나게 올바른 자아가 되어서 발언을 했던가.


‘순정한 자아’니 ‘강력한 자아’니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의지적으로 가장 훌륭한 정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공공의 매체에 글을 쓴다는 것은 나 자신이 공동체를 위한 ‘공정한 도의’에 이미 의지적으로 도달해 있을 것을 요청받는 것이며, 또 그 요청에 기꺼이 응하는 일이다. 아니 그런 상태가 되어야 글을 쓸 수 있다. 하다못해 ‘독자투고’나 ‘시민의 소리’에 짧은 한마디를 쓸 때도 사설을 쓰는 논설위원의 공의로운 태도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당당하고 올바른 ‘공적 자아’를 갖추려고 한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 안의 개인이 어떤 공식적 표현을 한다는 것은 그런 정신적 긴장을 반드시 요청한다. 조금도 나쁠 것이 없다.


글을 쓰는 것은 눈에 아니 보이는 유익함이 가득하다. 글을 매체에 게재하는 것은, 요즘 말로 글로써 널리 소통하는 일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유익하다. 우선 나를 의미 있게 사회화(meaningful socialization)한다. 그런 글을 쓰는 동안에 나의 자아는 공동체 윤리를 각성한다. 그동안 개인적 욕망의 수준에서만 살아왔던 자신을 반성하는 안목도 기르게 된다. 동시에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신의 책무를 보다 적극적으로 배우게 한다.

 

글쓰기가 우리에게 주는 미덕은 무한일까? 얼핏 보면 그런 것처럼 보인다. 매체에 글을 쓰면서 ‘강력한 자아’나 ‘순정한 자아’를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그렇게 되는 방향으로 나를 만들어나간다는 점에서 글쓰기의 미덕에 해당한다. 그런 글을 쓰기 때문에 은연중에 도덕적 품성을 찾아가게 된다. 그런 글을 쓰면서, 여러 사람 앞에 나아가도 ‘부끄러움이 덜한 나’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내가 쓴 글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지려는 마인드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발성이 강한
글쓰기는 그 자체가 바로 ‘실천’이라는 명언이 있지 아니한가.


그런데 여기까지가 글쓰기의 미덕이다. ‘강력한 자아’나 ‘순정한 자아’를 보이려는 것이 도를 넘으면 글쓰기의 미덕은 사라진다. 나를 그럴듯하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글쓰기의 덫일 수도 있다는 점을 놓치면, 글쓰기의 미덕은커녕 글쓰기의 악덕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의외로 글쓰기 초보자보다는 상당한 경력자에게서 나타난다. 특히 사람들에게 널리 소통되는 글을 쓸 때는 누구도 피해 가기 어려운 허영의식이 있다. 글쓰기의 심리적 기제 속에 이런 허영의식이 있고, 글쓰기가 사회적으로 소통되는 여러 국면에서도 이런 허영의식이 작동할 소지가 곳곳에 숨어 있다.


그런 허영의식에 기울어질 때 나타나는 글쓰기의 폐단을 들어 보자. 1) 글을 쓰기 위한 글쓰기, 2) 대중에게 자랑하여 보여주기 위한 글쓰기, 3) 글 쓰는 이가 소영웅주의에 빠져 버린 자기도취의 글쓰기 등이 있다. 이런 글쓰기 폐단은 대체로 ‘글쓰는 자아’와 ‘실제의 자아’가 조금도 일치되지 못하면서도 글쓰기를 자기과시나 명예욕의 욕망으로만 추구할 때 일어난다. 딱한 것은 이미 독자들은 그런 허위의식을 눈치채고 있는데도 막상 본인만 모른다는 점이다. 자기가 자기를 속이고 그 속임에 자기가 이미 넘어가 있는 ‘자기기만의 글쓰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글쓰기에 따라붙는 허위의식에 대해서 통렬한 각성을 제기하는 소설가이며 칼럼니스트인 홍형진 작가의 발언 한 대목을 함께 음미해본다.


나는 여느 사람보다 훨씬 큰 스피커(사회를 향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유력 일간지와 잡지 여럿에 지속적으로 글을 써왔고 매체에서도 나를 주요 필자로 대해준다. 책을 내고파 하는 출판사도 몇몇 있으며 SNS에서 내 글을 꾸준히 읽어주는 이 또한 제법 된다. 똑같은 말을 해도 가중치를 얻는 위치에 있다는 소리다. 대놓고 헛소리를 해도 누군가는 진지하게 믿을 테니 냉정히 보면 이것도 기득권의 한 갈래다.

 

하여 나는 내 글에 책임을 져야 한다. 스피커 또한 사회의 한정된 자원 중 하나니까.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지 않나? 한데 그런 내가 단지 내 생각이나 성향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극적으로 글을 쓰고 누군가의 삶을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그건 태만을 넘어선 전횡이다. 글쓰기를 그치지 않는 한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다 보니 언제부턴가 서민, 저소득층 같은 단어는 쉽게 쓰지 못하게 됐다. 나 역시 그들의 삶을 세세히 살피며 고통에 공감하는 도덕군자는 아니니까. 지표를 통해 현황을 살피는 게 고작이다. 한데 나와 비슷한 입장인 게 눈에 빤히 보이는 사람이 걸핏하면 서민 타령을 해댈 때면 속에서 무언가가 치솟는다. 차마 표현은 않지만.

                                      홍형진, ‘중산층 글쟁이의 딜레마와 과제’ 중에서(페이스북, 2018.9.12.)

 

글을 쓰면서 자신의 ‘이상적 자아’를 자랑하려는 욕구가 너무 지나치면, 글쓰기는 이미 미덕이 되기 어렵다. ‘이상적 자아’만 있고, 솔직한 ‘현실의 자아’를 망각하면 글쓰기는 이미 허위의식이 지배한다. 그런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글을 쓰면서 마치 자신은 무오류의 사람인 듯 말한다. 마치 자신은 하늘에서 온 심판자처럼 말한다. 오만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의 마음에 차오르는 진정성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는 글쓰기의 악덕이다. 진정성 있다는 것만으로 다 용납될 수는 없는 것이다. 때로 ‘진정성’은 ‘반이성(反理性)’과 동의어이다.


글쓰기는 본질적으로 ‘반성적 글쓰기(reflective writing)’라는 명제가 유효한 것처럼, ‘모든 글쓰기에 허위의식이 그림자처럼 따라 온다’는 말을 새겨서 경계해야 하리라. 반성이 도를 넘거나, 반성이 상투화되는 곳에도 정신의 허영이 따라온다. 오늘 내가 여기 쓰는 글도, 생각하면 등골로 땀이 흐른다. ‘너는 제대로 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 앞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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