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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별들의 언덕 - 제5화 교육적 인간

소설로 풀어보는 교사를 위한 인문학

'레트로(Retro)'에 주목하는 독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디지털 환경에 지친 현대인들이 아날로그 감성을 찾고 있다. 다시, 인문학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작은 동네 서점들에서 인문학 도서가 인기를 끈다. 아마도 인간만이 지닌 ‘온기’를 다시금 느끼고 싶은 까닭일 듯하다.

교육현장에서 오랫동안 인문학 발전에 힘을 쏟아온 우한용 서울대 명예교수가 교육현장의 감각을 살려 인문학을 소설로 조명한다. 첫 회는 ‘우주적 존재인 인간’의 의미를 추구했고, 제2화 접촉하는 인간, 제3화 희망하는 인간, 제4화 이야기하는 인간을 주제로 엮어냈다. 이번 호는 마지막회로 교육적 인간을 주제로 흥미있게 풀어냈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내 존재를 인문학적으로 성찰하는 소설을 만나보자. <편집자>

 

치통도 사라질 때는 서운하다, 그런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렸던 신천강은 자가 격리가 끝날 무렵에야 그 말을 이해하는가 싶었다.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그 문턱에 서 있는 자신은 그림자가 길었다.

 

태안고등학교 박민경 선생이 할아버지 49재를 끝내고 다부동에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갈 생각이 있는지 물어왔다. 전에 조지훈의 ‘다부원에서’라는 시를 읽어드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게 떠올랐다. 49재는 ‘태안사’에서 열렸다. 신천강은 거기 참여해서 시를 읽었다.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박민경 선생의 부친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목탁을 두드리던 스님이 목탁 치기를 멈추고 나무아미타불을 거듭 외었다. 다부동 전적지에서 장 루이라는 프랑스 젊은이를 만났다. 자기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다부동 전투에 참여해서 팔을 하나 잃었다고 했다.

 

주차장에서 전시관으로 올라가는 오른편 길옆 초가집만 한 바위에 ‘다부원에서’라는 시가 새겨져 있었다. 루이는 그 앞에 서서 시를 읽고 있었다. 신천강이 다가서자 악수를 청했고, 인사를 하고는 버럭 끌어안았다. 정부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화하라고 매일 방송을 해대는 중이었다.

 

간 고등어, 루이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물었다, 고등어가 어디로 간 겁니까? 신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외국인에게는 ‘간 고등어가’ 그렇게 읽힐 수도 있는 모양이라고 짐작을 하면서였다. 아니, 솔티드 매크럴! 위, 마끄로 살레, 메르시 비앙. 염장 고등어라는 걸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루이와 식사를 같이 하고 비주 인사를 하면서 헤어졌다.

 

무심히 지내면서 학교 출근도 하고, 인터넷 강의를 준비하면서 지냈다. 그런데 3월 중순이 되면서 열이 나고 기침이 심했다. 태안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코로나바이러스라는 것이었다. 스페인, 이탈리아를 이어 프랑스에서도 확진 환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중이었다. 컴퓨터와 책 몇 권을 들고 격리치료소에 들어갔다. 학교 개학은 연이어 뒤로 미뤄지고 있었다. 3월이 거의 지나갈 무렵, 4월 들어 온라인 개학을 한다는 발표가 났다.

 

인터넷이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학교에서는 이런저런 소식이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우선, 박민경 선생이 마치 자기 때문에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리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걱정해 주었다. 동료들의 문병 전화도 끊이지 않았다. 한솔희 선생은 자기가 연주한 피아노곡을 보내주었다. 임이랑 선생은 ‘키스의 철학’이라는 우스개를 적어 보내기도 했다. 코로나로 인해서, 마누라랑 있어도 키스하자고 덤비지 않아 살겠다는 누군가의 이야기였다. 그게 왜 철학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신천강은 ‘코로나바이러스=죽음’ 그런 등식을 마음속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 생각 자체가 바이러스였다.

 

교감 선생은 직접 찾아와서 관리인을 통해 책을 하나 전해주었다. ‘이 책은 끝까지 보아야 합니다. 독서가 바이러스 이기는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문자를 보내주었다. 박외서 산문집 <언어적 인간 인간적 언어>는 ‘주제가 있는 에세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박외서 교수가 신천강이 공부하는 대학원에 특강을 나온 적이 있었다. 잠재태를 가능태로 바꾸어주는 인류의 위대한 기획이 교육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교육은 결국 ‘자기교육’으로 귀결된다면서 학생과 더불어 성장하는 교사라야 삶을 마무리하는 장면에서 한숨을 쉬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교감 선생이 왜 책을 끝까지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을까 의문이 들었다. 책을 앞부분만 대강 읽다가 접어두는 버릇을 들킨 것 같아 좀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진의가 금방 확인되었다. 책 끝에 ‘발문’을 쓴 사람이 이인문으로 되어 있었다. 끝까지 읽는 게 아니라 발문부터 읽게 되었다.

 

 

이건 사뭇 외람된 일이다. 은사 선생님의 책에 발문을 쓴다니. 그러나 생각해 보면 고마운 일이다. 평소 선생께서 그렇게도 강조하던 소통을 실천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화답 시를 쓰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내가 <교사를 위한 인문학>이란 책을 냈을 때, 그 서평을 써서 ‘전국교육신문’에 실어 주는 은덕을 입었다. 공부하는 교사를 추어주시던 일도 기억에 새롭다.

 

선생께서는 제자들과 많은 공저를 냈다. 선생께서 공저에 이름을 올려준 덕으로 대학에 자리 잡은 젊은 학자들이 여럿이다. 그런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학문을 매개로 하는 사제 간의 정리(情理)가 얼마나 부러웠던지 모른다. 당신이라고 단독저서를 내고 싶지 않았을까. ‘언어적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 노동강도가 가장 높은 게 책 쓰기 아니겠는가. 그 언어 노동판에 팔 걷고 나서서 후학들과 어울리는 일은 헌신과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성스러운 과업이다.

 

인간이란 도무지 해명이 안 되는 존재다. 따라서 ‘인간적 언어’라는 것 또한 풀리지 않는 화두가 아니겠는가. 인간적이라는 말 자체가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는다. 인성이니 인간성이니 하는 말은 우리가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개념적 인간을 상정한다. 따지자면 공자와 도척은 둘 다 인간적이다. 해명이 안 되는 존재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사유의 ‘폭발’이 있어야 한다. 이 책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지만 사유의 폭발로 가득하다. 인간적 언어를 뒤집어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해명되지 않는 인간을 교육한다는 것, 그것은 필연적으로 예술 행위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교육학을 모색하는 일이야 일러 무엇하겠는가. 그런데 선생은 평생 교육자로 살아왔다는 점을 이따금 환기한다. 그리고 교육자가 언어를 다루는 학문에 관여하며 살았다는 점도 간간이 적어 놓았다. 인간 - 교육 - 언어, 이 세 항목은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아포리아다. 더구나 이를 연구하는 학문에 종사하는 일이 어찌 호락호락 품에 안겨 올 수 있겠는가. “위대한 학문적 사유들은 어떤 점에서 예술과 비슷하다. 그것은 폭발과도 같이 출현한다.” 유리 로트만의 말이다. 선생은 “예측 불가능한 장소에 폭약이 매설된 평원”에 서 있으면서도 “봄철의 상쾌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마주하고 선 듯 웃는 낯으로 ‘내 맘의 강물’을 노래한다.

 

교육은 궁극적으로 ‘자기교육’을 지향한다. 자기교육이란 주체와 대상의 공진화를 뜻한다. 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공진화는 물론이고, 자기 안의 타자와 함께 존재 상승을 도모하는 기획이다.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그 깨달음을 실천하는 제반 과정에서 맛보는 환희와 좌절이 모두 언어와 연관된다는 지적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선생의 책이 말의 힘과 마음의 힘을 깨닫고, 마음 밭을 가꾸면서 인성을 발양하여 결국은 이상적인 소통의 생태학을 모색하는 것은 그 구조 자체가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 세계의 가장 높은 자리에 ‘소통의 생태학’이 자리 잡는다. 거기까지 도달하면 ‘말에게 무슨 죄를 물을까’ 하는 우려는 저절로 자취를 감출 것이 아닌가.

 

아무쪼록 이 책이 선생께서 일구어가는 생애 서사에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책이 나오면 맑은 술 한잔 올려야겠다.

 

신천강은 이인문 교감 선생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발문이 책을 읽고 싶게 하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말로 소모할 게 아니라 실천으로 다가가기로 하고 핸드폰을 접었다. 전에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작품은 후경으로 밀려나고 비평만 무성한 시대가 되었다고. 실체로 다가가기. 다가가 맞대면하기. 머리가 아프고 좀 가라앉았던 열이 다시 오르는 것 같았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실체를 드러내는 중이었다. 우선 판피린 두 알을 먹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벚꽃잎이 눈처럼 날렸다. 문득 루이라는 친구 생각이 났다. 프랑스에 돌아가서 아무 일이 없을까. 아직 죽음을 생각할 나이는 아니었다. 두통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신천강은 책상에 앉아 <언어적 인간, 인간적 언어>를 펴놓고 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박외서 교수님! 이인문 교감 선생님께서 전해주셔서 교수님 쓰신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전에 우리 학교에 특강 오셨을 때, 교육이 아직은 계층상승의 문턱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겁도 없이 교육은 계급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이데올로기 구도일 뿐 아니냐고 어깃장을 놓았던 신천강입니다. 기억하시나요?

 

아니, 이러면 안 되지요. 어떤 선언보다 강력한 언어 에너지를 지닌 화행이 물음입니다. 물음 중에 가장 무거운 게 아마 존재물음일 겁니다. 저는 지금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을 앓고 있어요. 제가 보내는 이 메일이 이승에서 내가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메시지가 될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존재물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교수님 책 읽으면서 안정하고 지내면 코로나바이러스도 물러갈 거라고 믿고 있으니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교수님은 평정심이 있으신 분 같습니다. 말의 힘만 강조하지 않고 그걸 마음의 힘과 마주 놓아 평형추를 마련하고 계시네요. 그런데 다시 보니 생각이 달라져요. 말의 힘이 곧 마음의 힘이고 마음의 힘은 말의 형상으로 나타나잖아요? 둘이 맞물고 돌아가는 것을 갈라놓는 건 아닌지요? 또 진정한 힘은 보이지 않는다고요? 그럼 진정하지 못한 가짜 힘만 보이는 건가요? 생텍쥐페리의 어느 구절을 변용한 것 같은데, 본질과 형상이 맞물고 돌아가는 거라면, 이런 이분법은 좀 안이한 발상 아닌지요? 죄송해요. ‘눈썰미’ 이야기는 서사가 갖추어져 있어서 잘 읽히네요. 플라톤이 그 꾀까다로운 이야기를 왜 모두 서사로 처리했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말을 안다는 것’은 세계를 안다는 것이고, 세계를 안다는 것은 ‘세계-내-존재’로서 나를 형성하는 일. 따라서 그게 교육의 궁극적 지향이 아닐까 싶네요.

 

제 별명이 어깃장이거든요. 용서하세요. 마음 밭은 언어 아닌가요? 의미장이라고 하는 세만틱 필드, 그게 마음 밭일 거예요. 교수님은 듣기가 어렵다면서 듣기를 참 잘하시는 분 같습니다. ‘욕의 품격’이나 ‘길을 막고 물어봐’ 그거 우리 선배님한테 듣던 얘기거든요. 교수님도 아마 그 선배님 이야기 듣고 그 글 쓴 거 같아요. ‘인생 최고의 시절’은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어느 소설가는, 당신의 대표작이 뭐냐고 물으면, 죽기 전에 쓰려고 한다면서 의뭉을 떤대요. 그렇겠지요. 인간의 가능성이 끝을 알 수 없다는 믿음이 교육의 본질일 테니 말이지요.

 

‘언어와 인성 사이’에 붙은 화두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을 찾습니다’는 웃기는 내용 아닌가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냄새가 있지 않나요? 그 냄새가 조금씩 다를 뿐인데 말이지요. 사람 냄새 좋아하는 건 드라큘라 족속일지도 몰라요. 우리 어머니는 나 인간 냄새 지긋지긋하다, 그렇게 머리를 내둘렀거든요. 사람 너무 갈라보지 마세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왜 인물을 그렇게 많이 설정했겠어요? 죽도록 고생하면서 말이지요. 인간을 총체적으로 보자는 작가의 의욕이 그런 설정을 했을 건데요.

 

거기 누구 없어요? 제가 지금 그런 심정입니다. 불안에 떨다가 다시 잘 되겠지, 그렇게 믿다가, 다시 머리가 아파지면 정말 죽으려나, 죽기 전에 무슨 기도를 하지? 그렇게 시간을 견뎌내는 중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못 죽을 거 같아요. 저렇게 꽃잎이 흩날리면서 지는데, 또 금방 산벚꽃이 함성처럼 피어날 거잖아요? 그리고 프랑스 루이가 잘 견디는지도 궁금하고요. 웃어야지요. “표정은 한 사람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섬세하고도 역동적인 증거이다.” 정말요? 우거지상이나 죽상 그런 것도요? 노상 아이구 죽겠네 하는 그런 말도요?

 

내가 왜 이러나 모르겠습니다. 제가 로고홀릭, 언어에 미친증이 나나 봐요. 그럼 안 죽을 거예요. 코로나바이러스 지나가면, 교감 선생님과 술 한잔 드리러 갈께요.

 

내가 1,400명 사망자 가운데 안 들어 있음을 보고함. 파리에서 루이. 신천강은 핸드폰을 접어두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건너편 산에 봄과 이별을 알리는 산벚꽃이 녹음과 더불어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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