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고 지쳐 있을 때 피로를 푸는 방법은 다양하다. 편안한 공간에서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달콤한 음식을 먹으면 어느새 피로가 풀린다. 단맛은 우리의 피로를 풀어주는 행복한 맛이다. 반면에 단맛은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음료를 주문할 때 습관적으로 ‘달지 않게 주세요’라고 말을 하며 단맛을 피하려고도 한다. 단맛은 건강에 안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양면을 지니고 있는 단맛, 단맛의 중심에는 ‘설탕’이 있다. 지금은 너무도 쉽게 접하는 설탕이지만, 아주 긴 역사와 이야기를 갖고 있다. 설탕과 관련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설탕 이전의 시대, 곧 당신의 혀 위에서 녹는 하얀 곡물들이 지구상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 역사가들은 무기와 도구에 대해 사용된 금속들을 언급하며 철기시대·청동기시대를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와 마찬가지로 처음 수천 년 동안의 인류역사를 벌꿀의 시대(the Age of Honey)라고 일컬을 수 있다.
스페인의 한 바위그림은 기원전 7,000년경부터 산비탈을 기어올라 바위틈에서 벌집을 발견하고 꿀을 따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얼음으로 뒤덮이지 않은 유럽이나 아프리카·아시아의 거의 어디에서건 운 좋은 방랑객이라면 벌집을 우연히 발견하고 벌에게 몇 방 쏘이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이 특식을 들고 떠날 수 있었다. …(중략)…
꿀은 삶의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부모들과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 곁에서 자란 음식을 먹었고 왕들과 귀족들, 그들보다 높은 사람들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했다. 벌집 안의 벌들이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모델로 여겨졌기 때문에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벌들에게 신들의 불꽃이 담겨 있는 것으로 여겼다.
설탕은 꿀과는 다르다. 그것은 보다 강한 단맛을 제공하며 강철이나 플라스틱처럼 발명되어야 했다. 설탕의 시대에 유럽인들은 수천km 떨어진 곳에서 만들어지면서도 길가에서 얻는 꿀보다 덜 비싼 상품을 구매했다. 그것은 단지 설탕이 사람들을 전 세계에 걸쳐 이동하도록 유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들 가운데 수백만 명은 사슬에 묶인 노예로서, 또 다른 소수의 사람은 부를 찾아 이동했다. 이러한 완벽한 맛은 가장 잔혹한 노동에 의해 구현될 수 있었다. 그것은 설탕의 어두운 이야기이다. 또한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인류의 지식이 확장되고 거대한 문명과 문화들이 사상을 교환함에 따라 설탕에 관한 정보는 확산되었다. 사실 설탕은 노예제가 확산되는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한편으로, 그것으로 야기된 지구 규모의 연결은 또한 인간의 자유를 향한 가장 강력한 사상들을 키웠다.
본문, p.16
하나의 대상으로 인류의 사상과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정말 매혹적으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설탕의 역사에서 시작하여 노예들의 자유를 억압한 암울한 이야기 그리고 사상의 탄생까지…. 이렇듯 하나의 소재를 코드로 세상을 읽어가는 것은 소재 자체를 이해할 수 있고,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
때는 기원전 326년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현재 파키스탄에 위치한 인더스강에 서 있었다. 10년 동안 그와 그리스 병사들은 아시아의 지배자들이었던 강력한 페르시아인들을 무찌르며 당시까지 알려진 세계를 지나 전투를 벌이며 전진해 오고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미 800척 규모의 선단을 건조한 상태에서 절친한 친구인 네아르쿠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뱃길을 따라 인도 해안을 탐험하도록 파견했다. 우연히 ‘달콤한 갈대’를 발견하는 이는 네아르쿠스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1세가 기원전 510년경 인도를 정복했고, 그의 병사들이 꿀을 생산하는 한 줄기 달콤한 갈대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페르시아인들이 발견한 갈대는 십중팔구 사탕수수였다. 길고 가느다란 사탕수수 줄기는 대나무를 닮았다. 사탕수수는 옹이들로 마디가 지어진 나무 같은 껍질이 있다. 껍질을 벗겨 내면 회색빛이 도는 내부는 촉촉하고 달콤하다. 그것을 이 사이로 빨아들일 수 있고 주스에 넣어 마실 수 있다. 오늘까지도 여러분은 열대지역 시장마다 쌓여 있는 사탕수수 더미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구매자들에게 막대사탕과 건강음료 사이 어디쯤 놓여 있는 신선한 맛을 제공할 것이다.
네아르쿠스 또한 출항하여 탐험했을 때 ‘꿀벌은 없지만 꿀을 생산하는’, ‘갈대’를 발견했다.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강한 그리스인들은 사탕수수를 알게 된 것에 대해 기뻐했지만 그것은 단지 자연세계에 관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일 뿐이었고, 한 가족이 최근에 구경한 풍경을 순차적으로 보여 주는 우편엽서 같은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갈대들’이 꿀벌의 시대,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꿀벌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본문, p.21
설탕은 지금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설탕은 귀족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재였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설탕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된다. 긴 역사의 시간 동안 누군가는 그 발견을 할 수 있었겠지만, 그 순간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새로운 어떤 발견의 순간들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준다. 그 발견으로 우리의 역사와 삶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순간을 ‘변곡점’이라고 부를 수 있다.
설탕 밭에서 일했던 아프리카인들과 힘겨운 노동에 대해 인터뷰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일하면서 죽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한 가지 길이 있다.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의 삶의 고동, 곧 박자를 음악과 춤과 노래로 창작했다. 푸에르토리코에서 봄바(bomba)는 설탕 노동자들이 만든 음악과 춤이다. 그것은 한 여성과, 그녀와 함께 춤을 추는 남성, 그녀를 관찰하면서 그녀의 율동에 딱 맞는 리듬을 찾아가는 북 연주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리듬으로 표현한 일종의 대화다. 주인이 지나가면서 춤을 지켜본다. 분개나 폭동을 표현하는 가사는 이 음악에는 없다. 하지만 그녀가 움직이고 흔들어 대고 북 연주자들이 자신들의 박자를 배경으로 ‘이야기하는’ 동안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그저 일하다 죽기 위해 태어난 노동자도, 한 점 고깃덩어리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생존해 있으면서 그들 자신의 것인 율동과 소리로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쿠바에서 설탕 노동자들은 룸바(rumba)의 가사와 사운드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한 노래에서 말한 것처럼 ‘주인은 내가 북을 연주하는 걸 원치 않았다.’ 감독관들은 노예들이 북을 이용하여 메시지를 전달하고 폭동의 의사를 확산시키는 것을 두려워했다.
마찬가지로 브라질에는 설탕 농장을 떠올리게 하는 마쿨렐레(maculelĕ)라는 춤이 있다. 마쿨렐레는 막대나 사탕수숫대를 이용하여 춤을 추는 것으로 흡사 전투훈련을 연상시킨다. 많은 설탕 섬들에서 아프리카인들은 빙글빙글 돌고 높이 뛰어오르며 상대를 위협하는 것처럼 춤을 추고 나무막대를 두드리고 휘두르는 유사한 춤을 고안했다. 이들의 춤은 실제로는 주인에게 도전하지 않으면서 전쟁을 모방하는 방식이었다.
본문, p.68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사람들의 달콤함을 위해 그에 반대되는 쓰디쓴 고통을 누군가는 쏟아 부어야 했다. 수많은 노동자가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노동을 착취당했던 기록이다. 더 슬픈 것은 그들의 눈물을 기록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흥겨운 음악 속에서 그 눈물을 유추할 수 있다. 흥겨운 리듬에 슬픔의 역사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의 작가는 설탕을 소재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바를, 그리고 교육현장에서 활용될 수 있는 길을 소개하며 마무리한다. 이렇듯 세계사를 관통하는 다른 소재를 찾아 자료를 모으고 글로 풀어보는 것은 우리 인식의 지평을 한 단계 넓혀줄 수 있을 것이다.
설탕에 관한 자료를 읽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설탕이라는 생산품 이야기가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설탕과 노예제가 자유를 향한 투쟁에 어떻게 연관되었는가? 이 질문은 미국·프랑스, 아이티 혁명과 이들 국가 및 영국에서 벌어졌던 노예 폐지 운동과 관련된다. 둘째, 설탕과 노예제는 영국 산업혁명의 탄생과 어떻게 엮여 있었는가? 역사가들은 수십 년간 이 문제들을 논쟁해 왔다. 하지만 그것들은 예컨대 미국의 노예제, 계몽운동과 독립선언, 프랑스혁명, 영국의 산업혁명, 노예 폐지와 남북전쟁같이 모두 학생들, 특히 고등학생들에게 완전히 분리된 구성단위로 너무 자주 제시되었다. 그러한 구성방식은 이들 중요한 역사 주제들이 서로 전혀 연계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본문, p.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