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고 지쳐 있을 때 피로를 푸는 방법은 다양하다. 편안한 공간에서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달콤한 음식을 먹으면 어느새 피로가 풀린다. 단맛은 우리의 피로를 풀어주는 행복한 맛이다. 반면에 단맛은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음료를 주문할 때 습관적으로 ‘달지 않게 주세요’라고 말을 하며 단맛을 피하려고도 한다. 단맛은 건강에 안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양면을 지니고 있는 단맛, 단맛의 중심에는 ‘설탕’이 있다. 지금은 너무도 쉽게 접하는 설탕이지만, 아주 긴 역사와 이야기를 갖고 있다. 설탕과 관련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설탕 이전의 시대, 곧 당신의 혀 위에서 녹는 하얀 곡물들이 지구상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 역사가들은 무기와 도구에 대해 사용된 금속들을 언급하며 철기시대·청동기시대를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와 마찬가지로 처음 수천 년 동안의 인류역사를 벌꿀의 시대(the Age of Honey)라고 일컬을 수 있다. 스페인의 한 바위그림은 기원전 7,000년경부터 산비탈을 기어올라 바위틈에서 벌집을 발견하고 꿀을 따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얼음으로 뒤덮이지 않은 유럽이나 아프리카·아시아의 거의 어디에서
지난 10월 17일 제주도 교육감이 한 초등학교를 찾아 사과했다. 악성민원에 학교가 시달리는 동안 교육행정 책임자로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의 표시였다. 이 초등학교의 한 학부모는 학교폭력과 관련해 정당한 업무 처리 결과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하며 과도한 민원과 소송을 100여 건 이상 올려 학교의 정상적인 교육 활동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민원에 대해 교육청은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았으며, 민원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교사와 학교의 몫으로 전가되고 대다수의 학생들이 정상적인 교육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됐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한국교총은 제주도 교육감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사과와 시정 조치를 받아냈으며, 교권수호 SOS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렇듯 악성 민원에 의한 폐해는 학교 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발견된다. 악성 민원의 범주를 명확히 나누기는 어렵지만 사례별로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A 교사는 다투는 아이들을 늦은 시간까지 상담을 하고 타일러 집으로 돌려보냈다. 잘 마무리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A교사는 교육청으로부터 담임 교체를 요구한다는 민원이 접수됐음을 통보받았다. 학부모가 제시
최근의 통계 기준을 보면 전체 장애인은 250만 명이 넘는다. 전체 인구의 5%를 상회하는 수치이며, 장애 판명을 받지 않았지만 정상적인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까지 생각하면 상당히 많은 사람이 장애의 고통을 받고 있다. 예전에 비해 장애인을 위한 정책적 노력은 여러 차원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물리적 지원을 위한 시설 개선과 제도 정비는 물론 맞춤형 교육시스템 마련과 인식 개선을 위한 노력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일부 지역주민들에게 무릎을 꿇은 장애학생 학부모의 모습은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을 보여준다.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 장애는 발생 유형에 따라 선천적 장애와 후천적 장애로 나눌 수 있다. 선천적 원인 (4.4%), 출산 시 원인(2.3%)을 제외하면 90%가 넘는 장애가 질병과 사고 등으로 발생하는 후천적 장애라고 한다. 다시 말해 누구나 장애를 갖게 될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장애인들이 겪는 고통 중 가장 큰 문제는 일반인들의 차별적 시선이라고 한다. 차별이 아닌 차이로 바라보고, 불편함을 도와줄 수 있는 배려와 나눔의 실천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 주말의 명화에서 슈퍼맨과 배트맨은 최고의 인기 타이틀이었다. 아동복 코너에서 슈퍼맨의 S와 배트맨의 박쥐 모양이 새겨진 옷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영웅들이 등장하는 장르를 따로 ‘히어로物’이라고 부를 만큼 일반화되어 있었다. 영웅들이 모인 이야기 영웅 이야기는 영화 속에만 있지 않다. 어려움 속에서 의로운 일을 해낸 사람들은 뉴스에 등장하여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는다.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힘을 합쳐 구하고, 화재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구한 이야기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영웅 이야기에 열광하고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영웅의 기원을 찾아보면 인류의 시작과 함께 하는 신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비범함’을 갖고 있다. 고난을 이겨내고 위대한 성과를 얻었다는 것이 신화의 일반적 패턴이며 공통된 화소(話素, motif)로 활용된다. 역사 속에서도 혼돈의 시대를 끝내고 안정을 이끈 이들이 영웅으로 추앙 받는다. 이러한 모습들을 종합해보면 영웅은 우리 인간의 삶에 보편적 추구의 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 영웅이 등장하는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의 상징처럼 널리 퍼
우리의 국모가 일본 자객들에 의해 처참히 살해되고 궁의 앞마당에서 불태워졌다. 능욕을 당하고도 제대로 된 항변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때 황해도에서 한 청년이 칼을 차고 다니는 일본인을 추궁하다 싸움이 벌어지고, 울분에 차 있던 청년은 맨손으로 일본인을 때려죽인다.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던 당시 조선의 법정은 청년에게 사형을 선고 한다. 인천감옥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당했지만 굴하지 않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준다. 그의 이름은 ‘김창수’, 훗날 ‘김구’로 이름을 바꾸고 죽는 날까지 민족을 위해 헌신을 한다. 김창수를 아는가? 우리는 대부분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고,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학습을 통해 이름과 책의 몇 구절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민족을 위한 김구 선생의 헌신과 노력, 어떤 국가로 거듭나야 하는가에 대한 그의 철학과 사상은 백범일지를 통해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젊은 날의 모습 속에서도 우리는 많은 가치를 배울 수 있다. 내우 외환이 클 때일수록 우리는 어
권력의 통제와 지배 1984년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30여 년이 훌쩍 지난 과거의 시간으로 추억한다. 조지 오웰은 1949년에 35년 후의 미래를 소설로 만들어냈다. 작은 군소 국가들이 사라지고 거대 대륙 국가들이 서로 경쟁하는 상황, 개인의 자유는 사라지고 모든 것을 국가 권력이 통제한다. ‘텔레스크린’이라는 장치가 곳곳에 설치되어 개인의 행동은 물론 말까지 철저히 감시한다. 국가 권력의 정점에 있는 ‘빅 브라더’에 의한 통치는 모든 범위에서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소설의 내용처럼 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여러 면에서 ‘1984’를 연상케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뉴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몰래카메라’와 관련된 사건들이다. 개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촬영된 영상이 불법적인 경로로 유통되어 개인의 고통은 물론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우리의 삶은 사실 누군가의 시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하루의 일과만 떠올려 봐도 얼마나 많은 감시의 시선이 있는지 알 수 있다. 문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곳곳을 바라보고 있는 CCTV. 엘리베이터 안, 길거리, 버스의 내부 등 셀 수 없이 많은 눈이 우릴 지켜보고 있으
소설 밖으로 뛰쳐나온 악한 우리는 왜 ‘악’에 굴복하고 마는가?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통찰하고 있는 사회학 서적의 제목을 그대로 질문 삼아 글을 시작해본다. 정유정의 소설은 언제부터인가 책을 열기까지 두려움을 주기 시작했다. 유독 가독성이 높은 그녀의 소설은 한 번 페이지를 읽기 시작한 순간 폭주하는 서사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가쁜 호흡과 쉴 새 없이 진행되는 사건의 전개는 영화보다 오히려 큰 피로를 주었다. 무엇보다 작가의 소설이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악한’의 존재는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종의 기원’이라는 제목, 다윈의 진화론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 오버랩 되어서였는지 긴장을 풀고 첫 페이지를 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지없이 같은 패턴의 격한 호흡 속에 빠지고 말았다. ‘속았다’라는 생각도 잠시, 이전까지의 작품 속 악한들보다 더 악랄하고 종잡을 수 없는 주인공은 충격적이었다. 새벽녘 악몽에서 깨어나 발견한 참혹한 시신, 어머니임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그의 말과는 상관없이 사이코패스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이야기는 모두 변명으로 역겹게 들렸다. 기분 나쁜 독서 시 간이었음에도 ‘종의 기원’
성실만으로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 청년실업이 좀처럼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렵게 일하고 있는 이들에게 ‘열정 페이’라는 이름으로 홀대하고 있는 상황은 안타깝게도 장기화되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자신의 실력과 다양한 경험을 쌓아도 취업을 하기가 힘든 젊은이들. 공무원이 되기 위해 수십 만의 청춘들이 노량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현실을 기성세대들 중 일부는 열정과 도전 정신이 부족하여 편한 것만을 찾으려 한다고 힐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성실함만으로 해결이 되는 시대가 아니지 않는가?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에게 열정만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의 폭력이다. 라오서의 낙타샹즈는 1900년대 초 근대화의 길목에 있는 중국의 이야기다. 젊은 세대의 아픔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100년 가까이 지난 중국 소설을 들고 나온 이유가 뭘까? 중국의 근대 소설은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너무도 잘 알려진 루쉰의 아Q정전이나 최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모옌의 개구리, 그리고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라오서의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대상은 개인의 문제로 시작하지만 한 시대의 이야기를 대변한다. 개인의 감정과 내적 고민의 섬세한 묘사를 담고 있는 우리와
82년생 중 가장 흔한 이름 김· 지· 영 언제부터인가 ‘여혐’ 혹은 ‘남혐’이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어떤 사안이 있을 때 ‘성적 차이’를 들먹이며 문제의 본질적 이유나 양상과는 무관하게 날을 세운다. 특정 사이트에서는 무차별적으로 다른 성을 인신공격하고 무시한다. 한 개인의 인격이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생물학적 성’ 차이만으로 상식 밖의 공격을 서슴없이 퍼붓는다. 성에 따른 역할의 차이와 상호 존중이 필요함에도 서로에 대한 불신과 맹목적 비난이 횡행하고 있는 상황은 매우 우려된다. 특히 이성에 대한 왜곡된 문화가 초등학교 학생들에게까지 번지고 있어 그 심각성이 더욱 큰 상황이다. 그동안 억압받아왔던 ‘여성의 권익 신장과 안전’은 당연히 보장받고, 더욱 증진시켜야 할 대상이지 서로에게 상처와 반목을 남기는 소모적 논쟁거리는 아닐 것이다. 더욱 이 20세기 초 두 차례의 대전과 냉전 시대를 거치며 형성된 남성 중심의 폭력적 문화를 치유하자는 관점에서 출발한 ‘페미니즘’에 대해 논쟁의 대상이 아닌 ‘더 나은 인류애 실천을 위한 유효한 하나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누구의 휴대전화 주소록에 한 명씩은 있을 이름 ‘김지영’. 소설의
‘자유’의 고전 인간의 ‘자유’는 절대적 가치로 그 어떤 것보다 우선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우리 헌법에서도 보장하고 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그간의 역사 속에서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룩할 수 있었으며, 우리는 마땅히 자유를 수호하고 전승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우리의 근현대사만 보더라도 부당한 권력에 의해 자유가 억압받았던 사실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되고 민주주의가 공고히 되고 있는 시점이지만 정부에 반하는 입장을 가진 이들의 언로를 막고 통제한 일들은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보장받고 있지 못함을 반증한다. 과학의 발전을 바탕으로 한 인공지능(AI : Artificial Intelligence)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지적인 측면에서 인간을 위협한다 하더라도 결코 넘기 어려운 영역은 추상의 세계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인간의 ‘자유’는 구현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인간의 존재를 자문하는 과정에서 자유의 개념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핫 키워드 ‘4차 산업혁명’ 2017년 상반기, 각 포털사이트에서 집계한 빅데이터에 따르면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4차 산업혁명’이다. 산업의 영역뿐 아니라 교육과 사회문화, 예술 등 전 영역에 걸쳐 사용하고 있다. 클라우스 슈밥이 다보스 포럼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이 용어는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영향력은 매우 크다. 이 말을 쓰는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정말 많은 것들이 변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은 어떤 개념일까? 오늘 다룰 책의 내용을 직접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1760~1840년경에 걸쳐 발생한 제1차 산업혁명은 철도 건설과 증기기관의 발명을 바탕으로 기계에 의한 생산을 이끌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제2차 산업혁명은 전기와 생산 조립 라인의 출현으로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1960년대에 시작된 제3차 산업혁명은 반도체와 메인프레임 컴퓨팅(1960년대), PC(1970년대와 1980년대), 인터넷(1990년대)이 발달을 주도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컴퓨터 혁명’ 혹은 ‘디지털 혁명’이라고도 말한다. 이 세 가지 산업혁명을 설명하는 다양한 정의와 학문적 논의를 살펴봤을
몇 년 전만 해도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기술을 몇 번의 터치만으로 실행하고 있다. 우리말로 말하면 다른 언어로 바꾸는 것은 물론 생소한 문자도 사진으로 찍기만 하면 번역이 된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바로 이름을 찾아준다. 첨단기기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지만 동시에 두려움을 준다. 인류 자신에 대한 질문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패배를 한 뒤, 우리는 인공지능이 우리를 뛰어넘는 것은 물론 우리를 지배하고 말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됐다. 컨베이어를 필두로 고성능 기계가 등장했을 때도 사람들의 일자리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고 기계의 힘을 통해 더욱 진보하게 됐다. 같은 논리로 인공지능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지만 ‘인류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연결돼 많은 혼란과 걱정을 하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해 끝없는 질문을 던져왔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모든 학문의 출발점이자 궁극적으로 규명해야 할 명제처럼 여겨졌다. 호기심을 넘어 논쟁의 대상이 됐고 억압과 투쟁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런 관심과 논의는 현재에도 유효하며 미래
우리나라의 정치상황만큼이나 세계정세도 요동치고 있다. 특히 2017년 국제정세 혼돈의 중심에는 미국이 있다. 유력 언론사들의 예측이 빗나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그 결과만으로도 큰 혼란을 줬다. 미국 대선이 시작되면서 그가 쏟아낸 공약은 많은 비웃음을 샀다. 이민자들을 막기 위해 장벽을 세우겠다, 그동안 맺은 자유무역협정을 재고하겠다 등….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정책들은 대중을 자극하기 위한 것일 뿐 지킬 가능성이 희박한 정책으로 치부됐다. 충격적인 시작 트럼프가 당선됐을 때만 해도, 결국 그 역시 기존의 틀에서 포용의 방향으로 정책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실제 취임 직후 그의 행보는 충격에 가까울 정도로 공약을 실천해가고 있다. 많은 반발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공약으로 내세웠던 정책들을 실제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멕시코 국경 장벽 설치가 추진되고 있으며, 자유무역협정에서 탈퇴하거나 수정을 하고 있다. 또한, 특정 국가의 국민을 입국 심사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공항에 억류하고 있다. ‘강한 미국’을 표방하며 각종 정책을 쏟아내고 있는 미국의 문제는 한 국가의 문제로 볼 수 없다. 미국이 가진 정치, 사회, 경제적 영향력을 생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과 우리와 다른 존재들이 공존한다는 생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에게 공유되는 의식이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이기에 사후세계의 존재들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서양에서도 모두 그런 것은 아니나 귀신은 사람을 해치는 존재로 그려지곤 한다. 드라큘라, 미라 등 영화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캐릭터들만 봐도 이런 사실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전통 속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조금은 다른 모습과 특징을 갖고 있다. 그중 특이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존재가 바로 ‘도깨비’다. 지난겨울 ‘도깨비 열풍’이 불었다. 깊은 한이 서려 있는 우수에 찬 눈빛,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한 헌신, 잘 생긴 외모. 드라마를 통해 현대판으로 등장한 도깨비의 모습은 처음엔 낯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험상궂은 도깨비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사실 드라마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도깨비는 우리에게 친근한 존재였다. 동화나 동요 속에 등장하는 도깨비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때론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착한 일을 한 사람들에게 상을 내려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다. 드라마 도깨비는 최근에
‘요즘 아이들은 꿈과 열정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무기력하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안타깝게 흘려보내는 모습이 안타까울 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야기를 나눠 보면, ‘잘하는 것이 없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유로 자신의 현재 상황을 이야기하곤 한다. 어른들은 꿈과 열정을 강조하지만 쉬운 문제는 아니다. 아이들 중 자신이 잘하는 일을 스스로 찾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어른들도 돌이켜보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재능에 맞다고, 그때의 꿈과 열정이 지금 이뤄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빨리 달리라고만 하는 사회에서 걷기 아이들의 진로가 지금 명확히 자리 잡을 수 있을까? 현재의 직업이 미래에 유효하게 남아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과 꿈과 끼를 키울 수 있는 사회적 풍토를 마련해 주지 못한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진로 선택을 종용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일 수 있다. 조금은 여유 있게 생각하고 자신을 키워가는 데 응원을 해주는 편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영화 걷기왕의 주인공은 아주 평범한 여고생이다. 어느 교실에나 있을 법한 아이의 이야기다. 멀미가 심해 두 시간 거리의 학교를 매일 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