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next)’이 있기 때문에 지금 실패했다고 실패한 것은 아니다. 절망(絶望)이란 ‘바라는 바(望)’가 모두 ‘끊어진(絶)’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절망상태에 빠졌다고 하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함으로서 삶의 희망을 놓게 된다. 따라서 절망은 죄악이다. ‘바랄 망(望)’은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의 바람으로써(所) 소망(所望)을 의미한다. 즉, ‘望’은 ‘다음(next)’ 이다. Despire(절망)은 ‘de+spire’로 구성되어 있다. ‘de-’는 ‘없다. 부수다’의 부정접두어이고 ‘spire’는 라틴어 ‘spirare(to breath)’에서 유래된 것으로 ‘숨 쉬는 것’을 의미한다. Despire(절망)은 숨이 멈춘 상태, 즉 영혼의 파멸을 지닌 단어이다. 긍정과 희망, 전환적 사유를 하자 ‘절망’도 ‘다음(next)’으로 전환시킬 긍정적인 사유방식이 필요하다. 숨이 멈출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끝은 오히려 시작의 알림이다. ‘끝(end)’이라는 단어는 또 다른 시작의 싹이다. 왜냐하면 ‘end’는 ‘목적’의 뜻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적(目的)은 눈(目)이 무엇인가를 맞추기 위해(的) 그 쪽으로 향하여 있음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대지에 뿌리박고 나무처럼 살아라 현대사회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긍정적 모습은 견뎌 낼 만 하지만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모습은 극복하기가 쉽지는 않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대지’의 삶에 ‘나무처럼 살아 갈 것’을 말한다. 대지를 떠난 나무, 즉 우리 생활세계(대지)를 떠난 존재는 그 존재의 근원이 없어지게 된다. 대지위에 뿌리박고 있는 나(나무)는 이 세상에 내 던져진 존재이지만 저 위로(이상) 향해 나가는(실현시키고자) 발전 가능성의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초극(超克:극복을 이겨냄)되어야할 존재이다. 내 앞에 있는 고난을 극복해야 할 존재인 인간은 동물과 초인(超人:Ubermensch)의 중간자로서 초인으로서 성장가능성을 지닌 존재이다. 초인과 반대 되는 사람을 말인(末人: der letzte Mensch)이라고 한다. 말인은 힘든 세상살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불평불만만 솥아 내는 의지 박약자 이다.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여 쾌락만을 탐닉하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초인처럼 고귀하고 기품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갑질과 권력(힘)에의 의지 초인 같은 강한 정신력과 생명력을 지닌 사람은
음식은 사랑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말린 고추와 봄동이 생각난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필자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당신께서는 추수 끝의 들판을 돌아다니시며 고추를 따오고 봄에는 배추밭에서 한겨울 이겨낸 파릇한 배추를 도려와 서울 학교 자취방까지 바리바리 싸오셨다. 고추를 다 따고 버린 밭에서 따오시는 것이었지만 얼마나 창피하셨을까? 이른 봄날 얼마나 추웠을까? 가슴이 저려온다. 거울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지만 음식에선 그 사람의 마음을 본다. 음식 속에는 사랑이 깃 들여 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은 “맛있다” “감사하다”라는 단순한 표현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먹을 사람을 생각하면서 요리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향료를 좋아하고 지금 마음의 상태가 어떠니 어떤 음식이 좋겠다 등의 수많은 생각을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요리를 한다. 따라서 화를 내며 분노에 찬 음식은 맛이 없다. 먹는 이의 건강을 생각하고 그 사람이 먹는 모습을 생각하며 만든 음식이기에 그 음식이 맛있는 것이다. 따라서 식당에서 잘 차려진 음식이 맛이 없는 이유는 그들의 수고로움이 나만을 위해 음식을 차려준 사랑하는 사람의 정성만 못하기 때문이다.
배우고 때때로 이를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군자에겐 어떤 즐거움이 있을까? 공자는 첫 번째로 ‘배운 것(學)을 때때로 익히는 것(習)’ 즉, 학습(學習)의 즐거움을 말한다. 그렇다면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중국의 6례(六禮 : 禮·樂·射·御·書·數)를 배우는 것이다. 중국의 6례는 서양의 7자유과(七自由科, artes liberales : 3학(문법·수사학·변증법) 4과(산술·기하학·천문학·음악))와 같은 것으로 오늘날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에 해당된다. 6례와 7자유과는 실제적 지식이 아닌 이론적 지식으로 합리적 이성 계발을 목적으로 하며, ‘사람됨’의 교육을 위한 과목들이다. 하지만 사람됨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부도 습관이다. 우리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한다. 이런 습관적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날 하루는 마음이 상쾌하지 못한 것처럼 공부도 습관이 들어야 한다. 습관들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연습이다. 근육도 연습하여 단단해지는 것처럼 공부도 연습해야 단단해진다. 익히고 또 익혀야 하는 것이다. 공부란 흘러내려 가는 물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다. 따라서
‘자신을 해체한다’는 것은 마음의 조용한 혁명이다.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절대 변화란 없다’는 생각을 해체해야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는 해체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일체 모든 것은 늘 같지 않고 시간 속에서 변화한다는 것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란 일체 모든 법은 인연법에 의해서 모이고 흩어지므로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고정된 그 무엇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체개고(一切皆苦)는 모든 것은 변하며 스스로 존재하여 세상을 지배하는 주재자(主宰者)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을 해체한다는 것은 창조적 자아를 만드는 가법적(加法的)이고 승법적(乘法的) 작업이다. 즉, 자신을 향상(승법)시키고 무한의 능력을 갖게 하는 작업이다. 은퇴(retire)를 해체하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얻는다 TV 예능 프로그램 중 정글을 탐사하는 것이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출연진을 고생시키는 것은 파이어 스틱(Fire stick)으로 불을 피우는 것이다. 파이어 스틱으로는 불이 잘 지펴지지 않는다. 라이터로 불을 피우는 것이 시간 절약,
요즘 계절도 썸을 타나보다. 봄인 듯 봄이 아니고, 여름인 듯 여름 아닌 애매한 봄. 그 화려한 봄이 가고 여름이 온다. 봄을 청춘에 비유하곤 한다. 봄이라는 한자 춘(春)이 청춘(靑春)의 춘(春)과 같다. 청춘은 뜨거움을 갖은 열정(熱情)이다. 이 열정은 추진력이며 원동력이기도 하다. 화려했던 꽃도 꽃이 지기 시작하면 오던 나비도 오지 않고, 나무도 고목이 되면 오던 새들도 더 이상 찾지 않는다. 꽃이나 나무는 자신의 기능을 제대로 할 때 나비와 새들이 날아든다. 생기가 없다는 것은 죽은 것이다. 나이 먹음에 노여워하지 마라 노인과 청춘의 차이는 열정의 소유 정도에 따라 구분된다. 70살이 된 사람이 자기 변화, 열정을 갖고 있다면 청춘이다. 따라서 생물학적 나이 ‘70’은 중요하지 않다. 20살 된 사람이 ‘가슴 뜨거움’이 없다면 노인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청춘(靑春)은 입춘(立春)이다. 입춘은 험한 겨울을 이기고 싹이 돋는 계절을 의미한다. 입춘 때 만물은 상당한 힘(氣:기)을 갖고 겨우내 딱딱하게 언 땅을 뚫고 나온다. 그 싹은 역동 그 자체이다. 땅위로 치솟고자 하는 열정(熱情)이 있었기에 그 겨울에 죽지 않고 당당하게 대지위에 승자로 서있게 된다.
7. 철학(哲學)은 처락(處樂)이다 - 인문학기행 - ⑬ 인문ㆍ자유교육 ‘사람임’에서 ‘사람됨’이 필요한 시대이다. 실제적 지식만을 강요하는 시대에서는 나와 관련된 그 모든 것이 ‘수단’이 된다. 실용적 지식을 수단으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갖는 입신양명과 출세가 보편적 가치가 된 사회라면 ‘병든 사회’임이 분명하다. 계속(ing) 치료(heal)해야 하는 사회, 즉 힐링(healing)을 필요로 하는 사회는 치료가 끝나지 않은 병든 사회이기 때문이다. ‘병든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여야 한다. 서로 자신의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너와 나’를 이용한다면 인격적 만남은 이루어 질 수 없다. 모든 인간관계가 서로의 욕심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면 진정한 대화도 나눌 수 없게 된다. 마틴 부버(M. Buber)는 이런 관계를 ‘나-그것’의 만남으로 규정한다. ‘나-그것’의 만남을 중시하는 사회는 인격적 만남이 아닌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병든 사회이다. 서로를 이용하고, 자신을 중심에 놓은 사회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caring)란 없다. ‘병든 사회’,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사회’, ‘나-그것의 사회’를
7. 철학(哲學)은 처락(處樂)이다-인문학기행-⑫ 노장자 사상 노자 : 자연(自然)을 잃어버린 인간, 괴물이 되다 노자는 사회문제의 흔한 원인을 사물의 겉모습에 이끌려서 잘못된 인식과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인위적인 욕망 즉, 위(爲)로 인해서 ‘순수한 자연의 덕’이 훼손되고 있으며, 혼돈스럽고 어지러운 세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노자의 자연(自然)은 ‘自(스스로) + 然(그러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저절로 그러함’에 어긋나면 그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물의 본성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인위적인 행위를 가했을 때 물은 우리에게 반격을 가한다. 이처럼 인간도 자연성을 해치게 되면 인간이 아닌 ‘괴물’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자신의 자연(自然)을 어떻게 해서든 바꾸어 보려는 인위적인 행위(爲)를 자행하지 말아야(無)한다. 이것이 노자 강조하는 이상적 삶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자신의 ‘스스로 그러함’에 인위적인 가식과 위선적 행위를 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본래의 자기 모습대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모습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 세상은 병들게 된다. 그래서 대한민국 천지가 힐링(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후 17세기에 들어와서 과학적 지성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15세기 중세의 신본주의에서 벗어나 이성(logos) 중심주의의 깃발을 세운 사람이 데카르트(Descartes)이다.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의 진리나무에 따르면 뿌리는 자연학, 줄기는 수학과 철학, 맨 위가 신학으로서 신본주의의 대표적 위상을 들어낸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와 반대의 진리나무를 세운다. 뿌리가 형이상학, 줄기가 자연학, 맨 위가 의학ㆍ기계학ㆍ도덕학으로 보았다. 이제까지 ‘신’은 의심의 여지없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신’을 자연과학처럼 이성의 확실성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것이다. 이성의 냉철함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데카르트가 보내는 메시지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주장한 바처럼 인간은 이성적 동물인 것이다. 끊임없이 의심해 보아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것이 ‘진리’ 데카르트는 ‘확실성’을 추구하고자 한 사람이다. 우연적인 것이 진리가 될 수 없다고 본 그는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이성’의 존귀성에 대해 절대적 믿음을 갖고 있었다. 즉, 진리란 시대나 사회가 변
아폴론(Apollon)적인 것에서 디오니소스(Dionysos)적인 것으로 해체를! 우리 인간은 추잡하고 타락한 욕망과 고귀한 이성이라는 양극단을 갖고 균형을 지키며 살아간다. 디오니소스(Dionysos)의 추악함을 극복하기 위해 이성을 가진 아폴론(Apollon)의 결합을 니체(Nietsche)는 ‘초인’이라고 표현한다. 디오니소스가 아폴론에 의해 억압을 받으면 미쳐(광기)버리게 된다. 아폴론적인 것은 이성과 합리성이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감성과 열정인데 니체는 세계문명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의 발전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런 발전은 역설적으로 이 ‘아폴론적인 것’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의 해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온갖 이성과 합리성으로 포장하여 왜곡하는 것 보다는 그 사람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해체될 때 세계를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만 ‘내가 나이가 많아 정민이를 사랑할 수 없다’는 명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랑은 이성과 합리성 보다는 감성과 열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갖고 있는 왜소함을 극복할 수 있다. 초인이 될 수 있는 길은 자신이 갖고 있
자기가 살아가는 목적은 자신의 이름을 우리 시대의 사건과 연결 짓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함께 살고 있는 삶에게 있어서 자신의 이름과 어떤 유일한 일과를 연결 짓는 일이다. - 링컨 너와의 관계 맺음 우리는 ‘나’ 아닌 모든 것의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개구리는 ‘우물’ 안이라는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고, 연어는 ‘강’이나 ‘바다’의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따라서 ‘관계성’을 파악하는 것이 우리 존재의 이유가 될 것이다. 각자 나름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 안에서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정체성(identity)을 안다’는 것이다. 나와 세계와의 관계 파악이 되지 못할 때 우리는 방황하고 좌절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의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의미한다. 공연예술( Performing arts)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연주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 세계에 몰두하여 삶을 살아간다. 철학하는 사람들의 세계는 무엇일까? 바로 ‘우주’이다. 따라서 철학자의 세계가 가장 크다. 세계 내 존재(In-der-welt se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