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서 시집 한 권 읽고 있는데 문득 옆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언제 와 있었는지 여학생 하나가 서 있다. 필자를 방해하지 않고 잠시 기다렸던 걸 보면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웃으면서 “아이구, 우리 혜선이 왔구나. 왔으면 부르지 그랬니?”하고 아이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아이도 수줍게 웃으며 나에게 종이를 내민다. “대학에 제출할 자기소개서예요. 선생님께서 좀 봐 주세요”라고 한다. “벌써 원서 접수하는 곳이 있니?” 하면서 나는 아이가 작성한 글을 훑어보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썼지만 옥에 티가 눈에 띄었다. 때마침 수업 시작종이 울려, 점심시간에 만나기로 하고 교실로 올려보냈다. 아이는 “내일이 마감이에요, 선생님” 한다. 나는 조급한 마음으로 아이의 글을 몇 페이지 읽어갔다. 그리고 나름대로 애쓴 문장의 행간을 살피며 보완해야 할 곳들을 메모했다. 시간이 좀 걸리는 작업이었다. 아이의 인생이 걸린 문제이기에 긴장이 됐다. 건성으로 봐서는 안 되는,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문득 작년 일들이 생각났다. 작년에도 유난히 자기소개서를 들고 오는 아이들이 많았다. 하루에도 몇 명씩 나를 찾아왔다. 수업하랴, 아이들의 자료를 검토하랴 나는 종일 바빴다.
언젠가 소로우의 ‘월든’을 읽던 필자는 자연주의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가까운 시골에 작은 텃밭을 구입한 적이 있다. 퇴직을 하면 시골에 들어가 밭을 일구며 느림의 미학을 즐기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래서 틈틈이 옥수수, 감자, 아욱, 완두콩, 무 등을 심고 향기로운 땀을 흘렸다. 그 결과 내 식탁은 사계절 푸르른 행복이 넘쳤다. 식목일 때쯤인가. 나는 또 나무시장에 가서 감나무, 밤나무, 복숭아, 호두, 홍매화 등을 몇 그루씩을 사서 심었다. 다행히 나무들은 고맙게도 해마다 키를 올렸다. 바라만 봐도 주렁주렁 달릴 열매에 나는 ‘타샤의 정원’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초식동물의 여유로움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밭에 나간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누군가가 나무의 우듬지를 싹둑싹둑 잘라놓았던 것이다. 후투티의 머리깃처럼 멋지게 자라던 나무가 졸지에 볼썽사나운 꼴이 되어 있었다. 나는 밭 아래쪽에서 일하던 촌부에게 누가 내 나무들을 저 모양으로 만들었는가 물어보았다. 뜻밖에 그는 자신이 그랬노라 했다. 그러니까 그가 들려준 말은 이러했다. 그냥 심어놓기만 하고 내버려 두면 나무가 엉망이 된다는 얘기였다. 자고로 나무란 가지가 웃자랄 때 쳐주기를 잘해
교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선생님, 저 선구입니다. 이쪽 고등학교로 오셨다는 소식 듣고 연락드렸습니다.” “아……, 선구! 그러니까 20년 전에 졸업한 선구!” 나의 목소리가 자못 떨리며 톤이 올라간다. 선구 역시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음색이 역력하다. 그는 지금 잠깐 찾아뵙겠다고 한다. 긴장된 마음으로 나는 교문 쪽으로 향한다. 잠시 후, 작은 트럭이 도착하는가 싶더니 운전석에서 그가 내린다. 좀 떨어진 거리이지만 한눈에 봐도 분명 예전의 얼굴, 선구가 확실하다. 녀석은 성큼 내 쪽으로 오더니 그냥 발치에서 넙죽 큰 절을 한다. 말릴 새도 없이 땅바닥에 엎드린 채 “선생님, 건강하시죠?” 안부를 묻는다. 나는 그의 옷이 더럽혀질까봐 얼른 일으켜 세운다. 그의 선하게 생긴 눈이 이미 물기에 젖어 있다. 그러니까 기억이 새롭다. 20년 전 아이들이 졸업하는 날, 반 아이들 이름을 마지막으로 호명하며 하나씩 안아주고 헤어질 때, 유독 마지막까지 교실에 남아 눈물을 흘리던 아이. 눈물의 의미를 나에게 일깨워주던, 그가 바로 선구다. 통속된 말로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이 눈물이라고 하지만, 더러는 흘려도 좋은 것이 눈물임을 그때 알았다. 선구는
"일 년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이 밭두렁의 병해충 태우는 절기. 우리도 채비를 갖추고 우리와 함께 살아온 '오만과 편견을' 진정 박멸해야 할 시점이다. 더욱 2월은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화로워진다는 '자수정'의 계절이기에." 겨울방학도 끝나고 모든 학교가 개학을 했다. 항상 이맘때면 학교는 늘 어수선하다. 졸업식을 진행하느라 교사들은 나름대로 분주하고, 아침 일찍 등교한 아이들 역시 수업은 뒷전으로 떠들어댄다. 선생 역시 새로운 인사 소식과 업무분장으로 뒤숭숭하다. 이렇듯 선생이나 아이들은 으레 그러려니 하고 이 시기를 보낸다. 이게 덤으로 얻는 학년말의 선물이기에. 선생들은 쉬는 시간이면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모여 방학 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수다를 한다. 좋게 말하면 일종의 티타임인데, 누가 승진해서 어디로 갔고 누구는 부장이 되었고, 내가 맡은 업무는 뭔데 영 죽을 맛이라는 둥 자조와 불만의 소리가 싸늘히 들린다. 입춘이 지나면 얼었던 강도 풀린다는데, 우수(雨水)를 앞두고도 교육현장이 을씨년스럽다. 언제부턴가 교단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가 않다. 애정의 결여일까.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생각이 서로 전이되어 경영자와 평교사, 교사와 학부모가 상
“교장이 교사 하나하나를 기억해주고 믿어주며, 이해할 때 학교는 희망이 있다. 군불을 때야할 때 불쏘시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게 관리자의 역할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그 자리가 더러 술이라도 오가는 자리라면 더욱, 친구들은 예의를 구하지 않고 말을 한다. “우리 같은 놈은 개고생 하는데, 선생은 방학이 있어서 할 만 할 거야. 안 그냐?” 하하 맞는 말이다. 그래서 선생이 부러운 것이라면 맞다. 선생에게는 펑펑 놀 수 있는 방학이 있으니까. 그러나 해즐리트의 말처럼 그것은 무식의 소산이다. 그들에게 아니라고 반박해봤자 무엇 하겠는가. 술 취한 자의 면책특권인 것을. 나는 그냥 웃어넘긴다. 그러나 야박한 말이지만, ‘선생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라는 말로 논박을 끝내고 싶다. 얼마나 고되고 팍팍했으면 그 같은 말이 속담이 되었을까. 만약 선생이 편해서 할 만한 직업이라고 말하는 ‘교사’가 있다면 그는 분명 명품은 아니다. 초등과 중등이 서로 다르겠지만, 인문계 고교 같은 경우엔 방학 중에 보충학습을 해야 한다. 부장은 부장대로 긴급한 공문이 도착하면 출근해야 하고, 교장과 교감도 교대로 출근하여 학교를 관리해야 한다. 모두 바쁜 셈이다. 중요한 것은 그 하루
신묘년, 우리 모두 토끼 같은 아이들 앞에 칼바람에 얼고 녹기를 수 백 번, 그렇게 깨달음으로 부활하는, 짝짝 찢어진 노란 황태 해장국 한 사발이 되어보자. 눈처럼 사무치는 배경은 없다. ‘설국’이 그렇고, ‘닥터지바고’가 그렇다. 서정인의 소설 도 한 밤 중 하얀 눈이 내리는 것으로 끝난다. 모든 사람이 잠든 밤, 소리 없이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작부(酌婦)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결혼한 사람들은 좋겠다며 상념에 빠진다. 눈을 맞는다는 것, 어쩌면 세례의식이다. 주정꾼이건 술집 작부이건 그 순간만큼은 죄사함을 받는다. 미사포를 쓰듯 순수로 거듭나는 성결례, 이것이 눈의 순결성이다. 나는 비발디의 사계, 겨울 2악장을 듣는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며 그리운 것들을 하나씩 호명해 본다. 새해로 첫 걸음을 디뎌야 하는 시간. 정갈한 식탁에서 안도현의 ‘겨울 강가에서’를 음미한다. 불현, 세상의 문을 열고 떠나고 싶다. 눈이 펑펑 내리는 곳이면 어떤가. 무작정 떠나야 한다. 기억 속에 잃어버린 소를 찾으러 떠나도 괜찮겠다. 기왕 해가 뜨는 동쪽이면 더욱 좋겠다. 달마도 동쪽으로 갔으므로. 세상을 향한 그 비장한 대응. 그곳에 연꽃이 있고 내가 찾아야 할 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루소’와 ‘헤르바르트’들이여, 황금에 배팅하는 시대에 우리는 교육에 목숨 걸어야 한다. 이게 우리의 첫사랑이자 운명이기에 그렇다." 수업하러 교실 문을 여는 순간, 그 상황이란 옛날 동네 서커스를 보러갔을 때 기억을 방불케 한다. 커튼을 쳐놓은 상태에서 교실 형광등은 꺼져 있고 여기저기 엎드려 자는 아이들과 삼삼오오 책상에 걸터앉아 떠드는 아이들. 스위치를 켜면 바닥에 점점이 버려져 있는 휴지와 과자 봉지들, 서커스가 시작되려면 아직 먼 모양이다. 나는 큰 소리로 막이 올랐음을 알린다. 그러나 그 소리는 소음에 묻히고 결국 작은 지휘봉으로 교탁을 두드려 관객을 집중시킨다. 그제야 선생의 무대 등장을 깨닫고 서있던 아이들이 객석에 앉는다. 자다 깨어난 또 다른 아이는 어슬렁거리며 납골함 같은 사물함에서 교과서를 꺼내온다. 그래도 다행이다. 여전히 앞뒤로 히죽거리며 떠드는 소리는 가라앉지 앉는다. 오랜만에 만난 동네 친구들처럼 흥겹다. 배우는 처음부터 핏대 올려 시작할 필요 없다. 그냥 관객의 소리와 신체마임을 구경하면 된다. 무대와 객석이 바뀐 셈이다. 한참 후에 누군가 내지르는 소리, “야! 조용히 해!” 그제야 아이들은 자신의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