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귀는 소라껍질 / 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 ‘귀’라는 제목의 시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장 콕토(Jean Cocteau, 1889~1963)의 이 시는 실은 ‘칸느’ 연작 단시 중 제5번 시이다. 귀와 조개껍질과의 유사점에서 출발하여, 그 조개껍질이 파도소리로 이어지고, 다시 그 파도소리로부터 자연스럽게 귀로 돌아오는 원환적 구성을 이루고 있는 이 짧은 시에서 우리는 콕토의 재기 넘치는 이미지 구사 솜씨를 한껏 맛볼 수 있다. 파리 근교 메종 라피트에서 부유한 가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콕토는 1906년 17세 때 페미나 극장에서 시낭송의 밤을 개최함으로써 조숙한 시인으로 시단에 등장했다. 그는 시인으로서, 소설가로서, 문학비평가로서, 화가로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예술 장르를 넘나들었다. 그러나 무슨 일에 매달리든지 콕토는 시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명명할 때에 그냥 시, 소설, 평론, 연극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시, 소설의 시, 평론의 시, 각본의 시, 회화의 시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의 시사랑이 얼마나 깊고 열렬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소 사치스런 고독을 산 시인 콕토가 평생 가난과 술과 아
31세 때 ‘고무지우개’(페네옹상 수상, 1953)란 소설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 알랭 로브그리예(1922~)는 프랑스 ‘누보 로망’(새로운 소설)을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1978년 11월과 1997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친한파 작가이기도 하다. ‘어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정념으로 인하여, 혹은 정념의 부재로 인하여 생기는 갈등’을 그리는 전통소설 기술방법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그의 소설은 오브제로서의 사물과 현상만을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묘사할 뿐, 이야기의 줄거리도 인물의 성격도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행동과 오브제들은 그 무엇이기 이전에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물은 어디까지나 사물이고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세계를 인간이 멋대로 인간화하여 묘사하기를 그만두고, 대상을 순순하게 외면적인 것으로 규정하여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소설관을 가진 로브그리예가 1975년에 발표한 소설 ‘아름다운 포로’는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복제화 80점을 배열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특이한 작품이다. 전체 150페이지 중 대부분이 80
18세기 프랑스 회화에 대해 말할 때면 으레 부셰, 그리고 프라고나르를 들먹이기 나름이다. 그러나 주로 ‘우아한 향연’의 세계를 묘사한 이들과는 달리, 자연과 일상적 현실에 눈을 돌린 또 하나의 빼어난 선구적 화가가 있었으니, 그가 다름 아닌 샤르댕(Jean Baptiste Chardin, 1699~1779)이다. 그는 1728년 ‘식기대’와 ‘가오리’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뛰어난 화가로 인정받아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며, 그 후 네덜란드 루벤스파 화가들의 경향을 받아들여 정물화나 서민의 가정생활에서 취재한 정겨운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계몽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백과전서’파의 작가인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가 샤르댕의 그림에 이끌린 것은 당시 풍미하던 로코코 미술 양식의 흐름에 매몰되지 않은 채, 사물과 현실의 실재성을 생동감 있게 드러내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디드로가 ‘라모의 조카’ 같은 소설 작품에서 애써 시도했던 외부적 자연의 묘사, 즉 우리들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생명 그 자체의 서정적인 동시에 사실주의적인 묘사 태도와 상통한다고 하겠다. 디드로가 ‘미술비평’이란 새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가 된 것은
자연주의 문학의 교리를 충실히 반영한 소설 ‘마르트, 어느 창녀의 이야기’(1876) 등을 써서 졸라의 문하생으로 출발했던 조리스-카를 위스망스(1848~1907)는 1884년 특이한 상징주의 소설 ‘거꾸로’를 발표함으로써 데카당적 문학운동의 선두 주자가 된다. 이는 졸라의 입장에서 보면, 용서할 수 없는 커다란 ‘배반’이었으나, 초자연의 세계로 한사코 도망치고자 했던 위스망스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필연적 ‘개종’이었다. 위스망스가 창조한 ‘거꾸로’의 주인공 데 제생트는 파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퐁트네에 자신만의 성을 마련하여 거기서 낮에 잠자고 밤에 깨어나 활동한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습관과는 완전히 ‘역행하는’ 생활을 하며 인공적인 것에 대한 자신의 열정에 빠져 든다. 그의 조그만 미술관에는 환상적이고 기이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작품들, 즉 오딜롱 르동, 고야, 모로 등의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위스망스는 자신이 특히 좋아하는 상징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모로(1826~1898)의 두 작품, 유화 ‘살로메’와 수채화 ‘현신’(1876, 사진)을 보고 느낀 감동을 그대로 소설 ‘거꾸로’ 속에 옮겨놓는다. 화가의 이름과 작품명을 실명으로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위
본명이 이지도르 뒤카스인 로트레아몽은 1846년 남미 우르과이의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나, 1870년 24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해버린 조숙한 신동 시인이다. 그는 또 한 사람의 천재시인 랭보와 짝을 이루는 반항아, 현대시의 앞길을 비춰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정신의 횃불이라 할 수 있다. 인간과 창조주에 대한 난폭한 저주와 공격으로 가득 찬 그의 산문 서사시 ‘말도로르의 노래’는 광기어린 천재만이 창조해 낼 수 있는 불가사의한 상상력의 기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해부대 위에서의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름다운’이라는 로트레아몽의 저 유명한 수사법에 거의 모든 초현실주의 시인, 화가들이 열광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특히 막스 에른스트(1891~1976)의 초기 콜라주의 환각적인 시정(詩情)은 ‘말도로르의 노래’의 이미지들을 그대로 상기시킨다. 아무 관련도 없는 오브제들을 인위적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을 통해 새로운 시적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점에서, 긴밀한 공통적 특질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에른스트는 ‘회화 그 너머로’에서 로트레아몽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 바 있다. "고지식한 운명이 이미 정해진 듯한 기성의 현실
“살균 처리된 세계에서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다”는 행복의 시학을 평생 추구한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는 고독한 몽상의 철학자, 상상력의 낭만주의자답게 화가와 그림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종종 ‘꿈꾸기’의 황홀경에 빠져든다. 그는 마르크 샤갈(1887~1985)을 유달리 좋아했던 듯, ‘꿈꿀 권리’에서 비교적 긴 두 편의 샤갈론을 펼치고 있다. 바슐라르는 ‘샤갈의 성서 서설‘이란 글에서 원초적 몽상의 세계로 초대하여 낙원적 기쁨을 맛보게 하는 샤갈 그림의 역동적 창조성에 대해 이렇게 열광한다. “샤갈은 세계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를 바라볼 줄 알고, 특히 세계를 드러내 보여줄 줄 알기 때문이다. 낙원이란 아름다운 색깔들의 세계이다. 하나의 새로운 색깔을 발명하는 것이 화가에게 있어서는 낙원의 기쁨인 것이다.(중략) 모든 것은 함께 사는 것이다. 물고기들이 공중에서 헤엄치고, 날개 달린 당나귀가 새의 길동무가 되며, 우주의 청색이 모든 피조물들을 가볍게 만든다.” 사랑과 희망의 색깔로 인생을 색칠하는 러시아 비데브스크 출신의 화가 샤갈. 젊은 날 우체국 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학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마침내 솔본느대의 교수에 이르는 끝없는
‘세기의 시적 성서’ 또는 ‘상징주의의 경전’이라 일컬어지는 ‘악의 꽃’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1821~1867)는 ‘등대들’이라는 시에서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거장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 바 있다. “들라크루아, 악의 천사들이 넘나드는 피의 호수 / 거기엔 언제나 푸른 전나무 숲 그늘 드리워져 있고 / 침울한 하늘 아래, 야릇한 군악소리가 / 베버의 가쁜 한숨처럼 흘러간다” 이렇듯 보들레르는 시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미술비평을 통해서 거의 기사도적인 정열로써 여러 차례 들라크루아에게 열렬한 찬사를 보낸다. 당대 최상의 미술비평가이기도 했던 그는 ‘1846년의 살롱평’에서 들라크루아를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가장 독창적인 화가”라고 찬양하기까지 한다. ‘악의 꽃’(1857)의 출간으로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보들레르가 1864년 ‘외젠 들라크루아의 ‘옥중의 타쏘’에 부쳐‘라는 시를 썼다는 사실은 그의 들라크루아 예찬이 일시적 흥분에서가 아니라 매우 본질적인 것이었음을 잘 말해준다. “누더기 걸친 수척한 옥중의 시인 / 떨리는 발 밑에 원고지를 굴리면서 / 공포에 타오르는 눈으로 재어본다 / 그의 넋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