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 아이들은 부모의 보람이고 희망이지만 또한 짐이다.매일 용돈을 줘야 되고 학원비를 대야 하고 입히고 먹여야 된다. 십대 아이들은 산업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가 아니다. 돈 한푼 벌어 제 용돈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제 용돈을 벌거나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것은 궤도에서 조금 벗어난 경우에 해당될 뿐 부모로서 그리 달가운 일도 아니다. 그들의 본분은 학업에 있기 때문이다.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 그들의 일과가 되고 사명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새벽 일찍 아침밥은 먹는둥 마는둥 학교로 가야한다. 아침 자율학습부터 밤 아홉시 열시까지 공부는 이어진다. 말이 공부지 태반은 잠을 자고 태반은 장난치며 보낸다.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반복되는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파김치가 된다. 흐리멍텅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 효율적인 학습과는 거리가 멀다. 교수학습법 이론은 다 소용없다. 오로지 강행군이다. 더러 효과를 보기도 할 것이다. 부모는 일찍 깨워서 학교에 보내고 학교에선 등교시간을 정하고 빽빽한 일정을 준수할 뿐이다. 놀고 싶은 아이들은 핸드폰으로 수없이 문자를 날리거나 게임을 한다.
종종 버스를 탈 때가 있다. 예전엔 버스를 타는 일이 보통이었는데 요새는 좀체로 탈 기회가 없다. 승용차 십부제에 해당되는 날이나, 모처럼 모임이 있어 술자리가 예상될 때 승용차를 두고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고작이다. 그만큼 우리 생활 모습이 많이 변화하였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모처럼 버스를 타고 느긋한 마음으로 밖을 내다보며 가다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쳐오게 된다. 물론 내 복고적 취향도 작용했을 것이다. 버스에 몸을 싣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가다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옛날의 익숙한 내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어 그럴까. 버스에 앉아 있으면 소박한 삶의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나는 버스에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오르고 내린다. 아기를 데리고 아줌마들이 타고 내린다. 학교를 파한 학생들이 우루루 몰려와 타기도 한다. 학생들은 저마다 교통카드로 버스비를 지불한다. 카드를 센서에 댈 때마다 `청소년입니다`하는 경쾌한 음향이 울려퍼진다. 그 경쾌한 음향이 또 하나 청소년들의 동질성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어줄 것도 같다. 그것은 나중에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게 하는 추억의 음향이 되기도 할 것이다. 어른들은 저
내가 살고 있는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에서 소래포구와 월곶을 지나 조금 더 달려가면 시화호가 있다. 바닷물을 막아 담수호로 만들려다 실패하고 지금은 다시 바닷물이 드니들도록 한 거대한 인공호수다. 이 호수의 방조제가 사뭇 장관이다. 길이가 13km 정도나 되는 4차선 도로가 사뭇 이국풍경을 연출하면서 시흥시와 대부도 사이에 뻗혀 있는 것이다. 자동차도로 옆으론 자전거와 인라인스케이트 도로가 나란히 나 있어 동호인들이 즐겨 애용하는 단골 코스이기도 하 다. 양 옆으론 자전거 대여소가 있고 토스트나 커피를 파는 차량이 군데군데 늘어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길가에 자동차를 세우고 방조제 둑에 올라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바람을 쐬고, 낙조를 바라 보고, 멀리 물이 빠진 갯벌에서 너도나도 바지락을 캐는 사람들을 망연히 바라보기도한다. 나도 이 길을 자주 가는 편이다. 대부도 입구에서 부터 화성시 송산면 마산포까지 농업기반공사가 조성한 환상의 도로에서 사이클을 타기 위해서다. 이 도로는 2차선으로 완벽하게 마무리해 놓았지만 자동차는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어 쪽문을 통하여 겨우 자전거 한 대 드나들 수 있을 뿐이다. 이 도로를 자전거 동호인이나 인라인 스케이트 동
수업을 하다가 아이들이 장난을 하고 떠들면 나는 곧잘 " 야~ 저쪽 동네 지방방송 꺼라" 하고 수업을 이어가곤 했다. 아마 그때는 그만큼 라디오가 생활과 밀접하여 그 말이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는지 모른다. 그러면 아이들도 곧 알아듣고 자세를 바로 하여 수업에 임하곤 했다. 근래 접어들어선 수업 중에 아이들이 엉뚱한 발언을 하여 분위기를 깨트리거나 내 말을 멋대로 해석해서 또 엉뚱한 질문이라도 해오면 나는 "얘들아 ~ 악플 달지 말자” 하고 수업 분위기를 바로 잡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반응이다. 나이 지긋한 선생이 뜻밖에도 저희들 전용어일 것 같은 인터넷 은어 를 재미있게 구사하는 것에 대한 반가움의 표시일 수도 있고 의외성에 놀랐다는 반응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터넷에 댓글을 다는 것이 그 수단과 방법이 다를 뿐이지 옛날에도 어떤 말이나 글에 반응을 하고 대꾸를 하는 것은 통상 있었지 않았나 싶다. 의사소통의 자연스러운 한 양식이었던 셈이다. 말이나 글 속엔 의미가 있고 감정이 내포되어 있어서 접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게 되고 곧 반응을 보이게 된다. 행복하게 느꼈다면 행복한 반응을, 분노를 느꼈다면 분노의 반응을
노후가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순전히 예감이다. 내가 아직 중년의 나이에 있고 노년의 나이에 들어선 것은 아니지만 종종 그런 예감이 든다.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제일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 50대 중반에 들어서이다. 10대적을 회상하여 보는 때가 있다. 사랑과 우정의 숨 막히는 변주곡이라 할까. 꿈과 희망의 시절임엔 틀림없다. 그 꿈과 희망의 행간에 우정과 사랑은 실로 장엄하게 펼쳐졌던 오케스트라였다. 그 시절 나는 우정과 사랑을 앓고 철학과 문학에 심취했었다. 장차 톨스토이도 될 수 있고 소크라테스도 될 수 있고 프란체스코 같은 성인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세였다. 현실세계에 대한 경험은 부족하고 오로지 책을 통해서 미래를 조망하고 꿈을 설정하던 미숙한 시절이었다. 이 시절에 맺어진 우정, 좋아했던 이성, 그리고 내가 받아들인 신앙은 내 인생의 귀중한 방향 설정이었다. 그 우정을 바탕으로 전우애, 동료애를 발전시키며 삶의 영역을 확대해왔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 시절 한 여학생에 대한 짝사랑은 내 낭만적 연애관을 수립하고 발전시키는 데 초석과도 같았다. 열여섯 살에 입교한 가톨릭 신앙은 내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판단
안녕하십니까? 갑자기 낯선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놀라시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전혀 기억하시리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저는 39년 전 1968년 8월 서울 종로 2가 EMI학원에서 신일선생의 `완전수학1`강의를 듣던 남학생입니다. 그때 교수님께서는 S여고 3학년 학생으로 금호동에 살고 계셨지요. 저는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재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돈암동 고모님 댁에 의탁하여 지내고 있었습니다. 학원에 등록해서 수학을 공부하고 있던 중 한 단발머리 소녀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B교수님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 학생으로 서울 여학생에 대해서는 항상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뿐 언감생심 어떻게 말을 쉽게 걸어볼 수나 있었겠습니까? B교수님뿐만 아니라 다른 여학생들에 대해서도 저는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가 한여름 밤이라 강의실 불빛으로 나방이가 날아들기도 했지요. 저는 가수 김상국의 불나비라는 노래를 떠올리며 그 나방이들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냐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마음......”하는 노래 있지 않습니까. 한 여학생이 마음에 다가 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매료되었다고나 할까요. 물론 저
다시 봄이 성큼 다가왔다. 우리는 겨우내 추위에 떨면서 따뜻한 봄을 기다린다. 희망의 봄, 사랑의 봄,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봄을 칭송하며 봄이 어서 오기를 고대한다. 매스컴이 저 남쪽지방의 봄소식이라도 전하면 더 조바심을 내며 빨리 봄이 북상하여 우리 집 마당까지, 우리 동네 들녘에까지 당도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그렇게 아름다운 봄은 얼른 우리 곁으로 오지 않는다. 왜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찬란한 봄이 얼른 오지 않는 걸까. 혹시 우리가 어떤 착각에 빠져있는 것이 아닐까. 사춘기 소년이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며 밤잠을 설치듯이 우리도 봄에 대하여 일종의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멀리 남쪽 지방 어느 곳에 유채꽃이 만발했다고 했을 때, 3월 며칠쯤 벚꽃이 피기 시작할 것이라는 화신이라도 접하면 우리는 열심히 그 환상적인 봄을 머릿속에 그려보게 된다.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봄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아무런 제약 없이 그려보는 봄의 정경 속엔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고 바람 한 점 없이 고운 봄날 마당에, 울타리에, 도로변에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낙원을 이루고 있다. 산에는 진달래가 울긋불긋 장관을 이루
공부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공부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다. 공부는 사소하고 작은 것이다. 이 경구 같은 말은 요새 내가 종종 교육현장에서 느끼게 되는 깨달음이다. 저 화려한 놀이공원, 저 현란한 텔레비전 쇼에 비하여 공부가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가. 조용히 책상에 앉아 이리저리 생각에 몰두하며 앉아있는 모습은 초라해 보이고 궁상맞아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거기엔 작은 겨자씨 하나가 하늘을 덮을 만큼 큰 나무로 자라나듯 무한한 희망의 씨앗이 내재하여 있는 것이다. 나는 일본말을 모른다. 꽤 오래 전에 일본말을 배워보려고 기초일본어 교재를 구입해서 조금 본 일이 있다. 그때 언뜻 눈에 띈 단어가 하나 있었다. 바로 `지식`이라는 일본말인데 무엇인가를 잘게 쪼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설명이었다. 지금은 그 단어마저 잃어버린 상태인데 그 설명만은 오래 되었어도 잊지 않고 가끔 생각나 수긍을 하게 된다. 원자니 반도체니 광통신이니 나노기술이니 하는 첨단 기술이 모두 끝없이 작고 정교하게 쪼개는 것이 아닌가. 수백만 분의 일의 오차도 없이 정밀을 요하는 것이 아닌가. 지식, 즉 무엇을 알아가는 과정은 이렇게 작고 정밀한 것을 향하여 나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는 3월, 늦둥이 막내딸이 중학교에 들어갔다. 집 옆에 있는 남녀공학 학교에 배정이 안 되고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는 여자중학교에 배정이 되었다. 막내보다 열세 살이나 차이가 나는 쌍둥이 딸들이 이제 교육을 다 마칠 무렵 막내가 중학교에 입학해 교육의 문제가 다시 우리 집의 현안이 된 것이다. 쌍둥이 아이들 교육으로 너무 힘들어서 막내만큼은 지가 알아서 잘 했으면 싶지만 만 어디 교육이 그렇게 수월하기만 한가. 이제 입학한 지 열흘도 채 안되는데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그러면서 내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지 그 실체가 궁금해진다. 걱정의 실체?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앞서는 걱정은 학업에 대한 것이다. 저희 언니들하고는 달리 성격이 활발하고 교우관계도 어찌나 폭넓은지 다분히 연예인 기질이 있지 않나 여겨지면서도 학업에 대한 부모의 욕심은 여전한 것이다. 입학 전에 반 편성을 위하여 치룬 진단평가는 어땠는지. 반에서 어느 정도에 드는지 궁금하지만 얼른 알아볼 생각은 엄두도 못내는 것이다. 그 점수로 담임선생님은 벌써 아이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텐데. 첫 시험을 잘 봐서 무사히 중학교 학업에 안착해야 할 텐데. 첫 고사를 잘 못 쳐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앉아 혼자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때가 있다. 3월 8일 오후 1시 무렵 밖에는 때 아닌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다. 나이가 먹었다는 것인가. 때 아닌 함박눈 때문인가. 눈 오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은 저절로 옛날을 향하여 달음질친다. 코흘리개 유년의 소꿉놀이가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하고 들길 산길 쏘다니며 원시의 아이들처럼 자연 속에 묻혀 살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오늘은 ‘학교와 나’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학교와 나’라고 했지만 어찌 나에 국한된 얘기이기만 할 것인가. 우리 모두는 학교에 얽힌 많은 추억과 사연을 안고 세상을 살고 있다. 학창의 그 빛바랜 추억 속엔 엄청난 에너지가 비축되어 있어서 그 에너지는 끊임없이 우리의 삶에 공급되고 있다. 학창시절에 맺어진 우정, 그 시절에 싹텄던 사랑, 그 시절 온갖 천태만상의 체험들이 우리의 의식, 무의식 속에 화석연료처럼 매장되어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우리는 그 연료를 공급 받아 세상을 사는 동력으로 삼고 있다. 그 시절에 배웠던 지식과 도덕, 그 시절에 단련했던 강건한 체력은 일생동안 우리에게 무한한 힘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수없이 많은 동창회를 보
퇴근하니 아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여보, 이거 어떻게 열어?" 아내가 켜놓은 컴퓨터 화면을 드려다 보니 거기엔 여러 가지 폐질환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있는 것이 보였다. 그중에 `폐 섬유화증`이라는 병명을 가리키며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내로부터 의자를 넘겨받아 폐 섬유화증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관련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며 여기저기 검색을 해보았다. 여러 대학병원 호흡기 내과도 들러보고 이 곳 저 곳 포털 사이트를 옮겨가며 두 시간 가까이 확인한 것은 그 질환이 예후가 매우 좋지 않고 확실한 치료법이 없으며 반수 이상의 경우에 호흡곤란으로 5년 내 사망한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아내에게 캐물었더니 폐 시티촬영 결과를 보고 의사의 소견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내는 저번에 모 종합병원에 건강강좌를 들으러 갔다가 무료로 폐 검사를 해준다고 해서 폐 시티 촬영을 했다고 했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몰려드는 불안과 걱정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 잘 해주고 많은 사랑을 주어온 것도 아닌데 너무도 당황스러워 형언키 어려운 심정이었다. 갑자기 아내가 불쌍하다는 생각과 함께 아이들 걱정이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것이었다. 이튿
내가 청마와 정운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기는 오래 전 부터다. 1967년 청마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타계하고 1968년 무렵 청마의 연서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가 출판되어 그 책을 구해 읽을 무렵부터니까 거의 40년 가까이 된 셈이다. 그 동안 청마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계속 시집도 읽고 수상록도 읽었지만 정운에 대해서는 우연히 접하게 되는 작품을 더러 읽어보는 정도에 불과 했다. 그런데 근래 그분들의 사랑의 관계가 궁금해져서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선 청마의 시집과 산문집을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기도 하고 옛날에 읽었던 연서집을 구입해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허만하 시인이 쓴 청마 연구서 청마풍경도 꼼꼼히 읽어보았다. 그리고 급기야는 문덕수교수의 두툼한 청마 연구서 청마평전을 사서 읽는가 하면 이영도 여사의 수필집 애정은 기도처럼도 읽고 요새는 박옥금 시조시인이 쓴 이영도 평전 내가 아는 이영도 그 달빛같은을 아주 재미있게 읽고 있다. 그 책을 삼분지 일 정도 읽었을 무렵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 아! 이영도 어머니 같 은"이었다. 저절로 터져나온 탄성같은 것이었다. 이런 것이 바로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
오랫동안 교직에 몸담아 오고 있지만 원래 나의 꿈은 다른 곳에 있었다. 청소년 시절 여러 가지 꿈을 품어보며 장래를 그려보곤 했다. 여러 역사적 인물들의 전기를 읽으며 꿈과 연결시켜보곤 했다. 그 중에 페스탈로치도 하나였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마을길이나 마을의 공터를 다니며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휴지나 깨진 유리 등을 줍는 교육자 페스탈로치의 모습은 오랫동안 내 뇌리에 각인되어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내가 장차 교사가 되겠다는 꿈은 부차적이었다. 교사의 꿈을 갖질 않았다는 게 정확하다. 회사에 들어가 다니다가 어떤 계기가 있어서 교직에 들어왔던 것이다. 70년대 후반이었다. 당시는 교직이 그다지 인기직종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경제부흥기이기도 했던 때라 이력서만 넣으면 여러 군데서 면접을 보러오라, 시험을 치러 오라는 답장이 쇄도했던 시기라 취직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히 남자들은 회사 진출을 선호하고 교직을 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교사를 선호했던 사립학교에서는 사람을 대학에 보내 남자교사를 확보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학과장실에서 수도권 어디어디에서 남자교사를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으니 지원하라는 전갈이 와도 우리는 대부분 시큰둥하게 별 반응을 보이지
오랫동안 교직에 몸담아왔으니 이젠 내 평생의 직업이 교육자가 되었다. 그런데 어린 시절 에 나는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초등학교 내내 커서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무렵 읍내에 있는 공공 도서관에 가서 ‘돼지 기르기’에 관련된 책을 흥미롭게 읽으며 장차 양돈이나 양계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한 여학생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나는 책 읽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문학서적, 철학서적을 읽고 위인전을 읽으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꿈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 꿈이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페스탈로치 같은 교육자, 슈바이처 같은 박애주의자,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 덴마크의 달가스나 그룬트비히 같은 개척자의 삶을 동경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타고르, 바이런, 하이네와 같은 시인, 간디와 톨스토이 같은 사상가, 드골과 링컨 같은 정치가, 성 프란체스코 같은 종교적 인물을 모델로 설정했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나의 꿈은 사상적인 것, 문학적인 것, 철학적인 것이었으며 자아완성이라는 철학적 명제가 지상과제였다. 돈을
반장이 되나 안 되나 가슴이 조마조마 했던 초등학교 시절 반장선거 때의 정경이 엊그제의 일만 같은데 벌써 50대다. 사무치는 연정에 편지를 띄워놓고 날이면 날마다 답장 오기를 학수고대하던 여리고 순진하던 나의 사춘기, 주체할 길 없는 그리움에 무작정 봄 길을 걸으면, 연두색 물감으로 색칠을 한 듯 멀리 파릇한 풍경을 만들며 봄을 알려오던 동구 밖 버드나무, 이 모두가 엊그제의 일만 같은데 벌써 나이가 이렇게 되었다. 그동안 지내온 세월을 나는 모두 손금을 보듯 드려다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니 그렇게 들여다보인다. 대학 새내기 시절, 명동의 지하 학사주점에서 호기를 부리며 낭만을 구가하던 일도, 그 시절의 데모 행렬도 어제 일 같고, 군에 입대해 이십팔 주 고된 훈련 받던 모습이며, 훈련이 끝나고 군모에 빛나는 하사관 계급장이 달려지던 일도 손에 잡힐 듯 어제의 일만 같다. 군복무를 마치고 만학을 하느라 삼십 가까운 무렵까지 대학 캠퍼스를 오가고 졸업을 한 후엔 곧장 고등학교 교단으로 가 십대의 젊은이와 함께 생활해 왔으니, 나의 마음은 어쩌면 지금도 세상 물정 모르고 새파랗게 젊기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나이 먹었음을 부인할 수도 없다.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