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접어들자 햇빛은 더욱 투명해 졌다. 창문으로 바라 뵈는 저 쪽 아파트 담장으로 밝은 겨울햇살이 환하게 쬐여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나는 또 운동을 하러 나갈 참이다. 지난 봄 사이클을 본격적으로 타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경주용 자전거를 새로 구입하고 헬멧과 사이클용 안경 등 몇 가지 장비를 갖추었다. 들꽃들이 무더기무더기 피어있던 봄 길을 달리며 부드러운 봄바람을 온몸으로 맞기도 하고, 5월 하순엔 탐스러운 아카시아 꽃길을 달리며 그 꽃잎을 따서 입에 넣고 꾸역꾸역 씹으며 동심에 젖기도 했다. 진달래꽃과 더불어 아카시아꽃은 어렸을 적에 많이 따먹었던 꽃이다. 한여름에 접어들었을 때도 나는 그 뙤약볕 속을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렸었다. 더위는 피한다고 피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조금만 더우면 에어컨을 켜고 선풍기를 돌려대는 것보다는 그 더위에 몸을 내 맡기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걸 나는 터득했다. 조금만 더우면 덥다고 투덜거리며 냉장고 문을 여닫고 바닷가나 계곡으로 피서여행 떠날 생각을 하기 보다는 땀이 줄줄 흐르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그 열기에 내맡기는 것이 나의 피서법이다. 그래 한여름 삼복더위에도 나는 자전거를 타고 들녘을 달렸다. 오히려
1.30 밤 7시 38분 델리에 도착하여 돌아가는 기차 예매를 하려고 했으나 시간이 지났으니 내일 일찍 나오라고 한다. 나는 역 밖으로 나와 릭샤꾼의 도움으로 역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Chandler Palace G.H를 150루피에 얻었다. 아직 낮시간이다. 배낭을 두고 바로 나와서 도깨비 시장이라는 챤드리촉으로 가다가 인도의 지도자들이 화장된 기념공원 앞에서 내렸다. 그곳에는 간디와 네루, 인디라간디, 산자이 간디, 라지부 간디가 화장된 장소가 있었다. 묘역 일대가 넓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단연 마하트마 간디의 추모공원이 으뜸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기타 공원은 사람들도 뜸하고 시설물도 별로 볼 것이 없다.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 국민들에게 얼마나 추앙받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추모공원은 온갖 새들의 낙원처럼 여러개의 호수가 있고 호수마다 수백 마리의 물새들이 놀고 있었다. 인디라 간디 추모묘역엔 큰 돌이 하나 세워져 있었고 산자이 간디 화장터엔 한 그루 나무가 서 있었으며 라지브 간디 화장터엔 연꽃모양의 돌문양이 가운데 놓여 있었다. 네루 수상은 웅장하게 조성되어 있었으며 경비원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마하트마 간디의 화장터는 특별하게
2005 1.28 금 맑음 쟌시에서 k.g.m 호텔에서 묵고 새벽 5시 30분쯤 기상하여 역으로 향했다. 한참 걷다보니 길을 잘못 들었다. 오토릭샤가 마침 와서 10루피를 주고 역까지 왔다. 표를 끊었는데 11시 40분 기차가 아닌가. 역 안내실에 가서 10루피를 더 내면 8시 25분 기차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다시 가서 8시 25분 표를 다시 끊고 카스테라 20루피와 커피 5루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기차에 올랐다. 어젯밤부터 다시 읽던 영문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기차에서 다 읽었다. 마지막 구절이 인상적이다. If Agnes Fleming could have looked down on him from Heaven, she would have been very proud of her son. (만약 아그네스 플레밍이 천국에서 아들을 내려다본다면 그녀는 자기 아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지금 아그라로 가는 기차에서 이 일기를 쓰고 있다. 오전 11시. 40분 후에 아그라에 도착 예정이다. 아그라역에 도착하니 타지간지(여행자거리)까지 8km란다. 오토릭샤로 50루피를 주고 가서 샨티 lodge(하숙)에 100루피에 체크인 했다. 오늘 금요일은
2005년 1월 26일 수 일찍 일어나 자전거를 20루피에 빌리고 식당 사파리에 가서 30루피에 칼국수를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왔는데 길에서 요란한 악대소리가 나더니 긴 퍼레이드 행렬이 이어졌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생까지 모두 제복을 차려입고 트랙터, 트럭을 꽃과 온갖 장식으로 꾸미고 여러가지 복장의 여왕 같은 차림의 여학생들을 태우고 화려하고 긴 행렬이 이어졌다. 오늘이 리퍼브릭 데이 (인도 공화국 창건일)란다. 300년간의 영국 지배로부터 독립하여 1950년 1월 26일 정식으로 공화국을 선포한 날을 기념하는 날 행사인 것인다. 전 시가지를 저렇게 행진한다고 한다. 퍼레이드를 한참 지켜보다가 퍼레이드가 저만치 사라질 즈음, 나는 남부사원중 하나를 더 보러 갔다가 폐허가 된 두개의 탬플을 보았다. 하나는 완전히 허물어져 아래 기단부분만 남아 있었는데 거기에도 미투나가 오랜 세월을 견디고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무너진 사원도 경비초소가 있고 경비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한 사원에서 나오다가 까마수투라를 50루피에 샀다. 카마수트라는 인도의 오래된성애서이다. 단지 성에 관한 책이 아니라 훌륭한 생활을 하는데 필수적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허
2005.1.24.월 사트나역에 도착하여 사이클 릭샤로 10여분 만에 버스정류소에 도착했다. 카주라호 행 버스는 9시 15분 출발이다. 8시 30분에 표를 예매했다. 63루피. 이윽고 버스9시 15분 버스가 출발했다. 중간 소도시에 잠깐 정차할 동안 11루피에 과자 4개를 아침식사로 먹었다. 카주라호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1시가 넘었다. 릭샤, 오토릭샤가 손님을 잡기 위해 또 법석을 떤다. 릭샤를 타고 호텔까지 와서 100루피에 방을 구했다. 가우타마 호텔(Gautama Hotel)이다. 짐을 풀어놓고 나와서 거리를 걷는다. 한국 식당 간판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전라도 밥집이란 간판이 있는 집으로 들어갔더니 한국음식 일색이다. 50루피에 육개장을 시켰더니 육개장 냄새가 조금 나긴 했지만 흉내만 낸 것에 불과했다. 생수(미네랄 워터)를 10루피에 사서 마셨다. 이곳에는 총각식당, 고향식당, 장금이네 수랏집, 전주식당 등 한국 간판들이 많았다. 맛이 조금씩 다를텐데 어느 집이 맛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전라도 밥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길 옆에 자전거 대여점이 있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도심 밖으로 나가려는데 오토바이를 탄 젊은이가 계속 말을 걸어온
1.22 토 맑음 인도는 더운 지방이라 다양하게 꽃들이 어울어져 있을 줄 알았는데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보는대로 꽃을 사진에 담으려고 했으나 별로 많지가 않다. 사르나트 구경을 마치고 다시 버스를 타고 바라나시로 돌아오니 오후 5시가 넘었다. 오다가 인도 전통음악 카세트 두개를 더 샀다. 두개에 75루피였다. 어제 샀던 카세트 테이프를 다시 꺼내 자세히 보니 가격표가 지워져 있지 않은가. 어제 나는 그 테이프 한 개를 65루피에 샀었다. 거의 두배를 준 셈이다. 오늘 산 것과 어제 산 것은 같은 회사 제품이다. 물건은 정가를 확인하고 사야 할 것 같다. 여관으로 돌아오다가 우연히 길을 잘못 들어 간 곳이 갠지스강가 다샤스와메드가트였다. 그곳에선 뿌자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뿌자란 힌두교 의식을 일컫는 말로 가트(강변에 계단을 만들어 놓은 곳)에서 많은 깃발을 세워놓고 노래를 부르며 불춤을 추는 독특한 힌두교 의식이다. 매일 6시에 거행된다는 이 뿌자엔 많은 인도인과 관광객이 나와 구경을 한다. 이 의식에 무슨 뜻이 있는냐고 하니까 옆에 있던 인도인이 시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축원하는 종교의식이라고 설명해준다. 한참 힌두교 의식 뿌자를 구경하고 있는데 한 젊은
2005.1.20 목 맑음 8시에 일어나 갠지스강으로 나와서 30루피에 한 시간 동안 보트를 탔다. 보트를 젓는 20안팎의 젊은이가 영어를 곧잘 해 어떻게 영어를 배웠느냐고 하니까 talking, talking이란 말만 반복한다. 외국관광객을 상대로 자꾸 말을 하다보니 영어를 잘 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보트를 타며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한국인 여행자를 많이 만난다. 겨울방학기간이라 대학생과 교사들이 많았다. 다시 여관으로 돌아오니 11시가 다 되었다. 샨티 게스트 하우스 라운지에 있는 Restaurant(식당)에서 chicken noodle soup(닭국수)를 시켰는데 국수 몇 가락과 닭고기 몇 첨이다. 중국식당의 mixed soup(짬뽕)와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르다. 아쉬운 데로 그것으로 끼니를 때웠다. 저녁 땐 라운지 식당에서 50대 노총각을 만났는데 은행에서 명퇴를 하고 혼자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은 내게 카주라호의 에로 조각상 얘기를 했다. 전에 한번 T.V에서 보고 흥미를 느꼈던 그 에로 조각 사원을 다시 여행일정에 넣기로 했다. 카주라호와 델리에 대한 정보는 여행객에게서 여행 안내책 `인도 100배 즐기기`를 빌려서 꼼꼼
2005.1.19 수 맑음 하우라역까지는 버스로 갔다. 4루피였다. 택시를 탔으면 50루피 이상 주어야 했을 것이다. 하우라 역 대합실에서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렸다. 바나나와 포도를 사먹으며 옆에 앉은 인도 아줌마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대합실은 무척 컸으며 엄청난 사람들로 붐볐다. 여기도 예외없이 까마귀가 대합실 안까지 날아 들어 천장 밑에서 잠자리를 찾고 있었다. 저만치 한국인인 듯한 두 젊은 여성이 보인다. 담요까지 가지고 여행하는지 배낭의 크기가 내 것의 세 배는 되어 보였다. 프래트폼을 확인하고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는 제 시간에 도착했다. 나의 좌석은 17번이었다. 18번 19번 좌석에 아까 그 한국여성들이 자리를 잡았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하나는 의정부의 모 고등학교 영어교사고 또 한 사람은 안양의 모 중학교 보건교사라고 했다. 둘은 전에 같이 근무했던 직장동료라고 했다. 그 여교사들이 담요하나를 빌려주어 야간 열차 추위를 견딜 수 있었다. 기차는 문을 닫아도 사방에서 바람이 들어와 밤에는 무척 추웠다. 기차를 타기 전에 담요를 하나 준비하지 않은 게 후회 되었다. 다음날 10시 30분 도착예정인 기차가 오후 1시 30분에야 도착
2005.1.17 월 날씨가 많이 더워졌다.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나 마더하우스까지 걸어갔다. 경건한 마음으로 미사 예절에 참례했다. 지난 번과 똑같은 일정이 진행되었다. 다시 깔리 가트 임종의 집으로 갔다. 빨래를 하나씩 체크하여 변이 묻어있는 것은 따로 물에 넣어 헹궈 변을 제거해야 한다. 나머지 빨래는 다른 통에 넣고 비누를 풀어 빨아야 한다. 목욕탕엔 연실 따뜻한 물을 길어다 부어야 한다. 아무리 서둘러도 손이 딸린다. 물 데우는 솥에도 계속 물을 날라다 보충해야한다. 서양인들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헌신적으로 봉사에 몰두했다. 서양의 두 할머니가 매일 중증환자의 환부에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르고 다시 붕대로 싸매는 일을 도맡아 했다. 하는 일이 너무 능숙해서 평생을 의사로 살다가 이제 늙어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해볼 뿐이었다. 칠십은 되었을 서양 할아버지도 매일 나와 궂은 일을 도맡다시피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일상화된 봉사정신을 보는 것 같아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시간이 금세 가는 것 같다. 12시쯤 되어 봉사활동을 끝내고 비비디박에 있는 기차 예약 사무소로 가서 바라나시 행 기차를 예약했다. 295루피. 여행사 수수료가 없으니
2005.1.5. 밤 7시 25분 캘커타의 외국인 거리라는 Sudder st.는 외국인들로 붐빈다. 싼 숙소가 몰려 있는 곳인데도 관광철이라 그런지 방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425루피에 겨우 방을 구해 목욕을 하고 일기를 쓴다. 초라한 호텔방이지만 낯익은 느낌이다. 1996년 미국 여행 때 느끼는 것과는 달리 왜 이렇게 낯설지 않고 편안한가. 별로 긴장감이 들지 않는다. 너무나 흔한 가난의 모습, 내게 너무 익숙한 가난의 모습이어서 그럴까. 파크 스트리트에서 만난 자항기르라고 하는 젊은이가 자꾸 영어로 말을 붙여오기에 대꾸를 하다 보니 이젠 내 관광안내원으로 나서려는 것 같다. 캘커타의 뉴 마켓을 구석구석 보여주기도 하고 극장에 가자고 안내하여 그의 친구와 함께 셋이 인도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다. 1.2층으로 된 대형 영화관이다. 표를 내고 들어가니 안내인이 손전등을 들고 일일이 자리를 안내해 준다. 이상한 것은 1층과 2층으로 좌석이 구분되는 데 앞줄부터 순서대로 열을 맞춰 앉히는 것이다. 인도의 극장엔 카스트제도가 있다는 인도 관광 안내서의 구절이 생각났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핸드폰을 가지고 오락을 하거나 문자를 띄우거나 한
2005.1.7. 금 호텔을 옮겨 200루피에 묵고 아침 7시 30분 쯤 눈을 떴다. 자항기르가 이제 나의 관광가이들 나서고 싶은 눈치다.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한다. 어떤 미국인은 매일 20$씩을 주었고 어떤 독일인은 매일 7달라씩 주었다는 등, 또 일본사람을 들먹이기도 했다. 공연히 여자 얘기 섹스 얘기도 들먹이며 호감을 사려고 노력하는 것도 같았다. 바라나시에서는 하루에 1,000루피씩 주기도 했다는 얘기를 노골적으로 하는 것이다. 어제 그저께 계속 안내를 했다는 얘기로 생색을 내며 오늘은 돈을 주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맞긴 맞는 얘기다. 한국이나 미국이라면 하루에 20달라 아니라 50달라라도 주어야 했을 것이다. 20달라래야 20.000정도 아닌가. 1,000루피래야 26,000원이 아닌가. 그의 말이 일리가 있음을 알면서도 내 예산을 감안하면 그것은 터무니 없는 비용이다. 이제 결론은 났다. 그냥 식사와 교통비, 입장료만 제공하고 함께 지내보려고 했었는데 예산상의 부담으로 안되겠다는 결론이 난 것이다. 그의 친절이 고맙고 그의 영어가 다른 사람에 비해 유창해서 여러모로 좋은 점이 있지만 경비문제 때문에 오늘은 그에게 솔직하게 얘기를 해
2005.1.8토 밤 9시 45분 오늘은 완전히 혼자 캘커타를 여행했다. 아침에 일찍 깼다가 다시 잠이 들어 9시 30분에 깼다. 제일 먼저 Tagore House엘 가고 싶다. 토요일 Tagore House는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개관이다. 지하철을 타고 Girish Park역에서 내려 20여분 걸어갔더니 Tagre House로 들어가는 Gate가 보였다. 300여년전에 동인도 회사가 캘커타로 옮기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식민지 시절 인도의 수도가 되었던 캘커타는 London 다음가는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1772년에서 1912년까지 140년동안 인도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던 캘커타는 지식인계층이 민족주의적 경향을 띄자 그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영국 정부의 일련의 조치가 취해졌다. 수도는 뉴델리로 옮겨지고 뱅갈주는 분할되었다. 더욱이 인도 독립 후 East Bengal 이 동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난민사태가 발생하여 부귀영화는 막을 내리고 도시는 급격히 쇠락하였다. 타고르 하우스 인근도 마찬가지다. 길바닥에 쓸어져 잠든 엄마 옆에 두세 명의 젖먹이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매달려있는 모습은 여기저기에 흔하다. 죽은 듯 먼지
2005.1.9 일 맑음 아침 식사 대용으로 바나나를 샀다. 10루피 (260원 정도)에 5개는 주니 배가 부르도록 먹을 수있다. Tram(전철)을 탔는데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정류장 이름도 없고 안내 표시도 없어 난감했다. 시내 구경도 할 겸 무작정 끝까지 갔다. 차장이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는 것 같은 데 힌두어로 물으니 알 수 가 없다. 영어를 못하는사람도 많아 의사소통이 안 될 때도 자주 있다. 종점에 내려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는 호텔 근처의 중국음식점 howhua에서 mixed noodle soup(짬뽕)을 먹었다. 56루피였는데 맛이 있다. 식사를 마치고 여기저기 LSD라는 간판이 붙은 집으로 가 집으로 전화를 했다. 분당 20루피(520원)란다. 아내가 무척 궁금했었나보다. 162초에 54루피(1400원)를 지불했다. 다시 인터넷 카페에 들러 집으로 메일을 보냈다. 시간당 15루피(390원). 캘커타에서의 인터넷 요금은 싼 편인다. 한글이 지원되어 편리하다. 다만 자판을 외우지 못해 그를 입력하기가 좀 어려워 메일을 영어로 써야 했다. 카페를 나와 길을 걷는다. 거대한 인도인의 행렬에 나는 이방의 나그네, 그러나 미국에서보다는 낯선
마더하우스를 나와서 기차표 예매소로 갔다. Shantiniketan 가는 오전 11시 10분 기차표를 예매했다. 130루피. 30루피는 수수료였다. 하우라역 출발이다. 하우라역까지는 택시로 70루피 정도란다. 3루피면 버스로 갈 수도있다. 내일(화요일) 쌴티네케탄에 갔다가 모래(수요일)에 와야겠다. 샨티네케탄엔 타고르가 세운 대학이 있기 때문에 꼭 가고 싶었다. 그 다음 목요일 하루 쉬고 금요일부터 봉사활동을 하자. 아침에 일찍 미사에 참여하려면 alarm clock(자명시계)이 있어야 할 거 같다. 시계점에 들렀더니 작은 것은 70루피(1800원정도), 조금 큰 것은 110(2800원정도)루피란다. 봉사를 신청한 두 여대생 중 하나는 인하대 경영학과 3학년 마치고 휴학중이라 했고, 또 한 학생은 한양대학교 중국어과 3학년이라고 했다. 서인천고등학교 1년 선후배 사이며 인하대 학생은 만수 3동 성당 신자라고 했다. 지금은 옮겼지만 나도 전에 만수3동 성당에 적을 두기도 했었다. 나의 집도 만수동인데 인도에서 동네 학생들을 만난 것이다. 40여일 전 델리로 들어와 여러 곳을 들르며 캘커타 까지 왔다고 한다. 1월 19일 켈커타공항을 떠나 태국으로
11시 10분 기차를 예약해놓았기 때문에 8시 30분 G,H 를 나왔다. 밤새도록 비는 내리고 까마귀는 밤에도 계속 울어대 잠을 한 숨도 못잤다. 호텔 옆에 큰 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그것이 까마귀들의 잠자리라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니다. 아마 어제밤은 비가 내려서 까마귀들도 잠자리가 뒤숭숭했었던 것 같다. 담요가 다른 호텔보다 얇아서 그런지 추워서 밤새 뒤척이다가 잠 한 숨 제대로 못자고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질 하고 소설 Oliver Twist를 읽다가 8시 30분 여관을 나왔다. Park Street로 가서 하우라역 가는 버스를 탔다. 3루피면 금방 오는 걸 택시를 탔으면 70루피는 주었어야 했을 것이다. 기차역에 도착하니 9시 정도 되었다. 두 시간을 여기서 기다려야 하나? 인터넷 카페에나 가려고 해도 근처에는 없는 것 같았다. 예매한 열차시간표를 확인하고 이리저리 역내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일도 지루하다. 까마귀는 역 구내까지 들어와 이리저리 천장 주변을 날아다닌다. 귤 3개를 18루피에(470원) 사서 아침 식사 대용으로 먹었다. 귤과 포도는 인도에서 비교적 비싼 과일에 속한다. 대기실 한 쪽에 있는 안내소에 예매표를 보여주고 플래트홈 번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