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주신 만 원짜리 돈을 만지작거리며 선생님께 다가섭니다. “선생님, 날갈이 해도 돼요?” “시간 없다. 그냥 신어라.” 나는 집에서 가져온 스케이트를 든 채 쭈뼛거립니다. 날갈이를 해야 잘 나가는데 그냥 신으라니 짜증이 납니다. 긴 파마머리를 뒤로 묶은 선생님께서는 친구들이 스케이트 신는 걸 도와줍니다. 그냥 내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 위에 서니 자꾸만 엉뚱한 곳으로 미끄러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안전모 타고 갈까?” “동민아, 그거 재밌겠는데.” 준혁이가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세워 흔들더니 안전모를 벗습니다. 나를 따라 안전모를 엉덩이에 깔고 앉습니다. 쭉 미끄러져 나갑니다. 빙글 돌기도 하고 기우뚱하며 아이들과 부딪히려고도 합니다. 스케이트 타는 것과는 색다른 아슬아슬한 맛이 있지요. 선생님께서 호루라기를 불어 우리를 부릅니다. 준혁이는 재빨리 안전모를 머리에 쓰더니 스케이트를 타고 갑니다. 나는 안전모를 깔고 앉아 두 발로 중심을 잡고 선생님 앞까지 미끄러져 갑니다. “동민아, 너 지금…….” 선생님은 어이없다는 듯 말을 잊지 못합니다. “기분 짱이예요!” “뭐?” 이상하게 선생님의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러고는 아직도 내가 깔고 앉은 안전모를 곁눈질
2010-12-23 13:322010 교
2010-12-23 13:31우리 집에 실란이 이사 온 지는 5년이 좀 넘었나 봐요. 정확히 표현하면 공원에 버려진 말라가는 실란이 가여워 주어다가 우리 집 화분에 심은 지가 그 정도 됐다는 거죠. 빈 화분에 거름흙을 섞어서 정성껏 심었습니다. 그렇지만 첫해에는 몸살을 앓는지 꽃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다음 봄에도 꽃을 피우지 않아서 이젠 그러려니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3년 째 되는 봄이었습니다. 우연히 베란다를 바라보던 나는 마치 조화처럼 올라온 3개의 꽃대에 피어난 하얀 꽃이 생소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아! 네가 꽃을 피웠구나.” 나도 모르게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수줍은 듯 약간 오므린 꽃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다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 꽃도 피웠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5년째 되는 올 봄엔 지난해보다 더 많은 20여 개의 꽃대를 올렸습니다. 봄마다 분갈이를 해 주는 나의 정성을 잊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올해에는 봄에 꽃을 피운 것도 모자랐는지 10월쯤에 또 쉴 새 없이 많은 꽃대를 올리며 꽃을 피웠습니다. ‘이게 무슨 일 일까? 좋은 일이 있으려나?’ 막연히 꽃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이 11월을 맞이했고, 그날은 18일
2010-12-23 13:28‘찌릉~’ 아직 붐한 날인 줄로 아셨는지 거미가 촉수로 더듬듯 짧게 한 번만 보냈다. 무얼 핑계 삼더라도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곤한 잠을 깨울 새라 안쓰러워하는 엄마의 고민이 벨 소리에 역력히 묻어 있었다. 새벽잠이 없는 어머니가 일찍 전화를 넣으신 것이다. 잠 들 때까지 자식 생각하다가 밤새도록 가슴에 품고 눈 뜨면 다시 생각하는 존재가 엄만 것 같다. 이적지 살아오시며 자식들에게 기운을 다 내어 준 어머니한테 아직도 남은 게 있을까? 안 골목에 사는 고향의 누나가 들어오더니 안고 온 보자기를 거실 바닥에다 내려놓는다. 이리로 오는 차편에 어머니가 끝물 감을 부친 것이다. 벽시계의 분침이 아래로 처지며 나를 출근길로 밀어낸다. 홍시 담은 함지박을 급하게 싸느라 자꾸 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까지 같이 쌌을 그 보자기를 나는 풀어볼 시간이 없어 그냥 나갔다. 고향집을 야트막하게 두른 돌담을 사립문까지 따라오면 키가 큰 돌감나무와 과육이 꾀죄죄한 고욤나무를 만난다. 잘아빠진 돌감이나 고욤은 씨 치레라서 늦가을에 까치밥으로나 남을 뿐 별로 실속이 없다. 타작마당에 요긴하게 새참을 하도록 건넌방 옆에 증조할아버지가 반시나무를 심었다. 납작감은 떫지 않은 감으
2010-12-23 13:25보통 수필은 작가의 개성이 드러난 산문 문학이라고 한다. 허구적이지 않은 사실적인 개인의 경험을 성찰의 과정을 거친 후 글로 표현한 것이 수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경험이다 보니 특정한 형식이 없지만 내용이 유기적으로 잘 조직되어 있어야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를 이끌 수 있다. 흥미 이외에도 수필에는 삶의 교훈과 세계에 대한 비판이 함께 녹아 들어가 있어야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개성, 흥미, 교훈을 수필 심사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이번 교원 문학상에 응모한 작품들의 특징은 학교나 개인의 일상에서 경험한 일, 자연에 대한 경외, 여러 가지 경험을 토대로 한 단상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았다. 특히 교사라는 직업을 통해 겪게 되는 학내의 소소한 일들에 대해 개성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다수였다. 최근의 경향인지는 몰라도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그로인한 본인의 성찰과 관련한 작품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수필이라는 장르가 워낙 개성적이다보니 그것을 평가하고 순위를 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가운데 몇 작품을 위에서 언급한 개성, 흥미, 교훈, 문장 능력을 토대로 골라보았다. 감씨와 민들레 씨앗을 두고 심사위원들은 매우 고심을 하
2010-12-23 13:24오 일마다 장이 서는 읍지역 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는 것이 참으로 넉넉하고 즐겁습니다. 장이 열리는 날, 보부상들이 길을 꽉 채우며 보따리 위에 펼쳐 놓은 홍시, 찐쌀, 메밀묵 같은 먹을거리들을 보면 마치 점방에 들어선 어린애마냥 이것저것 가지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설렙니다. 장날이 걸린 토요일 오후는 사물들에 감춰진 재미난 얘기도 듣고 아이들에게 던질 미끼도 찾기 위해 재래시장으로 나서지요. 장날은 무싯날보다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한층 들떠, 장에 가는 날은 저도 덩달아 부푼 마음이 발걸음을 따돌리고 저만치 앞서 갑니다. 쫀득쫀득한 강냉이를 까먹으며 장 구경도 참 좋고 양념 냄새 풋풋한 국수도 사 먹을 수 있어 더욱 신났습니다. 저의 수준에는 이런 재래시장 풍경이 언제나 잘 맞습니다. 할머니가 싸 온 보자기에 홍시 여남은 개가 남아 있었습니다. 발갛고 튼실한 감을 보니 고향집 납작감을 만난 것 같아 그만 할머니 앞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오후 내내 아무 입 다실 일이 없으셨던지 할머니는 저를 보자 아들 같다며 홍시 흥정은 간데없고 자식 이야기로 침을 튀기시더군요. 홍시 하나를 손바닥으로 쓰윽 닦더니 풀쑥 저의 입에 갖다 댑니다. 어느새 저는 어머니의 향수
2010-12-23 13:22흰 와이셔츠에도 뼈가 있다는 말을 흘려듣다 너무 오래되어 어슴푸레한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옷장 속에 묵혀 누렇게 탈색된 흰 와이셔츠 물 뿌리고 풀 먹여 등덜미를 문지르자 생솔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대나무 관절 꺾이는 소리 감나무 제 힘에 부쳐 어깨 찢어지는 소리 뼈와 뼈가 부딪쳐 자지러지는 소리에 벌레가 구멍을 갉아내는 소리였다 그동안 등에 흐르던 물방울 소리가 늘 따뜻했던 것은 흰 와이셔츠를 떠받치고 있던 등뼈 때문이었다 골다공증이었다 흰 와이셔츠에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다리미가 지나갈 때마다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생을 추스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흰 와이셔츠를 다리는 일은 금방이었지만 벌집 숭숭한 등뼈의 맨홀을 덮는 일은 또 몇 년이 걸려야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2010-12-23 13:19시 쓰는 일이 밥이라면 며칠 굶겠습니다. 아니 단식에 돌입하겠습니다. 한번쯤 머리를 깨끗이 비우고 나면 사람 사는 풍경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겠지요. 밥그릇만 챙기다 보니 늘어나는 건 설거지해야 할 시간뿐입니다. 빈 그릇을 무엇으로든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앞선 나머지 겉만 번지르르한 말장난이 담길까 두렵습니다. 속 빈 강정 같은 시 말입니다. 뒤돌아보는 여유도 없이 먼발치에서 풍경만 바라보다 말 같지 않는 말만 늘여놓고 있는 것 같아 정말 시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다림질 하다말고 잠시 다리미를 내려놓습니다. 손에 너무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 뼈가 시려옵니다. 반듯하게 옷을 펴겠다고 무턱대고 용만 썼으니 그럴 법도 합니다. 다리미의 적정온도를 잊었던 것입니다. 구부정해진 척추를 바르게 펴려면 따끔한 침과 알맞은 온기에 찜질이 물리적으로 이루어져 함에도 나는 느긋함을 참지 못해 병원 문을 박차고 나옵니다. 어느 시인이 골다공증을 하늘을 날기 위해 몸을 가볍게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아직 난 몸을 가볍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못합니다. 아는 것이 있다면 뼈에 구멍이 나는 병이기에 바람이 드나드는 구멍을 열심히 막아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연탄구멍만 빼고 말
2010-12-23 13:18교원문학상 응모작은 예년에 비해 편 수가 적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작품의 수준차는 크지 않아서 낙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소재도 다양해서 세상을 촉지하는 여러 생각들을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 좋았다. 다만 정서를 평이하고 상투적으로 표출하거나 심정 토로식으로 나열하는 것이 올해도 산견돼서 아쉽다. 이는 시의 긴장이나 밀도를 약화시키는 요인이므로 늘 유념해야 할 것이다. 시 부문 당선작 (정영희)는 사물을 의인화하고 이를 인간의 이력과 연계시켜 삶을 통찰하는 예리한 눈을 확보했다. 눈부시게 흰, 그러나 이제는 ‘누렇게 탈색된’ 와이셔츠와 퇴락한 자신의 삶을 연계시키는 발상이 신선했다. 구멍난 와이셔츠 그리고 골다공증과 관절이상으로 신음하는 화자가 일체되며 묘한 연민을 자아낸다. 섬세한 감수성과 삶을 진지하게 통찰하는 안목이 뛰어났다. 당선작 외 응모시편들 역시 시적 긴장을 끝까지 잘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런데 안정적이라는 것은 자칫 시를 지루하게 만들 수 있다. 보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세상과 삶을 통찰하는 작품을 기대하고 싶다. 시적 모험이 동반된 생동하는 개성을 선보여 주길 기대한다. 가작 (안영선)는 당선작에 비해 경쾌하고 날렵하
2010-12-23 13:16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은 깜짝깜짝 놀란다. 여리고 예민한 풍경은 바람이 오는 소리를 먼저 듣고 바람이 불기 전에 소리를 내며 바람이 오고 있음을 알린다. 풍경의 추에 부딪친 바람은 아프다고 엄살떨고 풍경은 감싸는 바람이 간지럽다고 앙탈을 부린다. 바람이 풍경을 흔드는지 풍경이 바람을 울리는지 가는 바람이 마냥 아쉬워 풍경은 바람이 올 때마다 운다.
2010-12-23 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