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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벽 칼럼] 카네이션이 아니라 인카네이션이다

스승의 날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최근에 얻었습니다. 10년 전에 멘토링 해준 대학생들이 카네이션을 들고 절 찾아오겠다는 겁니다. 오랜만에 받는 연락이 너무 반갑고, 저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 고맙고, 그들과 다시 만날 생각에 설렜습니다. 사회초년생이라서 지금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텐데 거의 전원이 함께 시간을 맞춰서 오겠다니 뿌듯했습니다. 저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여태껏 마음에 잘 간직해준 것 같아서입니다.


근데 참 이상합니다. 일 년 내내 열심히 가르친 학생들은 감감무소식인데 단 몇 회기 만난 학생들이 찾아온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수업할 때는 매번 최선으로 준비하였고, 추천서도 꼬박 써주었고, 고민 상담에 시간을 후하게 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절 찾아오는 학생이 없으니 혹시 제가 그들에게 뭘 잘못했거나 섭섭하게 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이와 반대로 멘토링 할 때는 강의 준비도 없었고, 상담도 없었고, 그 흔한 맛집 회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뭐가 그리 좋은 추억으로 남았기에 10년이 지난 후에 다시 찾아온다는 건지 수수께끼처럼 아리송합니다.


학생들에게 쏟은 열정과 시간에 완전히 반비례하는 듯 보이는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과연 스승이란 무엇인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단 스승은 공부시키는 사람이 아닌가 봅니다. 교수 생활 40년간 공부시킨 학생은 많지만 찾아오는 이가 없어 좀 허망합니다.

 

스승은 진학을 위해 추천서를 써주는 사람도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 입이 닳도록 고마워했던 학생들마저 아무 뒷소식이 없으니까요. 괘씸하지만 저 역시 추천서를 써주신 선생님을 찾아뵙지 않았으니 전혀 화낼 처지가 아닙니다. 스승은 고민거리를 상담해 준 사람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때 해준 조언이 도움이 되지는 않았는지 기별이 없어서 괜한 잔소리였나 싶어 뒤늦게 민망해집니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에 10년 후에 찾아와서 카네이션을 달아준다는 걸까요. 멘토링 할 때는 오히려 학생들이 싫어하는 과제를 많이 내줬습니다. 회기마다 학생은 둘씩 짝지어 당번을 정해서 점심·설거지·엔터테인먼트·자기소개·게스트 멘토를 담당하였습니다. 이처럼 활동은 지극히 평범했는데, 굳이 특이한 점이라면 활동에 임하는 규칙이었습니다.


식사 준비 당번은 한정적 예산으로 원재료를 사야 했고, 모임 장소에 미리 와서 직접 요리해야 했습니다. 요리는 거의 모두가 평생 처음이어서 엄마에게 조언을 구하고 아예 사전 연습마저 해온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수고하셨는지 비로소 깨달았고, 음식을 맛있게 먹는 자녀를 지켜보며 흐뭇해하는 어버이의 마음도 알게 되었답니다.


식후 수북이 쌓인 설거지와 찌꺼기는 당번이 모조리 맡아야 했습니다. 설거지보다 남은 음식 뒤처리가 만만치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음식은 정도껏 준비하고 적당히 떠가서 남김없이 먹는 게 진정으로 사려 깊은 행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식후 30분 동안 이어진 엔터테인먼트에는 담당 팀이 노래를 부르거나 매직쇼를 펼쳐도 되지만, 반드시 본인의 재능을 활용해야 했습니다. 사람을 짜증나게 만드는 건 쉽지만 유쾌하게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고, 타인을 즐겁게 만드는 역량을 하나라도 확실하게 갖추어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자기소개 당번은 자신의 현재·과거·미래 모습을 그려내야 했지만 주어진 시간은 단 5분이었습니다. 내용을 선별하고 간추리고 농축하는 것이 엄청 어려웠다고 합니다. 인생에 흐름이 있고, 위기와 기회가 있고, 순간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간 얼마나 사소한 일에 쓸데없이 매달리며 살았는지 알아차렸고, 앞으로 좀 더 굵직하게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매회기에 다양한 전문영역과 연령대의 게스트 멘토가 초대되었고, 당번은 질문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다정한 70대 노부부를 만났을 때 가장 마음속 깊이 감동했고, 자신들보다 어린 고등학생을 멘토로 맞이했을 때 가장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들처럼 열심히, 성실히, 후회 없이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10개 대학에서 온 대학생 10명이 10개월 동안 매달 한 차례, 총 10회기를 만났는데 10년이 지난 후에 저를 스승이랍시고 찾아오겠다는 겁니다. 아마 제자가 원하는 스승은 지식 전달자나 조언자가 아니라 성장의 기회를 만들어주는 사람인가 봅니다. 자신을 알아볼 기회, 생각을 공유하는 기회, 타인에게 기여하는 기회, 하찮은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기회, 인생이 지극히 평범한 일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졌음을 깨닫는 기회.


이 과정에서 잘하면 격려해 주고, 못해도 격려해 주는 사람을 스승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이래라저래라 지적하며 가리키는 지시자가 아니라, 이리저리 보살피며 가르치는 지지자를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맞고 틀림에 대해서는 관대하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엄격한 사람을 믿고 따르는 것 같습니다. 관찰하고 평가하되 등급 매기지 않고 발전시켜 주는 사람을 기억해 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부릅니다. 학생들에게 그냥 나이만 먹은 어르신이 아니라, 어른스러운 존재가 필요합니다. 꼰대라는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닮고 싶은 대인의 모델이 필요합니다. 아이에게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고, 아이를 어른으로 성장시켜 주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 주변에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가 넘치는 게 문제입니다. 많은 아이가 가상세계에서 난폭한 게임 캐릭터와 동일시하며 망나니가 되어봅니다. 허황되고 이상야릇한 만화 캐릭터에 이입하며 환상 세계에 빠져듭니다. 나머지 시간에는 10대 아이돌이 우상이고, 10초 짤에 삼매경입니다. 미성숙한 아이들끼리 모여 서로 모방하며 결국 미성숙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맙니다.


현실 세계에서도 매한가지로 어른을 만날 기회가 너무 희박합니다. 아이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와 학원에는 어른 한 명에 아이들 수십 명씩 모여 있지요. 집에는 어른이 아예 안 계시는 경우가 너무 흔해졌고, 계셔도 방문 닫으면 아이는 달랑 혼자입니다. 세상과 단절된 고립상태에서 마음의 빈곤을 달래기 위해 게임이나 약물과 연결합니다.


성숙한 어른의 따뜻한 시선과 섬세한 손길이 턱 부족한 곳에서, 어떨 땐 폭군의 차가운 눈초리와 매서운 손질이 빈번한 곳에서 아이들은 번창하지 못합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대를 이어가기가 망설여지는 건 당연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가장 큰 위기인 저출산율을 해결하는 방법은 더 많은 현금 살포가 아니라 아이 주변에 성숙한 어른 비율을 높이는 일입니다. 학생수가 급감하는 이참에 교원을 감축하지 말고 역으로 대폭 증가하는 역발상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학부모와 교원이 서로 대립이 아니라 합심하는 관계로 부활해야 합니다.

 

오월에 스승의 날과 어버이의 날, 어린이의 날이 연이어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오월은 어린이와 어른이 잠시나마 서로 진심으로 마주 보는 시간입니다. 서로에 대한 편견과 착각을 버리고 서로를 향한 목표와 지표를 내려놓고, 서로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 존재인가 확인하는 날입니다.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라는 노래가사처럼 교원은 지고한 전문가가 아니라 지혜로운 어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스승의 날이 가슴에 가짜 카네이션(carnation)꽃을 다는 날이 아니라 진짜 어른으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하여 꽃피는 날이 되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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