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과 입시를 준비하던 한 학생이 찾아 와 한탄을 했습니다. “선생님 이제 AI가 그림을 다 그려서 저는 먹고살기 어려울 것 같아요.” 전 세계의 모든 직업군이 AI의 등장으로 휘청인다는데, 그림까지 잘 그린다고 하니 더욱이 앞이 막막해졌을 것입니다. 이미 망연자실해진 학생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린 작가가 되어야 해. 기술자가 아니라 예술가가 되어야 해.” 이 말의 뜻을 이해한 학생은 다시 입시에 집중했고, 결국 만화과 진학에 성공했습니다. AI의 등장으로 우리들의 삶이 무척 편해졌습니다. 엑셀의 등장처럼 단순한 노동을 줄이게 되었고, 상담소처럼 말 못 할 비밀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특정 스타일로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면 그 작가가 그린 것처럼 그려주기도 하고, 내용만 적어서 웹툰으로 만들어달라고 하면 4컷 만화로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예술뿐만 아니라 견고했던 전문직 분야도 AI가 대체할 수 있다는데, 어떻게 해야 대체되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제가 내린 답은 ‘자기다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다움이란?
‘자기다움’은 바로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호기심을 느끼는 것,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방식,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 등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흔히 ‘ENFP’나 ‘에겐녀’처럼 범주화된 단어로 자신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개인 본연의 특징을 가리지 않고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즘 주로 언급되는 퍼스널 브랜딩 또한 자신만의 독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 사회는 서서히 자신만의 개성을 무기로 사용하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AI가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효율적인 결과물을 내놓을 수는 있지만, 한 사람의 고유한 경험과 감정,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통찰을 완벽하게 재현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를 알기 위해 필요한 것
그런데 많은 사람이 머리로는 알면서도, 막상 자기다움을 드러내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못한다’라는 말보다는 ‘어려워한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드러내기 어렵게 만드는 것일까요? 인플루언서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답게’ 살아야 행복한 삶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왜 나답게 살기 어려운 것일까요? 저는 가장 큰 이유가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과정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찾는 가장 확실한 내비게이션, 인문학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나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할 시간이 없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죠. 마치 어딘가에 가고 싶은데 내비게이션 없이 무작정 헤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나를 더 잘 알 수 있을까요? 물론 직접 체험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며 세상을 이해하는 폭을 넓힐 수 있죠. 하지만 그렇게만 하기에는 120세라는 수명도 부족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인문학을 배우는 것입니다.
인문학이란 언어·문학·역사·철학 따위를 연구하며, 인간의 가치와 인간만이 지닌 자기표현 능력을 탐구할 수 있는 학문입니다. 대학교 때 들었던 철학 강의에서는 인문학을 ‘무늬’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간의 무늬를 드러낼 수 있는 학문, 나다움을 표현할 수 있도록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죠. 학문들을 배우며 고민하고 탐구하며 스스로 답을 내리는 과정에서 나의 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문학은 인간 본연의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이는 곧 나를 알아가는 여정입니다. 나답게 살아가려면, 먼저 나를 알아야 하고, 그 출발점에 인문학이 있습니다.
초·중·고 인문학 교육, 이렇게 바뀌어야
학생들은 학교에서 우수한 선생님들에게 국어·영어·역사·미술·음악·도덕 등 다양한 학문에 대해 배우고 있지만, 이를 깊이 사유하거나 자신에 대해 고민할 기회는 잘 얻지 못합니다. 당장 답을 찾고 외우느라, 고민은 사치인 것입니다. 어쩌면 진도를 나가기 바빠 고민할 시간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주입식 교육환경 속에서 학생들은 정답을 찾는 데 익숙해지고, 스스로 질문하고 사유하는 능력을 키울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바쁜 학교에서 배우는 학문이 학생들의 삶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려면, 학문이 우리 삶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학생들이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AI시대에 더욱 필요한 인문학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외우는 수업을 넘어, 학생들이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 보는 경험을 주는 교육이어야 합니다.
저는 영화 사조에 대해 가르칠 때 영화 사조를 우리가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또한 배운 사조를 우리가 어떻게 제작 영화에서 응용할 수 있는지 학생들이 고민해서 구체적으로 예시를 들어 얘기할 수 있도록 합니다. 시나리오 창작수업을 진행할 때는 인물이 왜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어떠한 주제의식을 나타내고자 하는지 학생들이 답변할 수 있도록 합니다. 연극영화수업뿐만 아니라 초·중·고 교과수업에서도 이처럼 사유하고 통찰하는 과정을 늘릴 수 있습니다.
● 같은 책을 읽고 인물들의 선택을 이해하기
모두 동일한 책을 읽고 왜 이 인물이 이런 선택을 했는지 토의해 보며, 자기 삶의 방향성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랑·우정·관계 등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서 자신만의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 글쓰기·발표 기회 확대
프랑스 대입 철학시험처럼 ‘정의란 무엇인가?’, ‘예술작품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와 같이 삶의 철학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자기 생각을 글로 쓰고 발표하는 기회를 늘려야 합니다.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을 글로 쓰고 말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기다움을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비판적 사고력과 논리적 표현력을 기르는 중요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 체험과 융합 활동 강화
지역 문화 탐방, 박물관 교육, 예술·미디어 활동 등과 연결해 ‘살아있는 인문학’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인문학적 통찰을 현실 세계와 연결하여 학생들이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도록 유도하는 게 중요합니다. 책 속의 지식을 현실 속에서 적용하고 경험함으로써, 인문학이 추상적인 학문이 아닌 삶의 지표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 AI와 함께 배우는 인문학
AI를 자료 조사나 글쓰기 도우미로 활용하면서, ‘AI가 못하는 생각’을 스스로 고민하게 유도해야 합니다. AI의 도움을 받되, 최종적인 판단과 창의적인 발상은 인간의 몫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게 핵심입니다. AI를 도구로 활용하여 인문학적 질문을 더욱 깊이 탐구하는 방식을 모색해야 합니다. 이런 방안들을 통해 학생들은 ‘인문학은 시험과목’이 아니라, ‘자기다움’을 알아가는 과정임을 알 것입니다.
AI를 ‘기술자’로 두는 ‘진짜 작가’가 되자!
AI가 대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주체적인 나’입니다. 정해진 답을 찾아내는 것은 AI가 더 잘할 수 있지만 왜 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아는 건 오직 나만 할 수 있습니다. AI는 우리에게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의지와 목적의식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AI시대에는 기술자보다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단순히 테크닉만 익히는 사람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AI가 가진 방대한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되, 그 결과물을 인간적인 통찰과 가치로 채워 넣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AI는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표현을 더 쉽고 멋지게 도와주는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AI를 ‘나를 대신하는 작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나다움을 가장 잘 드러내게 도와주는 기술자’로 쓰는 것입니다.
인문학 교육은 바로 그 시작점입니다. AI시대일수록, 학생들이 더 많이 자기 자신을 탐구하고, 나만의 무늬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걷는 것이, 학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궁극적으로 인문학 교육은 학생들이 급변하는 미래 사회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아를 확립하고,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