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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경영

[현장이슈 2] 위기의 직업교육, 자격증은 넘치는 데 기술은 없다?

 

우리 산업 시계는 자정(Midnight)을 향해 가고 있다.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한강의 기적은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중국의 기술 굴기와 선진국의 견제 사이에서 우리 산업은 이른바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다. 산업의 구조는 AI와 로봇, 디지털 전환으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지만, 정작 이 산업을 지탱할 ‘사람’을 길러내는 직업교육훈련(VET)은 여전히 1970년대 산업화시대의 공장형 교육과 21세기의 관료적 형식주의 사이에 갇혀 길을 잃고 있다.


우리는 지난 20여 년간 독일의 도제제도, 영국의 국가직무능력표준(NCS), 스위스의 도제학교 등 좋다는 제도는 모조리 수입했다. 하지만 현장의 반응은 냉담하다 못해 처참하다. 제도의 간판은 화려하게 걸렸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현장과는 동떨어진 서류 더미와 보여주기식 행정만이 앙상하게 남아있다. 왜 우리는 무엇을 도입하든 결국 ‘형식’만 남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면, 그 어떤 개혁안도 공염불에 그칠 것이다.

 

우리 형식주의의 기원 _ 명분과 속도의 그림자
우리 사회, 특히 교육현장에 깊이 뿌리내린 형식주의(Formalism)를 이해하려면 우리의 역사적·문화적 DNA를 해부해야 한다. 우리의 형식주의는 크게 두 가지 뿌리에서 기인한다.


첫째는 조선 성리학적 명분론의 변질된 유산이다. 내용(Substance)보다는 형식(Form)과 의례(Ritual)를 중시했던 전통은 현대에 와서 ‘학벌주의’와 ‘간판 집착’으로 진화했다. 실질적인 업무 능력보다는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어떤 자격증(종이)을 가졌는지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절대적 척도가 되었다. 이는 직업교육현장에서 ‘무엇을 할 줄 아는가’보다 ‘자격증을 땄는가’에 집착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자격증은 있으나 실무는 모르는 ‘장롱 면허’가 양산되는 근본적인 이유다.


둘째는 압축성장이 낳은 ‘결과 지상주의’와 ‘속도전’이다. 우리는 산업화 과정에서 과정(Process)은 생략되거나 무시되기 일쑤였다. ‘빨리빨리’ 문화는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데는 주효했지만, 매뉴얼을 준수하고 원칙을 지키는 문화를 ‘융통성 없음’이나 ‘비효율’로 치부하게 했다. 안전 수칙이나 표준 절차(SOP)는 사고가 나지 않는 한 무시해도 되는 귀찮은 형식이 되었고, 이는 교육현장에도 그대로 전이되었다. 과정을 생략하고 정답만 맞히면 되는 교육, 원리를 이해하기보다 기능을 암기하는 교육이 굳어진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도입된 NCS와 각종 직업교육 제도는 필연적으로 ‘서류를 위한 서류’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실적을 요구하고, 학교와 기업은 그 실적을 맞추기 위해 영혼 없는 보고서를 양산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직업교육이 처한 서글픈 자화상이다.

 

유럽의 교훈 _ 매뉴얼은 책이 아니라 ‘표준’이자 ‘법’이다
반면 독일·프랑스·영국 등 유럽 직업교육 선진국들은 철저히 ‘과정’과 ‘표준’에 집착한다. 그 중심에는 바로 ‘매뉴얼(Technical Manual)’이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용 설명서 정도가 아니다. 유럽의 직업교육에서 매뉴얼은 국가 법령과 산업현장을 잇는 가장 강력한 연결 고리이자, 교육의 시작과 끝이다.


독일의 직업교육을 분석해 보면, 상위 법령(Top-Down)이 하위의 구체적인 훈련 규정으로 내려오고, 이것이 다시 현장의 작업 표준서(Manual)로 구현된다. 학생들은 교과서로 이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기업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매뉴얼을 펴놓고 훈련한다. 이들에게 매뉴얼을 학습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계 조작 방법을 배우는 것을 넘어, 산업계가 합의한 ‘표준(Standard)’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특히 유럽 교육의 핵심인 ‘장애 대처(Troubleshooting)’ 능력은 매뉴얼 없이는 길러질 수 없다. 기계가 멈췄을 때, 우리 학생들은 당황하여 선생님을 찾지만, 유럽 학생은 매뉴얼의 ‘고장 진단 순서도(Flowchart)’를 펼친다. 1단계 전원 체크, 2단계 센서 확인, 3단계 유압 라인 점검…. 이 논리적 절차를 따라가며 문제를 해결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은 자연스럽게 기계의 구조와 원리를 깨닫고, 문제해결의 논리적 사고(Algorithmic Thinking)를 체득한다.


이것이 바로 유럽 직업교육의 저력이다. 그들은 결과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도달하는 ‘표준화된 프로세스’를 가르친다. 따라서 유럽의 매뉴얼 시스템은 단순한 교육도구가 아니라, 산업의 품질을 유지하고 안전을 담보하며, 기술을 다음 세대로 전승하는 ‘사회적 유전자(DNA)’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 직업교육의 대개조 _ ‘형식’을 파괴하고 ‘야생’을 복원하라
이제 우리 직업교육은 형식주의라는 낡은 옷을 벗어 던지고, 산업현장의 야생성(Wildness)을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섯 가지의 구체적이고 과감한 혁신을 제언한다.

 

첫째, 거버넌스의 형식주의 타파다. 교육부와 고용노동부로 나뉜 이원화된 구조는 현장의 혼란만 가중시킨다. 학교교육과 직업훈련의 경계는 이미 사라졌다. 대통령 직속의 ‘국가인적자원위원회’와 같은 강력한 통합 컨트롤타워를 신설하여, 예산과 정책 집행을 일원화해야 한다. 부처 간 밥그릇 싸움 때문에 청년들의 미래를 볼모로 잡는 일은 이제 멈춰야 한다.

 

둘째, ‘죽은 교과서’를 버리고 ‘살아있는 매뉴얼’을 도입해야 한다. 10년 전 기술이 담긴 교과서와 NCS 학습모듈 대신, 현재 기업현장에서 쓰이는 ‘기술 데이터 패키지(TDP)’와 ‘작업 표준서(SOP)’를 주교재로 채택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산업별 인적자원개발협의체(ISC)에 매뉴얼 제정 권한을 부여하고, 정부는 현장 엔지니어와 명장들이 최신 기술을 매뉴얼화하는 비용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매뉴얼을 모르면 현장에 투입될 수 없다’라는 인식을 학교에서부터 심어주어야 한다.

 

셋째, 평가의 혁명이다. ‘수련 기록부(Berichtsheft)’ 제도를 도입하라. 정답을 고르는 객관식 시험은 폐지되어야 한다. 대신 독일처럼 3년간 매일 자신이 수행한 작업 내용, 참조한 매뉴얼 번호, 문제해결 과정을 기록한 ‘수련 기록부’를 작성하게 하고, 이를 자격시험 응시의 필수 조건으로 법제화해야 한다. 이는 학생이 거짓 없이 성실하게 훈련받았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이자, 형식적인 자격증 남발을 막는 거름망이 될 것이다.

 

넷째, 교사의 자격을 ‘현장성’ 중심으로 재정의해야 한다. 교원자격증이 없어도 좋다. 산업현장에서 10년 이상 매뉴얼과 씨름하며 잔뼈가 굵은 엔지니어들이 강단에 서야 한다. 교사는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학생이 매뉴얼을 해석하고 적용하도록 돕는 ‘코치(Coach)’이자 ‘트레이너(Trainer)’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기존 교사들은 산업체 심층 파견(Sabbatical)을 통해 ‘매뉴얼 기반 교수법’을 의무적으로 재교육받아야 한다.

 

다섯째, ‘5W1H’에 입각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전략이다. 거창한 전국 단위 개혁보다 ‘작은 성공(Small Success)’이 시급하다. 절박한 위기감을 가진 지역 강소기업 대표, 관행을 깰 용기가 있는 학교장, 현장 출신 전문가가 연합하여 ‘규제 샌드박스형 시범 지구’를 만들어야 한다. 


학교 교실이 아니라 공장 설비 옆에서, 입학 시즌이 아니라 기업의 신규 설비 증설 시점에 맞춰, 취업률 수치가 아닌 ‘불량률 제로’를 목표로 교육해야 한다.

 

결론 _ 진짜(Authenticity)만이 살아남는다
지금 우리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계속해서 보여주기식 행정과 서류 놀음에 안주하며 서서히 가라앉을 것인가? 아니면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고 형식의 거품을 걷어낼 것인가? 유럽의 직업교육 시스템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교훈은 ‘이원화 제도’라는 시스템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현장에 대한 존중’, ‘표준에 대한 집착’, 그리고 ‘과정에 대한 엄격함’이라는 철학이다.


매뉴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기계는 요령을 피우지 않는다. 우리 교육이 다시 ‘정직한 땀’과 ‘정확한 기술’의 가치를 가르칠 때, 우리 산업은 다시 한번 도약할 엔진을 얻게 될 것이다. 형식주의의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고통 없이는, 새로운 생명은 태어날 수 없다. 지금 당장, 우리의 아이들에게 낡은 교과서 대신 기름때 묻은, 그러나 살아있는 ‘야생의 매뉴얼’을 쥐여주자. 그것이 우리 직업교육이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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