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는 600여 명의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핵심 주인공을 꼽자면 당연히 서희와 길상이고 그중에서도 ‘원픽’을 하라면 서희일 수밖에 없다. 소설은 서희가 다섯 살인 1897년 한가위에서 시작해 1945년 쉰세 살에 해방 소식을 듣고 감격에 겨워 해당화 가지를 잡고 주저앉는 장면으로 끝나고 있다.
서희는 어려서 어머니 별당 아씨가 머슴 구천이와 야반도주하면서 외롭게 자라고, 아버지 최치수마저 재산을 노리는 김평산·귀녀 무리의 음모에 빠져 목 졸려 죽는다. 유일하게 남은 할머니 윤씨 부인도 1902년 호열자가 대유행할 때 세상을 뜬다. 최참판댁에 열 살짜리 여자애 하나만 남은 것이다.
그런 서희를 작가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미인으로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은 유명희, 유인실, 봉순이도 미인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서희 미모에 대한 묘사가 압도적으로 많고 아름답게 그리기도 했다. 그런 만큼 서희를 꽃에 비유하는 대목도 많다. 대략 추려도 개나리·연꽃·매화 등을 꼽을 수 있다.
서희의 꽃, 개나리·연꽃·매화
서희 미모는 어머니 별당 아씨를 닮았다. 서희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별당 작은 연못에 얼굴을 비추어본다. 이때 서희는 ‘한 송이 연꽃’ 같았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서희는 허리를 굽혀 연못가에 얼굴을 비춰본다. 옥같이 맑은 조그마한 얼굴이 물 위에 뜬다. 한 송이 연꽃같이 보인다. 그러나 서희는 어머니의 얼굴로 본다.
길상이는 최참판댁 머슴이지만 서희가 용정으로 피신하고 거기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다 서희의 마음까지 얻어 혼인하는 인물이다. 길상이가 열여섯 살 때, 그러면 서희는 아홉 살일 때 길상이는 김 훈장댁에서 막 피기 시작한 개나리를 한 아름 꺾어다 서희에게 준다. 이 대목을 처음 읽을 때 꺾은 개나리를 봉순이에게 주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서희한테 주었다. 주인과 머슴이라는 신분 차이가 엄연했으니 연정까지는 아니겠지만, 서희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싹트고 있었음을 작가가 암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토지>를 다 읽고 보니 일종의 복선이었다.
대문을 나선 길상이는 곧장 돌아갈 판인데 문이 열려져 있는 사랑 마당 쪽으로 눈이 갔다. 햇볕 바른 곳이어서 그랬던지 별당 뜰의 개나리는 움이 트고 있을 뿐인데 그곳의 개나리는 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옳지. 저걸 꺾어서 애기씨한테 드려야지. 방에 두믄 곧 꽃이 필기다.” 길상은 서슴없이 들어가서 조심성 없게 꽃가지를 우직우직 꺾는다. …(중략)…
“얻었나?” 노려보는 서희 눈초리에 길상이는 감히 제 마음대로 꺾어왔다는 말은 못 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어서 방에 꽂아라. 따신 방에 두믄 꽃이 필 기다.”
봉순이 꽃을 받아 안았다. 그러더니 꽃가지 속에서 필 듯 말 듯한 꽃 한 가지를 꺾은 봉순이는 서희 귀밑머리에 꽂아주면서 “애기씨 참 예쁘요”하고 웃었다. _ (3권)
마침 서희는 당시 아버지 최치수에 대한 상복을 막 벗은 때였다. 1부가 끝날 즈음, 그러니까 용정으로 떠나기 직전에는 서희를 꽃 중의 꽃인 매화에 비유한다.
머리를 엮어 내리는 하얗고 가는 손, 그것은 마물 같고 열 손가락에 오목오목하게 박힌 손톱은 이른 봄날에 날아내리는 매화꽃이파리 같았다. 거울을 보기 위해 검은 눈동자는 한켠으로 몰리었고 흰자위가 넓어진 얄팍한 눈매가 몹시 아름답다. 길게 찢어져서 확실한 골을 이룬 눈꼬리도 또렷한 윤곽과 더불어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_ (4권)
작가는 정말 공을 들여 서희의 아름다움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서희는 미모만 빼어난 것이 아니다. 제 나이를 넘어서는 명석함이 있었고, 아버지와 할머니 등의 죽음으로 조숙했으며, <한서> 등 책을 읽어 총명함까지 갖춘 여인이다.

그런 서희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 때가 두어 번 있다. 그중 하나가 길상에게 청혼할 때다. 서희가 신분 차이를 넘어 길상이와 결혼을 생각했을 때 길상이는 피하려고 했다. 이런 길상이의 태도는 서희의 자존심을 짓밟는 것은 물론이다. 두 사람은 용정으로 돌아오는 마차가 계곡에서 뒤집히는 사고로 서희가 크게 다치는 것을 계기로 혼인에 이른다.
이처럼 작가는 서희에게 개나리·연꽃·매화 등 아름다운 꽃들을 차례로 선사하고 있다. 그중에서 개나리는 유년의 서희 꽃으로, 아직 어린 서희와 길상이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적격인 것 같다. 해당화도 서희의 꽃 중 하나다. 작가는 서희가 어릴 적 해당화 꽃잎을 갖고 노는 장면을 여러 번 그렸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도 서희가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에 겨워 해당화 가지를 잡고 주저앉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우리나라 특산이지만 자생지 못 찾아
개나리는 진달래와 함께 초봄 가장 먼저 피어 봄이 오는 것을 알리는 꽃이다. 3월이면 전국이 노란 물로 든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개나리꽃으로 뒤덮인다. 학명이 ‘Forsythia koreana’로, 학명에도 한국 특산이라는 점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그런데도 아직 국내에서 개나리 자생지를 찾지 못한 나무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밝혀낸 자생지는 모두 산개나리 자생지일 뿐 개나리 자생지는 한 군데도 없다. 산개나리는 개나리처럼 가지가 아래로 처지지 않고 잎 뒷면에 털이 있는 점이 다르다. 일년생 가지가 개나리는 녹색, 산개나리는 자주색을 띠는 것도 다르다.

이른 봄 개나리 비슷하게 노란 꽃이 피는 나무가 있는데 영춘화(迎春花)다. 이름 자체가 ‘봄을 맞이하는 꽃’이란 뜻이다. 자라는 모양이나 크기가 비슷해 멀리서 보면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개나리와 닮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춘화를 보고 흔히 개나리가 피었구나 생각하고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개나리보다 보름쯤 먼저 피고, 꽃잎이 대개 6개로 갈라지는 점이 다르다. 개나리는 4개로 갈라지는 꽃이다. 개나리는 우리 토종인 데 비해 영춘화는 중국 원산으로 관상용으로 들여와 심은 것이다.
하얀 꽃이 피는 개나리처럼 보이는 나무도 있다. 바로 미선나무다. 미선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1속 1종 희귀 식물이다. 미선나무는 열매의 모양이 부채를 닮았다고 부채 선(扇)자를 써 미선(尾扇)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희귀 식물이지만 요즘엔 증식을 통해 많이 퍼져서 수목원은 물론 고궁이나 공원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