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앙마이에서 빠이로,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Are you Chinese?”
열댓 명이 어지러이 앉아 있는 덜컹거리는 미니밴에서 거친 팔뚝 위 문신이 그대로 드러나는 민소매를 입은 흑인이 팔뚝만큼이나 거칠게 물어보았다. 웬만한 일에는 쉽게 주눅이 들지 않는 나였지만, 처음 만난 덩치 큰 외국인들 앞에서 그저 몸과 마음이 작아져서 모기만큼 작은 목소리로 “No. I′m Korean”이라고 한 뒤 주섬주섬 큰 배낭을 챙겨 차에 올라탔다.
나와 같은 배낭여행자들이 빼곡하게 탄 미니밴은 태국 북부의 유서 깊은 도시 치앙마이에서 ‘빠이(Pai)’라는 작은 예술 도시로 가는 거의 유일한 차편이었다. 태국 최북단 산악지대 속 작은 분지에 자리한 ‘빠이’는 1980년대부터 예술가와 배낭여행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작은 도시이다.
치앙마이에서 북서쪽으로 약 146km에 위치하여 구불구불한 762개의 커브길을 넘어야만 닿을 수 있어서 ‘느리게 가야 비로소 보이는 곳’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빠이+유토피아’의 합성어로 ‘빠이토피아’라고도 불리며, 태국에 여행 온 힙스터(hipster)라면 누구나 기억에 남는 여행지로 꼽는다는 소도시였기에 힘들더라도 꼭 방문하려 한 곳이었다.
짐을 추스른 뒤 스윽 차 안을 둘러보니 나 외에는 딱 한 명, 동양인 소녀가 눈에 띄었다. 다행히 그 친구도 나에게 흥미가 생겼는지 이름을 물어보았다. 고맙게도 나에게 이야기를 걸어 준 그 동양인 소녀는 알고 보니 중국인이었고, 한국 친구들 이름 중에도 매우 많은 한자인 ‘지혜 지(智)’를 외자 이름으로 쓰고 있는 친구였다. 그녀는 30분 전에 생전 처음 만난 나에게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는 법까지 알려주며, 태국 여행은 어떠했는지, 내가 겪었던 치앙마이는 어떤 느낌이었는지 상세히 물어보았다.
사실 나는 그 시기 인생 최저 몸무게를 매일매일 경신하고 있었다. 혼자서 38리터짜리 큰 배낭을 메고 씩씩하게 동남아를 누비고 다녔지만, 사실은 다사다난했던 교직생활과 그로 인해 얻은 크고 작은 상처들을 털어내고자 도망치듯 떠나온 여행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캄보디아 길거리에서 먹었던 코코넛 캔디가 심한 탈을 내는 바람에 장장 5일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상태였다. 치앙마이에 힘겹게 도착한 후 감당이 되지 않는 몸을 어찌할 줄 모르고 숙소에서 잠만 푹 자며 쉬다가 급하게 ‘빠이’로 향하는 미니밴을 잡아탄 것이었다.
‘지(智)’가 질문한 치앙마이 여행 경험에 대해 내가 우물쭈물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지(智)’는 자신은 치앙마이에서만 한 달은 머무른 것 같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들려주었다. 그녀의 고향이자 처음으로 여행을 시작한 곳은 중국이었는데 중국에서 베트남·라오스를 거쳐 태국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비행기를 타지 않고 오직 육로로만 여행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원래 중국의 실리콘밸리 ‘선전’에서 일하던 촉망받던 IT 인재였는데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변화만을 끊임없이 좇는 미래 지향적인 삶에 갑작스러운 회의를 느끼고 퇴사를 한 후, 전 세계를 돌며 여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지속 가능한 여행’을 추구한다며 관광객이 아니라 ‘지구 여행자’의 마음으로 여행을 이어 나가고 있다고 하였다.
‘지(智)’의 여행법은 먼저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게스트하우스 같은 숙박 시설에 청소 및 관리 역할을 맡겨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같은 숙소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 숙식을 제공받으며 기념품 및 식비는 최소한으로 한정한다. 특산물이나 특선 요리 같은 것은 간혹 레스토랑에서 주문해서 먹기도 하지만 보통 그 지역의 식재료를 사서 자신의 레시피대로 만들어 먹는다. 지역의 랜드마크와 관광지만을 엿보는 여행이 아니라 지역 주민과 일상생활을 함께하는 생계형 여행을 추구한다.
당시 나도 도망치듯 뛰쳐나온 여행이었기 때문에 금전적인 여유는 꿈꿀 수 없는 상황이었고, 한정된 예산에서 최대한 오랜 시간 여행을 하기 위해 마냥 편하지만은 않은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룸에서 저렴한 여행을 해 나갔지만, 그런 나에게도 ‘지(智)’의 여행 방식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중국의 꽌시(關係)를 만나다
‘빠이(Pai)’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우리가 도착한 바로 그날이 1년에 한 번 있는 ‘빠이 국제 뮤직 페스티벌’이 있는 날이었다. 미니밴은 우리를 적당한 번화가에 내려주었지만, ‘즉흥여행’을 꿈꾸고 있던 우리가 묵을 숙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전체 마을에 빈방이 없는 상황을 처음으로 겪게 되니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배낭처럼 무거워진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오늘 밤을 어떻게 무사히 보낼 것인가 걱정만 태산인 나와는 달리 ‘지(智)’는 무척 태평해 보였다. 인생이란 원래 이런 거라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지(智)’와 함께 마을 구석구석 숙소의 문을 두드렸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진 발걸음과 어깨를 부여잡고 터덜터덜 걷다가 눈앞에 보이는 허름한 숙소의 문을 두드렸다. 중국인 아저씨 한 분이 나오시더니 ‘지(智)’와 중국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셨다. ‘지(智)’는 환하게 웃으며 여기에 우리가 잘 수 있는 곳이 있다고, 숙소 주인아저씨가 방을 만들어주시겠다고 하셨다며 환한 미소를 보였다. 내가 ‘Thank you’를 연신 거듭하자 중국인 주인아저씨는 당연한 일이라며, 어깨를 한 번 으쓱하시고는 창고로 쓰던 방 한 칸의 물건을 후딱 옮기시더니 우리에게 방을 마련해주시고는 훌쩍 떠나셨다.
드디어 잘 곳을 찾았다는 안도감에 주린 배를 움켜쥐고 먹을 것을 찾으러 거리에 나선 우리는, 방금 전 우리처럼 숙소가 없어 큰 배낭과 함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는 캐나다에서 온 청년 하나를 만났다. 남 일 같지 않은 그 모습에 측은지심이 들어 혹시 괜찮다면 우리와 같이 묵자고 제안하였고, 결국 처음 만난 세 명이 중국인 아저씨가 급조해 주신 방을 함께 쓰게 되었다.
뜻밖의 인연이 만든 완벽한 밤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계획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와 성향이 매우 비슷한 친구들이었기 때문인지 3명 중 어느 누구도 오늘이 빠이의 1년 중 가장 큰 축제인 ‘빠이 국제 뮤직 페스티벌’이 있는 날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우리는 영혼이 흘러가는 대로 유유히 흘러오다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을 뿐이었다.
히피 문화로 유명한 빠이에 왔으니 우리는 우선 빠이 메인 스트리트로 나섰다. 역시 히피 문화의 성지, 전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성지답게 거리에서는 오색찬란한 개성 넘치는 모습들의 예술가들과 예술 공연이 곳곳에서 있었다. 거리의 예술가들과 함께 몸을 흔들어보기도 하고, 태국에서 즐겨 마시는 레몬그라스 티도 대나무 통 텀블러에 담아 마셨다. 태국 북부 지방의 명물 국수라는 ‘카오소이’를 저녁으로 맛있게 먹으며 한국·중국·캐나다 각자 출신 국가의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어설픈 영어 대화로 열심히 나누었다.
대화를 나누다 흥이 오른 우리는, 마침 우리가 빠이에 도착한 오늘이 빠이 국제 뮤직 페스티벌인 이 놀라운 상황을 마음껏 즐겨보기로 하였다. 때마침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태국 젊은이들이 뮤직 페스티벌을 가는 길이라는 이야기에 혹해 그들의 차를 얻어 타고 빠이 국제 뮤직 페스티벌도 다녀왔다. 처음 경험하는 타국의 뮤직 페스티벌은 아는 노래가 정말 하나도 없었지만 너무나 흥겨웠고 신이 났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태국 음악에 몸을 맡기고 함께 리듬을 즐기다 보니 한국에서 가지고 온 걱정과 근심은 어느새 나의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 중 어느 것 하나 계획했던 것은 없었지만, 수많은 놀라운 우연들이 만났기에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재연되는 황홀하고도 행복감이 넘실대는 ‘완벽한 밤’이었다.
새로운 곳으로 혼자 떠나는 여행은 정말이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곳에 뜻하지 않게 만난, 좋은 반려자(伴旅者)가 있다면, 어떤 험한 길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어려운 일도 ‘그래도 할 만한 것’이 아닐까 한다. 빠이 여행을 통해 나는, 인생은 결국 어느 곳을 가는가보다는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존재하는 순간순간을 있는 힘껏 즐기는 것. 그것이 히피 정신이자 준비된 여행자의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당시 여행 때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던 여행 명언으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여행 중에 우리는 발전하고, 바뀌고, 다른 사람이 된다(레몽 드파르동, <방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