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을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역사의 향기와 전통의 숨결이 살아 있는 정신문화의 고향, 안동’이라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유교적 사상에 기반을 둔 선비의 고장답게 종택과 같은 전통 가옥이 많고 강직한 지조와 절개를 중시하는 선비들의 삶이 문화유산 속에 그대로 묻어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민족저항시인 이육사가 있다.
이육사의 고향 안동을 찾아 나선다. 안동은 경북의 중심지답게 규모가 제법 크다. 그러나 화려한 도심을 벗어나면 안동 역시 고풍스러운 정취가 묻어나는 전통문화의 고장임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이번 답사 일정은 시내 태화동에 이전되어 있는 이육사의 생가를 시작으로 민속박물관 옆에 있는 시비 ‘광야’와 생가터인 도산면 원천리 일대를 돌아보는 것으로 했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서안동나들목으로 나오면 안동 시내로 향하는 34번 국도와 연결이 된다. 안동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태화동에 있다는 이육사 생가이다. 생가는 안동공고를 지나 약 1㎞ 정도 가면 왼쪽으로 약수장모텔과 안동축협태화지소 사이의 작은 골목길 안에 있다. 골목길로 들어가서 작은 슈퍼를 지나면 낡은 철 대문이 있는 한옥집이 나오는데 이곳이 원천리에서 옮겨온 이육사의 생가이다. 안내판이 대문 안쪽에 설치되어 있어 골목길에 들어서도 찾기가 쉽지는 않다.
나무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좁은 안마당이 나온다. 이곳에는 이육사 시인의 후손이 살고 있다. 인기척을 알리자 한 젊은 총각이 나와 시인의 친척이 된다면서 인사를 한다. 사람이 살지 않았다면 금방 폐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육사 시인의 정신과 혼이 서려 있는 생가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시비 ‘광야’가 있는 안동댐
생가를 나와 시비 ‘광야’가 있다는 안동댐을 찾아 나선다. 34번 국도를 달려 법흥육거리에 이르자 왼쪽으로 안동댐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온다. 약 5㎞ 정도 지나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나무다리인 월영교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분수대가 설치되어 있는 월영교 위의 팔각정에 앉아 내려다보는 안동댐의 모습은 장관이다. 월영교를 지나 좀 더 달리면 안동댐유원지로 들어가는 영락교가 나오는데 이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안동민속박물관과 민속촌, 왕건 드라마 촬영장이 나온다.
이육사의 시비는 안동민속박물관을 지나 민속촌 입구에 있다. ‘광야’ 전문이 실려 있는 이 시비는 시인의 광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잘 담겨 있다. 시비 뒤편으로는 야외 민속촌과 드라마 촬영장이 있고 나오는 길에는 안동민속박물관이 있어, 함께 돌아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을 느끼기에 충분할 것이다.
수감번호에서 따온 이름
이육사는 1930년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하면서 ‘이활’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해 10월 ‘별건곤’에 ‘대구 이육사(大邱 二六四)’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육사(二六四)’라는 이름은 수감번호에서 따온 이름이다.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해 중국 등지를 활동하던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형제들과 함께 구속되고 대구형무소에서 1월 7개월의 수감생활을 한다. 이때 그의 죄수번호가 ‘264호’였다고 한다. 이육사는 수감번호에서 육사를 자신의 아호로 삼아 주로 시를 발표할 때 필명으로 사용해 이제는 본명 이원록보다 더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이육사(二六四)’가 한문인 ‘육사(陸史)’로 바뀌어 나타난 것은 1932년 의열단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입학 명단에서다. 문학관 자료에 의하면 처음에는 ‘죽일 육(戮)’과 ‘역사 사(史)’를 사용해 ‘육사(戮史)’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집안 아저씨인 이영우가 ‘육사(戮史)’는 너무 혁명적인 이름으로 노골적이니 온건한 의미를 지닌 말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해 ‘육사(陸史)’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 후 작품을 발표할 때 그는 육사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름 속에서도 그의 독립 의지가 묻어난 것을 볼 수 있다.
민족 저항 시인 이육사
흔히 민족 저항 시인을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이육사 외에도 한용운과 윤동주를 거론한다.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애국지사였으며 그 정신과 사상을 문학이라는 예술적 장르로 표현해 우리 문단에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과 이육사 사이에는 구별되는 뚜렷한 선이 있다. 즉, 이육사의 시에는 넘쳐나는 힘과 초지일관 지사의 지조와 절개를 담아내는 맥이 있다. 한용운이나 윤동주의 시가 조국 상실의 슬픔을 섬세한 여성적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라면 그의 작품은 조국 상실보다는 광복과 독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제에 대한 투쟁과 독립에 대한 굳은 의지가 희망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있는 그의 시는 남성적인 기개와 힘이 넘쳐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달해 준다.
안동댐 유원지에서 생가터와 이육사문학관이 있는 도산면으로 가려면 다시 시내로 나가 35번 국도를 타야 하지만 영락교를 건너 우측으로 안동댐을 끼고 넘어가는 지방도로를 이용하면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다. 도로가 다소 좁기는 하지만 시골 마을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어 오히려 번잡하지 않은 여유를 누릴 수 있다.
그렇게 굽이진 고개를 넘으면 다시 35번 국도와 만난다. 도로 옆으로 오천유적지의 멋스러운 모습과 한국 유학 연구의 산실인 한국국학진흥원, 산림과학박물관 등이 반가운 손짓을 보낸다. 도산면사무소 앞 삼거리에 도착하면 우측으로 퇴계 이황의 종택과 묘소, 이육사 시비와 묘소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나온다. 시비가 있는 생가터는 이곳 삼거리에서 약 5.3㎞ 정도 거리에 있다.
원천리에서 도심으로 옮겨진 육우당
안동시 태화동 672-9번지에는 이육사의 생가인 ‘육우당’이 있다. 낡은 초록색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좁은 마당 안에 ‘이육사 생가’라고 적힌 작은 비석과 녹슨 안내판, 안내판 아래에 한국문인협회가 세운 문학 표석이 눈에 들어온다.
안내판에는 이 집이 원천리에 있었다는 내용과 1976년 4월 안동댐 건설을 위한 수몰지구로 지정되어 이곳 태화동으로 옮겨왔다는 내용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10호로 지정된 ‘육우당’은 가옥 양식이 매우 특이한 홑처마에 일자형 구조로 되어 있다. 박공지붕으로 되어 있는 안채와 팔작지붕의 사랑채가 역시 일자형으로 평행을 이루는데 안채와 사랑채의 칸 수가 같은 것도 이 집은 특징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안동 시내의 좁은 주택가로 옮겨지면서 안채와 사랑채의 간격이 너무 좁아졌고, 안채를 등지고 있던 사랑채가 서로 마주 보는 형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문화재를 관리하는 세심한 배려가 아쉽다.
원천리 생가터는 이육사문학관에서 약 500m 거리에 있다. 생가터에서 건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텅 빈 생가터에는 수몰 지구로 지정되면서 태화동으로 이전된 생가를 대신하여 생가가 있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93년 세운 ‘육우당유허지비’와 ‘청포도’가 새겨진 시비만이 시인의 흔적과 유구한 시간의 흐름을 대신하고 있었다.
초인을 기다리며 부르는 노래, 시비
최초로 세워진 이육사 시비는 안동댐 옆 안동민속박물관과 민속촌 사이에 있는 ‘광야’이다. 원래 이 시비는 안동 시내 낙동강 변에 세워졌던 것인데 도로를 확장하면서 1978년에 이곳으로 옮겨 왔다.
시비는 1964년 이육사 탄생 60주기를 맞아 시비 건립 운동이 추진돼 1968년 어린이날에 제막식을 가졌다. ‘광야’ 전문이 실려 있는 이 시비는 시인의 광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잘 담겨 있으며 시비의 뒷면에는 지조의 시인 조지훈이 이육사를 추모하는 글이 적혀 있다.
이육사의 묘소는 이육사문학관 뒷산에 있는데 왕복 1시간 반 정도면 다녀올 수 있다. 이육사의 묘소가 처음부터 고향 야산에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육사문학관 자료에 따르면 1944년 1월 16일 북경 감옥에서 옥사한 이육사의 시신은 이육사와 같은 마을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이병희가 북경의 일본총영사관에서 인수해 화장하고 유골을 친구 집에 맡겨두었다가 1944년 1월 25일 이육사의 동생 이원창에게 전달하고, 다시 국내로 옮겨져 미아리에 있는 공동묘지에 안장했다고 한다.
그 후 1960년 유족들에 의해 이육사의 고향인 원천리로 돌아와 뒷산에 있는 그의 부인 묘소 옆에 이장됐다. 오직 독립을 위해 중국과 만주를 떠돌고 시신마저 타향의 야산을 떠돌다 이제는 돌아와 고향의 든든한 파수꾼이 되었다. 오랜 산행 끝에 발견한 묘소, 소나무에 걸린 목판 시비 ‘청포도’가 들뜬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
탄생 100주년에 개관한 문학관
도산면 원천리 900번지에 있는 이육사문학관은 시인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04년 7월 31일에 개관했는데 잔디밭과 연못, 오솔길 등의 부대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문학관 뜰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만든 시비가 눈에 띈다. 넓은 자연석 위에 또 다른 자연석을 얹어 만든 시비에는 대표작 ‘절정’이 새겨져 있으며 시인이 넓은 자연석 위에 앉아 책을 읽는 동상을 만들어 색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청포도 샘과 새롭게 복원된 육우당의 모습도 낯설지 않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시인의 흉상과 벽에 새겨진 시 ‘광야’와 잘 정리된 시인의 생애와 가계도,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전시관, 여러 곳에서 출판된 시인의 시집, 서예나 시화 작품으로 만들어진 시인의 작품들, 이육사의 육필 원고와 사진이 눈에 띈다. 육사의 생애와 문학 세계,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영상실과 시인의 작품을 탁본해 볼 수 있는 체험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학생들에게 좋은 학습의 장소가 되고 있다.
◈ 문학답사를 위한 여행 코스
안동 도착 ⇒ 태화동 생가 ⇒ 육사 시비(민속박물관 앞) ⇒ 원천리 생가터와 청포도 시비 ⇒ 이육사문학관 ⇒ 이육사 묘소 ⇒ 안동 출발
◈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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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버스(서울-안동)=동서울터미널에서 매일 37회, 센트럴시티 매일 13회 운행. 요금 15,700원. 소요시간 약 3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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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서울-안동)=청량리역에서 매일 7회 운행. 요금은 무궁화호 성인 1만 5700원. 소요시간 약 4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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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서울-안동)=중앙고속도로를 이용 서안동 IC로 진입 후 송현오거리와 태화삼거리를 지나 35번 국도를 타고 안동 진입함.
◈ 문의 사항
안동관광정보센터 = 054) 856-3013
이육사문학관 = 054) 852-7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