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유일의 마애불 사찰, 금정산 남단의 석불사 예로부터 부산 동래에서 구포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정산을 넘어야 했다. 금정산은 부산의 진산으로, 부산 사람들에게는 아버지나 어머니 같은 산이기도 하다. 산은 푸른 구름을 머리에 인 그 존재만으로도 아버지의 근엄함과 어머니의 자애로움을 안겨준다. 금정산을 넘어 동래에서 구포로 넘어가는 대표적인 고개가 바로 만덕고개인데, 이 만덕고개의 유래가 자못 흥미롭다. '만덕'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다음의 세 가지라고 한다. 만덕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 임진왜란 때 만 명의 사람들이 피난와서 그 화를 면했다는 설, 도적들이 하도 많아 만 명의 사람이 모여 고개를 넘었다 해서 '만등 고개'라 불렸다는 설이 그것이다. 만덕고개는 예로부터 동래와 구포를 연결하는 주요한 교통로였으며, 각종 물자들을 이고 진 민초들이 고달픈 다리를 달래가며 넘던 아픔의 고개이기도 했다. 이 만덕고개를 넘고 산성 오리마을을 지나 정상을 향해서 가다보면 '석불사'라는 부산 유일의 마애불 사찰을 만날 수 있다. 마애불은 석불의 일종으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단애나 절벽 혹은 크고 길다란 돌 위에 불상 등을 새긴 것을 말한다. 주로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이 노래를 들으면 사람들은 동해안을 떠다니는 거대한 신화를 생각한다. 그리고 희디 흰 고래가 푸른 물줄기를 허공에 뿌리며 유유히 바다 위를 떠다니는 꿈을 꾼다. 고래는 신화처럼 숨을 쉬고, 병태와 윤락가 여인 춘자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동해안으로 고래를 잡으러 간다. 그러나 고래는 이제 우리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 거대한 몸체에서 흘러 나왔던 짙은 향을 아스라이 남긴 채. 고래 중에 귀신고래라는 종이 있다. '귀신'이라는 말이 다소 그로테스크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바다의 밑바닥을 입으로 훑으면서 먹이를 찾는 귀신고래는 우리나라 동해안에 살고 있다. 아니 예전에는 엄청나게 많은 귀신고래가 울산 장생포 앞바다에 살고 있었다. 아쉽게도 그 휘황한 무리를 지금은 볼 순 없다. 오메가 일출이 만들어내는 붉은 색소의 바닷물을 헤집던 그 아름다운 무리를 지금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울산 장생포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고래 박물관을 찾아가면 이 귀신고래를 실물크기로 만날 수 있다. 그것도 몸 전체에 따개비와 조개껍질이 군데군데 붙어있는 기괴한 모습의 귀신고래를. 뿐인가? 1층에 위치한 어린이 체험관에 가면 고래
아주 오랜 옛날 - 신라, 가야, 혹은 그 이전 시대부터 부산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곳은 동래지역이었다. 부산이라는 명칭이 있기 전에 먼저 동래라는 지명이 등장하였으며, 부산 지역 인근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살던 곳도 바로 동래지역이었다. 그래서 동래에는 권력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오래된 고분들이 발견되기도 했고,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명문가인 ‘동래 정씨’를 비롯한 많은 양반들이 살던 곳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동래지방은 아주 중요한 행정구역이었으며, 동래부사의 벼슬도 정3품 당상관일 정도였다. 이런 점에서 동래지방에 양반집 자제를 대상으로 하는 공립학교가 들어선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원래 향교는 각 지방에 유교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을 창업했던 태조 이성계는 뛰어난 유교적 합리주의자인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여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유교이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당시 고려사회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대립과 갈등이 극에 달하였고, 무엇보다도 불교에 의한 폐해가 심했다. 따라서 혁명이나 개혁이 필요했는데, 정몽주 등은 개혁을 하고자 한 반면 정도전를 비롯한 진보적인 학자들은 혁명을 하고자 했
- 동양 최대의 철새 도래지, 창원 주남저수지를 찾아서 날개. 그것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2차원의 존재들을 주눅 들게 만드는 경이로운 존재, 날개. 새는 그 날개를 보유한 지구상 유일의 온혈 동물이었다. 새가 하늘을 날게 된 것은 순전히 날개 덕분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날개에 의해 발생되는 기압 차이 때문이다. 윗부분의 볼록한 부분에서는 기압이 떨어지고, 아랫부분의 오목한 부분에서는 기압이 올라간다. 결국 새의 날개에서 두 가지 기압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공기가 흐르는 원리를 날개는 교묘하게 이용했다. 새는 그 날개에 편승하였을 뿐이다. 철새는 한 군데에 정착하지 못하는 가련한 존재이다. 오로지 먹이와 따뜻한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할 뿐이다. 인간 세계에도 이와 유사한 종족이 있다. 이른바 유목민으로 불리는 이들은 양떼를 몰고 이동에 이동을 거듭했다. 정착되지 못하는 삶. 파괴적인 삶의 연속. 기본적으로 서양 문명은 유목민의 문화이며 철새와 같은 문화이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을 그리도 즐기는 건가. 그러나 철새는 파괴적이지 않다. 종에 따라서는 텃새들을 몰아내고 주인 행세를 하는 못된 무리들도 있지만 대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우리네 먹을거리 문화를 나타내는 말 중에 '먹자골목'이라는 무척 정감이 가는 말이 하나 있다. 이 말은 언뜻 보면 두 단어가 합쳐져서 한 단어가 된 것처럼 보인다. 즉 '먹자'와 '골목'이란 말이 합쳐져서 생긴 것처럼 보이는데, '먹자'라는 말은 동사 '먹다'의 청유형에 해당된다. 따라서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먹을 게 많은 골목, 혹은 그 골목에 가서 뭘 좀 먹자’ 뭐 그런 의미이다. 그런데 듣기에 따라 우습기도 하고 왠지 군침이 돌게 하는 이 말이, 국어사전에 한 단어로 등재되어 있으니 작은 감탄이 절로 난다. 아마도 이 말은 우리네 생활에서 널리 쓰이게 된 말을 채용한다는 원칙에 의해 국어사전에 기재된 듯싶다. 그만큼 이 '먹자골목'이란 단어는 우리 생활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들으면 들을수록,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맛나고 향긋한 냄새가 풀풀 나는 먹자골목으로 한 번 들어가 보자. 사전에서 '먹자골목'을 찾아보면 "많은 음식점이 몰려 있는 번화가의 뒷골목"이라고 되어 있다. 참 적절한 설명인데, 이 설명에 아주 충실한 먹자골목이 부산에도 있다. 그게 바로 남포동 극장가 뒷골목에 있는 '세명약국 먹자골목'이다. 이곳에 형성된 먹자골목은 6.25전
- 중부교회, 양서조합, 그리고 그 시절의 언어들 그때가 고등학교 2학년의 어느 봄날이었다. 당시 나는 봄 학기를 맞이하여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참고서와 문제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 연기가 가득 차더니 칼칼한 냄새가 코끝에 밀려왔다. 옥시글거리던 책방 골목이 일순 긴장에 휩싸이고 곧 이어 요란한 소음의 소방차들이 미문화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유명한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그때가 82년이었으며, 광주항쟁의 희생자들이 아직 구천을 떠돌 때였다. 그들이 편안히 저승으로 가지 못하는 그 순간에, 군인 출신의 권력자들은 구중궁궐의 금침에 누워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부미방’ 사건 1년 전에는 부산대학교 학생들과 부산지역 민주인사들을 용공세력으로 몰아 총 22명을 구속시킨 ‘부림 사건’이라는 것이 발생했었다. 그때 고문과 폭행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학생들과 그 가족들은 활발한 성격의 젊은 변호사를 만나면서 약간의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근세 들어 보수동 책방 골목은 부미방 사건과 부림 사건, 그 젊은 변호사와 중부교회, 그리고 양서조합 등이 잘 버무려진 한 그릇의 전주비빔밥이었다. 세계 최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송강 정철은 우리나라 고전 시문학의 대가이자, 불세출의 명 문장가였다. 그의 문장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김만중이 서포만필에서 정철의 가사인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을 굴원의 이소에 비겨 극찬할 정도였을까. 그만큼 정철 선생의 작품은 민족 문학의 보고이다. 관동별곡에서 내.외 해금강과 관동팔경을 묘사한 언어의 속살은 곱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어떻게 이런 문장을 지었는지 경탄하고 또 경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철은 결정적인 한계를 지닌 인물이었다. 오로지 군왕과 왕실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하여 군주제와 유교적인 이데올로기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이런 사고는 사미인곡이나 속미인곡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여인이 남자를 연모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며, 이는 송강 자신이 임금을 연모하는 마음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들의 제목에 있는 美는 모두 임금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부산에 가면 이런 의미를 가진 동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망미동이란 곳이다. 바랄 望자에 아름다울 美자를 쓰는데, 결국 임금을 그리워하는 동네란 뜻이다. 이 망미동에 얽힌 사연이 송강 정철의 사연과 유
- 그 친구들과 함께 먹던 돼지껍데기를 생각하며 세상이 참 많이 편해졌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변했다. 돼지껍데기를 인터넷 쇼핑몰에서 다 팔다니 말이다. 우연히 인터넷 검색창에 돼지껍데기라는 글자를 타이핑했더니 돼지껍데기 관련 사이트와 그의 각종 요리법이 우후죽순처럼 나왔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사태인지라 그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실 돼지껍데기라는 용어는 엽기성(?)과 기이함, 통속성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 때가 아마 20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부산 사상공단의 허름한 뒷골목에서 소주와 돼지껍데기를 먹었던 때가. 그때 난생 처음 먹어본 돼지껍데기는 질길 것이라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린 요상한 음식이었다. 입안에 들어간 돼지 껍데기가 어찌 그리도 부드러운지. 참 어이없으면서도 황당한 경험이었다. 돼지껍데기는 철저히 민중적인 음식이다. 싼 값에 민중들에게 단백질을 공급하니 말이다. 이런 기능을 하는 음식은 몇 개가 더 있다. 닭발과 순대, 족발, 편육 기타 등등. 모두 하나같이 고기를 먹기엔 돈이 부족한 민중들에게 단백질을 공급하는 음식들이다. 그래서 이들 음식들에겐 어딘가 정이 간다. 깊숙하면서도 늘쩡늘쩡한 정이 느껴진다. 오랜만
- ‘여명의 눈동자’가 바다위에서 달려오는 곳 존 르 카레, 애드가 앨런 포우, 애거서 크리스티, 그리고 김성종.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007 spy house의 중요한 멤버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고?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 가면 세계 유일의 추리소설 전문도서관을 하나 만날 수 있다. 고급 빌라가 들어선 동네 가운데쯤에 가면, 전면 통유리에 흰잿빛의 화강석으로 곱게 단장한 5층짜리 건물이 하나 보인다. 이 건물이 여명의 눈동자로 유명한 추리소설가 김성종씨가 사재를 털어서 설립한 ‘추리 문학관’이다. 그리고 이 추리 문학관의 인터넷 주소가 바로 007 spy house인 것이다. ‘김성종 추리문학관’에 가면 위에서 말한 유명 소설가들을 맘껏 만날 수 있다. 그것도 포도빛 바다를 한 눈에 쳐다보면서 말이다. 추리문학관은 당시에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획기적인 문화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시대를 앞서 가는 행위였고, 그래서 고독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달맞이 고개의 아름다움에 반해 부산에 정착하게 된 김성종씨는, 오래전부터 세계 유수의 추리 소설가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공간을 꿈꾸었다. 그것은 그분의 꿈이었고, 희망이자, 깊은 소망이었다. 마침내 김성종
- 일출이 아름다운 청사포에서 청사포. 푸를 靑에 뱀 沙 혹은 모래 沙, 그리고 갯가 浦. ‘푸른 뱀의 포구’라는 뜻을 지닌 청사포는 해운대 해수욕장과 송정 해수욕장의 중간 지점에 있는 어촌이다. 해운대 해수욕장의 꼬리에 붙어있는 미포에서 동해남부선 철로를 따라 계속 걷다 보면 청사포가 나오고, 다시 송정방향으로 계속 걸어가면 구덕포라는 한적한 어촌이 나온다. 결국 해운대와 송정 사이에는 세 개의 포구가 해안가를 따라 나란히 있는 셈인데, 이 세 마을은 동해안 남단에 존재하는 작은 포구들이다. 세 마을에 나란히 놓여 있는 동해남부선은 정동진과 강릉까지 연결되며,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짙푸른 모습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 세 마을 중에서 역사가 깊고, 가장 잘 알려진 곳이 바로 “청사포”이다. 청사포는 그 이름만으로도 곱디고운 해변과 푸른 모래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청사포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일출은 보는 이의 넋을 앗아갈 정도로 아름답다. 일출도 붉은 해가 맨 몸을 활짝 드러내는 것보다는 구름 사이로 아련한 빛이 보이는 일출이 더 볼만하다. 이 청사포 마을의 남쪽 끝에 가면 수령 300년을 자랑하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두 줄기를 이
- 지하철에서 만난 어린이 뮤지컬 공연 귀여웠다. 너무 귀여웠다. 그리고 사랑스러웠다. 어둡고 침침한 대도시의 지하철이 아니라 어린 천사들의 문화공연이 살아 숨 쉬는 지하철역이었다. 아이들은 깜찍한 복장을 입고 앙증맞은 소품을 들고서 엄마와 아빠에게 정성스레 마련한 공연을 선보였다. 지하철 한쪽에 마련된 훌륭한 무대에서. 참으로 우연히도 지하철 공간에서 열린 어린이 뮤지컬을 보게 되었다. 때는 한낮이었고, 한적한 지하철역사엔 작은 정적마저 감돌았다. 그런데 저쪽에 마련된 무대에서 어린 천사들의 노래소리가 들렸다. 예쁘면서도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몸짓이 땅 속을 곱게 물들이고 있었다. 동물로 분장한 아이, 천사로 분장한 아이, 가수로 분장한 아이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겨울의 차가운 밀도가 스민 지하철 역사도 아이들의 옹골진 열기 앞에선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또 아이들의 뮤지컬을 바라보는 엄마아빠들의 흐뭇한 마음을 식힐 수도 없었다. 어쩌면 저리도 잘하는지.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며 미래의 희망이란 말은 언제 들어도 마음에 와 닿는다. 밝고 건강하게 웃는 아이들의 웃음은 삶에 지친 어른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된다. 그 아이들의 미소
- 문화 볼모지, 부산 유일의 미술관 참 슬프게도 부산은 문화의 볼모지란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부산에는 변변한 문화시설이 별로 없다. 상설 문화예술시설은 서울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하고, 각종 전시시설이나 미술관의 숫자도 보잘것없다. 인구 400만의 대도시라는 위상과는 걸맞지 않게 문화 예술과 관련된 시설은 없어도 너무 없다. 그저 화가 난다. 수도권 집중화의 한 슬픈 단면이라고 볼 수밖에....... 부산의 문화시설은 지난 1990년대 들어 각 지역별로 조금씩 만들어 지기 시작했을 뿐, 그전에는 동구 범일동에 있는 ‘부산시민회관’이 거의 유일했다. 당시 이 회관이 만들어졌을 때 그래도 순진한 부산사람들은 그게 어디냐며 감지덕지했다. 이 회관이 세워진지가 30년도 더 넘었으니, 각 지역구의 문화회관과 박물관, 시립미술관이 등장할 때까지 수 십 년 간 부산사람들은 기본적인 문화적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국제적인 공연단이나 미술품 전시회도 서울에서만 잠시 하고 갈 뿐, 제2의 도시라는 부산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니 부산의 문화 예술인들은 그저 서울로 서울로 갈 수 밖에. 그나마 90년도에 대연동의 부산문화회관이, 98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일본군과 조선군이 최초로 벌인 전투는 부산진성 전투였다. 당시 부산진성의 책임자는 정발장군이었으며, 일본군의 수장은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고니시는 18,700명의 병력과 700척의 병선으로 이루어진 제1군을 이끌고 1592년 4월 13일 부산포로 쳐들어 왔다. 당시 부산진성에는 채 1,000명이 되지 않는 병력이 있었으며, 민호은 겨우 300여 호에 불과했다. 누가 보더라도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정발 장군과 부산진의 주민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며, 결국 모두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부산진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곧 바로 송상현이 부사로 있는 동래성으로 진출하였다. 당시 송상현공은 경상좌도의 병력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싸울 계획이었는데, 한심하게도 경상좌도 병사 이각과 경상좌수사 박홍은 왜군의 위세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고 말았다. 그래서 동래성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적의 대군을 맞아 격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15일 간 상호간에 피를 말리는 격전이 벌어졌고, 마침내 송상현공을 위시한 대다수의 성민들이 전사한 가운데 일본군은 동래성을 함락하고야 말았다. 이후 일본군은 승승장구하면서 서울과 평양까지 단숨에 점령했으며 조선
‘니 시장에 가서 팥 좀 사온나.’ ‘팥이 뭔데요?’ ‘이 빵에 들어가는 앙코가 바로 팥 아이가. 시장에 가서 100원어치만 사오너라.’ ‘그냥 시장에 가서 파를 달라고 하면 되지예?’ ‘하모. 시장통에 가서 팥을 파는 아줌마한테서 사면 된다.’ '알았어예.‘ 아이는 풀빵 파는 아줌마한테서 100원을 받아 들고 포장마차를 나섰다. 그리고 의문점을 가지면서 시장으로 향했다. ‘풀빵 안에 앙코가 들어가야 되는데, 왜 파를 넣지? 이상하다. 파가 앙코로 변한단 말이가.’ 아이는 그런 의문점을 가지면서 시장에 갔다. 그리고는 파와 감자, 양파를 파는 아줌마에게 가서 굵은 대파 100원어치를 사게 된다. 가슴 한 구석에는 풀빵 아줌마가 시킨 심부름을 해냈다는 자부심을 가득 안고서.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아이는 아줌마에게 자랑스레 대파를 내밀었다. 대파는 꽤나 묵직했다. 아이의 얼굴에는 이렇게 묵직한 파를 사왔으니 심부름 값으로 풀빵 하나 달라는 요구가 순진하게 묻어 있었다. 그런데 아이를 본 아줌마는 곤혹스러운 미소를 짓고만 있었다. 그러면서 종내에는 굵고 투박한 웃음을 풀풀 날리면서 이야기했다. ‘아이고, 야야. 팥을 사오라고 했지 누가 파를 사오라고 했나?’ ‘
- 서평 을 읽고 헤롯왕을 유혹하여 세례 요한을 죽게 한 살로메는 성경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고? 이게 사실일까? 사실이다. 이 말이 의심스러운 사람은 지금 당장 신약성서의 마가복음편을 자세히 읽어보라.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중의 하나는 살로메라는 팜프파탈이 유대 왕 헤롯 앞에서 밸리 댄스를 추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댄스에 넘어간 헤롯왕이 살로메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하자 그녀가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식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성경에서 요한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나오는데, 이 두 곳에서 살로메라는 이름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단지 헤롯의 아내인 ‘헤로디아의 딸’이 왕과 관리들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만 나올 뿐이다. 결국 살로메라는 이름은 후대의 예술가들에 의해 창조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에는 이처럼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들이 실상은 오류와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독일의 두 지성인인 괴츠 트랭클러와 발터 크래머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상식들의 오류를 다양한 자료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 상식들은 서양, 그중에서도 유럽 사회에 널리 퍼진 상식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