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모처럼 서울에서 내려온 딸에게 그 동안 말로만 듣던 울산 산업의 발전상을 보여주기 위해 아내와 함께 나들이를 했다. 현대자동차 제1공장으로부터 제5공장을 지나 현대 미포조선을 거쳐 저가 근무했던 울산교육연수원으로 안내했다. 그 곳은 8년 전에 근무했던 연수원이 아니었다. 바다는 옛 바다 그대로였지만 소나무는 아니었다. 수백 년을 곧게 자란 그 많은 해송들은 소나무 에이즈라 불리는 소나무 재선충병에 걸려 많이 잘려 나가 엉성해 보였다. 해송의 적인 재선충병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으니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 울산교육연수원이 울기공원 안에 위치해 있어 건물을 재보수해야 하지만 할 수가 없어 그런지 많이 낡아버렸고 도색도 하지 않아 이대로 연수원이 사라져버리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안 그래도 관할 동구청에서는 울산교육연수원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곳을 공원으로 만들려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즈음이라 더욱 안타까움을 더하게 하였다. 아무튼 연수원은 나같이 감성이 무딘 자에게도 감성을 키워주기 안성맞춤인데 그 곳이 사라지면 어떨까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다시 99년 4월로 돌아간다. 4월 7일 오후 제7기 ○○○○정보고등학교 1
수련 3일째가 되면 수련생들이 대왕암을 찾는 날이다. 6시 기상해서 체조를 한 후, 신라 문무왕비가 죽어서 문무왕처럼 동해의 호국용이 되어 이 바위로 잠겼다고 하는 대왕암에 간다. 그러면 나도 머리를 깨끗이 씻고 체육복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연수원 후문을 통해 해변을 따라 난 산책길을 따라 걸어간다. 그러면 하루의 산책은 주위의 자연 배경으로 인해 한 폭의 그림을 안고 돌아오게 된다. 내가 산책로를 따라 걸을 때면 여러 산책객들을 만나게 된다. 보통 때는 날씨가 썩 좋지 않은데 오랜 만에 화창한 날씨가 되면 더욱 머릿속에 담을 것이 많아진다. 맑게 갠 하늘에 간간히 보이는 옅은 구름과 바다 위에 떠있는 조각배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 준다. 산책길의 왼쪽은 소나무 숲이고 오른쪽을 바라보면 확 터인 동해바다와 하늘이 열리며 앞에는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대왕암이 보인다. 어떤 날은 바닷가의 크고 작은 바위만 눈에 들어온다. 제일 먼저 들어오는 바위는 바다 위에 외로이 떠 있는 작은 바위, 설움에 지치다 못해 굳어 버린 바위, 자기는 항상 그 자리에 있는데 바닷물은 자주 변덕을 부린다. 기분 좋으면 열어주고, 기분 나쁘면 감싸버리는 심술궂은 바닷물
울산교육연수원은 울기공원 안에 있다. 공원 안에 연수원이 있다는 건 연수원이 공원보다 먼저 건물이 세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울기공원은 울산의 공장이 많이 있는 방어진에 위치해 있다. 큰 길에서 아마 1km 정도 걸어가면 된다. 공원입구 오른쪽에 보면 연수원 입구가 보인다. 울산에서 유명한 커다란 고래 턱뼈가 아취 형태로 세워져 있음을 보게 된다. 거기에서 양쪽 소나무 사이로 약 150m쯤 걸어 들어가면 연수원 건물이 나온다.연수원은 때때로 하얀 세상이 된다. 건물 앞으로 펼쳐진 바다가 하얀 세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보통 때는 연수원은 푸른 세상이다.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나무도 푸르다. 그러니 언제나 푸른 세상 속에서 푸른 꿈을 키우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때로는 검은 세상을 만들기도 한다. 하늘도 검다. 바다도 검다. 나무도 검다. 그러니 마음도 새까맣게 타들어가게 된다. 그럴 때는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 때는 바람도 거칠다. 소리도 거칠다. 파도소리도 거칠다. 고동소리도 거칠다. 나무소리도 거칠다. 검은 세상을 보는 듯하다. 검은 세상 속에 함께 검게 된 나를 바라본다. 검은 세상 속에 함께 거칠어진 나를 되돌아본다. 그
연수원의 숙소생활은 많은 행복을 가져다 준 곳이다. 숙소 앞에 아침마다 펼쳐지는 정원은 언제나 나의 스승이다. 나에게 깨우침을 주는 곳이다. 언제나 기쁨을 만들어내는 샘물이다.생각을 키우게 하는 보고(寶庫)이다. 하루하루 힘과 용기를 주는 아름다운 자연의 보배다. 매일매일 인격을 다듬어주는 용광로이다. 자연과 친하게 하며 닮아가게 하는 고요한 샘터이다. 4월을 알리듯이 날만 새면 새들이 찾아와 인사한다. 커텐을 열면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온갖 시련을 묵묵히 이겨낸 소나무 숲이 점잖게 인사한다. 그리고 정원에 펼쳐져 있는 온갖 나무들과 꽃들이 앞다투면서 반겨주며 인사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그러면 나도 그들에게 인사한다. 새들! 안녕, 소나무 안녕! 목련도 안녕하고 벚나무도 안녕? 동백나무야 인사 늦어 미안해, 잘 있었니? 참 초화(草花) 너희들도 있었구나! 아차 잘못하면 인사 빠져 미안하게 될 뻔했네. 잡초(雜草) 안녕? 이렇게 인사하고 나면 자연과 하나가 된 느낌이고 기분도 상쾌해진다. 커텐을 열고 뒷뜰을 내려다보면 크고 작은 나무들이 춘삼월을 알리듯 자색(紫色), 백색으로 옷 입으면서 활짝 웃고 있다. 자신의 최대의 아름다움을 뽐내듯 마냥 웃는
울산교육연수원에서의 생활은 규칙적일 수밖에 없다. 숙소마다 스피커시설이 다 되어 있어 수련생들과 함께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맡은 일이 없다 하더라도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아침에는 언제나 오전 6시 기상을 하게 된다. 오전 6시가 되면 행진곡이 울림과 동시에 사감의 수련의 시작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일째 기상시간입니다 신속한 동작으로 생활실을 정리정돈하고 중앙현관 앞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수련이 시작된다. 엄숙하고 장엄한 국기에 반주에 맞추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 후 울산교육연수원만이 자랑하는 넓고 푸른 바다를 향해 외친다. “야호, 울산○고 파이팅, 아버지, 어머니”하고. 외치며 학교사랑, 부모사랑을 하게 한다. 연수원 원훈인 “푸른 꿈 갖자, 무한한 창의력을 기르자,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자” 라고 복창한 후 이어 우리의 다짐을 이렇게 한다. ‘우리는/Ⅰ. 자신을 바르게 알고, 겸허하게 행동한다./Ⅰ. 이웃에 봉사하고, 나라 사랑을 몸소 실천한다./Ⅰ.진취적 기상으로 밝은 미래를 창조한다.’ 그리고 난 다음 부모, 형제, 친척들의 평안을 기원하는 묵념을 한 후 국민체조를 한다.
99년 들어와 가장 크게 마음에 어그러진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전문직 발령에 관한 것이었다. 97년 말에 전문직 시험에 응시해 합격한 후 98년 3월 1일부터 1년 동안 울산광역시교육청에서 파견근무(인턴장학사)를 하고 있을 때 그 때 당시 교육의 수장께서 하루는 저를 불러 99년 3월 1일자로 본청에 장학사로 발령을 내 주겠으니 열심히 하라고 말씀을 하셔서 저는 그 말씀을 찰떡같이 믿고 기대를 하며 최선을 다했는데 기대와는 달리 99년 3월 1일자로 울산에서 가장 가기 싫어하는 울산교육연수원에 교육연구사로 발령이 났으니 기뻐하기는커녕 실망이 너무 커서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 때 연수원에 와서 마음을 달래며 바다를 친구 삼고, 산과 나무와 자연을 친구 삼고, 책을 친구 삼으며 마음을 다스려 나갔다. 3월 어느 날 저녁 백운소설의 작가 이규보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분의 글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백운소설의 작가 이규보 선생님은 “작게는 한 몸의 영화, 출세, 고생, 안락에서부터 크게는 국가의 안위와 난리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어그러지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 고 했다. 그러면서 ‘위심시(違心詩)’ 12구를 지었는데 그 시는 이렇
울산에는 산업도시인 동시에 조상의 얼이 담긴 곳이 많은 유적도시이며 교육의 도시이기도 하다. 지난 99년 울산교육연수원에 근무한 것이 저에게는 교직생활 30년 중 가장 추억이 많이 담긴 해였다. 그 때 당시에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그러함을 더욱 느끼게 된다. 울산교육연수원은 경남과 분리되기 전에는 학생들의 수련활동인 수련원이었지만 저가 교육연구사로 발령받은 당시에는 광역시로 승격된 이후라 학생수련원과 교원연수원으로 겸하여 운영하던 때였다. 그 때 저는 교수실에서 교원연수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면서도 학생수련에 관한 보조업무를 했다. 담임연구사가 계시지 않으면 대신 보조 담임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사물놀이지도에 대한 담당연구사님이 이동하시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저가 어깨 너머로 배운 실력으로 사물놀이 지도를 하기도 했다. 그 때 당시 생활근거지가 울산이 아니고 마산이었기 때문에 저 혼자서 객지생활을 하던 때였다. 그래서 연수원 내에 있는 숙소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다른 분들은 두 명씩 배정이 되었지만 저는 객지생활을 한다고 원장님의 크신 배려로 혼자 조금만 숙소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숙소는 별도의 건물이 아니었고 학교건물을 수
지난 99년 3월부터 울산교육연수원에서 6개월간 교육연구사로 연수원 숙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해 4월 20일 깊어가는 밤에 ‘순오지’를 읽고서 메모한 것을 올려 봅니다. 『조선 인조 때의 학자인 홍만종 선생님께서 병으로 누워 있을 때 15일간 걸쳐 완성했다고 하는 ‘순오지(旬五志)’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그분께서 평생에 세 가지 버릇, 네 가지 장점, 다섯 가지 폐단을 적고 스스로 경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그분의 평생 세 가지 버릇은 이렇다. “재주는 대단치 않으나 책 보기를 좋아하고, 글씨는 졸려하지만 필적을 좋아하고, 병은 많으면서 산수를 좋아한다”. 나의 평생 버릇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특히 연수원에 오고 나서 나의 습관과 너무 흡사해 기쁘기 그지없다. 지덕이 높으신 분의 좋은 버릇 닮아가나 싶어 기분이 좋다. 3월 이후부터 재주가 없으나 책읽기를 좋아하고, 필재(筆才)가 없으나 글쓰기를 좋아하며, 다병(多病)인데도 산해(山海)를 좋아하니 혹 홍만종 선생님의 영향을 받은 때문은 아닌지? 틈만 나면 시집, 수필집, 교양서적 할 것 없이 내 손에 주어지는 책은 닥치는 대로 마구 읽는다. 어떤 때는 하루 만에 시집을 한 권을 읽어 낸다. 이해되
오늘 보충수업이 끝나는 날이라 지난 여름방학 때처럼 간단히 코멘트를 해주면 좋겠다는 1,2학년 부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별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인사말씀을 드리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아 시작 5분 전 방송을 통해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보충수업이 끝나는 날입니다. 그 동안 정말 말없이 열심히 수고해 주셨는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간단히 메모해 보았습니다. 이것을 읽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겠으니 끝까지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선생님, 오늘 출근길은 몸은 추웠지만 마음은 따뜻하지 않았습니까? 시작할 때만 해도 체력이 고갈되어 좀 쉬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을 텐데 이렇게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또 고생을 하게 되었으니 저로서도 죄송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벌써 18일간의 보충수업기간이 끝나는 날이라 마음이 가볍고 몸도 마음도 따뜻하고 기쁨과 보람도 느끼리라 생각됩니다. 여러 선생님께서 보충수업 자체가 부담스럽고 힘이 들었겠지만 말없이 묵묵히 학생들 곁에서 땀을 흘려주신 선생님 정말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임신을 하신 선생님께서도, 유산 후유증으로 편하게 몸조리 하셔야 하는데도, 신혼초기에 여행도 다녀오셔야
베트남은 자타가 공인하는 후진국이다. 미국과의 전쟁 후 심각한 전쟁 후유증을 겪은 나라 아닌가? 남북 베트남이 통일을 이룬 후 외국원조의 단절, 낙후성, 미국과 서방의 제재 및 봉쇄 정책, 이웃 강대국과의 관계악화, 캄보디아 크메르 정권의 침공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은 나라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베트남에 갔을 때 여러 곳에서 후진국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울산의 젖줄인 태화강이 있는 것처럼 후치민시에는 사이공강이 있었다. 사이공강은 태화강과는 달리 수심이 깊고 넓어 많은 배들을 볼 수 있었으며, 특히 큰 배들이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사이공강물은 울산의 태화강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태화강물도 오염이 되어 수질이 양호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사이공강물은 흙탕물이었고 지류에서는 썩은 물들이 그대로 있어 쳐다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사이공강을 중심으로 한 경치는 아름다웠지만 가장 중요한 물이 이렇게 오염되어 있으니 말이나 되겠나? 아직 물 관리를 할 만한 여유가 없어 보였다. 베트남의 무질서도 도를 넘을 정도였다. 오트바이문화로 시내에는 수십 만대의 오트바이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는데, 낮과 밤이 따로 없었고
추위를 유달리 많이 타고 겨울하면 또 어떻게 보내지 할 정도로 추위가 저에게는 매우 싫다.하루하루를 힘들게 겨울을 보내고 있었는데 더운 나라를 방문할 수 있게 되어 추위를 잘 보낼 수 있었다.베트남이 그 겨울을 이겨내기에는 너무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가진 자들이 겨울을 따뜻하고 더운 나라를 방문해서 거기에서 월동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추운 겨울보다는 더운 여름보내기가 그래도 나은 저로서도 베트남 같은 곳에 겨울을 보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위에 떨다 따뜻함이 넘치는 계절을 맞이한 느낌이니 기쁨이 되었고 여행길마다 즐거움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구경하는 곳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오랜 시간 관광버스를 타야만 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어찌나 오트바이가 많은지 오트바이 세상이었다. 차는 저리 가라였다. 차가 가는데 오트바이가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트바이가 가는데 차가 방해가 되곤 하였다. 우리나라처럼 길가에 차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차가 귀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틈틈이 보이는 차들 가운데는 심심찮게 우리나라 차들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베트남에는 70-80%의 차가 한국 차라고 하였다. 승용차
오늘이 방학이 아니었다면 1월 놀토 둘째 날이 됩니다. 하지만 저는 놀토 둘째 날의 느낌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제가 1월 놀토인데도 평소와 같이 정상적으로 출근을 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학교에 나와서 보충수업을 하는데 교감이라고 놀토인데 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기분이 썩 좋은 편이 아닙니다. 방학이 되기 전 부장회의 때 방학 중 보충수업 계획을 세울 때 놀토는 보충수업을 하지 않도록 계획을 세우면 좋겠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1,2학년 두 부장선생님께서 저에게 찾아와 건의를 했습니다. 방학 동안에 놀토에도 보충수업을 했으면 한다고요.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학생들이 원하고 있고 선생님들이 원하고 있으며 학생들에게 놀토를 쉬게 하면 리듬이 깨어져 학교에 나오지 않을 학생들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아주 못마땅했습니다. 평소에 놀토에도 선생님들께 말씀하시는 것처럼 학생들이 공부에 리듬이 깨진다고 학교에 오게 해서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하면 이해가 됩니다. 보충수업을 하겠다. 기초반, 심화반 학생들을 위한 수업계획을 세워 하겠다고 하면 모릅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놀토는 쉬어야고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에너지가 보충이
선생님, 저는 어제 종일 기쁜 날이었습니다. 딸이 저에게 기쁨을 안겨줬기 때문입니다. 12일 깊은 밤 01시 조금 지난 시간에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딸이 서울 초등 임용고사 최종합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기쁜지 그 이후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내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정말 평생 기쁨을 처음으로 맞이하는 듯했습니다. 딸, 아들의 대학의 합격 때도 그렇게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것도 어제만큼 기쁨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 정도로 바람이 간절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리고 학교에 와서도 모두들 어떻게 되었나 하고 궁금해 하는데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어 다행이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간단하게나마 함께 떡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교장선생님과 행정실장님과 두 분의 선생님과 함께 점심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여러 선생님의 축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같이 재수를 하면서 이화여대 도서실에서 한 해 동안 같이 동고동락하며 함께 공부를 했던 딸 친구 중 한 명이 떨어졌다는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그 학생의 마음이 어떠했으며, 그 부모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기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인을 좋아한다는 걸 공항에 도착할 때부터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도 아무 이유도 없이 그저 베트남 사람들에게 호감이 갔다. 뭔가 통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서로가 갖고 있는 공통된 분모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안내인이 말한 것처럼 그들은 우리처럼 정이 많고 눈물이 많은 나라였다. 우리와 비슷한 역사-식민지 지배, 남북 분단, 전쟁 등-를 지닌 베트남 국민들은 남들에게 말 못할 한(恨)을 품고 살아왔을 것이며, 많은 세월을 눈물을 쏟으며 서로 위로하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공항에 나와 있는 수많은 인파 -가족 마중객-들의 모습 모습들을 볼 때면 꼭 우리 선조들의 근심 어린 눈빛과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 수심(愁心)이 가득 차 보였다. 한국인 안내인은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는데 그 이유는 내용이 그들의 정서와 맞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유명 탤런트들을 아주 좋아하는데 탤런트 '장○○'이는 중학생도 다 알고 있다고 하였다. 어느 날 중학교를 방문했는데 그 때 안내인이 하교하는 많은 중학생들과 대화를 하면서 한국인 탤런트 '장○○'이를 아
베트남 호치민 도시를 둘러볼 때 마치 일본에 온 것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비슷한 점이 눈에 많이 띄였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바로 좁은 도로-아무리 넓은 곳도 4차선이고 대부분 2차선-에 비해 인도가 아주 넓었다. 한국보다 차도는 훨씬 좁은데 인도는 오히려 넓었다. 인도가 우리나라의 1.5배 정도로 넓었다. 일본도 비슷했다. 일본도 차도에 비해 인도를 넓게 해 걸어 다니거나 활동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우리 같으면 차가 다니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최대한 도로를 넓히고 인도를 좁게 할 것인데 우리와 달리 베트남과 일본은 인도를 넓게 하는 데 대한 생각이 동일함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아마 차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배려 차원에서 이루어진 앞서가는 발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하겠지만 특히 베트남 사람과 일본 사람들은 체구면에서 너무나 닮았다. 얼굴 생김은 분명 다른데 몸집이 작고, 키가 작으며 생김생김이 뛰어나지 못한 것까지 빼어 닮았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거기 비하면 한국 사람들은 한국인의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듯싶다. 그들에 비하면 덩치도 크고 잘 생겼으며 키도 훤칠하다. 베트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