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3 학생이 중3 수학 공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게 인식되고 있다. 교육과정에 해당하는 내용을 새롭게 배우는 아이들을 마치 열등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언론에서 보도된 바와 같이 일부 지역의 선행학습은 도를 지나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학원가에서는 너도나도 선행을 앞세워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있는 아이들을 이상하게 만들고 부모들의 불안한 심리를 자극한다. “중3이면 고등학교 수학Ⅰ은 끝내야 한다”든지 “누구는 미적분과 통계를 한다더라”는 등 경쟁을 자극하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선행학습은 이전에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심각할 정도로 선행학습이 만연하고 있고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교과도 수학 교과에서 주로 이뤄지던 것이 거의 모든 교과로 퍼지고 있어 우려를 더하고 있다. 학원들은 선행학습과 상급학교 입시를 연결해 앞 다투어 자극함으로써 선행학습을 선택이 아닌 필수로 인식하게끔 하고 있다. 그러나 선행학습은 경쟁의 비교우위를 점하는 수단으로 작용해서는 곤란하다. 이런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는 데에는 불안감을 조장하는 사교육의 홍보와 운영 방식이 표면적인 이유일 수 있겠
들어가며 필자는 지난 열두 달 동안 ‘토론’이라는 주제로 선생님들과 만났다. 토론의 중요성을 알고 계속 공부하고, 선생님들에게 소개하면서도 정작 내 수업에서는 수능 대비를 위해 문제풀이에만 집중할 수 없었던 미안함과 아쉬움이 너무도 크다. 하지만 필자 역시 아이들이 토론의 재미에 빠지고 삶에 있어 정말 필요한 토론 능력을 갖게 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였다. 이런 고민의 결과를 글을 통해 선생님들에게 소개한 지난 1년의 시간이었다. 선생님들과 똑같이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입시라고 하는 커다란 벽을 아이들과 넘는 입장에서 감히 글을 써서 토론에 대한 안내를 해드린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큰 무리였다. 그러나 늦은 시간 토론과 관련된 이론을 다시 찾아보고, 실제 수업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수업에 활용하는 활기를 가질 수 있었다. 참 고되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외람된 말일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한다. 새교육의 독자 입장에서 간간히 투고 형식으로 글을 올리다 3년 전 처음 고정 필자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어제의 일 같다. 처음 1년 간 ‘독서’와 관련된 글로, 다음 해에는 ‘논술’
들어가며 지난 12월호까지의 연재를 통해 토론과 관련된 이론적 내용과 주제별 토론 내용 추출 방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토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다양한 주제에서 쟁점을 추출하여 수업에 실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수업 현장의 개별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토론은 유기체적 성격을 갖고 있다. 현상에 대한 문제 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것이 왜 문제이고 어떤 맥락에서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 특히 아이들과의 교감이기 때문에 더 세심한 접근이 요구된다. 교재를 정하고 매뉴얼에 따라 토론 수업을 적용한다면 편리는 하겠지만 아이들의 관심과 문제 인식에 얼마나 부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토론의 과정도 개별 교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 아이들의 수준에 따라 쟁점의 선택과 제공되는 자료의 질과 양이 결정될 것이다. 학급 분위기 또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친밀한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거나, 평상시 수업의 방법이 일방적인 강의 위주로 이루어진 상황의 교실이라면 토론 수업이 원활히 이루어지기 어렵다. 토론 결과에 대한 평가 방법에 대해서도 개별적 특성이
최근 한 케이블 방송의 드라마가 큰 화제가 되었다. 199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현재 30대의 향수를 자극했다. 당시의 음악과 유행하던 옷이 소재가 됨으로써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당시의 휴대전화였다. 큼지막한 크기는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어마어마하게 느껴진다. 필자의 기억이 맞다면 처음 컬러 휴대전화가 나온 것이 2001년으로, 이전까지 흑백 휴대전화가 전부였던 상황에서 컬러로 된 화면(지금에 비하면 흐리고 조악한 색상이지만)은 혁명적인 변화였다. 그 휴대전화를 보며 한 친구가 장난스런 말투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러다 전화기로 텔레비전도 보고, 인터넷도 하겠네.” 그 말은 이미 실현된 지 오래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기술은 빠르게 진보하고 있다. 어제의 최신 제품은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리는 세상이다. 과학기술은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주고 있다. 각종 질병과 재해로부터 안전하게 해주었고, 빠른 속도와 엄청난 힘으로 우리 인류의 삶을 편하게 해주고 있다. 그러나 과연 과학기술의 발전이 우리에게 좋기만 한 것인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으나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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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문제는 인간의 존망을 결정짓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환경이 파괴되면 우리 삶의 터전이 사라지고, 식량은 부족해지는 고통을 겪게 된다. 이렇듯 환경 문제는 인류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며, 그 해결 방법이 복잡하다는 점에서 총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한 개인이나 단일 국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범지구적으로 함께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다. 때문에 환경 관련 토론을 통해 아이들이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바람직한 해결 방안을 모색케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토론의 과정을 거치면서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환경 문제가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는 현실임을 직시하고 다양한 현상들에 대해 알아본다. 이 과정에서 환경 문제를 야기하는 무분별한 개발의 이유가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개발과 환경 보존이 양립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는다. 궁극적으로 인간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현재에 대한 대안을 찾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현실의 문제 인식에서 출발하여 원인의 탐색,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토론의 전형적인 주제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환
들어가며 ‘교육’은 아이들의 삶과 가장 밀접한 주제이다. 지금까지 다양한 영역에 대해 토론의 쟁점을 추출하고 학교급별로 적합한 토론 내용을 제시했지만, 실제 체감하기에는 거리가 있는 내용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은 아이들이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매일매일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이다. 교육은 인류 공통의 특성이며 사회 체제를 유지하고 개인 삶을 영위하게 하는 데 있어 기본이 된다. 우리나라에서의 교육은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빈약한 자원과 강대국 사이의 지정학적 열세를 극복하고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은 당연히 교육열에 있었다. 선진적인 우리의 교육시스템은 외국의 벤치마킹 모델이 되고 있으며, 미국에서도 우리 교육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현재의 교육시스템 속에서 행복한가에 대해서는 일선 현장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입장에서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아이들은 별보기 인생이라고 한다. 새벽에 무거운 가방을 들고 등교하고, 밤늦게 집에 와 잠만 자고 다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필자는 고3 담임을 맡고 있다. 피곤에 지쳐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행복을 묻는 것 자체가 미안할 뿐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잘려진 허리’라는 말은 분단된 한반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광복과 함께 분단된 우리나라는 6·25 이후 분단이 고착화된 채로 60여 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본래 하나였지만 떨어져 있게 되었고, 지금은 긴 세월 동안 휴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분단이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분단은 현실의 문제로 우리 삶 속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천안함 사건’, ‘연평도 피격 사건’처럼 최근의 일들만 상기하더라도 북한 문제는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것임을 바로 알 수 있다. 분단이 단순히 국가 체제의 분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위협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를 공고히 하고 대외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선점하기 위해 도발을 감행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2000여 회가 넘는 도발이 있었으며 평화적 협상과 병행하여 이루어지기에 우리의 대응이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이후 김정은이 권력을 이양 받는 과정에서 우리에 대한 위협은 더욱 커지고 있다. 정통성 확보와 대내적 정치 관심을 대외로 돌리기 위한 방법으로 극단적 형태의 도발을 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북한의 문제
어느 사회에서나 무릉도원이나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향은 이야기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다. 요즘 유행하는 영화들에서도 이런 이상향의 모티프는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야기들이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비롭고 재미있다는 이야기 자체의 요소도 있지만 현실을 고단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의 많은 문제 속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으며,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심리를 이야기로 표현한 것이다. 신문과 뉴스를 보면 어떠한가?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있는가? 대부분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두운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문제가 발생하고 이것이 해결될 새도 없이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고 사람들은 괴로워한다. 토론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다. 사회 문제가 없다면 애초에 토론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의 의견 차이를 발견하고 보다 나은 근거를 논리적으로 펼쳐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는 활동이 토론이라면 사회 문제는 토론의 주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사회는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고 그 복잡한 구성만큼이나 다양한 문제가 존재한다. 여기에서는 사회 문제 중 쟁점 추출
국가·민족적 차원으로 보면 한 개인이 속한 사회의 고유한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행동 양식을 보이게 된다. 자신이 속한 문화의 관점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에 당황하기도 하며, 아무렇지 않게 한 행동이 오해를 불러오기도 한다. 세계적인 협상 전문가 다이아몬드(2012)는 국제 협상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문화의 이해를 꼽는다. 예를 들어, 미국과 중국 사이의 경제 협상 과정에서 미국인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처리를 위해 절차를 간소화하려 할 수 있지만, 중국인의 경우 협상 내용보다도 서로를 신뢰하고 예의를 갖추었는지 여부를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이를 결례라 생각하기도 한다. 또 미국에서는 다른 사람과 마주쳤을 때 보통 미소를 보내지만, 한국에서는 무표정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는 예를 들고 있다. 문화의 차이는 이처럼 사소한 표정 하나에서 시작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국가 간 분쟁의 소지로 작용하기도 한다. 국제화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을 만큼 지식과 정보의 교류에 대한 준비는 충분히 갖추어져 있지만 문화에 대한 이해는 아직 부족하기만 한 것이 현실이다. 얼마 전, 우리를 경악하게 한 수원살인 사건을 보면 사건 자체의 잔인함에 대한
아이들에게 경제는 어렵고 낯설게 여겨진다.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현실의 문제이지만 어려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초등학생, 중학생뿐 아니라 경제 교과를 본격적으로 학습하는 고등학생도 학습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실제로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영역 선택 비율을 보면 높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진로 희망에서는 상경계열을 희망하는 비중이 높음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경제 영역에 대한 매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수와 복잡한 인과관계를 이해하는 것에는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경제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어렵다는 이유로 멀리할 수는 없다. 경제는 자금의 유통과 흐름에 관한 것이지만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경제대공황이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1997년 IMF가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서브프라임 사태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경제 문제는 어느 한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삶 전체에 영향을 준다. 이러한 경제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아이들이 학업을 마치고 자신의 직업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경제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아이들의 진로·직업 선택과 학습 방향에도 경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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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신문으로 교육 관련 기사를 검색해보니 참혹하기 그지없는 사건들 일색이었다. 급우들로부터 학대를 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이, 같은 학급의 친구들로부터 성추행을 상습적으로 당한 여학생. 우리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안에서 불철주야 고민하고 헌신하며 아이들을 위해 열정을 다했음에도 현실에서는 참혹한 결과가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위기’라는 말의 부정적 함의를 알기에 쓰고 싶지 않지만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황이기에 ‘위기의 교육’이라는 말을 벽두부터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갖게 된 작은 바람을 두서없이 몇 자 적어보도록 한다. 우선 교육현장의 폐쇄성이 사라져야 한다. 그간 우리는 교실을 열린 공간으로 만들고 구성원들이 모두 만족하는 행복한 곳이 될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가시적인 성과도 있었고, 많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왕따 문제, 교권 침해, 이해관계에 따른 분열 등의 모습을 보면 여전히 폐쇄성을 벗지 못하고 있다. 구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소통과 상생의 과정을 거쳐 혼연일체가 되어야 한다. 교사와 학부모는 알량한 자존심이나 소모적인 논쟁
문고판 책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공원의 벤치에서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는 노신사의 모습은 하나의 풍경을 넘어 삶의 향기까지 함께 전해준다. 독서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방법이 존재하지만 근본적으로 독서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가정과 학교에서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서와 삶이 일치하지 못한 채 독서가 하나의 수단과 방법으로 인식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독서의 생활화는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 문화 강국으로서의 필수 조건이다. 독서를 삶의 가운데로 자리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이 중심의 생활독서 필요 독서의 필요성은 가정과 학교에서 모두 공감하고 있다. 아이를 위해 좋은 책을 사주고 독서의 장점에 대해 끊임없이 설명하는 부모님의 노력, 교과와 연관된 자료를 제시하고 다양한 교육 방법을 적용하는 선생님의 노력 등 아이들의 독서를 위해 가정과 학교에서 많은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통합되어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독서는 근본적으로 생활독서여야 하며 삶의 가운데 위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정과 학교에서의 유기적이고 조직적인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우선, 효과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