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아름다움의 대명사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을 나타낼 때 꽃이라는 말을 붙여서 사용하였다. 화용월태(花容月態)란 꽃처럼 아름다운 미인을 나타내는 말이다. 꽃은 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영예와 소망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문학에서도 많은 문인들이 꽃에 매료됐다. 작가 이순원이 생각하는 은비령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멈춘 영원의 공간이며, 환상적인 치유의 공간이다. 그 곳으로 가는 여정을 통해 바람꽃 같은 그녀 선혜와의 사랑에서 소금 짐처럼 느껴지는 친구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은비령에서 나와 선혜에게 별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처럼 은비령은 시간이 멈추어버린 그 곳으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담당하게 묘사하는 것이 더 수채화처럼 투명하게 느껴지는 이순원 작가의 필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인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현실에서 많은 제약을 가진다. 함께 공부를 하던 내 친구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발표되었던 1990년대의 삼십 대의 나에게 친구의 아내와의 사랑은 주변의 시선 그리고 자신 속에서 용서받기 힘들어 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본능적인 이끌림으로 그녀의 모습 속에 있는 바람꽃을 찾아낸다. 눈과 얼음을 뚫고 피는 바람꽃은 독
‘어느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러자 그는 가방을 싸고 서둘러 일본을 떠나 그리스와 이탈리아 등을 3년간 여행한다. 긴 여행지로 떠나 쓴 소설이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와 《댄스 댄스 댄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문학은 물론 자신의 인생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하며 하루하루의 삶을 기록한다. 여행 기간 동안 그의 삶을 따라가면 인기작가 하루키가 얼마나 작가로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매일 글을 쓰고, 조깅을 한다. 그에게 글을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길이고, 세상을 향해 나가는 길인 듯하다. 그리고 그의 글은 화려하고 아름답다기 보다는 소소하고 소박하고 감성적이다. 마리자 튀김을 먹고 카라마리를 사고 포도주를 마신다. 그리고 음악을 듣고 주변의 사물을 관찰하고 투덜거리고 저녁으로 먹을 전갱이 소금구이를 해주는 그리스 선술집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고양이를 관찰하고 개를 바라보고, 동네 사람들의 모습과 시장에 파는 신선한 생선에 관심을 가진다. 여행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착민도 아닌 어정쩡한 장기 투숙 여행자인 것이다. 읽는 내내 그는 전생에 바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입동 즈음입니다. 세상은 그대로 화려한 풍광을 펼쳐놓습니다. 연갈색의 갈참나무와 노랑의 은행나무, 붉은 단풍으로 빛나는 아름다움은 제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봄이 새롭게 출발하는 싱싱한 젊은이 같은 밝은 아름다움이라면, 가을은 스산한 중년 여인의 눈가 주름처럼 아름답고 고독합니다. 이렇게 늦가을 떨어진 낙엽같이 인생을 살다간 이가 있습니다. 그는 매월당 김시습입니다. 어린 신동으로 세종대왕 앞에서 문재를 뽐내었던 그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세상을 등지게 됩니다. 절의를 잃은 그는 세상을 떠돌며 글을 토해냅니다.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제목은 "금오산에서 지은 새로운 이야기"라 풀이할 수 있고, 이 제목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추리할 수 있습니다. 김시습(金時習)은 19세 때 서울의 북한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 책을 모두 불사르고 강원도 김화로 들어가 뜻을 같이 한 사람들과 함께 한동안 은둔합니다. 1462년 잠시 경주 남산의 용장사에 머문 적이 있고, 31세 때인 1465년에 남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6년 남짓 정착 생활을 합니다. 제목에 금오산 이름을 쓴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강마을은 가을이 가기 전 겨울이 먼저 온 듯합니다. 하얀 서리가 추수한 들판과 말리고 있는 볏짚과 아직 베지 않은 벼 포기에 온통 흩뿌려져 있습니다. 노랗고 붉은 소국과 키 큰 대국이 학교 현관을 장식하고 가을 햇살 사이로 빛나고 있습니다. 노랑나비 한 마리가 꽃 사이로 언뜻 보입니다. 꽃인지 나비인지 분간되지 않습니다. 나비가 꽃잎인 듯 그렇게 보였습니다. 꽃잎처럼 보이는 나비는 자신이 잠시 꽃이라 생각하고 앉았을까요? 아니면 가분 좋은 가을 햇살에 잠시 날개를 말리고 꽃향기에 취하고 싶어서일까요? 그저 잠시 가을 꽃잎에 자기 한 발을 들여 놓고 작은 부탁을 하기 위해서일까요? ‘문간에 발 들여놓기(foot-in-the-door technique)’란 심리학 용어가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큰 부탁을 하고자 할 때, 먼저 작은 부탁을 해서 상대방이 그 부탁을 들어주게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학자들이 연속 근사(successive approximation)라고 일컫는 인간의 성향에 의존한다고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사람이 작은 부탁이나 약속을 들어주고 나면 그 사람은 그 방향으로 태도나 행동을 계속 수정하
강마을의 가을 아침은 안개가 주인입니다. 안개는 강위로 그 존재를 확실히 드러내며 올라와서는 은사시나무 사이로 하얀 입김을 불어버리면, 세상의 풍경은 제 것입니다. 축축하고 하얀 안개 속에서 우리는 외롭고 무섭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고 나도 너도 꽃도 나무도 보이지 않아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저는 세상살이가 이런 안개 속을 걸어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언제나 제 앞의 삶은 두렵고 무섭습니다. 지천명의 나이를 지나면 이런 마음이 덜 할까 하였습니다만,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 저는 요즘 학교에서의 일상이 참 힘듭니다. 많은 업무와 수업, 공부, 힘든 인간관계가 매일 반복됩니다. 지친 저를 또 다른 제가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 속에 있는 다른 존재는 걱정하며 저에게 말을 합니다. “세상 뭐 별거 없어. 그냥 마음 가는대로 살아.” “하루를 잘 버티어 왔잖아, 내일도 그럴 거야. 힘내!” “너 잘하고 있어. 징징 거리지마. 너는 어른이잖아.” 이런 저를 비웃는 그를 깊어진 가을날에 만났습니다. 거침없는 영혼의 자유인 ‘조르바’입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저와 판박이인 그의 대장을 후려치듯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
가을비가 내립니다. 비는 그칠 생각이 없는 듯 계속계속 내립니다. 비에 젖는 나무들이 보입니다. 절반쯤 잎을 떨어뜨리고 있는 배롱나무 끝가지에는 아직 몇 개의 붉은 꽃송이가 남았습니다. 금목서 나무 아래엔 금빛의 자잘한 향기로운 꽃들이 날벌레처럼 쌓였습니다. 저의 가을은 백두산에서 본 자작나무로 깊어집니다. 올 가을 저는 원 없이 자작나무를 보았습니다. 길고 날씬한 자작나무, 노란 단풍이 든 자작나무, 어린 자작나무, 잎이 다 떨어진 자작나무... 백두산 장백폭포 가는 길에는 정말 자작나무가 많았습니다. 수목한계선 아래 곧게 자라지 못하고 가지가 휘어진 하얀 숲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 숲에서 눈으로 보고, 사진으로 찍고, 손가락으로 만져보고, 코로 냄새로 맡고, 몸으로 비벼보았습니다. 곰들이 자신의 체취를 묻혀 영역을 표시하듯 저 역시 영역표시를 하고 싶은 것이었을까요? 서리가 하얀 자작나무 숲에서 [설국]이라는 소설을 생각하였습니다. 한적한 눈 고장에서 게이사로 살아가는 ‘고마코’는 삶의 순간마다 그 뜨거움으로 녹일 듯합니다. 청순한 모습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요코’, 특별한 일없는 여행자 ‘시마무라’는 이 두 여인을 허무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지인으로부터 녹나무 한 조각을 선물 받았습니다. 몇 백 년 된 녹나무로 탁자를 만들고 남은 조각을 얻었다고 하면서 은은한 향의 나무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바짝 말라있던 나무에 물을 휴지에 묻혀 표면에 바르자 갑자기 죽었던 것같이 보이던 나무가 세포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속에 감추어 두었던 향기를 터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말라붙은 나무 조각도 물과 접촉하는 순간 마른 세포벽을 귀퉁이를 열어 생명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죽은 듯 보이는 것에도 어떤 새로운 생명의 순간과 접촉하는 순간 살아있는 삶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무만이 아니라 우리 몸은 단순하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세포는 수많은 미생물과 네트워크를 이루고 접속하면서 진화해 왔습니다. 즉 나의 몸은 나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 몸은 미생물의 터전이며, 그 미생물과 공존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은 미생물들의 생활 터전이자, 우리 몸은 수많은 외부 미생물의 활동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교류하며 소통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근 사스를 비롯한 콜레라 등의 병원균에 대해 지나치게 민간하게 반응해 온 것에 대해 너
한가위를 앞둔 시장에는 사람들과 물건들로 가득합니다. 시절은 아름다운 가을을 향하여 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빳빳하게 군기가 든 모습으로 무논을 지키던 초록 모들은 여름을 지나 어엿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여문 씨알들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색은 황금빛입니다. 이따금 메뚜기가 뛰고 여치와 잠자리들이 끝물고추밭을 이리저리 돌아답니다. 아직은 가을 초입이어서 여름 꽃들이 기세를 올립니다. 왕고들빼기의 연노랑꽃들이 흐드러지고 맥문동도 푸른 열매와 보랏빛 꽃을 함께 달고 있습니다. 분홍 메꽃은 밭둑에 까마중 줄기를 친친 감아 무성합니다. 하지만 계절은 그대로 묵묵히 가고 있습니다. 거리엔 이미 은행열매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떨어지기 시작했고, 아련한 꽃무릇이 무수한 꽃대를 올립니다. 저는 이제 가을을 시작하려 합니다. 갈색 스카프와 붉은빛이 도는 펠트 모자를 구입하였습니다. 약간 더운 날이지만 모자와 스카프를 착용하고 수크렁 무성한 무학산 언저리를 공원을 산책하였습니다. 산바람은 서늘하고 붉은 잎이 드문드문 보이는 벚꽃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이문열의 책을 읽었습니다. 황제를 위하여는 정감록을 취재하라는 데스크의 호출에 시덥잖은 잡지사에 근무하는 그
강마을은 계절의 교차점에 있습니다. 후끈한 열기를 뿜어내는 한낮의 열기를 받아 들판의 곡식들은 여물어가고, 저녁이면 ‘스르르렁 스르르렁’ 이런 소리를 내는 벌레들의 향연이 가을 초입을 알립니다. 하늘을 저만큼 높아갑니다. 벼포기가 고개를 숙이고 노르스름한 빛을 보이는 논도 제법 보입니다. 정말 가을이 오나 봅니다. 서늘한 바람결에 지리산의 밤하늘이 생각납니다. 천왕봉 아래 경남환경교육원으로 청소년환경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였습니다. 팔월의 뜨거운 열기도 지리산의 품안에서는 서늘한 산기운에 밀려났습니다. 학생들과 환경교육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연수 오신 선생님 한 분이 천제망원경으로 별을 관측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반짝이는 눈매의 아이들에게 토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름다운 고리를 가진 토성과 그 위성 중 하나인 타이탄의 모습도 살짝 보였습니다. 갑자기 밤하늘의 별들이 저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다른 것이 보입니다. 일반적이고 평범한 사물들도 내가 생각하고 다시 조합하면 다른 것이 만들어집니다. 이것을 김정운교수는 편집 즉 ‘에디톨로지’로 설명합니다. 개그맨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유쾌함으로 무장한 김정운 교수의 이야기는 결
강마을의 여름은 빨강입니다. 여름과 같은 성정으로 남쪽을 주관하는 신은 주작(朱雀), 붉은 봉황입니다. 그녀의 화르르 타오르는 열기는 여름의 절정과 참 잘 어울립니다. 붉은 불덩이를 삼킨 듯 온몸을 태우는 그녀, 옹녀가 등장하는 『변강쇠가』를 읽었습니다. 노골적이고 강렬하며 민망하지만 자연스러운 모습이 우리의 여름과 닮아있습니다. 『변강쇠가』는 예전 우리의 장터마당에서 ‘19금’의 은밀한 이야기들이 판소리로 공연되어 남녀가 공감하고 즐겼다고 합니다. 남몰래 훔쳐보는 것이 아니라 성과 죽음의 문제를 드러내어 당당하게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 “샤아아 샤샤 싸아아아---- 싸” 하고 울어대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읽는 『변강쇠가』에는 성(性), 질병, 죽음, 시체, 무속행위 등 우리들이 터부시하는 것들이 마구 뒤섞이면서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우리는 『변강쇠가』에 대해 무지합니다. 한국인치고 변강쇠와 옹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고, 수많은 영화를 통해 변강쇠와 옹녀가 명실상부한 성적 아이콘으로만 자리 잡았습니다. 특정한 배우의 뜨거운 숨소리만을 기억한다는 것은 몹시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변강쇠와 옹녀가 판소리 『변강쇠가』의 주인공
팔월의 뜨거운 열기 속에도 통영의 바다는 아름다웠습니다. 싱그러운 바다 내음과 더 푸른 색감을 자랑하는 화가 전혁림의 그림을 보러 길을 떠났습니다. 창원에서 통영까지는 1시간이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지만 휴가철 통영으로 가는 길에는 꽤 차가 많았습니다. 남해의 아름다운 도시, 통영은 예술의 향기가 가득한 도시입니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과 청마 선생의 향기가 남아있고, 백석과 김춘수의 시, 이영도 시인의 시조가 흘러나올 듯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숨을 쉬고 있는 곳입니다. 전혁림 미술관은 67번 국도를 따라 미륵산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방향으로 봉수골이라는 작은 마을 기슭에 있습니다. 푸른 타일로 장식한 외관이 아름다운 미술관에는 통영 바다를 연상시키는 시원한 비취빛 그림뿐만 아니라 선생의 도자기 작품과 다른 소품, 물감, 파레트 등 삶이 묻어나는 일상의 소소한 모습도 함께 볼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전혁림미술관 아래 담장을 같이한 작은 출판사와 책방도 함께 방문하였습니다. 출판사 ‘남해의봄날’은 서울 생활을 접고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통영에서 지역문화의 구심점이 되어 꽃피우겠다는 젊은 출판인의 아름다운 소망이 오롯이 드러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운
푸른 강물 위로 오월이 흐르는 강마을은 신록이 참으로 싱그럽습니다. 모심기를 위해 물 잡은 논에는 개구리 소리가 들리 고, 비라도 오면 청개구리가 먼저 알고 목청을 높입니다. 어느새 여름이 성큼 다가섭니다. 자연은 참 쉬지 않고 흘러갑니다. ‘자연(自然)’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입니다. 절로 절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상태겠지요.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월의 신록이나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두가 어려운 때입니다. 젊은이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힘들어 하고, 중년들은 직장에서 막판으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노년층은 빈곤과 푸대접으로 모진 추위를 견뎌야합니다. 아, 오월은 신록은 너무나 아름답고 세월은 자연적으로 흘러가지만, 이 눈부신 꽃 잔치에 소외된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비바람이 지나가면 다시 해가 나오듯이 겨울이 지나가면 봄은 반드시 오듯이 지금 우리의 삶이 팍팍해도 함께 서로를 배려하면서 같이 간다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어쩌면 일제강점기 앞과 뒤를 돌아보아도 한 발 재껴 디딜 곳조차 없던
강마을의 봄빛이 쏟아집니다. 화사한 벚꽃나무는 팝콘을 튀기듯 퐁퐁 꽃들이 피어납니다. 그렇지만 그늘진 화단을 보니 지난 계절에 무성했던 풀들이 말라 있습니다. 마른 풀 아래 검은 흙 속에는 겨울을 땅 속에서 보내는 벌레들이 숨을 죽이며 동면에서깨어날 것입니다.가물가물 쏟아지는 잠 속에서 죽은 듯 보이나 죽지 않은 상태로 가을과 봄 사이에 있는 한 계절을 보낸 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견디며 쏟아지는 봄 햇살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지요. 우리의 삶도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이 아닐까요? 요즘은 젊은이에게 더 힘든 시절입니다. 지난 해 회자인구(膾炙人口)한 ‘금수저, 은수저’, ‘헬조선’ 등의 단어에서도 짐작하듯 부모의 능력에 의해 계층이 고착화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시대는 젊은이에게 불행한 시대입니다. 우리의 젊은이가 부모의 물려준 수저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새로운 경계의 문을 열어나가 창의적으로 인생을 디자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동면한 벌레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서 죽은 듯 죽지 않은 상태로 살아갈 것입니다. 겨울처럼 얼어붙은 취업시
세상은 봄으로접어든다. 우리의 혈관 속에 봄이 수혈되기 시작하였다. 봄을 맞이하여 무엇을 해야할까? 우선 묵은 마음의 때를 벗겨야할 것이다. 봄맞이 대청소를 통해 버려야할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물건들에 묻은 먼지를 벗겨내고, 작은 화분이라도 하나 사서 창가에 두어야할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어야 한다. 지성사의 거장들이 [돈키호테]를 주목한다. 푸코는 [돈키호테]를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경계에 있는 작푸이라 [말과 사물]에서 평했다. 이 소설은 바야흐르 기독교의 신이 세계를 떠나기 시작하는 시대의 초엽에 있다. 즉[돈키호테]는 '영원한 내용과 영원한 태도로 그 시간이 끝나 보리면 의를 잃어버린다는 사실'에 대난 깊은 멜랑콜리이다.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이론') 돈키호테는 광기에 대한 고고학적 탐색이다. 돈키호테는 어쩌면 현대인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는 광기 속에서 무엇인가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의 돈키호테는 스마트폰을 들고 알 수 없는 블랙홀로 빠져들어간 사람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그를 만나보자. 이 봄에 봄이 제공하는 바람에 휩쓸려 그의 행보를 따라가 보자. 《돈키호테》는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무수히 많은 작품들의 밑거름이 된
강마을에 봄은 향기롭습니다. 운동장가에 지천으로 핀 냉이꽃을 책갈피에 말려 엽서를 만들어 벗들에게 보내었습니다. 이 엽서를 받은 벗은 냉이를 캐러 다니던, 소녀적 생각에 한참 먼 산을 바라보았답니다. 봄햇살은 봄비처럼 그렇게 보실보실 내리는 날입니다. 강마을에서 이선애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