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탓인지 따스한 온돌방처럼 잔잔한 감동을 주는 책이 그리웠다. 쇼핑 카트에 책을 담고 나올 때 느끼는 작은 행복이 커 보이는 것도 가을이 주는 선물이다. 추석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도 작은 그리움들이 마음 한 켠에 남아 있었나 보다. 생필품을 사는 것보다 책을 고르는 일이 먼저인데도 항상 순서가 뒤바뀌곤 한다. 서점에 죽치고 앉아서 책을 보는 사람은 아이들뿐이었다. 어른들은 책을 들었다 놓았다만 할 뿐 선뜻 책을 들고 나가는 사람이 드문 할인 매장의 풍경. 의식주보다 먼저인 책이 뒷전으로 밀린 모습들이 아쉬워 보이는 쇼핑 문화. 쇼핑 카트에 물건이 가득 실려 있어도 책이 얹혀 있는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특히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님이라면 아이를 데리고 책 코너로 먼저 가서 잠시만이라도 책 구경만이라도 같이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신간 서적도 구경하고 사지는 않더라도 한 편의 시라도 읽고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모습을 통해서 가장 잘 배운다. 책을 읽는 습관도 마찬가지이다.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말로 되는 게 아니며 오직 보여지는 행동만이 설득력을 지닌다. 20년 전에 많이 읽혀졌던 '모모'가 아직도
'오늘은 내 생일인데...' 평소에 말수가 적고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어른들보다 더 신중한 찬우가 아침 독서를 끝내고 와서 나를 보자마자 혼자서 중얼거립니다. 내가 잘 못 들은 것으로 알았는지 이번에는 더 큰 소리로 중얼거립니다. '오늘이 내 생일인데...' 그러자 곁에 있던 아이들이 합창을 합니다. "선생님, 오늘은 찬우 생일이래요.' "응, 그러니? 부모님께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편지를 드리고 큰절을 올렸니? "아니오, 아직 못 했어요." "그럼 오늘 집에 가면 감사 편지도 드리고, 큰절도 올리고, 엄마 아빠 발도 씻어 드리세요. 찬우는 잘 할 수 있지요? 낳아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하는 말씀도 함께 할 수 있지요?" "예, 선생님. 잘 할 수 있어요." 아이들은 찬우를 위해서 각자 선물을 만듭니다. 진우는 색종이 강아지와 보트를 만들어서 찬우가 바다 여행을 갔으면 좋겠답니다. 서효는 학과 망원경을 만들어주며 찬우에게 행운이 많이 오기를 빕니다. 은혜는 색종이 목걸이를 만들어 주며 색종이처럼 예쁘게 살면 좋겠답니다. 2학년 나라는 오뚜기를 만들어서 찬우가 넘어지더라도 잘 일어나는 아이가 되길 바란다는군요. 주인공인 찬우는 부모님께 드릴 감사 편지를 정
9월 23일자 조선일보는 미래의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들여다 보며 미소 지을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뇌성마비 승헌이가 전교회장 됐어요" 라는 기사 제목을 달고 어른들의 세상을 말없이 나무라고 있었다. 화제의 주인공은 울산 송정초등학교 6학년 우승헌 군. 승헌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뇌성마비를 앓아 지금도 말과 행동이 다소 부자연스러운 정신지체장애 1급의 장애우이다. 우사모(우승헌을 사랑하는 모임)까지 조직하여 그의 선거 기간에도 각종 홍보와 활발한 득표활동으로 승헌이가 당선되는 데 도움을 준 친구들도 대견한 아이들이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가진 장애를 상관하지 않고 똑같이 대해 주어 그의 장점을 부각시켰으며 학교 행사나 공부 과외활동 등 모든 일에서 모범이 되고, 솔선수범하는 전교회장이 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4~6학년 1200명이 참가한 투표에서 550여 표를 얻어 당당히 당선시켰다. 사이버 수사 요원을 꿈꾸는 승헌이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눈 앞에 그려보며 나까지 행복해지는 아침. 장애를 가진 승헌이를 이처럼 당당하게 키운 그의 부모님이 자랑스럽고, 힘든 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전교회장에 입후보 한 승헌이와 그의 장점을 믿고 표를 던진 유권자
전통적으로 엄부자모(嚴父慈母)형 가정의 모습을 지켜 온 우리 나라 가정에서는 나이든 아버지의 설자리가 없다고 한다. 일이 바빠서 아이와 대화할 시간이 없는 우리 나라 아버지들이 나이가 들어서 막상 자식들과 친해지려면 참 힘들다고 한다. 주로 어머니와 대화를 해오던 습관 때문에 아버지와 대화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고 자라는 현실. 이래저래 아버지는 외롭다. 젊어서는 일에 내쫓겨 자식들과 어울리지 못한 아버지들이, 이제는 새롭게 자식들과 친해지는 데 어려움을 느껴서 소외감마저 느낀다는 것이다. 경희대 장해순 언론정보대학원 객원교수와 강태완 언론정보학부 교수가 지난 해 10월 전국 중고교생 103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부모와 개방적이고 긍정적인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아이일수록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느낀다고 한다. 특히 부모 중 한 명은 악역을 맡아야 하는데 도전적인 자녀로 키우고 싶으면 엄부자모(嚴父慈母)형 가정보다 자부엄모(慈父嚴母)형 가정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부모가 둘 다 개방적이기만 하면 권위가 서지 않고 둘 다 엄격하기만 하면 아이는 집에서 튕겨져 나갈 가능성이 많다. 부모 중 어느 한 쪽이 엄격해야 한다면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더
"얘들아, 참새는 누가 맡지?" "나라 언니, 내가 할게." "그래, 참새는 은혜가 하고. 그럼 강아지 똥은 누가 해?" "그건 진우가 하고 싶다고 했어." 우리 반 아이들이 중간 놀이 시간에 모여서 '강아지 똥'을 극본으로 꾸미느라 배역을 맡는 회의 중입니다. 추석에 우리 반 다섯 명에게 맡겨진 과제는 '강아지 똥'을 외워오는 것이었답니다. 물론 2학년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작년에 배운 것이니 더 잘 외웁니다. 아침 공부 시작과 함께 다섯 명 아이들이 종알종알 외우는 대사를 들으며 나는 한없이 행복해 집니다. 첫날은 두 명만 외워서 별 두개를 따갔는데 오늘은 나머지 세 명도 다 외워서 별 한개씩을 따갔습니다. "왜 오늘은 별이 한 개 뿐이어요?" "하루 늦게 외운 사람하고 약속한 날짜에 해온 사람하고 같으면 안 되지." "예, 선생님." 아이들이 다 외운 걸 보니 욕심이 생겼습니다. 동극을 해 보면 좋겠다고. 아이들도 대 찬성입니다. 책을 많이 읽은 나라는 대본을 쓰겠다며 즐거워 하고 아이들은 소품을 만든다며 나를 조릅니다. 그래서 오늘 즐거운 시간은 소품 만들기를 하였습니다. 까만 표지로 머리 띠를 만들고 등장 인물을 만들어 붙여서 찍찍이로 머리 칫수에
어제(22일)는 참 우울한 날이었다. 계발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다른 학교로 간 우리 학교 6학년 아이가 축구부 활동을 하다 팔목을 다치는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내가 맡은 문예부 수업을 마쳐갈 즈음 연락을 받고 병원을 찾아 동분서주했던 시간. 제발 많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소규모 학교 협동학습의 일환으로 금년에 처음 도입된 3개 학교 연합 계발 활동으로 다른 학교를 찾아가서 친구들을 만나 좋아하는 부서에 들어가 열심히 뛰던 하늘이였다. 또한 우리 분교에서 근무한 3년 이래로 처음 당한 사고라서 여간 힘든 하루였다. 다행히 손목 부상으로 한달 동안만 고생하면 나을 수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늘 이렇게 물가에 내놓은 것처럼 불안하게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 건강의 소중함과 걱정해 주는 사람들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하늘이는 잠시 나마 건강한 육체로 태어난 자신의 몸을 돌아보며 깊이 감사하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더불어 장애우들이 갖는 고통과 어려움을 스스로 체험해 보는 좋은 시간이 된다면 다친 경험도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몸으로 태어난 자신의 몸을 더욱 사랑하고 장애우들
오늘은 우리 반의 천사 소녀, 김은혜가 가장 밝은 얼굴로 학교에 왔습니다. 추석을 보내고 온 아이의 표정만 보아도 예쁜 엄마가 오신 것이 분명합니다. "은혜야, 외할머니 댁에 엄마 오셨니? "예, 우리 엄마 집에 오셨어요." "참 좋았겠네. 예쁜 머리띠도 사 주셨구나." "예, 선생님. 엄마랑 동생이랑 함께 잠 잤어요." 은혜는 송아지 눈만큼이나 큰 눈에 늘 그늘이 드리워져서 마음저리게 하는 아이입니다. 그런데 엄마가 다녀간 다음 날에는 생기가 돕니다. 아이들은 엄마 그늘로 산다는 걸 한 눈에 보여줍니다. 생글생글한 눈빛하며 밝고 커진 목소리에 분홍색 옷에 구두까지 신을 걸 보면 알 수 있으니까요. 가정 형편으로 엄마랑 같이 살지 못하고 동생과 함께 우리 분교에 다니는 아이입니다. 오늘은 은혜의 예쁜 엄마가 학교에 오셨습니다. 아이들이 은혜 엄마를 구경한다며 우르르 몰려 나갑니다. "우와 , 예쁘시다. 공주님 같다!" 아이들의 탄성을 들으며 은혜는 한층 더 신이 나서 엄마 품에 와락 안깁니다. 추석에 한 편만 해오라고 한 그림일기장에도 온통 엄마 얘기 뿐입니다. 엄마랑 잠을 자서 행복하다는 아이. 추석을 지내는 동안 읽기 책에 나오는 '강아지 똥'을 모두 외
월간 조선에 연재된 14인의 원로급 시인 이야기. 김광림, 김남조, 김종길, 김춘수, 박성룡, 신경림, 조병화 등 70, 80에 이르른 노시인들의 문학 세계와 삶을 인터뷰를 통해 실제적으로 접근한 책이다. 시인은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앙드레 브르통이 말했는데, 이는 흘러가는 일상과 자연에서 시인이야말로 비범한 것 혹은 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알려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선택은 물론 신(神)이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이 도움을 받아 언론인이자 시인인 작가 이유경(李裕憬)이 우리 나라의 원로 시인 14명을 직접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중심으로 연재한 글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손에 넣게 된 계기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일면식도 없는 경상도의 어느 독자에게서 선물로 받았다. 교육계에 종사하시다가 퇴직한 분이셨는데 지면 신문에서 내 이야기를 읽고 편지와 함께 보내주신 책이어서 감동이 특별한 책이었다. 나 역시 시를 좋아하지만 그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아직도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삶을 살고 있는, 시에 대한 짝사랑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야말로 '선택받아야 하는' 그 숙명적 택함을 납작 업드려 기다리며 구도의 길을
조선일보(2005년 9월 19일자)에 따르면, 부산의 교육 만족도가 16개 시 도 가운데 전국 1위라고 한다. 이는 한국교육개발원이 전국 학생 학부모 교사 3만 7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부산의 교육이 전국 1위의 평가를 받게 한 내용으로는 릴레이 영상 수업, 독서 인증제, 불우한 학생들을 도와주는 보충수업 시스템을 비롯해 병원에 장기 입원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병원 학급까지 운영하는 결과라고 보도하고 있다. 다른 시 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시책들을 추진하고 있음에 비추어서 리포터가 특히 관심을 갖는 부분은 '독서 인증제'이다. 서울 학생들이 학교 도서관에서 연평균 1.3권의 책을 빌리는 데 반해 부산 학생의 대출 도서 수는 9.1권이나 될 정도로 책 읽기 붐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바로 독서 인증제라고 한다. 부산에서는 학생들이 책을 읽고 나서 이터넷 사이트에 독후감을 올리면 그 책을 읽었다는 증명으로 쿠폰은 주고 있다고 한다. 독서가 중요하고 책이 소중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명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확실한 제도로 정착시키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모든 선생님들이 느끼는 애로 사항이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게 하
‘항상 저의 마음에 사랑과 즐거움을 안겨 주신 은사님께 감사드리며, 연락 자주 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합니다. 항상 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며 따뜻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렵니다. -제자 영철 올림-’ 1983년에 남도의 끝자락 고흥에서 6학년을 가르치던 때 만난 제자가 보낸 카드이다. 이젠 병역의무를 다 하고 대학까지 마친 후 한국통신에 취직해서 서울 생활을 하는 건실한 청년이 된 제자. 결혼식 주례까지 부탁받고 고흥까지 내려가서 주례를 서 준 후, 아이까지 보았으니 이젠 내가 제자의 아이에겐 할머니뻘이다. 그 아이와의 첫 만남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된다. 아이들과 처음 만나는 날, 서로를 소개하고 1년을 시작하는 소망을 이야기 한 후, 교실을 정리해야겠기에, “오늘, 선생님이랑 같이 교실 정리할 사람?” 이런 경우 선뜻 손을 들어 자원하지 못하는 게 시골 아이들이다. 마음이 있어도 수줍어서 망설일 뿐이다. “선생님, 제가 도와 드릴 게요.” “참 고맙구나. 이름이 뭐지?” “예, 김영철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하던 어린 영철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983년 그 해에 내가 가장 먼저 이름을 외운 아이. 영철이는 첫날의 기대처럼 매사에 적극적이고
산골에 찾아든 가을밤. 가을벌레들이 숨죽이며 겨우살이 준비를 하는지 조용해진 요즈음, 피아골의 분교엔 밤이 일찍 찾아온다. 창밖이 어두워서 사택으로 가려고 문을 잠그고 나니 달님이 보인다. 팔월 보름이 지났으나 아직은 살이 남아있는 달이 보기 좋다. 달님을 보니 집으로 가는 게 억울해서 다시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왔다. 달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교정을 빠져 나가기가 어려운데, 달님이 친구 해 줄 터이니 마음이 놓인다. 친구란 참 좋은 단어이다. 그것이 비록 말이 통하지 않은 달님이건 작은 고양이 한 마리이거나 말이다. 어쩌면 진정한 친구 사이에는 말조차 필요 없지만……멀리 있어도 느낌으로 통하고 언제 찾아도 다시 반가우며 요란하지 않으니 친구는 해님보다는 달님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 뜨겁지 않으니 싫증이 나지 않아 좋고 날마다 볼 수 없으니 잔잔한 그리움까지 채웠다가 비워야 하는 아쉬움까지 간직한 달님!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아끼는 사람들에게, 제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글쇠판을 두드린다. 그리움의 편지를 쓰라고 달님이 창밖에서 재촉한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많이 사랑하고 그리워 할 수 있는 시간을 뒤로 미루지 말라고, 누군가를 격려하라고
*좋은 사람이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날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가치 있게 쓰임 받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되기 위해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좋은 생각- 요즈음 우리 연곡분교장은 날마다 바뀌고 있다. 짙푸른 나무들과 계곡의 물소리에 화답하듯, 늘 새로운 생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있고 열심히 공부하는 착한 아이들의 키 크는 소리가 한창이다. 더욱이 교장 선생님과 구례교육청의 아낌없는 투자로 학교의 시설과 환경이 날로 좋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장님 순방 시에 건의를 올린 특기‧ 적성 교육활동 지원 사업이 본교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열매를 맺어 전교생이 바이올린을 배울 뿐만 아니라, 깨끗한 급식 실에서 유치원생부터 6학년에 이르기까지 전교생이 음식 남기지 않기 운동을 벌여 골고루 먹어 건강해지기, 환경 보호하기,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기를 하다보니 급식비 절감의 효과까지 얻고 있다. 아이들의 바람직한 식습관은 성격까지 바꾼다고 할 만큼 소중한 가치로 부각되고 있지 않은가? 거기다가 새로 오신 이재춘 주사님이 이른 아침부터 화단을 가꾸시고 학교 둘레에 꽃들을 심으시느라 구슬땀을 흘리신다. 그분이 일하시는 모습을 보
추석날 새벽, 나는 단잠 대신에 자판 앞에서 아들을 그리며 귀향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분단의 아픔으로 고향을 북에 둔 이산 가족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취업이 안 되어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젊은이들, 공부하는 학생들, 일자리를 잃은 가장들, 자유의 몸이 아닌 수감자들, 외국인 노동자들, 그리고 내 아들처럼 전방을 지키는 병사들.... 생각해 보니 가장 행복해야 할 명절인 추석이 오히려 외롭고 슬픈 사람들이 참 많음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하며 나도 시간 여행을 떠난다. 스무 살이던 처녀 시절. 나는 2년 동안 민족의 명절인 설날과 추석날을 부모님께 가지 않았다. 얼마나 독했는지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참 후회스럽다. 가난이 죄는 아니었지만 그 굴레를 벗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던 내게 명절에 귀향하는 일은 사치였으며 시간 낭비였고 몇 달간 일을 한 월급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멀리 객지에 보내놓고 명절이면 눈물을 훔치셨을 어버이의 찢어지는 가슴을 헤아리지 못한 불효막심한 행위가 이렇게 늦은 나이에 미련스럽게 생각나는 이유가 무언가? 이제 보니 내 자식이 집에 올 수 없는 상황이 되니 나도 그 어버이처럼 그리움으로 안쓰러움으로 그 자
1교시를 끝내고 우유를 가지러 가던 6학년 재성이가 급하게 나를 불렀습니다. "선생님, 새가 죽었는데 어떻게 하죠?" "그래? 안 됐구나. 어떻게 하면 좋겠니?" "글쎄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하지?" "예, 땅에 묻어요." "땅에 묻어주면 참 좋겠는데, 네 생각은 어떠니?" 그렇게 해서 재성이는 화단을 파고 새를 묻어주기로 했습니다. 날마다 학교의 교정에서 울던 새일 것입니다. 아마 가족인 새들과 함께 날다가 유리창에 부딪쳐서 죽은 것 같습니다. 죽은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새의 눈이 감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저학년 아이들이 보고 슬퍼할까봐 재성이와 둘이서 화단을 파고 묻어준 뒤 아이들이 밟지 않도록 떨어진 꽃무릇을 주워다가 하트 모양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꼬마들이 달려와서 죽어서라도 행복하라며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해 줍니다. 사람이든 한 마리 새이든지 그 생명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측은지심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죽은 새이니 함부로 하거나 그냥 버리는 것은 아이들의 감성을 상하게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매 순간 어떻게 하는 것이 교육적인 지를 늘 생각해야 하는 선생님의 자리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아이들은 누
아침부터 연곡분교의 주방장이신 홍맹례 여사님의 손길이 매우 바쁩니다. 전체 점심 식사를 혼자서 다 책임지면서도 선생님들이 원하는 특별 메뉴를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추석맞이 송편 빚기 체험학습'을 하는 날입니다. 시골이어도 생업에 바쁜 학부모님들이 집에서 송편을 빚는 집이 거의 없어서 송편을 빚어볼 기회를 갖지 못하니 학교에서라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송편은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 꽃을 피우며 덕담을 나누는, 참 아름다운 우리네 삶의 모습인데도 바쁘고 번거롭다는 이유로, 아니면 차례상에 놓을 송편만 떡집에서 사서 쓰는 풍조가 널리 퍼진 까닭입니다. 대화를 나눌수 있는 장이 되기도 하고 오랜 동안 만나지 못한 친척들끼리 둘러 앉아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는 풍경이니, 농경 사회의 풍속이지만 오히려 요즈음처럼 각박한 사회에서만은 한가위에 꼭 해야 할 음식이 아닌가 합니다. 쌀가루를 빻아서 익반죽(뜨거운 물로 반죽)을 하여 준비해 놓고 깨를 볶아 학년 별로 그릇에 담아 누구누가 제일 예쁜 송편을 빚나 내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방앗간에서 쌀을 곱게 해주지 않는 바람에 반죽이 잘 안 되어,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송편이 터진다며 선생님을 불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