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꽃 향기 봄 햇살에 바랜 지 오래다. 찔레꽃, 감꽃, 백화마삭줄꽃의 재스민 내음이 섞인 초여름 향기가 녹음으로 짙어지는 유월이다. 가는 봄이 아쉬운지 하늬바람은 산과 들의 짙은 녹음을 흩어 놓는다. 시간의 흐름은 빠르다. 일 년 열두 달을 사람의 평균 수명인 80살로 비교해 본다면 유월은 불혹에 가까운 계절이다. 유월은 고양이 손을 빌릴 정도의 농번기이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논밭은 마늘보다 보리를 많이 심었다. 농사철만 되면 들녘은 부산했다. 들에서 갈무리한 보릿단을 집 마당이나 타작마당에 내는 일은 순전히 인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집 저집 원동기와 탈곡기 도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철에 어른들은 바쁘지만, 아이들은 일손도 도우며 자연을 벗 삼아 놀기도 했다. 며칠 전 산책길이었다. 지난 4월 말, 연한 연두색 새 이파리로 가슴을 아리게 한 감나무의 잎은 짙은 녹색으로 두꺼워지며 잎사귀 사이에 아기 감을 달고 있다. 혹시나 감꽃이 떨어져 있으려나 주변을 둘러보니 갈색으로 변한 꽃밖에 없다. 감꽃이 떨어지면 봄은 가고 초여름이 시작된다. 떨어진 감꽃을 보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수꽃이 먼저 피어서 암꽃을 기다리는 기본 매너에, 암꽃이 열
일신우일신이라 했다. 올해로 교직에 몸담은 지 36년 만년 교사다. 청운의 칼칼한 꿈을 품고 시작한 교직 생활도 이순에 접어들면서 느긋해지고 순해졌다. 3월이면 지역신문에서는 동기나 후배들의 교감, 교장 승진 축하 광고가 대문짝만하게 실린다. 의기소침할 수도 있지만 언제나 하루를 새롭게 또 아이들 만날 생각으로 가슴은 뜨겁기만 하다. 매일 지각하는 아이 지난 3월, 시업식을 앞두고 새 학년을 준비하며 새로 맞이할 아이들 명단을 보며 새로움과 첫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였다. 그리고 나 자신도 새 학년과 새롭게 시작하니 새로움으로 거듭나야지 하며 구두와 간절기 코트도 장만하였다. 또한 나이 많은 선생님이란 느낌이 들지 않으려고 이발도 한다. ‘외모는 그래도 마음은 언제나 열정이 넘치는데…’ 이발소 대형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스스로 달랜다. 등교일이다. 아이들 오기 1시간 전에 출근하여 온풍기를 돌려 교실을 데우고, 먼지나 앉았을까 싶어 물수건으로 24개의 의자와 책상을 쓰다듬듯이 닦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두른 거리는 소리에 시계를 보니 아이들이 올 시간이었다. 출입문 앞에 서서 오는 아이 하나하나 이름을 물어보고 손을 쓰다듬어 준다. 이제 모
남해의 봄은 어떤 빛일까? 설천면 벚꽃길 유채와 노량바다, 서면 예계마을 벚꽃 터널과 남색 바다, 상주 고개를 넘어가는 붉은 동백꽃과 앵강만 윤슬이 남해 봄빛이지만 일부분이다. 남해는 사계절 내내 아름답다. 언제나 두근거림 그 자체이다. 제주, 거제, 강화도를 둘러보았지만 아늑한 품과 부드러운 산세는 남해에 비할 수 없다. 4월에 접어들 때 아이들과 남면 다랭이마을을 찾았다. 홍현마을을 지나 한 고개 돌면 소치도를 품은 에메랄드빛 하늘이 수평선에 내려앉아 품을 벌린다. 아이들은 바다라고 외치며 윤슬이 예쁘다고 한다. 윤슬 참 어려운 우리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일상에서 벗어나 다랭이마을 지겟길 정자에서 간식을 먹으며, 파도 소리에 몽환에 젖어든다. 680여 개의 논다랭이와 삿갓배미 이야기, 108층의 논을 300여 년에 걸쳐 지게와 손으로 일구었던 이 마을 사람들의 근면함과 성실함, 어려움을 이기려는 생활 모습을, 눈을 반짝이며 듣는 모습이 너무 대견했다. 그리고 이 체험을 엮어서 다랭이논에 스민 남해인의 정신을 사투리로 나타내는 수업을 하였다. “쎄가 빠지고 지게를 지고 까꾸마글 오르고 하면 허리가 뿌라질 것 같심니더.” 잊혀져 가는 남해 사투리를
2024년을 보내고 2025년 을사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이어져 온 혼란한 정치와 어려워지는 민생, 하향곡선을 긋는 국가 신용도는 나라의 현실이 내우외환에 처했음을 알 수 있다. 너나없이 모이면 작금의 현실을 걱정하는 말과 혼란한 정국 상황이 빨리 해결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01년부터 교수신문에서 공표하는 그 해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를 살펴보며 메시지를 생각해 본다. 2024년 12월 3일 교수신문은 전국 대학교수 108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도량발호(跳梁跋扈)’가 41.4%의 지지를 얻어 2024년의 사자성어로 꼽혔다고 했다. 도량발호는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는 뜻으로 단일 사자성어가 아닌 ‘도량(거리낌 없이 함부로 날뛰어 다님)’과 ‘발호(권력이나 세력을 제멋대로 부리며 함부로 날뜀)’ 등으로 각각 달리 활용하던 고어가 붙으며 만들어졌다. 도량발호를 추천한 정태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권력자가 지켜야 할 규범의 본질은 위임받은 권력을 선용해서 국민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봉사하는 것”이라며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와는 판이하다. 권력자들은 자신이 곧 권력의 원천인 것처럼 행동한
타다가 고개 숙인 여름이 저만치 가고 있다. 쭉 뻗은 철길은 언제나 그리움을 부른다. 끝없는 평행의 소실점을 바라보면 유년의 로망이 떠오른다. 그 로망을 반추라도 하는 듯 빠름의 일상을 잠깐 물리고 플랫폼에 선다. 지열과 복사열을 더한 플랫폼의 열기는 비릿한 쇠 냄새까지 더해져 송골송골 땀방울로 맺힌다. 가끔 아이를 보낼 때 배웅한 그 자리에 오늘은 주인공이 되어 몸을 싣는다. 열차는 덜커덩거림도 없이 레일 위를 미끄러지며 고속으로 달린다. 열차 여행의 묘미는 완행열차처럼 쉼과 약간의 덜커덩거림이 있어야 하는데 빠른 속도는 로망의 아쉬움을 남긴다. 예년보다 빠른 추석이 생활의 간이역을 지나며 기다림과 기쁨, 슬픔과 회안이 녹아있는 어머니 역으로 다가오고 있다. 기억 속 제일 따듯한 곳은 어머니가 계신 고향 집이다. 아마 어머니의 마음이 모자이크처럼 배어있어서일 것이다. 느림이 일상화됐던 그 시절, 추석은 왜 그렇게 더디게 오는지 기다림은 설렘을 품은 아름다움이었다. 추석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객지에서 고향 집 찾는 일이다. 대처에서 버스, 열차, 승용차를 이용하여 인파에 휘말리고 기다리면서도 반갑고 즐거운 귀성길을 밟는다. 평소보다 더 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