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발을 하고 처음 머리 염색을 했다 눈썹에도 흰 털이 박혀 눈썹까지 했다 염색을 하고 거울을 보니 새까만 머리가 낯설다 이삼일 지나면 금방 또 익숙해지겠지 돋보기를 쓴 건 벌써 이십여 년 전 나는 이제 돋보기를 끼고 겨우 염색을 한번 해보았다 앞으론 지팡이도 짚어야 하고 보청기를 맞추러 허둥지둥 헤매기도 해야 하고 임플란트를 하러 뻔질나게 치과에도 드나들어야 한다 세상은 지금 폭설과 연일 강추위다 이 추위를 견디며 나는 봄을 기다리고 있다 내 젊은 날은 연일 폭설과 강추위였다 따뜻한 봄날을 기다리다 흘러간 세월이었다 이제 내게도 노년의 세월은 목전에 왔다 무엇을 하며 긴 하오의 날들을 보내야 할지 어머니의 좋은 아들로 여생을 살아야 할 텐데 어려서 하이네와 바이런을 읽으며 내게 했던 약속도 죽기 전에 꼭 지켜야 할 텐데 시작노트 이제 내 나이도 60대 후반에 접어들었다. 50대 이후 부터였던가. 누구에게 나이를 얼른 공개하기가 망설여지더니 급기야 70고개를 저만치 내다보고 있다. 나이를 자꾸 감추기만 하면 어쩔 것인가. 정직하게 나이를 공개하고 그 나이에 걸맞게 건강하고 보람있게 나이를 가꾸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고령사회, 고령화 사회라는 말에 자
엄청난 충격을 주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킨 최근에 발생한 사건들에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이웃집에 찾아가 수면제를 탄 음료를 먹여 잠들게 하고 불을 질러 일가족을 살해한 양양 3모녀 살인사건, 재혼한 아내의 전남편과 딸을 살해하고 자신도 피해자라며 소리를 지르는 인면수심의 안산 인질극 사건, 어린이를 사랑으로 돌아보아할 어린이집 교사가 4살 어린이를 무지막지하게 폭행하는 장면은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건들입니다. 범죄가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겠지요. 인류가 탄생한 이래 끊임없이 범죄는 발생하고 같은 유형의 범죄는 반복되어 왔을 것입니다. 시대의 특성에 따라 범죄도 점점 진화하여 마침내 뉴욕 쌍둥이 빌딩을 비행기로 폭파하고 한 단체의 인터넷 사이트를 해킹하여 자료를 탈취하거나 갖은 수법으로 통장의 돈을 빼가는 보이스피싱 같은 전화사기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대한 항공 부사장의 갑질논란을 필두로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한 횡포가 또 사회를 어수선하게 만들기도 했지요.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악은 존재하고 범죄는 발생할 것입니다. 세상이 국제화 되면서 범죄가 한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가 연루되는 국제적 성격을 띄어가고 있습니
사랑과 신뢰의 구도 소설 ‘불멸의 꽃’ 1. 직지소설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은 시인이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을 쓴 작가는 한라일보 신춘문예에 2006년 ‘개성집’이 당선되어 등단한 김명희 시인이다. 나는 그의 시집 ‘빈곳’을 읽고 매료되어 72일간의 인도여행에 그의 시집을 가지고 가 틈틈이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녀의 시는 체험을 바탕으로 한 섬세하고 독특한 묘사로 강한 공감을 자아낸다. 그의 시의 배경은 결코 높거나 화려하지 않다. 가장 낮고 후미진 곳의 진실과 아름다움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다양하게 펼0쳐진다. 그는 나에게 좋은 시인의 이미지를 각인시켜 준 시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동화작가로 다시 부각되었다. 산림청 주체 동화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것이다. 그 동화 역시 산골마을의 정경을 다정다감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한동안 소식을 모르고 지내다가 지난해 말 제 2회 직지소설문학상 대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다. 참 대단한 열정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의 소설이 시중 서점에 깔리자마자 구입해 읽었다. 원래 정독을 하는 나의 독서 습관으로 그의 소설을 나는 토씨 하나, 맞춤법, 띄어쓰기 까지 살펴가며 닷새에 걸쳐 읽었다. 그 과정에서 몇 군데의 맞
추모시 누가 너희들을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의 명복을 빌며 최일화 누가 너희들을 보냈니 아무도 너희들을 보내지 않았는데 누가 무엇이 너희들을 데리고 간 거니 하늘이 너희들을 데려갈 리 없는데 바다가 너희들을 멀리 데려갈 까닭이 없는데 저 사월의 꽃바람이 어찌 너희들을 데려 갔겠니 희망의 돛을 올려야 할 너희들의 바다가 어찌 너희들을 데리고 낯선 곳으로 갈 수 있겠니 무엇이 부모의 품에서 너희들을 빼앗아 간 것이니 무엇이 너희들의 등굣길을 막아서고 너희들의 교실에서 너희들을 내친 것이냐 꿈이 자라던 교정에 평화롭던 도시 한 가운데에 대한민국의 가슴 한 복판에 누가 휑한 구멍을 낸 것이냐 누가 국민들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낸 것이냐 누가 온 세상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 것이냐 날마다 사월은 무르익어 너희들이 달려야할 오월은 목전에 다가오는데 누가 너희들의 꿈을 너희들의 야망을 무럭무럭 자라나야할 너희들의 미래를 빼앗아 간 거니 우리나라가 이렇게 볼품없는 나라라니 피땀 흘려 수십 년 가꾸어놓은 나라가 이 모양이라니 모두 다른 일에 도취해 사방에서 무너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구나 여기저기 구멍 뚫리는 위태로운 상황에 대처하지 못했구나 너희들은 이 땅을 훌쩍
나는 오랫동안 인도를 여행하고 싶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나라,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나라, 수많은 신들이 삶의 현장에서 활동하는 나라, 동물과 인간이 한 공간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에 가서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기를 열망해왔다. 그 첫 번째 기회가 왔다.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한 달 동안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때가 2005년 1월이었다. 나는 인도대사관에 찾아가서 직접 비자를 발급받고 비행기 표를 사가지고서는 배낭하나 걸쳐 메고 무작정 콜카타(캘커타는 영국식민지 시대의 이름)로 향했다. 첫 도착지로 캘커타를 정한 것은 그곳에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는 ‘사랑의 선교회 ’ 본부가 있기 때문이다. 가는대로 바로 그곳에 가 ‘임종의 집’에서 5일 정도 봉사활동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유는 그곳이 바로 동양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가 출생하여 성장한 곳이기 때문이다. 일정에 따라 나는 콜카타에 여장을 풀고 닷새 동안의 봉사활동을 하고 타고르의 옛 집을 방문하였다. 이후 나는 아그라-사르나트-카주라호-바라나시-뉴델리를 한 달 동안 관광하였다. 그때 콜카타에 머물면서 나는 기차를 타고 200여km
지난 12월 13일 제 25회 인천문학상을 받았다. 1998년 내 다섯 번째 시집을 심사위원회에 응모했다가 고배를 마신 후 두 번을 더 실패를 한 후 획득한 3전4기의 쾌거(?)였다. 인천문학상은 대외적으로 권위를 알아주는 큰 상은 아니다. 하지만 인천문인협회 170여 명의 회원들이 출간한 책 중에서 1명을 선정하여 상패와 소정의 상금과 함께 주는 상이라 나를 비롯하여 책을 출판한 회원들은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이 수상하는 꿈을 가져보기도 했을 것이다. 책을 출간하지 않은 회원들도 11월이 되어 문학상 응모 작품집을 제출하라는 공고가 나가면 그 해의 수상자가 누가 될지 몹시 궁금해지는 것이다. 소설가가 될까 시인이 될까, 아니면 수필가? 아동문학가? 점쳐보며 지난해는 시인이 탔으니 이번엔 소설가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혼자 이리저리 상상의 날개를 펴며 수상자를 점쳐보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 상이 인천 유일의 문학상이기 때문이다. 인천시 문화상과 각 구청에서 시행하는 구민문화상이 있으나 관에서 수여하는 각종 상엔 상금이 없다. 예전엔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없어졌다. 그리고 예총에서 시상하는 예술상, 공로상이 있지만 상금이 없는 명목상의 상이거나 상금이 아주
지난 주 뜻밖에 문학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20여 년 전에 한번 인천문인협회 행사에서 문학 강연을 해 본 적은 있지만, 학생들을 상대로 문학에 관한 강연을 한 적이 없기에 망설이면서 나 대신 다른 좋은 시인을 소개해 주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원고료를 많이 못 드려 죄송하다며 거듭 부탁하는 분에게 자꾸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수락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어떻게 무슨 말로 시간을 채워야 할지 몰라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겨우 생각해 낸 것이 문학 창작 강의 같은 형식은 안 된다, 문학의 효용이라든지 문학의 본질 같은 것을 얘기하면 아이들의 관심을 끌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다른 시인들을 벤치마킹하기로 하고 아주 사소한 일상생활이나 시가 태어난 과정을 자연스럽게 낮은 톤으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나는 강연의 제목을 '고향과 어머니에 관한 시 몇 편'으로 정하고 부제로 '우리는 왜 시를 쓰는가?'라고 달아 원고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 칼럼은 그때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 중에 고향 이야기는 빼고 어머니에 관한 부분만 발췌하여 다시 칼럼 형식으로 손을 본 것이다. 고향에 관한 부분은 다음 기회에 소개할 수 있기를 기대하
1. 인천공항 출발 출발일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러시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미지의 것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고 과연 마음속으로 상상해보던 러시아의 실제 모습은 어떨까 궁금증이 더욱 증폭되었다. 러시아 하면 구소련이 먼저 떠오른다. 크레믈린, 붉은광장, 레닌과 스탈린, 후르시초프, 동토, 철의 장막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시베리아횡단철도, 자작나무가 떠올랐다. 이런 러시아에 대한 선입견 중에도 차이코프스키, 톨스토이, 토스토에프스키, 푸시긴 같은 예술가들은 공산주의 이미지와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9월 9일 출발하는 여행을 준비하면서 그곳의 날씨는 어떨까. 우리나라의 10월 날씨일까, 11월 날씨쯤 될까 궁금했지마는 인터넷 정보만으로는 얼른 파악이 되지 않았다. 출발 전 여행사가 전해준 정보에 따라 11월 날씨를 예상하고 옷을 준비했다. 물론 더 추운 날이 있고 더 따뜻한 날도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에 맞춰 복장을 준비했다. 호텔엔 모든 편의 시설, 이를테면 비누, 화장지, 수건, 샴푸 혹은 음료수는 잘 구비되어 있는지 궁금했으나 어느 곳에서도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음료수가 없으니 미리 사가지고 들어가야 한다고도 하고
봄이 지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머지않아 엄청남 초록이 세상을 점령할 것이다. 봄이 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던 사람들이 세상을 점령해버린 초록을 보고는 기가 질리고 말 것이다. 지금 들판으로 나가 보라. 양지쪽엔 이미 냉이도 질경이도 씀바귀도, 그리고 클로버도 굳은 땅 마른 풀 섶을 뚫고 꽃샘추위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도시에 사는 분들은 길 가 개나리나무 행렬을 눈여겨보거나 일렬로 늘어선 쥐똥나무 검은 가지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아라.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일제히 돌격하기 위해서 지금 태양의 돌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한 순간 한눈이라도 팔라치면 푸른 봄은 순식간에 정원을 점령하고 가로수 길을 점령하고 눈을 들면 먼 산 전체가 이미 초록의 군단에 점령당하고 말 것이다. 봄은 그렇게 이적하여 온다. 꽃샘추위 속에 숨어서, 검은 나무껍질 속에 숨어서, 응달에 남아있는 어름 덩어리 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산과 들, 호수와 바다, 도시와 농촌을 삽시간에 지배한다. 한눈팔거나 방심하면 안 된다. 봄이 오면 시작하려던 계획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봄에 혼비백산, 갈피를 못 잡는다. 조심해야 한다. 손꼽아 기다리던 봄은 그렇게 들이닥친다. 노처
추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나간 날들은 생각할수록 아름답다. 우리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 시절을 몸서리칠 만큼 그리워할 때가 있다. 그 아름다운 추억 속엔 항상 가난했던 우리들의 초상이 있다. 춥고 배고팠던 기억이 있다. 그 시절은 호의호식하던 시절이 아니다. 너나없이 가난하고 헐벗고 쪼들렸던 시절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명절 때만 고깃국을 먹었고 달걀 하나 찌면 할아버지 진지 상에만 올려놓던 시절이었다. 전쟁이 훑고 간 헐벗은 강산, 동화책 하나 읽을 수 없었고 라디오도 없었던 몽매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그 시절은 아름다웠다. 날고구마 깎아먹는 것이 즐거웠고 밤톨 주으러 산에 올라가는 일이 즐거웠다. 아궁이에 감자 구워먹는 일이 즐거웠고 감자꽃 따 모으던 일이 즐거웠다. 소구치기 하고 소구 따서 모으는 일이 재미있었고 딱지치기 하여 딱지 모으는 일이 신바람 났다. 새집 찾으러 산으로 들로 쏘다니는 일이 낙원을 뛰어다니는 것과 같고 꽁꽁 얼어붙은 논배미에서 썰매를 타던 일이 스케이트장에서 노는 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빙판으로 변한 언덕에서 수수깡을 타고 미끄러져 내리던 일마저 끼니때를 잊을 만큼 재미있었다. 한결같이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가난이
늦가을 오후의 햇살 속에 조정만 묘를 찾아나섰다. 도림동에서 논현동으로 갈 때 항상 보던 묘지 표지판을 떠올리며 차를 몰고 있는데 저만치 묘지를 알리는 안내판이 보였다. 안내 표시를 따라 올라가 봉분과 묘지석 사진을 찍었다. 조정만(1658~1739) 조선조 숙종때 벼슬에 오른 유학자다. 봉분과 묘지석에 는가을 오후의 햇살이 비치고 있다. 이 묘는 인천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오봉산 아랫자락에 위치한 조정만 묘역은 3기의 묘로 조성되어 있다. 제일 위에 위치한 묘가 조정만 묘고 아래로 일직선으로 2기의 묘가 있다. 크기는 모두 같으나 아래의 두 묘엔 아무런 글자가 새겨지지않은 묘지석이 놓여 있다. 이 길을 따라 50m정도 올라가면 묘역이 나온다. 도림 주공단지 차도 옆에 안내판이 걸려 있다.
11월 30일 오전 10시쯤 운연동 이여발 묘를 찾아나섰다. 이여발(1621~1683)은 조선 숙종때 무관이다. 이 묘는 인천시 기념물 제 50호로 지정되었다. 초겨울 오전 햇살 속에 금잔디 봉분이 햇빛에 빛나고 있다. 숙종 9년 6월에 사망했다. 인천시 서구 신현동 문종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703년 현위치에 이장되었다. 옆에서 본 묘지, 석물들이 보인다. 묘비와 봉분을 조금 크게 촬영했다. 묘비 앞 20m지점에 신도비가 보인다. 앞뒤로 글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강아지들 추측이 묘지인데, 세 마리 개중에 가운 데 놈이 쫒아오는 바람에 긴장했다. 도망가지 않고 똑자로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뒷걸음질로 위기를 모면했다.
시 지정 기념물 제 3호인 김재로 묘는 남동구 운연동 소래산 남쪽자락 중부능선에 있다. 김재로는 청풍김씨로 조선조 영의정을 지냈다. 산 중턱을 향해 올라가다가 물웅덩이를 만났다. 물웅덩이는 야생동물과 야생조류의 쉼터이고 물웅덩이 옆에 약수터도 있다. 묘지가 가까웠다는 것을 알리는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드디어 묘지에 도착, 묘지 안내판이 보인다. 남서방향으로 자리잡은 묘지의 전경 묘지 정중앙에 장명등이 보인다 영의정 김재로와 부인 청송심씨의 묘임을 알리는 묘비 담장과 망주석이 보인다. 다른 묘지와 달리 담장이 쳐져있다. 묘지를 다른 각도에서 크게 촬영했다. 한 무리의 등산객이 올라오더니 제일 나이 많은 노인이 할아버지에게 인사하자 하면서 두 번 절을 올렸다. 아마 청풍 김씨 후손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한국 최초의 이승훈 베드로 묘를 찾아나셨다.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반주골에 묘지가 있다. 장수동 방향에서 오다가 대공원 가는 고가도로 밑을 지나자마자 우회전하여 들어가 차를 세우고 만수 수도사업소 철책을 따라 걸었다. 안내판이 보인다. 가파른 길엔 나무 계단을 만들어놓아 오르기 편했다. 십자가의 14처를 알리는 기도문이 보인다. 다시 안내 표지판이 보이고... 제 1처 사형 선고 받으신 예수님... 예전엔 없었던 수도사업소 물이 보인다. 제 14처 돌아가신 예수님이 성모님의 품에 안겨 있다. 이승훈의 3남 순교자 이신규의 묘 이신규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이승훈의 장남 이택규의 묘가 이신규의 묘 옆에 있다. 두 아들의 묘 바로 위쪽에 이승훈 베드로의 묘, 유해 일부는 1981년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 천진암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한국 천주교 선각자 이승훈의 묘라는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승훈의 행적을 기록한 큰 비석이 세워져 있다. 내려오면서 다시 바라보니 이승훈과 두 아들의 묘역에 늦가을 햇살이 비치고 있다. 이승훈의 묘 바로 옆에 수도사업소 배수지가 만들어졌다. 저 잔디밭 아래엔 수돗물 저장소가 있다. 많은 노인들이 이곳에서 간단한 공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