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열차역 플랫폼의 바람은 너무 차다. 햇빛과 달빛, 기다림과 이별의 사연이 켜켜이 쌓여 달려온 바람은 레일 위를 차갑게 안겨 오고 빠져나간다. 둘째 아이가 도회에서 유학하다 보니 마땅한 버스 편이 없어 집을 찾을 때면 인근 도시의 열차역을 이용한다. 올 때 승용차로 데려오고 갈 때 바래다준다. 종종 있는 이 일이 귀찮을 것 같지만 아이를 만난다는 기쁨에 오히려 반가움과 아쉬움이 넘쳐난다. 플랫폼에서 열차 도착을 기다리는 몇 분의 시간은 길게 느껴진다. 드디어 열차가 도착하니 노란 선 안쪽에서 기다리라는 안내 방송이 울리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고 헤어질 때 승차를 알리는 방송에 따라 아이는 ‘안녕히 계세요.’ 메아리만 남긴다. 휑하니 멀어져 사라지는 열차의 후미등을 바라보면 가슴이 멍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만날 텐데 무슨 걱정이냐며 가슴을 추스른다. 부모에게 자식은 성장해도 언제나 보살핌의 대상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표현처럼 모든 일에 힘과 보탬이 되어 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누가 그랬다. 자식은 바람(風)이라고.내 몸 빌어 이 세상에 나온 한 줄기 꽃바람이라고. 부모는 자식이라는 귀한 알맹이 하나 이 세상에 내보낸 바로 그 순
2023-01-16 13:37나는 퇴직 전 여러 해 동안1학년 담임을 했다. 순수하고 호기심이 많은 1학년 아이들은 '젊어지는 샘물'을 마시게 하는 순간들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가장 힘들고 마음을 졸였던일은 안전사고 예방이었다. 무엇보다 오전 내내 화장실을 거의 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특히 3월이 제일 힘들었다. 한 순간도 자리를 비울 수 없을 만큼 1학년 입학생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었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더 문제였다. 학기 초에는 직원협의회가 잦았는데 그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직원회의로 1분만 자리를 비워도 어느 사이 피아노 위로 올라가 뛰는 아이, 친구와 싸우는 아이, 복도를 달리다 다치는 아이가 발생하는 게 1학년 아이들의 특징이었으니,학과 공부는 그 다음이었다. 내 반 아이가 다치지 않는 게 최우선이었다. 아이들끼리 놓아두는 일은 늘 위험천만한 일이었다.학생 수가 15명이 넘으면 더욱 위험했다. 20명이 넘으면 초비상이 걸릴 정도로 예민했다. 그러니 20명을 데리고 운동장에 나가서 즐거운 생활을 공부하는 날은 목이 쉬곤 했다. 병아리들처럼 금방 뿔뿔이 흩어져서 뛰고 숨어버리는 3월에는 지쳐서 혼절하여 응급실까지 간 적도 있었다. 집에서는 한 아…
2023-01-12 19:29볼까 말까 망설였다. 토요일만 되었어도 그러지 않았을 텐데 하필 일요일이다. 게다가 새벽에. 한 주일의 첫날부터 피곤이 쌓이면 일주일 내내 회복할 길이 없다. 카타르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축구 경기를 보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카페를 마감하고 밤 늦게 집에 온 큰 딸과 남편, 셋이서 텔레비전 앞에 둘러앉았다. 전년도 우승팀인 프랑스와남미 강호 아르헨티나가 결승에서 맞붙는다. 프랑스는 이제 스물셋의 음바페가 최전방 공격수다. 아르헨티나에는 마라도나를 잇는 걸출한 영웅 메시가 있다. 메시는 매년 세계에서 한 해 최고 활약을 펼친 축구 선수에서 수여하는 상인 발롱도르 7회 수상, 유럽 챔피언스 리그 4회, 라리가 10회 우승 등 이 시대 최고의 축구 선수이다. 그는 22명이 뛰는 축구장에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키가 170cm가 채 안 된다. 그보다 20cm 이상 큰 선수들이 포진한 경기장에서 가장 작다. 대학생과 초등학생이 한 운동장에서 뛰는 것처럼 보인다. 유럽 선수들 틈바구니에서 땅꼬마로 보이는 그가 살아남은 것만도 놀라운데, 한동안은 깨지기 어려운 실적까지 쌓았으니 메시 찬가는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질 듯하다. 그는 이번 월드컵에서도 역대 최초
2023-01-12 13:591월 5일종업식 겸 졸업식이다. 비가 오려는지 미세먼지인지 아침부터 하늘이 부옇다. 몇 년 전부터 2월 등교일을 최소화하더니 이제는 1월에 모든 교육과정을 마친 학교가 많아졌다. 작년에는 코로나 때문에 교실에서 담임 선생님과 간단하게 했는데 그래도 올해는 학부모님도 초대하고 후배 배웅받으며 강당에서 식을 치르게 돼 다행이다. 아침부터 아이들이 부산하다. 재학생은 방학이라 들뜨고, 졸업생은 학교를 떠나니 시원섭섭할 것이다. 교실 앞을 지나는 학생에게 “졸업인데 마음이 어때?” 물으니 “초등학교 더 다니고 싶어요” “많이 서운해요”라고 답한다. 그러기도 할 것이다. 담임 선생님들이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데 그걸 모르면 안 되지. 며칠 전 1반 친구들이 독서 수업을 했던 내게도 롤링 페이퍼를 써 가져왔다. 수업 시간 까불고 내 속을 뒤집어 놓은 아이도 본인이 그런 줄은 아는 모양이다. 속은 다 있었다. 아이들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까짓 문장 하나가 뭐라고 가슴 뭉클하며 눈시울까지 적시는지 선생이 아니면 느껴보지 못할 일이다. 아홉 시가 가까워 강당으로 갔다. 정면에 걸린 축하 플래카드, 화환, 꽃다발 등 비로소 졸업식장답다. 5학년 학생…
2023-01-09 13:38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오직 연필과 샤프심 닳는 소리와 간간이 종이 뒤집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아이 셋 챙기느라 출근 시간이 늦어 날마다 불안했는데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1995년 6학년을 담임했다. 순천에 처음으로 분양한 아파트에 당첨되어 이사했고, 집 가까운 학교로 옮겼다. 아홉 개 반으로 잘사는 사람이 많았고 학부모 교육열 또한 높았다. 매달 월말고사를 봤고, 학생은 물론 선생님과 학부모도 시험 결과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엄마들도 시험공부에 열을 올렸고 문제 한두 개 맞고 틀리고에 민감했다. 심지어 집으로 전화해 자기 아이가 몇 등인지 물어보기도 했다. 알려 주지 않아도 몇 반, 누가, 몇 점으로 전교 일등을 했는지 벌써 소문이 났다. 점수가 낮은 반은 교장이 따로 담임을 불러 꾸중하기도 했다. 공부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려면 할 수 없이 애들을 들들 볶는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 문제였다. 6학년 담임은 중학교 반별 배치 고사 성적까지 신경 써야 했다. 시험 날짜와 범위가 정해지면 그때부터는 매일 복사물을 풀고, 외우기를 반복했다. 아이들도 지겨웠겠지만 선생님도 입에 침이 마른다. 시험이 끝나면 아홉 명 선생님이 교실에 모여 한 과목씩 채점
2023-01-03 14:14계묘년 새해 아침이다. 이른 아침, 아내는 일월호수에서 해맞이를 했다. 새해 힘찬 첫출발이다. 우리 부부는 어제 칠보산을 찾았다. 산행을 하면서 일년을 마무리짓고 새해 맞이 마음가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칠보산의 전설유형적인 일곱가지 보물(산삼 황금수탉 맷돌 잣나무 등) 대신 무형적인 보물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 부부가 생각한 것은 건강, 인내, 배려, 사랑, 순리, 조화, 치유다. 우리가 지향하는삶의 덕목이다. 아침 식사와집안 정리를 마치고11시 광교산을 향해 출발이다. 교통수단은 시내버스.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한 것은 환경보전에 의미가 두었다. 또 산행과 하산 코스 선택에 자유로움이 있다. 주차장으로 다시 올 필요가 없다.경기대 입구에서반딧불이 화장실 옆길로 오른다. 이 코스는 광교산 능선으로 곧바로 이어지는데 등산객들의 애용 코스다. 능선 따라 가다보면 형제봉으로 이어진다. 이 코스는 광교산을 처음 찾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다. 교통편 접근이 좋기 때문이다. 또 길이 넓고안전하다. 초행길 등산객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필자도 젊었던 시절 자주 이용한 코스다. 다만 너무 자주 이용했기에 요즘엔 뜸했던 것이다. 사실 광교산을 오르는 방법…
2023-01-03 14:05“너는 관리자들이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다.” 불과 십 년여 전에 소속 학교장으로부터 면전에서 직접 들은 불만 섞인 코멘트였다. 이 말의 진심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는 필자에게 쇼킹한 말이었다. 원래 음주가무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에 함께 어울림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이 대인관계의 약점일 수 있다. 특히 우리 조직문화에 그러한 시기가 분명히 존재했기에 내심 짐작은 했다. 하지만 마치 선천적인 증상처럼 교직 초기 단계부터 알코올을 몸이 이겨내지 못하고 또 학생 시절 내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에 깨어 공부하던 생활 방식은 야간에 친교의 시간을 갖지 못하기에 두고두고 타인과의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필자에겐 교직의 입문부터 지론(持論)이 있다. 이는 '배우면서 가르친다'는 것을 삶의 모토(motto)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성격적으로도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사교를 중시하기보다는 조용히 홀로 침잠(沈潛)하여 책을 읽고 사색을 즐기는 내향적인 기질이 압도적이다. 그러니 젊은 날 또래들과 어울려 당구를 치며 우정을 쌓는 시간을 비롯해 소위 잡기(雜技)를 즐기는 놀이문화에는 젬병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술을 즐기는 모임에서는 고통스런 시간을
2023-01-02 15:07교육삼락회(이하 삼락회)라는 단체가 있다.퇴직교원들의 모임인데 사단법인 전국단위 조직이다.중앙에 한국교육삼락회가 있고 시도삼락회가 있고 지역삼락회가 있다.여기서 삼락이란 배우는 즐거움,가르치는 즐거움,봉사하는 즐거움이다.캐치프레이즈에 추구하는 목표와 활동내용이 드러나 있다. 얼마 전 도단위 삼락회장 선거가 있었다.두 명의 후보가 나와 경선을 했다.당선 윤곽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한 기세에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필자는 도 임원인데 여기서 선관위원을 맡아 경선과정과 결과를 시종일관 지켜볼 수 있었다.대신 필자에게는 선거의 중립과 공정성 유지를 위해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았다. 삼락회장을 투표로 뽑는다?삼락회 사정을 아는 사람에게는 기이한 일이다.중앙회장은 경선사례를 몇 차례 보았다.그러나 시도회장과 지역회장 투표는 못 보았다.대개 유능한 후임자를 지명하든가 아니면 추대형식으로 하든가 그래도 없으면 억지로 떠넘기는 것이 관례였다. 회장 자리를 자진해 맡으려는 사람이 드물고 자리를 탐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권한이나 이득이 있는 자리도 아니고 회원을 위해 봉사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그리하여 지역회장 후임을 못 구해 수 년 째 맡는 경우도 흔하다. 필자
2023-01-02 15:02아이를 가르치고 차를 마시고 있는데 교감 선생님이 들어왔다. 유치원 선생님이 독감으로 결근이라며 보결 수업을 해야 한단다. 본인이 1, 2교시 수업을 할 테니 나에겐 3, 4교시를 맡으란다. 유일하게 병설 유치원 수업권이 있는 방과 후 담당 교사와 연락이 안 되어서 관리자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말을 덧붙인다. 급한 공문을 처리하고 11시가 조금 못 되어 유치원에 갔다. 아이들이 반긴다. 3년째 근무하며, 비슷한 시간에 점심을 먹기에 날마다 인사를 나눈다. 하던 활동을 정리하고 이제는 그림 그리는 시간이라고 알리며 교감 선생님은 나간다. 색연필과 사인펜이 담긴 자신의 연필꽂이를 하나씩 가지고 정해진 자리에 앉는다. 마침 근무 중인 하모니 선생님이 복사 용지 이면지 모아 둔 상자를 가지고 와서 한 장씩 나눠준다. 내 옆에 앉은 찬유는 다섯 살이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한때 나와 같이 근무했다. 교육부에서 추진하는 100대 교육과정을 준비하면서 정신없이 바쁘게 보내던 시절, 그 일을 맡아서 하던 연구부장이었다. 도에서 통과하고 교육부에 제출한 보고서를 다듬는 동안 정시에 퇴근하기는 어려웠다. 아이들 수업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는 다시 교무실에 모였다. 진로 부
2022-12-26 16:01겨울 아침 산책길에 날마다 만나는 백발 할머니가 있다. 이른 시각에 나선 노인이 걱정 되어서 말벗을 자청하곤 한다. "할머니, 오늘도 장갑을 끼지 않으셨네요.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면 위험합니다. 갑자기 넘어지시면 큰일 나십니다. 장갑을 꼭 끼시고 손을 내놓고 걸으세요." "아이고, 고맙소! 오늘도 깜빡 잊고 그냥 나왔네요." "날씨가 추운데 나오시지 말고 따뜻한 낮에 산책하시지요." "아, 아침밥을 사먹으러 나왔어요. 나는 혼자 살아요. 아들은 넷을 두었는데 모두 출가하고 집에는 나밖에 없어요. 밥을 해먹자니 힘들어서 사먹어요. 딸이 있으면 이렇게 옆에서 말동무도 해줄 텐데 그게 슬퍼요." "아니, 아들이 넷이나 있으신데, 복도 많으신데요." "아이고, 아들 많으면 뭐해요. 딸 하나만 못해요." 딸이 없어서 슬프다는 할머니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경제력은 있으니 사는 데 지장은 없다는 할머니는 한 겨울에도 아침식사를 위해 시장에 가서 해결한다는 것. 한 끼 식사 5천 원짜리를 절반도 먹지 못하신다며 그나마도 집에서 해먹으면 버리는 게 더 많으니 사먹는 게 더 낫다고 하신다. 날씨가 더 추워지면 아침 식사를 위해 나오지 못하실 텐데…
2022-12-26 15: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