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인족의 탄생 <마루 밑 바로우어즈>
어릴 적 잠자리에 누워 뒤척이던 밤이면 어디에선가 도란도란 정체모를 소리들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가만히 숨죽이고 있으면 발소리 같은 작은 움직임들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그러다 몸을 한 번 뒤척여서 돌아누우면 어느새 쥐 죽은 듯 조용해지는 그 밤의 묘한 고요함이란…. 그렇게 내 방의 작은 세계에서, 낮 동안 숨죽이고 있던 사물들이 밤새 살아서 움직이는 상상을 하곤 했다. 늘 조용한 말상대가 되어주던 인형들, 그리고 책상 밑의 세계에 사는 이름 없는 존재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을 거라는 그런 공상을 나만 한 건 아니었나 보다.
영국의 동화 작가 메리 노튼은 ‘만약 인간과 똑같은 작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집 안에서 바늘과 우표 같은 것이 자꾸 없어지는 건 그들이 그 물건을 가져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공상에 빠지곤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생활이 어려워지고 자유를 침해받게 되자 집필활동에 들어간 노튼은 지하에서 살고 있는 ‘바로우어즈(Borrowers)’라는 소인족을 창조하게 되고, 1952년 <마루 밑 바로우어즈>라는 동화를 발표했다.
바로우어즈 종족은 키는 연필만하고 생김새와 생활 방식은 인간과 똑같다. 그들은 훔치는 것을 ‘빌리는 것’이라 말하고, “버터가 빵을 위해 존재하듯이 인간은 바로우어즈를 위해 존재한다”고 우기며, “세상의 중심은 바로우어즈다”라고 큰소리를 치는, 작지만 자존심 강한 종족이다.
책에서 이 마루 밑 지하 소인들의 세계는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듯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부엌 마루를 천장삼아 숨어 살면서 골무를 냄비로, 병뚜껑을 세숫대야로, 수프 그릇을 욕조로 삼는 그들의 생활은 꽤 흥미롭다. 그러나 동화라고 해서 밝은 이야기만 담긴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이 책을 집필한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아기자기한 동화 속 곳곳에 전쟁에 대한 비판과 그로 인한 공포, 그리고 생존에 대한 염려와 인간 문명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공존을 이야기하다<마루 밑 아리에티>
올해 칠순이 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메리 노튼의 이 소인족 이야기를 원작으로 신작 애니메이션 <마루 밑 아리에티>를 만들었다. 지하에서 살아가는 ‘바로우어즈’들의 세계를 꼼꼼한 수작업으로 실감나게 되살려내 아이들의 상상과 어른들의 추억을 환기시킨다. 물론, 이번엔 요네바야시 히로마사라는 젊은 신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지만 극본과 기획에 참여한 미야자키의 감성은 영화의 곳곳에 잔잔히 스며들어 있다.
미야자키 월드에서 그 소재나 스케일로 볼 때 소품에 속하는 이 영화는 푸르디푸른 어느 여름날에 일어난 사춘기 소년소녀의 동화 같은 만남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청량함과 애잔함을 선사한다. “그해 여름… 엄마가 말했던 소인을 만났다”라는 소년 쇼우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소년의 기억을 따라가고 있지만, 그 중심에서 생기를 부여하는 것은 사랑스러운 소녀 아리에티와 그의 가족들이 펼치는 모험이다.
아리에티는 이제 14살이 된, 한 작고 예쁜 소녀의 이름. 용감하고 총명하며 맑은 눈을 가진 이 소녀는 키가 10㎝ 밖에 안 되는 소인이다. 아리에티 가족은 마루 밑에 숨어 인간의 물건과 생필품을 빌려 살아가는 ‘바로우어즈’족이다. 증조부 때부터 한 집에 보금자리를 틀어온 아리에티 가족은, 심장 수술을 앞두고 외갓집에 요양 온 소년 쇼우가 정원에서 아리에티를 발견하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어려서부터 심장병을 앓아온 터라 또래 친구 하나 없이 책에 파묻혀 지낸 쇼우는 나이답지 않게 속 깊고, 웬만한 일에도 놀라지 않는 12살 소년이다.

아리에티네 가족의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인간들의 살림을 빌리는(?) 것이다. 밤에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몰래 가져오지만 ‘훔치기’가 아닌 ‘빌리기’라고 말한다. ‘훔치기’와 ‘빌리기’의 차이는 그 행위를 바라보는 시각에 의해 규정된다. 원작자와 감독은, 이 바로우어즈의 행위를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여유분의 물건을 나눠 쓰는 것으로 본다. 휴지나 비누, 각설탕 같은 아리에티 가족에게 가장 중요한 생필품은 인간의 세계에선 아주 사소한 물건들이다. 그것의 일부분, 딱 필요한 만큼만 소량을 가져다 쓰면서 아리에티 가족은 인간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그런데 이 ‘빌리기’는 바로우어즈에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집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덩치만한 생필품을 운반해오는 일은 에베레스트 등정만큼이나 험난한 일이다. 가장으로서 늘 이 일을 담당해오던 아리에티의 아빠는 14살이 된 딸에게 비법을 전수하고자 마음먹는다. 아직 어린 아리에티는 첫 빌리기 모험이 두렵지만, 기대되기도 한다.
영화는 아리에티가 아빠와 함께 나선 첫 여정을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양면테이프를 신발 바닥에 붙여 높은 곳을 올라가고, 밧줄 끝에 고리를 달아 암벽 등반을 하듯 이동하며, 갖가지 소품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그 여정에서 긴장과 설렘의 교차로 볼이 빨개진, 실수를 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아리에티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또한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앞으로 혼자 남게 될지 모를 딸의 미래를 위해 힘든 교육을 시키는 아빠와, 그런 아빠 마음을 깨닫게 된 딸, 그들 부녀 사이의 애틋한 정이 느껴져 흐뭇한 동시에 짠하다.
동심이 가르쳐주는 우정과 배려
아리에티가 위험에 처했을 때 쇼우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도움을 준다. 아직 어린 탓에 일처리를 완벽히 못해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오기도 하지만, 소년의 진심은 소녀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사춘기 소녀 아리에티는 친절한 소년이 내미는 호의의 손길에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해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부모의 걱정에도 쇼우를 향한 호감을 숨기지 못하는 아리에티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부분에선, 어김없이 미야자키 감독의 장기가 드러난다.
중요한 첫 모험을 앞둔 아리에티가 사람들의 눈에 띌 염려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빨강색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빨래집게로 머리를 올린 다음 꼼꼼히 매무새를 들여다보는 것은 알게 모르게 쇼우를 의식한 행동으로 보인다. 둘 사이에 직접적인 로맨스가 없음에도 아리에티의 설레어 하는 모습과 쇼우의 사려 깊은 배려는 시너지 작용을 해서 영화 전반에 풋풋한 첫사랑의 긴장감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그 순수함에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일원인 쇼우는 온전히 바로우어즈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진 못한다. 주변의 바로우어즈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본 아리에티의 부모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리에티는 마지막 생존자로 고독하게 살게 될 거라고 염려하듯이, 감독은 영화 내내 바로우어즈의 ‘멸종’을 강조한다. 쇼우 역시 “너희는 곧 멸망할 것”이라고 아리에티에게 단언한다. 지구상에서 이미 많은 종족이 사라져갔고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그러나 아리에티는 수긍할 수 없다. “우린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아.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다들 나름 열심히 살고 있어!” 아리에티의 이 대찬 발언은 잔잔한 호수와 같던 쇼우의 세상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지금껏 시한부 환자라는 처지로 인해 체념했던 쇼우의 삶에 작은 소녀가 가진 열정으로 인해 새로운 꿈이 생긴 것이다. 소녀의 용기에 힘입은 쇼우는 아리에티 가족이 어른들의 위협을 피해 새로운 거처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자신 또한 수술을 잘 받고 건강해질 것이라고 다짐한다.
아리에티와 공유했던 소중한 기억과 삶에 대한 의지는 이 착한 소년을 한 뼘 더 성장시킬 것이다. 아리에티 역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발걸음이 두렵지만은 않았을 것이기에 지켜보는 관객들도 한숨 놓게 된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동화를 통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가르침을 선사한다. 소년과 소녀가 함께 누렸던 짧은 여름날의 시공간에서 다른 존재들 간의 우정과 존중을 배웠던 것처럼, 어른들도 서로의 입장만 내세우지 말고 화해와 공존을 모색하라고. 이 지구는 우리가 미래의 후손들로부터 빌려 쓰는 것이기에 소중히, 평화롭게 가꾸어가야 한다고…. 현실은 가시밭길이지만 작은 희망을 품고 성실하게 나아가는 삶의 가치를 믿으며, 오늘 하루 또 용기를 내어 본다. 아리에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