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11월 ×일 ×요일. 비.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건만 봄비처럼 부슬부슬 비가 내립니다. 정말 날씨가 요 모양이니 부아통이 터질 것만 같다. 청소시간의 일이었다. 반장인 내가 쓰레기통을 비우기 위해 비도 가릴 겸 쓰레기통을 머리에 이고 나서야 했다. 웬 계집애들이 그렇게 극성스럽게 야단인지 도무지 청소가 아니라 놀이시간이다. 교실에서 마구 뛰고, 걸레로 마구 치고, 던지고 야단이기에 그러지 말고 청소하라고 했더니, 걸레가 날아와서 뒤통수를 때렸다. 한 아이가 던지니 너도나도 덩달아서 집어 던지니 견딜 수가 없어서 쓰레기통을 이고 비우러 나선 것이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쓰레기통을 뒤쪽에서 잡아당기는가 하면 밀어대기도 해서 도무지 교실을 나설 수가 없었다. 정말 울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주번 선생님께서 교실 복도를 지나셨기 때문에 다행히 더 이상 심한 장난은 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왜 이렇게 날 괴롭히려 드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지난 10월의 일을 생각하면 정말 혼쭐을 내주고 싶다. 그러나 그때 내가 한일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짓궂게 구는 것일까 ? 나는 정말 바보가 되어 가는 느낌이다. 공부시간에 바보 같던 영숙이, 점순이 마저 한데 어울려서 날
구겨버린 용지 한 장 “어이, 김 선생, 여기 급한 공문이 있어서 어서 작성해서 보내야겠는데, 얼른 해주어야겠어.” 교장선생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김 선생님의 초등학교 4학년 때의 담임선생님 이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교사가 되어서 돌아온 제자이자 바로 자신의 초등학교, 그리고 사범 고등학교의 후배이기도 한 김 선생님은 유난히 사랑하셨습니다. 멀리 남쪽 바닷가에 맞닿은 면의 외진 한 마을에 위치한 이 학교는 3개 리의 어린이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으로 12학급짜리 아담한 학교였습니다. 바로 김 선생님을 지금의 교장선생님이 담임하시고 계시던 4학년 때에 이 곳에 분교가 생겼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함께 다니던 후배들이 이제 이곳에서 공부하게 된다고 하여, 1,2학년의 아이들이 방앗간으로 쓰던 곳에서 기계들을 뜯어내고 임시 교실로 개조하여 공부를 시작하였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그 동안에 산밑에 자리를 마련하여 학교를 짓고 개교를 하여 벌써 10회 째 졸업생을 배출한 학교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학교에 병아리 교사 티를 벗지 못한 김 선생님이 부임한 것은 2년 전이었고, 이제 은사님을 교장으로 모시게 된 것이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부임해 오시던 날의 풍경
운명을 바꿔라 “야, 왕두 오늘도 숙제를 안 해 왔어?” “아니요. 이렇게 해왔는데요?” “뭐? 왕두가 숙제를 해왔어?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게 아냐?” “아니에요. 해는 동쪽에서 뜰 거예요.” “아니 뭐라구? 왕두가 오늘은 웬일이지?” “선생님, 어제요. 왕두네집에 사주쟁이가 왔는데요, 왕두에게 깡패가 될 거라고 했데요. 그래서요. 왕두가 깡패가 되어서 감옥에 가는 고생을 하지 않으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오늘부터는 숙제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기로 했대요.” 앵무새처럼 말을 잘하는 영순이가 달랑 들고 나서서 얘기를 하였습니다. 왕두는 빙그레 웃으면서 선생님을 바라봅니다. 선생님은 빙긋이 웃어 주면서 왕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우리 왕두가 정말 깡패가 되지 않도록 부지런히 도와주자. 지금까지와 달리열심히 공부하겠다고 하는 왕두에게 잘 생각했다는 칭찬과 함께, 더 열심히 하도록 도와주겠다는 박수를 한번 쳐주자.”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모두 손뼉에 불이 나도록 힘껏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우리 학급의 아이들은 모두들 이 말이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랐습니다. 백왕두 ! 멀리 남쪽 바닷가 물결이 출렁거리
마음먹기 달렸지 “야 ! 정말 오랜만이다. 이게 얼마 만이냐? 그래, 그 동안 잘 들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인사를 나누느라고 부산했고, 더구나 지난날들을 이야기하느라고 소란스러웠습니다. 이제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30년이 넘은 중년 아저씨 아줌마들이 모여서 “야 이 자식아!” “뭐 임아? 너 그 동안 많이 컸구나?” “나이가 몇 인데 이제껏 크는 타령이냐? 이제 늙어 가는 마당에…” 이런 소란이 얼마동안 계속 되면서 흰 머릿카락이 희끗희끗한 어른들이 금세 어린아이가 되어서 야단법석입니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니까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가 버린 듯 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들은 제각기 너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오늘 모임의 책임졌던 이봉룡 박사가 아이들에게 잠시 조용히 하라면서 “오늘 여기 귀한 손님을 모셨다. 너희들 기억할는지 모르겠는데, 여기 계시는 분은 우리가 2학년 때 우리를 가르쳐주셨던 김영화 선생님이시다. 처음 발령이 나셔서 얼마나 우리를 열심히 가르쳐 주셨는지 기억나지?” “ 와아 ! 선생님! 반갑습니다.” 한바탕 인사가 있고 나자 아이들은 선생님을 가운데 모시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선생님 피! “선생님, 혜경이가 피를 토했어요.” 한창 수업이 진행 중인 교실에서 갑작스런 외침에 선생님은 웬일일까 하여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이들이 혜경이의 책상을 향해 모여들면서 교실 안은 어느새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자 조용히 자리에 앉아요.” 선생님은 차분하게 얘기를 했지만, 머릿속이 어지럽고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정신이 아뜩하였다. 선생님은 혜경이에게로 다가선다. 혜경이는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데 책상 위에는 흥건히 고인 피가 교실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혜경이는 친구들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피가 묻은 채 책상 바닥에 얼굴을 대고 얼굴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야, 우선 이것 좀 닦아야 하지 않겠니? 종해, 네가 좀 닦아 줘라.” 선생님은 우선 좀 닦아주게 해놓고서 옆 교실의 이 고장 선배선생님께 여쭤보기 위해서 재빨리 교실을 나선다. “정 선생님, 아이가 벌겋게 피를 토하였어요. 어떻게 해야 하죠?” 5학년 담임선생님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정 선생님은 전혀 놀란 기색도 없이 “놀라지 마십시오.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하고 담임선생님을 앞서서 5학년 교실로 다가갔다. 정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서서 책상에 엎드린 혜경에게로
까치밥 “윤영아 ! 위험해 어서 내려와!” 아버지가 고개를 뒤로 재껴서 감나무를 바라보면서 소리칩니다. “여기 이것을 꺾어야 해요.” 윤영이는 아직도 더 올라가야 잡힐 나뭇가지를 꺾겠다고 한사코 더 위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 모습을 보면서 아련한 옛날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선생님이 아직 초등학교 5학년 가을의 일이었던가 봅니다. 유난히 빨갛게 감이 잘 열린 그 해 가을, 무슨 일이었던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담임선생님께서 방문을 하셨습니다. 집 뒷뜨락에 있는 커다란 감나무는 그 높이가 20m 가까이나 되고 아이들이 둘이서 손을 마주 잡아야 간신히 둘레를 잴 수 있는 큰 나무였습니다. 나무가 얼마나 크고 감이 많이 열리는지 마을에 들어서면 온통 감나무가 마을을 가리고 마치 빨간 낙하산을 펼쳐 놓은 것 같은 커다란 감나무가 마을 안에 10여 그루나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감나무나 선생님의 집 감나무였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집을 방문하셨는데 그 시절(1956년)에는 농촌에서 손님이 온다고 무얼 대접할 만한 음식도 없고 차나 술도 없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집 뒤란에 있는 감이나 조금 따서 드리고 싶었던가 봅니다. 그 때까지 겁이
고집쟁이 길들이기 “경순이 어서 일어나 !” “......................” 질문에 답해보라고 지명을 받은 경순이는 묵묵부답으로 고개만 숙이고 있습니다. “안 일어 날거야. 너 지금 선생님 말을 안 듣겠다는 것이니?” “......................” 경순이는 선생님이 어서 일어나서 대답을 해보라는 독촉에도 도무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책상 속에 손을 집어넣고 가만히 무언가를 만지고 있습니다. “자, 이제 숫자를 셀 거야. 센 숫자만큼 매를 맞을 줄 알아. 네가 고집을 부릴 모양인데 선생님도 전혀 너에게 지고 싶지 않거든........” 선생님이 다시 경순이에게 주의를 줍니다. “..................”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도무지 움직일 기색이 없습니다. “자, 빨리 일어나서 이야기 해보세요. 하나, 둘, 셋, 넷........... 열.” 그래도 조금도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경순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선생님께서 소리를 꽥지르시면서 “경순이, 더 이상 못 참는다. 빨리 못 일어나?”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순이는 얼른 책상 속에서 자기 책들을 책보자기와 함께 움켜쥐고 밖으로 내달립니다. 우리들은 모두 눈이 둥그레져
미워하지 말고 가만히 둬요 “자, 한 학기 동안 수고들 하셨습니다. 오늘 점심은 학교에서 여러 선생님들의 수고에 보답하기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곳 사정을 다 아시기 때문에 따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특별히 마련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발령을 받아서 첫 학기를 마치는 날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통지표를 들려 보내고 이제 방학의 즐거움에 집에 가서 한 달 동안을 살게 될 일이 가슴은 부풀어 있었습니다. 비록 이웃 군이라는 하지만 객지에서 보낸 만 4개월이 퍽이나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한 학기를 무사히 보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도 들었습니다. 이런 들뜬 기분에 참으로 오랜만에 학교에서 사준 점심 한 끼가 가슴 설레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학교는 분교로 본교에 교장선생님이 계시고 여기는 환갑을 맞으시는 분이 분교장으로 계시지만 여러 가지로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본교의 지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여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 학기가 다 가도록 학교에서 선생님들에게 식사를 대접한 일을 이게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전 직원이라고 해봤자 선생님 7분과 학교 심부름을 하는 청부(지금은 기사라고 부르지만 그땐 이렇게 불렀음) 1명이 고작이었습니다. 식
못 늙어서 미안해! “선생님, 김영화 선생님이시지요. 선생님 혹시 첫 발령을 전남 고흥으로 받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예? 전남 고흥이라구요? 글쎄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고흥 흥양이라는 곳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맞아요. 선생님, 선생님께서 첫 발령을 받아 오셔서 2학년을 맡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 그 때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을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쓰고,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선생님 꼭 한 번 뵙고 싶습니다. 저 이봉룡이라고 합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응? 이봉룡이라고? 아 봉서 마을 중간쯤에 살던 봉룡이란 말이지?” “네, 선생님 저의 집이 있던 곳까지 기억하시고 계시네요. 건강하신지 인사가 늦었습니다.” 전혀 낯익지 않은 전화 속의 목소리는 지난날을 기억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직 새파란 초년 시절의 초임지 모습을 눈앞에 그리면서 반가움에 목소리까지 들떠 있었습니다. “그래 반갑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니?” “네, 저도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교직에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선생님의 소식을 듣게 되어 이렇게 전화로 확인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 거처를 알게
총각선생님의 막내 딸 “정희야 ! 저기 저것 좀 가져다 줄래?” “네, 선생님, 이거요? 여기 있어요.” 오늘도 수업이 끝난 뒤에도 선생님의 곁에 붙어 서서 무어라고 종알대던 정의는 선생님의 심부름에 신바람이 난다는 듯이 얼른 출석부를 집어다 드립니다. 잔뜩 늘어놓은 서류들을 만지던 선생님은 그런 정희를 보면서“그래, 우리 막내 최고야. 그래서 우리 막내가 이쁘지. 그렇지?” “네, 선생님.” 날마다 보는 얼굴 날마다 한 교실에서 사는 아이들이지만 유난히 선생님을 따르는 정희를 선생님은 늘 ‘막내’라고 부르고, 이제는 학급의 아이들도 모두들 정희라는 이름보다는 막내라는 이름으로 더 잘 불러 주었다. 그래서 이제 처음 발령을 받아서 아직 총각인 선생님의 막내딸이 된 정희는 모든 아이들이나 선생님이 부르는 ‘막내’라는 이름을 오히려 더 좋아합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자기를 좋아서 불어주는 이름이기 때문에 그 이름이 조금도 싫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기까지 한 것입니다. 4교실에 8학급이 공부를 하여야 하는 형편에 모두 2부 수업을 하였지만 그래도 한 교실이 부족한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교실이 부족하여 우리들은 군인들의 천막을 가져다 교실 옆에 바짝 붙여서
새 학교 이름을 만들자 1964년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이제 한창 바쁜 모내기철이었다. 이 무렵에는 우리나라 농촌의 80% 이상이 논과 밭에 모두 보리를 심고 심지어는 산과 논둑까지 무엇이든지 먹고 살 것을 심어야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너무나 가난하여 "굶주림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느 곳에나 먹을 수 있는 작물을 심어라"는 국가의 방침에 따라 학교 빈터에 옥수수와 호박을 심고 도로변의 길가에도 호박을 심어야 했던 시절이었으니 얼마나 가난에 찌들었던지 모를 시기였다. 한 가정의 평균 자녀의 수가 6명이 넘었고, 각 가정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땅의 넓이는 논밭을 합해 보아도 고작해야 900평이 채 안 되는 가난한 고장이었다. 이런 고장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한 김영화 선생님은 오늘도 무엇이 그리 바쁜지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난생 처음 시작한 직장 생활에서 맡은 사무가 학교 살림을 맡은 경리 사무였다. 평상시에 늘 돈에 관심이 없어서 셈이 그리 밝지 못하던 그였기에 늘 쩔쩔 매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이 곳은 두 마을이 학교 설립을 싸고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학교가 설립이 되어서도 한동안 갈등을 겪었다. 심지어는 감정이 격해져서 아이들의 등교를 막
꼴찌만세 “윤정엽, 자 책을 한번 읽어보아라.” 선생님의 지명에 나는 비실비실 일어서며, 선생님의 눈치를 살핍니다. 아직도 책을 자신 있게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 25쪽을 읽어보아라.” “우리 도 동네...,사라암드을은, 모두 항께,......” “그래 됐어. 그 다음 이 두리 읽어보아라.” 맨 앞에 앉은 두리는 동글동글한 얼굴에 어울리는 이름을 가져서 쉽게 친해지는 친구였습니다. 영순이는 곧 자기도 읽어야 할 차례이기 때문에 빨리 돌아오는 것에 가슴을 졸이고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모두 함께 논으로 나가서 모내기를 합니다.” “그만, 아주 잘 읽는군. 그 다음엔 영순이.” 영순이는 가슴이 두근두근해서 잘 읽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커다란 논에는 모를 날라다 펴놓은, 노은 .... 것들이 주욱 늘어서 있습니다.” “됐어. 그럼 그 다음.......” 영순이는 어쩌다 쉬운 부분을 틀리게 읽었지만 선생님이 자기에게 잘 읽었다고 얘기해 주신 것이 기분이 좋았습니다. 나는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고, 나이는 아홉 살, 5학년짜리 언니와 그 위로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오빠가 한 분 있어서, 우리 집의 막내이자 귀염둥이입니다.우리 식구들은
까만 도시락 밥 성구암 선생은 1960년도 중반에 접어드는 1964년에 학교의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된 병아리 선생님이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되어서 국민학교, 지금의 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은 것이었다. 그 때만해도 우리나라는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때여서 농업이나 수산업 등 1차 산업에 의해서 생활을 하는 국민이 약 80% 이상을 차지하는 대부분이었고, 나머지가 약간의 상업이나 공업, 그리고 가장 부러워하는 대상인 공무원 등 사무직의 순서였다. 이 고장에서는 특히 농업을 빼고 나면 한 반에 한 명이나 두 명 정도의 아이들이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정도였으니까. 아마 이 반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은 집은 송자네 한 집 뿐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농촌 사람들의 부러움을 가득 받는 교사라는 직장에서 근무하게 된 것만도 여간 기쁨이 아니었으므로 성구암 선생은 무엇이나 최선을 다하기로 했었다. 그렇지만 성구암 선생이 발령을 받은 학교는 요즘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참으로 보잘 것이 없고 허술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우선 학교 모습을 보면 밖에서 보이는 것으로는 마을 앞에 덩그랗게 선 교실 네 칸, 국기 게양대 하나, 흙으로 벽을
1964년 학교가 움직였던 까닭은 1964년 3월 첫 개교를 한 신호분교의 교사 선태규는 어린이들을 몰고 오늘 공부를 할 동네회관을 찾아서 나섰습니다. 반장의 손에는 백묵과 칠판지우개로 쓸 걸레 한 조각이 들려 있고, 선생님은 조그만 소칠 판을 하나 달랑 들고 아이들의 맨 앞장을 서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2학년 아이들은 54명이나 되었지만, 이 아이들이 공부할 교실은 없습니다. 이 봄에 새로 분교로 개교를 한 이 학교는 새터말과 청룡말의 두 개의 마을을 가진 조그만 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태어나면서부터 아주 말썽이 많은 학교로 태어나서 군내에서도 소문이 난 학교였습니다. 두 개의 부락에서 학교를 세우자고 합의를 하여 새로 학교를 세우기로 하였지만, 두 부락의 대표가 되는 사람들은 서로 자기 부락의 앞에 학교를 세우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잘 뭉쳐서 새 학교를 세우자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부락 앞이 아니면 안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학교를 세우자고 먼저 주장을 했으니까, 우리 마을 앞에 학교를 세운 것은 당연하지 않소 ?” “천만의 말씀이오. 아무리 당신들이 먼저 의견을 내어놓았다고 하지만, 당신네 마을만으
교육과정 개정은 백년대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줄거리를 형성하는 일이다. 2009년 12월17일에 발표된 2009개정교육과정을 살펴보면서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국가적인 대업에 대해 소홀하거나 일부 이익을 위한 계획이라는 비난을 들으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 하겠다. 더구나 어떤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비난이 일 때는 반드시 다음 정권에서 또다시 반대의 수정을 하여서 국가의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적어도 교육에 대해서 국가적 차원의 심도 있는 고려가 없다든지, 조금이라도 어떤 집단을 위한 일에 휩쓸리게 한다는 것은 국민과 나라를 배신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선 좋은 점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는 창의적 체험활동 영역의 개정이라 하겠다. 특히 여기에 봉사활동을 포함시켜서 봉사활동이 공교육의 정식 교과활동 영역의 일부가 되도록 한 점은 다행이다. 사회봉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일찍 깨달은 사람은 그만큼 많은 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가장 눈에 띄는 점이 1,2학년 초기단계에서 국어사용능력과 수리능력을 충분히 정착시키도록 장치한 점이다. 사실상 이 두 가지는 모든 학문을 하는 동안 가장 기